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47회


제4장


8


저녁어스름이 덮인 보통강 수면우에서 유보도가로등빛이 번쩍이며 흔들거렸다. 낮동안 휴식을 즐기는 시민들을 태우고 강우에서 떠돌던 유람선과 놀이배들이 강건너편에 바줄로 묶이여 물결우에 흥떡이고있었다. 강변의 공원의자우에는 주로 처녀, 총각들이 쌍쌍이 앉아 다정하게 속삭이며 때로 주위의 아무것도 꺼릴것 없다는듯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이들과는 달리 은근한 사랑의 세계가 있다는것을 시위하기라도 하듯 중년부부들이 속삭이며 천천히 걸어가기도 하였다. 하여튼 저녁녘의 이 강변에는 혼자서는 걷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남녀로 짝을 지은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군 한다.

그런데 그들모두가 다 유쾌하고 즐거운 낯을 하고있는것은 아니였다. 강변의 버드나무밑에 서있는 처녀와 총각, 다름아닌 한설미와 장현철이 바로 그러하였다. 그들은 싸움이라도 하듯 피차 잘생긴 얼굴들이 찌프러지고 저으기 심각하였다.

《어서 말해요. 난 오빠에게서 모든 질책을 다 들을 각오가 되여있어요.》

한설미는 번뇌에 지친듯 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장현철은 설미에 대한 불만과 노여움이 가슴속에 꽉 차서 씨근덕거리고있었다.

《어쩌면 네 심장은 그렇게도 차겁니? 난 믿어지지 않아.》

《예?》

설미는 눈물이 가랑가랑한 눈으로 현철을 쳐다보았다.

《내 심장이 차겁다구요?》

《그래, 너때문에 산호동지가 지금 김일동지에게 불리워올라와 얼마나 욕을 먹고있는지 알아?

결함이야 시정시키면 될것인데 구태여 불집을 일구어 괜히 좋은 사람에게 허물을 줄 필요가 뭐란 말이야?》

《그분의 일은 나도 가슴아프게 생각해요. 하지만… 난 량심이…》

《자꾸 량심을 거들지 말라. 그럼 나나 우리 아버진 량심이 없는 사람인가.》

《비웃지 말아요.》 설미가 야무지게 내쏘았다.

《아직도 속은 살아서…》

성이 나면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현철이가 더욱 화가 나서 소리쳤다.

《설미때문에 우리 아버지도 피해를 입게 되였단 말이야.》

《오빠, 그건 무슨 소리예요?》

《지금 아버지도 산호동지를 비호한것때문에 당조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있어. 사실 아버지야 항일혁명투사의 후손인 산호동지를 구해주려고 노력했을뿐인데… 문제가 섰단 말이야.》

《사실이예요?》

《내가 너에게 무엇때문에 거짓말을 꾸며대겠니? 난 거짓말을 할줄 모르는 사람이야. 네가 그런 제기를 취소하기만 했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벌어지지는 않는건데… 생각할수록 네가 원망스럽단 말이야.》

설미는 머리를 돌려 검푸르게 일렁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현철의 아버지 장종학의 유정한 모습이 눈앞에 선히 그려졌다.

현철오빠의 집에 놀러가 혹 만나게 될 때마다 참으로 인정깊게 대해주던분, 나에게 제 손으로 탐스러운 사과를 담은 다반을 들고와서 어서 먹으라고 권하던 그 일도 잊을수 없다. 그때 제 손으로 사과를 깎아주기까지 하면서 뭐라고 말하였던가.

《설미야, 우리가 너에게 바라는건 진실한 사랑뿐이란다.》

아, 난 얼마나 행복한 녀자인가. 이런 사람을 시아버지로 모신다는건 참말 녀자의 행운이라고 생각하였었지. 아버지도 이제 시집가면 현철오빠의 아버지를 잘 모셔야 한다고, 현철의 아버지는 함께 싸운 전우와 같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때문에 피해를 입었단 말인가.

설미는 이윽히 뒤설레이는 강물을 바라보고있었다. 다음순간 그는 자기의 행복한 결혼생활의 꿈이 실린 배가 뒤집어져서 어두운 강물속으로 가라앉아버리는 환각을 보는것만 같았다.

(그래, 나의 차거운 심장때문에 그 모든 일이 벌어졌단 말이지?)

현철의 분노가 서린 목소리가 계속하여 칼날처럼 가슴에 날아와 박히였다.

《무슨 녀자가 그래? 남자 말을 귀등으로 흘려보내는것도 괘씸하지만 더 참을수 없는건 녀자가 너무 모질다는거야.》

(난 평생 저런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하지 않을가? 그건 정말 싫다. 시아버지가 될 그분이 얼마나 나를 원망하고있겠는가. 일이 이렇게까지 번져질줄은 난 몰랐지.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친다더니 결국은… 꿈에서 깨여날 때가 되였구나. 아, 난 모질게 살고싶진 않았다. 다만… 다만 내가 바란건 참된 삶이였지.)

설미의 두볼로 눈물이 흘러내리였다.

현철이와 알게 되여 사랑하면서 흘러온 지난날들이 영화화면처럼 눈앞에 흘러갔다.

아,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시작된 인연, 점차 사랑을 느끼면서 그 사랑을 충실하게 가꾸어온 소중한 나날들이였다. 내 얼마나 현철오빠를 사랑했고 그 또한 나를 얼마나 사랑해주었던가. 특히 잊을수 없는건 아버지가 철직되였을 때 뜨겁게 사랑해주고 고무해주던 오빠의 그 마음이였다. 그런데 결혼을 앞에 둔 이제 와서는 내가 그에게 환멸스러운 존재로 되여버렸단 말인가. 그것도 시아버지가 될분에게까지 피해를 준 녀자로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혀아래소리로 사죄하고싶지는 않았다. 지금의 자기를 리해하여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아온 날보다 더 길게 이어질 앞날을 함께 살아갈수 있을것인가.

설미는 현철의 얼음같이 찬 목소리와 태도를 받아들일 심장이 자기에게는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물론 현철의 발끈해진 성이 누그러지고 다시금 살뜰해질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다시 오늘의 일을 현철이나 그의 아버지가 상기시킬는지 누가 알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자기의 처사로 하여 현철에게 아픈 못을 박았음을 설미는 인정하였다.

《오빠, 날 용서해요. 더는 오빠나 오빠 아버지를 볼 낯이 없어요.》

설미는 설음이 자꾸만 목구멍을 틀어막는 바람에 가까스로 말하였다.

《내 말이 지나쳤다면 용서해.》

현철은 설미의 눈물앞에서 당황해졌는지 말투를 눙치였다.

(이젠 다 쑤어놓은 죽인데 자꾸 설미를 탓해서 무얼하랴.) 하고 현철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생활에서 참작은 하란 말이야.》

《알겠어요.》

설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지막이다. 더는 이렇게 만날 날이 없을것이다. 행복은 더는 찾아오지 않을것이다.)

울지 않으려고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현철이와 작별하고있었던것이다.

《됐어, 그만해.》

현철은 북받치는 동정을 이기지 못해 처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런데 이전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쩐지 서툴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 취소한다는 한마디 말을 하기가 이 처녀에겐 그렇게도 힘든것이란 말인가. 리해할수 없는건 처녀의 마음이로구나.

현철은 한숨을 내쉬였다. 그는 설미가 원망스러우면서도 그를 사랑하고있었다.

《난 그만 가봐야겠어요.》

설미가 얼마간 마음이 진정된듯 자세를 바로하고 현철을 바라보았다.

《왜 좀 더 있다가 가지.》

《아니, 가야겠어요.》

《내가 좀 욕했다고 시뜩해졌구만. 좋아, 내 바래주지.》

《필요없어요. 나 혼자 가겠어요.》

설미는 머리를 까딱 하고나서 돌아섰다. 몇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현철을 보았다.

《현철오빠를 나쁘게 생각지 않겠어요. 건강하세요.》

설미는 홱 몸을 돌려 눈물을 훔치며 반달음을 놓았다. 순간 현철은 그 어떤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 소리쳐불렀다.

《설미.》

벌써 설미의 자태는 어둠에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 옆의 의자에서 처녀, 총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현철은 왜선지 어리둥절하여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찌나 화가 나서 설미와의 대화에 열중하였던지 지금까지 자기들의 곁에 행복한 한쌍의 젊은이들이 앉아서 열렬하게 속삭이고있었다는것을 잊고있었던것이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