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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제3장


7


밤이 되여 김일이 집으로 왔다. 그가 들어오니 성봉이는 잠자리에 들어있었다. 김일은 말없이 자고있는 진성봉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애정과 아픔이 엇섞인 착잡한 표정이 떠돌고있었다.

김일은 묵묵히 방바닥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담배꽁초를 재털이에 비벼끄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엄하게 말하였다.

《성봉이를 깨우오.》

창숙은 애원의 눈길로 김일을 보았다.

《은희 아버지, 성봉이가 금방 잠들었어요.》

《깨우오.》

김일은 드놀지 않는 자세로 창숙에게 준엄한 눈길을 던지였다. 창숙은 그 눈길에 위압되여 성봉이를 깨웠다. 성봉이가 일어나자 김일이 말하였다.

《옷을 입고 날 따라오너라.》

김일이 어안이 벙벙해있는 성봉을 데리고 나가는데 창숙이 아연해서 물었다.

《은희 아버지, 왜 그러세요?》

《당신도 따라오오.》

흥정을 조금도 허용치 않는 명령조의 그 목소리에 창숙은 가슴이 옥죄여짐을 느끼였다.

김일은 밖에 세워져있는 승용차에 창숙과 성봉을 태웠다. 그리고 말없이 차를 몰아갔다. 차는 도로를 냅다 달려 대동강가의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다. 밤은 깊어 대동강기슭에는 사람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달빛을 받은 대동강이 진한 기름처럼 번들거리며 흘러가고있었다.

김일은 성봉이를 데리고 걸어가 둔덕우에 섰다. 가파로운 벼랑턱이여서 더는 갈수가 없었다. 발밑 몇길아래에서는 물결이 철썩철썩 바위들을 들이치고있었다.

김일은 발밑을 내려다보자 무엇인가 가슴을 치는 충격에 흠칫 놀랐다.

여기까지 올 때는 결심이 있었는데 그것이 뒤흔들리고있었다.

(내 친아들 용석이라면 내 무엇을 주저할것인가. 하지만 이 애는… 이 진성봉이나 애어머니가 과연 나를 리해할수 있을것인가. 만약 친아버지가 살아있다면 이 애가 오늘과 같이 철없이 놀수 있을것인가? 모든것이 나로 인하여 발생한것일수도 있을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잠겨 김일은 한동안 말없이 대동강물을 바라보았다.

허창숙과 성봉이는 어쩐지 심판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서있었다.

(아, 이건 사람이 할짓이 못되는것 같다.)

김일은 거듭 생각하고있었다. (돌아서자. 성봉이를 따뜻하게 일깨워주면 그만이 아닌가. 이 앤 고아로 자랐으니 선입견 또한 보통이 아닐것이다.)

가까이에서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풍겨왔다. 날이 밝으면 꽃들이 하얗게 만발한 아카시아나무들을 찾아볼수 있을것이다. 지금은 봄철이라 여기 대동강기슭에는 아카시아뿐아니라 철쭉과 매화꽃도 피였을것이고 각종 이름모를 꽃들이 다투어 피였을것이다. 아름다운 조국강산, 어려운 전쟁을 이겨내고 바야흐로 더 아름답게 변모되여갈 이 조국강산에 자기의 노력으로 한떨기 꽃도 피워놓지 못하고 시들어버릴 그런 인생이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로 될것인가.

(설사 누구든지 나를 모진 놈이라 욕을 한대도 할수 없다. 문제는 이 성봉이가 수령님께서 바라시는 그런 혁명의 후비대로 자라나는가, 마는가 하는 거기에 귀착되는것이다.)

김일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나서 성봉이에게 말하였다.

《네가 학원에서 도망친 후 난 너의 앞날을 두고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네가 가루개시장부근을 떠돌면서 거지처럼 산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는 더욱더 생각이 많아졌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네가 더 살아서 사람구실을 못하고 부모들의 얼굴에 흙칠이나 하면서 버러지처럼 살바치구는 깨끗이 죽어버리는게 낫다는것이다. 그래서 널 여기로 데려왔다. 자, 어떻게 하겠니? 네 스스로 저 강물에 떨어지겠느냐, 아니면 내가 도와달라느냐?》

《은희 아버지, 무슨 말을 하는거예요?》 창숙이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성봉은 겁에 질려 주춤거리고있었다.

《창숙동무는 가만있소.》 하고 김일은 엄하게 말하였다.

함께 부부생활을 하면서 중년나이에 이르렀어도 김일이 격해졌을 때는 창숙을 동무라고 불렀다.

《제 부모가 어떻게 싸웠는지도 모르고 이 귀중한 조국을 위해 어떻게 투쟁해야 하겠는가도 생각지 못하는 이런 애가 살아서 누구에게 필요한가 말이요?》

성봉이는 추운것처럼 온몸을 우들우들 떨고있었다. 만월에 가까운 달이 검푸른 구름속을 뚫고 신비한 광채를 뿌리며 삼라만상을 어루만지고 강물은 무엇인가 애타게 소리치며 흘러가는데 김일의 얼굴은 얼음마냥 서늘한 빛을 내고있었다.

《성봉아, 똑똑히 결심해라. 우린 언제까지 네 응석이나 받고 엉덩이를 두드려줄새가 없다. 16살이면 적은 나이가 아니야. 항일빨찌산들중엔 너보다 더 어린 나이에 총을 멘 사람도 많고 네 나이에 벌써 소대장을 한 사람도 있었다. 네 아버지 진강순동무는 불굴의 혁명정신을 소유한 지휘관으로 북만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네 아버지 최후가 어떠했는지 너는 아느냐? 혁명임무를 수행하다가 수적으로 우세한 왜놈들과 조우했을 때 강순동무는 대원들을 이끌고 결사전을 했다.…》

1930년대 후반기 항일유격대의 한 부대는 김일성장군님의 전략적구상을 받들고 요하와 호림 등지에서 활동하고있었다. 재봉대원들은 보마정자와 쓰빠상의 골안에 남아서 부대성원들에게 입힐 솜옷을 만들고있었다. 어느날 황혼이 깃들무렵 부대의 군수장인 진강순은 대원들에게 입힐 솜옷을 가지러 재봉대에 찾아왔다.

부대에서 떠나기는 다섯명이였는데 다른 동무들은 도중에 외딴 곳에 있는 빈집에서 기다리게 하고 그 혼자만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재봉대에 드나들면 적들에게 재봉대의 위치를 로출시킬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재봉대원들의 신변이 위험하게 될것을 념려하였기때문이였다. 그는 군복을 가지고 그날 밤으로 떠나려 했는데 솜옷이 미처 되지 않아 다음날 새벽에야 길을 떠났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진강순이 네 동무와 함께 외딴곳의 빈집을 나서려는 때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왜놈들이 사면으로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유격대원들은 즉시 놈들에게 대응사격을 들이대였다. 얼마 안 가서 빈집의 벽은 온통 총알구멍으로 숭숭해지고말았다.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유격대원들은 구들장을 뜯어 그것을 방패로 하여 계속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그러나 워낙 적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보니 사태는 각일각 위급해졌다. 방패로 삼았던 구들장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대원들은 다 쓰러지고 진강순만이 남았다. 그는 허리에 부상을 당하여 피를 흘렸다. 그러나 그는 한손으로 출혈을 막으면서 안깐힘을 다해 뒤뜰안에 있는 연자매돌을 향하여 한치, 두치 기여나갔다. 매돌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킨 그는 그에 의지하여 다시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심한 출혈로 하여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소스라치며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연자매돌에 의지하여 천근의 무게로 잦아드는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매돌을 끼고 맴돌면서 가까이 달려든 앞뒤와 좌우의 적들을 쓸어눕히기 시작하였다. 그의 발자국으로 매돌둘레의 눈은 얼음처럼 반반히 다져지고 눈우에는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마치 붉은 띠를 둘러놓은것 같이 원을 그렸다.

이윽고 그는 자기의 총에서 총알이 나가지 않는것을 알았다. 그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집안에 들어가 전우들의 품안에서 총알을 꺼내여 다시 복수의 총탄을 적들에게 안기였다.

마침내 그는 연자매돌을 껴안은채 쓰러지고말았다.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어졌다. 이른아침부터 시작된 전투가 해가 질무렵까지 지속된것이였다. 붉은 저녁노을에 비낀 주위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는 멀리 산과 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무한히 아름다운 이 산천과 자기의 서른살 청춘과도 영원히 결별하여야 한다는것을 알았다. 희미해지는 기억속에 지난날의 모든것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는 혁명에 대한 자기의 충실성과 책임감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피 한방울이 남을 때까지 왜놈들과 싸운 자기의 최후를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한이 있다면 그리도 흠모하며 그리던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옵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그것이였다.

(동무들, 김일성장군님을 받들어 조국광복의 그날까지 용감히 싸워주시오.)

진강순은 간절한 소원을 아름다운 저녁노을에 얹으면서 눈을 감았다.…

진성봉은 울고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북만땅의 그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는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평소에 간직하였던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쳐왔다.

김일의 말은 계속되였다.

《네 아버지 진강순동무가, 왜놈들에게 학살당한 네 어머니가 네가 이 꼴로 살고있다는것을 알면 아마 땅속에서 분하여 통곡할게다. 그래, 어떻게 하겠느냐. 저 강물에 떨어져 깨끗이 없어지겠느냐, 아니면 힘껏 배우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부모들이 피흘리며 찾은 이 나라의 기둥이 되겠느냐?》

성봉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주먹으로 땅을 쳤다.

《용서하세요. 제가 불효막심한 놈이였습니다.》

김일의 얼굴에는 여전히 엄한 빛이 비껴있었다.

《그래 널 믿어도 되겠느냐?》

《예, 아버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김일은 성봉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꽉 틀어잡아 끌어당기였다.

성봉은 김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계속 흐느꼈다.

《이제 너는 단순히 진강순의 아들로 살아서는 안된다. 너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의 참다운 아들로 자라나야 한다. 네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김일성장군님의 전사였고 지금 나도 허창숙어머니도 모두 장군님의 전사들이다.》

잠시후 김일은 다시 진성봉과 허창숙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허창숙과 한방에 들었을 때 김일은 물었다.

《동무는 내가 너무했다고 생각하오?》

《아니예요. 은희 아버지 심정을 내 어찌 모르겠어요. 단지 강에 빠져 죽으라는 그 소리에 너무 놀라 심장이 활랑거렸던거예요.》

《우리가 바라는거야 하나밖에 없지. 저 애들이 수령님을 진심으로 받드는 충신이 되라는거지. 난 성봉이를 은희나 또 지금 류학가있는 용석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내 자식으로 생각하고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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