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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34회


제3장


5


1954년 봄,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평양역홈에서 우람한 체대의 기품있는 중년사나이와 자그마한 몸매의 아련한 녀인이 이제 도착하게 될 렬차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있었다. 그들은 김일과 허창숙이였는데 중국에서 귀국하는 한 소년을 마중나온것이였다. 그 소년은 허창숙과 함께 싸운 동지의 아들로 해방후부터 김일의 부부가 안타깝게 찾던 진성봉이였다. 그 진성봉을 오늘에야 비로소 만나게 되였으니 기쁘고 반가운 심정은 이루 다 말할수가 없었다.

흥분과 초조감을 억제하기 어려운듯 김일은 련속 줄담배를 피워댔고 허창숙은 자주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군 하였다.

렬차가 들어오게 될 북쪽방향을 살피던 김일의 눈에 화판을 놓고 그림을 그리고있는 한 어린 소년이 띄였다. 김일은 기다리는 지루감도 덜고 호기심도 풀겸 소년에게로 다가가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소년은 연필로 역구내에 서있는 렬차를 그리고있었다. 그 그림에는 기차를 배경으로 키높은 아빠트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희한한 정경이 펼쳐졌는데 그것이 김일을 은근히 놀라게 하였다. 사실 당시의 평양역이라는건 단층집 한채가 서있었을뿐 그 근처는 페허나 다름없이 한산하였던것이다.

《얘야, 내 보기엔 네가 그림을 잘못 그리는것 같구나.》

김일은 소년의 등가까이로 허리를 굽히며 슬쩍 말을 붙이였다.

어린 소년이 시쁜 표정을 띤 얼굴로 김일을 돌아보았다. 한 8~9살정도 되여보이는데 무척 영특한감을 주는 소년이였다. 그 소년은 김일의 모습에서 그 무엇을 발견한듯 씩 웃으며 벌떡 일어서서 꾸벅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넌 참 인사성도 밝구나.》 김일은 소년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헌데 이 그림속의 아빠트들은 어디서 생겨났니? 내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거 말이예요? 이 집들은 이제 저기에 서게 될 집들이예요.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미국놈들을 쳐부셨으니 멋있는 집들을 인차 짓게 된대요. 아버지가 편지에 그렇게 써보냈습니다.》

《편지에 써보냈다고?》

김일은 의아함을 금치 못해 다시 물었다.

《아버지가 집에 없는 모양이구나. 군대에 나가있느냐?》

《아닙니다. 아버지는 외국에서 류학하고있습니다.》

《그래?!》

김일이 머리를 끄덕이는데 소년이 별빛을 띤것처럼 영채도는 눈을 반짝이며 말하였다.

《난 아저씨를 압니다. 우리 집에 아버지랑 아저씨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거던요.》

《허, 네가 나를 안다구? 집에 내 사진이 걸려있다?! 허허… 그래 내가 누구냐?》

《아저씨는 김일아저씨지요?》

김일은 어지간히 놀라 소년을 찬찬히 보았다.

《네 아버지 이름이 뭐냐?》

《장종학입니다.》

《아하, 그러니 네가 장종학의 아들이였구나. 그러고보니 넌 아버지를 꼭 닮았구나.》

김일은 껄껄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김일의 눈앞에는 장종학의 훤칠한 키에 지성적으로 잘생긴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이 소년이 큰다면 꼭 아버지처럼 미남형의 사나이로 번질것이라고 생각되였다.

《해방직후에 너희 집에 갔을 땐 갓난애기였댔는데 이렇게 몰라보게 자랐구나. 네 이름이 현철이지? 네 아버지가 아들애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긴 맞구나, 응… 그림을 잘 그린다. 환상도 놀랍고…》

김일은 소년이 대견하여 자꾸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 허창숙을 소리쳐불렀다.

《여보, 여기 와서 이 애가 그린 그림을 좀 보오.》

허창숙이 다가오자 김일은 다시 소년을 칭찬하였다.

《얼마나 엉뚱하오. 이제 여기에 설 아빠트들을 상상하여 그렸구만. 이 기특한 애가 누군지 아오? 장종학동무의 아들 장현철이요.》

《그래요? 참 우리 현철이가 똑똑하구나.》

허창숙도 미소를 짓고 소년의 어깨를 쓸어주다가 김일에게 눈길을 돌리였다.

《이 애 아버지는 아직 류학중이지요?》

장종학은 1948년에 외국류학의 길을 떠났었다.

김일은 장종학이 보내온 편지를 통해 외국의 건설전문대학에서 공부하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이제 얼마 안있어 귀국하게 될거요. 그동안 많이 배웠겠으니 전후복구건설에서 한몫 해야지.》

이때 렬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보니 멀리에 기관차가 렬차를 달고 나타났는데 연기를 내뿜으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있었다.

《현철아, 공부 잘하거라, 좋은 그림도 많이 그리고… 이제 평양시에 네가 그린 아빠트보다 더 훌륭한 집들이 꽉 들어차게 된단다.》

김일은 소년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렬차가 정차하게 될 역홈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렬차가 홈에 들어서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홈은 내리고오르는 사람, 마중나온 사람, 바래주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워졌다. 김일과 허창숙은 그 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김일은 이제 만나게 될 진성봉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고 허창숙은 아기때 헤여진 애가 어떻게 자랐는지 알길이 없었다.

드디여 양복을 잘 차려입은 한사람이 조선바지저고리차림의 허약한 소년을 데리고 그들앞에 나타났다.

《김일부수상동지가 아닙니까? 이쪽분은 허창숙동지이시지요?》

양복을 입은 사람의 말에 김일과 허창숙은 허약한 소년이 다름아닌 진성봉임을 알아차렸다.

《성봉아, 네가 이렇게 컸구나. 내가 허창숙이다.》 창숙은 와락 소년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리였다.

진성봉은 허창숙이 중국 흑룡강성 료하현 다반촌에서 살 때 함께 투쟁한 동지가 남긴 애였다. 당시 애의 아버지는 유격대지휘관으로 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고 애어머니는 집단부락에서 지하공작을 하면서 유격대 원호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리였다. 그러다가 왜놈들에게 체포되여 희생되였다. 그 녀성혁명가를 친언니처럼 따르며 지하공작을 함께 하던 창숙은 동지가 남긴 젖먹이어린애를 자기의 아들로 삼았다. 하여 그는 성봉이를 안고 동네를 다니며 젖을 먹이였고 밤에도 꼭 껴안고 잤다. (난 시집가지 않을테다. 이 애를 키우며 이 애를 친자식으로 삼고 살면서 동지의 뜻대로 끝까지 혁명을 할것이다.) 하고 창숙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생활은 창숙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변절자가 생기는 바람에 창숙이 급히 몸을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정황이 조성되였다.

창숙은 1년간 안아키우면서 정을 쏟아부은 성봉이와 헤여져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애를 맡기면서 창숙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였다. 그는 성봉의 야들야들한 볼에 입을 맞추며 정신없이 중얼거리였다.

《성봉아, 부디 앓지 말고 잘있거라. 그리고 날 기다려라. 내 꼭 너를 찾겠다. 혁명이 승리한 다음에 꼭 찾아오겠어.》

그날 저녁 날이 어슬어슬해질 때 창숙은 빨래함지를 이고 집을 나서 강으로 향했다. 그다음 물에 빠져죽은것처럼 강가에 신발을 벗어놓고 유격대를 찾아떠났다.

그렇게 헤여진 성봉이가 16살의 소년으로 자라 창숙의 앞에 나타난것이였다. 성봉의 손에는 퇴색한 사진 한장이 쥐여져있었는데 그것은 자기의 친어머니와 함께 허창숙이 찍은 사진이였다.

《네가 진성봉이로구나.》김일이 성봉이의 어깨에 큰 손을 얹었다.

《우리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성봉은 서름서름한 감정이 진하게 어린 얼굴로 김일을 보다가 꾸벅 절을 하였다.

잠시후 김일은 허창숙과 진성봉을 차에 태워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내각으로 나갔다.

집에는 딸애인 박은희가 있었는데 처음 보는 성봉이를 졸졸 따랐다.

1946년도에 김일을 찾아온 아들 박용석은 외국류학중이였다.

허창숙은 성봉에게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또다시 눈물을 흘리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심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성봉은 열살우였던 누이의 손에서 변변히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고생스럽게 살았다. 그때문인지 성봉은 공부도 제대로 못하였고 몸도 튼튼치 못하였다.

《성봉아, 네 누이는 어떻게 살고있니?》

허창숙은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였고 혼자 시집을 가서 아득바득 가정살림을 유지하면서 어린 남동생을 돌보느라 모진 고생을 다 겪은 성봉의 누나가 불쌍하고 그리워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누이는 먼저 나를 떠나보내면서 인차 가족을 다 데리고 나오겠다고 했어요.》

어머니와 말하면서도 성봉은 자꾸 식은땀을 흘리였다.

《오빠, 그렇게 덥나? 땀을 닦으라요.》

철없는 박은희가 곁에서 성봉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난 일없어. 그런데 너 꽤나 똑똑하구나.》

성봉은 어색하게 웃으며 은희의 오동통한 볼을 손가락으로 꼭 찔러준다.

그러는 성봉에게 창숙은 말하였다.

《이젠 내게 자식이 또 생긴셈이다. 성봉아, 여길 네 집으로 생각해야 한다. 은희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널 친자식으로 생각한단다.》

성봉의 해쓱하게 질린 얼굴에는 다시금 땀발이 돋아났다.


내각부수상 겸 농업상이였던 김일은 평양시주변의 어느 한 농장에 시범적으로 조직된 농업협동조합에 지도사업을 나갔다가 황혼이 깃들무렵 시내로 들어오고있었다. 그는 《책방》이라고 쓴 간판앞에서 차를 세우게 했다. 책방주인이 문을 잠그려고 나서는것을 김일이 량해를 구하였다.

《어떤 책들이 있는지 한번 구경을 좀 합시다.》

턱수염을 자래운 늙수그레한 주인은 승용차를 타고온 간부풍의 사나이가 책방을 보자는 바람에 금시 얼굴이 환해져서 김일을 안내하였다.

《비록 집은 초라해도 여기엔 동서고금의 인류문화가 숨쉬고있는 신성한 곳이지요. 어떤 책을 요구하십니까.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있고 리기영선생의 〈고향〉, 한설야선생의 〈황혼〉도 있습니다. 일문판 세계문학선집들도 있구요.》

《전쟁통에도 용케 책들을 보존했군요.》

김일은 주인을 칭찬하며 이것저것 책들을 뒤적이다가 김람인의 유고작품인 서사시 《강철청년부대》를 발견하였다.

김람인의 시집을 보노라니 전쟁시기에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김람인은 1951년 6월에 전선동부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앞으로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쓸 사람인데 일찍 희생되였다고 비분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가 서사시원고를 남기고 희생된것만큼 우리가 그를 대신하여 세상에 내놓도록 하자고, 작품이 출판되면 그의 유가족들에게도 보내주고 자신께도 한부 보내달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바로 그렇게 되여 세상에 나온 서사시였다. 한권의 서사시가 김일에게 전쟁으로 인한 상실의 아픔을 다시금 느끼게 하였다.

(귀중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였지. 김책, 강건, 최춘국…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전사자, 피살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런 생각을 하며 김일은 김람인의 시집을 비롯한 소설책 몇권을 사들고 책방을 나섰다.

김일은 퇴근하면서 책방에서 산 책들을 가지고 집에 들어갔다.

그는 진성봉에게 그 책들을 안겨주었다.

《좋은 책들이니 읽어보아라. 조국에 대해 알게 하는데 얼마간 도움을 줄게다.》

허창숙이 당황해하며 김일에게 말하였다.

《성봉인 아직 조선글을 몰라요. 중국소학교에 좀 다니다가 중퇴했대요.》

《그래?!》

얼굴이 새빨갛게 되여 외면하는 성봉을 보노라니 김일은 가슴이 아릿해왔다.

(그래도 용석이는 모진 생활고를 이겨내면서 공부를 좀 했었지.)

《일없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먹고 공부하면 된다.》 하고 김일은 성봉에게 말하였다.

그는 성봉이를 볼 때마다 어쩐지 강정익이 남긴 아들애가 생각나면서 동지에게 죄를 지은것만 같은감을 느끼군 하였다.

(과연 그 애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대체 찾을 길이 없으니…)

어언간에 성봉은 김일에게 있어서 동지들이 남긴 후대를 상징하는 존재처럼 여겨지게 되였다. 말하자면 성봉의 육체에 강정익의 아들의 혼도 깃들어있는듯싶어 김일은 성봉에게 온갖 정을 다 쏟아붓고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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