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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6 회


종 장


전후의 년간들은 계응상박사의 생애에서 풍요한 수확기, 황홀한 밀원의 시기라고 할수 있다. 그는 해방후 근 10여년에 걸쳐 정력을 기울여온 잠체해부론문을 마침내 완성하였다. 계박사는 1964년에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세계생물학자대회에 참가하여 이 론문을 발표했다.

각국의 생물학자들은 그의 누에보고가 누에를 해부하고 그의 생리현상을 상세히 구명한 론문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심오한것이라고 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유전 및 육종리론의 기초가 이처럼 폭이 넓고 깊을진대 조선의 현대생물학이 얼마나 착실하게 세계적수준으로 발전했는가를 짐작키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의 이러한 추측은 그럴만한 근거를 가지고있었다. 이무렵 계응상박사는 국잠 208호, 56호, 147호, 145호를 주도한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1대잡종의 가잠 신품종들을 련달아 육종해냈으며 애초의 원종에 비해서는 무려 배반의 무게가 나가는 1대잡종의 가둑누에 58호를 육종해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원산지가 인디아의 아쌈인 열대지방누에 피마잠을 우리 나라의 애경수라는 가둑누에와 교잡하는 종간교잡에 성공하여 온대지방에 적응한 피마잠누에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던것이다.

또한 중앙잠업시험장에는 매해 중국, 벌가리아, 로므니아, 마쟈르의 과학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계응상의 조언을 받았으며 우리 나라에서 새로 육종한 온대지방 피마잠을 보급하기 위하여 시험부의 연구사들을 로므니아에 파견했다. 그 나라에서는 무연한 두나이강변에 순전히 기름을 얻기 위해 수만정보의 피마주를 재배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 무진장한 피마주밭에서 기름뿐아니라 비단실고치도 따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계응상은 1957년에 한 외국농업과학원의 초청을 받고 거기에 가서 그 나라 과학자들과 생물학발전에서 이룩한 서로의 경험을 허심탄회하게 나누었으며 돌아오던 길에는 모스크바에 머무르게 되였다.

그는 마중나온 쏘련농업과학원 일군에게 릐쎈꼬를 만날것을 요청한다고 알리고 붉은광장가까이에 자리잡고있는 모스크바호텔에 들었다. 큰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면 덮어놓고 숭상하면서 그가 하고있는 연구사업을 의혹에 차서 지켜보며 뒤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조건에서 릐쎈꼬를 만나 유전학에 대한 견해를 솔직하게 주고받는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는 릐쎈꼬와의 회견을 기다리면서 모스크바시내의 과학문화기관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저녁이면 릐쎈꼬와 만나 주고받을 내용을 깐깐히 준비하였다.

계응상은 실험유전학자로서 자신이 일생동안 누에를 재료로 하여 진행한 실험결과들을 가지고 릐쎈꼬와 론전을 할 차비였다.

그는 수첩을 꺼내놓고 12가지 조항으로 된 문제를 또박또박 써넣었다. 그것은 누에에 존재하는것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생물체에 지배하는 일반성을 띠는 그런것들이였다. …

모스크바에 머물러야 할 기간이 지났으나 계응상은 쏘련(당시)주재 우리 나라 대사관에 알리고 릐쎈꼬를 기어이 만나고야 귀국하겠다는 립장을 밝히였다.

그는 실로 릐쎈꼬를 만나 하고싶은 말이 많았다. …

계응상박사가 모스크바호텔에 머물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쏘련에 류학을 와있는 젊은 제자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왔다.

어느날 그가 들어있는 호텔 귀빈실에 찌미랴쩨브명칭 농업아까데미야에 와서 류학하고있는 한 제자가 찾아왔다. 그들은 볼쇼이극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밑의 원탁앞에 마주앉아있었다.

은근한 암회색모직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단정히 앉은 제자를 이윽토록 바라보던 계응상은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자네 나이가 몇인가?》

《스물네살입니다.》

《스물네살!》 이렇게 뇌인 계응상은 깊은 감회에 잠겼다. 수난에 찬 자신의 젊은 시절이 못 견디게 눈앞에 떠올랐던것이다. 그 나이때 그는 중학을 마치고 상급학교에 갈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호미자루를 쥐고 물곬비탈밭에서 밭김을 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의 젊은 제자는 그 나이에 나라의 부담으로 모스크바의 1류급대학 아까데미야에 와서 선진과학과 기술을 마음껏 탐구하고있는것이다.

계응상은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전련맹농업전람관을 비롯한 과학연구기관들을 돌아보며 쏘련과학자들이 달성한 성과와 경험을 배우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자기의 존재 40년에 들어선 쏘련은 지난 세계대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성새의 우람찬 면모를 력력히 드러내고있었다.

계응상은 짜리로씨야때 락후한 농업국가였던 쏘련이 거대한 과학기술적잠재력을 가진 나라로 비약한것을 볼수 있었다.

…1904년 《교육통보》는 로씨야의 유럽부문주민이 초보적인 지식을 가지자면 120년이 걸리고 씨비리와 깝까즈에서는 430년이 그리고 봉건제도가 번성하고있던 중앙아시아에서는 4 000년이 걸릴것이라고 예측하였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과거의 사람들의 계산법으로는 헤아릴수 없는 전대미문의 발전속도를 가지고있었다.

하나 서방나라들에서는 로씨야인들이 여전히 교육과 과학분야에서 《문명국》들보다 엄청나게 뒤떨어져있다는 견해가 오래동안 집요하게 남아있었다. 얼마전에 쏘련의 인공지구위성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구주위의 궤도에 오르고 유리 가가린이 지구사람으로서 제일먼저 우주비행을 하였고 모스크바근교에서 세계최초의 원자력발전소가 조업을 개시하게 되자 모든것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전련맹농업과학원에서는 릐쎈꼬가 지방에 출장을 나갔기때문에 계응상박사의 요청에 인차 응할수 없게 되였다고 알리여왔다. 그러면서 계박사에게 쏘련의 잠업중심지인 뚜르크메니야가맹공화국의 잠학연구소며 양잠사육지들을 돌아보도록 했다.

릐쎈꼬는 정통유전학자들을 만나는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쏘련의 저명한 물리학자이며 과학원 원사인 쎄묘노브가 과학잡지 지면을 통하여 말한바와 같이 릐쎈꼬는 자기의 적수들, 과학적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접근시키지 않는 독단적인 사람이였다.

릐쎈꼬와의 면담은 계응상이 뚜르크메니야에서 비행기로 모스크바에 돌아온 그 이튿날에야 이루어졌다. 이날에만도 릐쎈꼬를 만나야겠다는 외국손님들이 여러 사람 되기때문에 계박사를 만나는데 30분이 예정되여있다는것을 미리 알리여왔다.

계응상이 마루를 깐 넓은 방에 들어서자 사무탁앞에 앉아 피로한 기색으로 글을 쓰고있던 릐쎈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손을 내밀었다. …

그때 릐쎈꼬의 방에서 어떤 담화가 벌어졌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계응상박사자신도 후에 자세히 언급한적이 별로 없다. 그러나 30분을 예견했던 면담은 무려 2시간반동안이나 계속되였다는 점에 류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며칠후 귀국하여 연구소에 돌아온 계박사는 면담석상에서 릐쎈꼬가 그에게 증정한 책들을 뒤적이면서 주섬주섬 몇마디씩 했다. 그 말들을 종합하여보건대 릐쎈꼬는 계박사를 매우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주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계응상은 일반적인 이야기를 피하고 한사코 오래동안 준비한 과학적론제에 릐쎈꼬를 끌어들였다. 우선 그는 자기네 연구소에서 염색체수가 서로 다른 누에들을 교잡하여 새로운 누에품종을 육종한 사실을 언급했다.

이것이야말로 릐쎈꼬가 유전학자들이야말로 생물체의 변화발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있는데 대한 도전이라고 할수 있었다. 한데 릐쎈꼬는 외교적인 태도로 계박사의 연구성과를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앞으로 두 나라 농업과학원사이의 교류를 활발히 하자고 말머리를 돌렸다.

계응상은 아연했다. 이제까지 릐쎈꼬가 공식적으로 표시한 견해와 그 앞에서 한 말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고있었던것이다.

계응상은 심각한 기색을 짓고 자기가 잡종강세현상을 리용하여 생산성이 높은 우수한 누에품종을 수없이 육종했다는것을 사실적인 자료들을 들어 이야기하고나서 앞으로도 이 선에서 누에육종사업을 진행할 결심이라고 언명했다.

하자 놀랍게도 릐쎈꼬는 육종사업에서 강세현상을 리용하는것을 자기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앞으로 잠학연구에서 달성하고있는 연구업적에 대하여 주목해보겠노라고 다짐했다.

릐쎈꼬와 격렬한 론전을 벌릴 잡도리를 하고 찾아왔던 계응상은 억이 막혀 손맥이 풀리기까지 했다.

계응상이 알고있건대 릐쎈꼬는 무서운 독단과 자고자대에 빠진 사람이였다. 그런데 그는 계응상이 제기한 12가지 문제를 어느 하나도 부인하지 못했을뿐만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중시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던것이다. 면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선 응상은 허거픈 웃음을 짓지 않을수 없었다.

어쨌든 릐쎈꼬는 계응상을 자기 방에서 맞이한것과는 정반대로 그를 바래울 때에는 마당까지 따라나가 친절하게 전송했다.

《릐쎈꼬는 어떤 사람이던가요?》

후에 연구소의 제자들이 이렇게 물을 때면 계응상은 두눈을 슴벅거리며 시답지 않게 대꾸하군 했다.

《릐쎈꼬란 사람은 과학자라기보다 사변철학가더군.》

《그는 우리가 하고있는 연구사업에 대하여 한마디도 부정하는 말을 하지 못했소.…》

몇해가 지나 쏘련잡지 《과학과 생활》에 실린 쎄묘노브원사의 글 《과학은 주관주의를 불허한다》가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계응상이 그때 릐쎈꼬에 대하여 어째서 그토록 혹독한 평가를 했는가를 깨달았다.

그날 연구소성원들은 실험공들까지 소장방에 들어와 계박사의 서기가 목청 돋구어 읽는 쎄묘노브원사의 글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유감스럽게도 생물학의 중요한 일련의 분야들에서는 떼. 데. 릐쎈꼬원사와 그 조수들의 활동의 결과 아주 특이한 형세가 조성되였으며 4분의 1세기동안이나 건전한 과학건설원칙이 로골적으로 유린되여왔다. 이것은 전례없는 부당한 견해의 보급과 수많은 현대생물학분야의 발전의 지연, 교육기관들에서 생물교육의 질저하 등을 초래하게 되였다.

이 분야에서 비정상적인 사태가 너무도 오래동안 지속되였으므로 지금에 와서 우리의 생물학과 관련된 과학교육실천사업을 개조할데 대하여 론의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한때 그럴 가능성을 가지지 못했던 수천명의 교원, 농업기사, 과학일군들이 현대생물학의 성과를 완전히 습득할수 있는 조건을 보장해주어야 할것이다.

당은 우리 과학자들이 자기 분야에서 주관주의의 그 어떠한 발현도 허용하지 말며 언제 어디서나 정확한 실험에 의하여 고착된 객관적자료에 엄격히 립각할것을 요구하고있다.…

격동된 연구소성원들은 흥분하여 웨쳤다.

《글쎄 그러면 그렇겠지, 달리 될수가 있나.》

서기는 다음대목을 소리내여 읽었다.

…릐쎈꼬의 그루빠가 오래동안 생물학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할수 있었다는것을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이것은 우선 릐쎈꼬와 프레젠트와 같은 그의 지지자들이 자기네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의 투쟁을 과학적토론의 견지로부터 데마와 정치적비난의 견지에로 넘겨쳤으며 여기에서 크게 성공했다는것으로 설명된다. …

떼. 데. 릐쎈꼬와 그의 그루빠는 1948년의 전련맹농업과학원총회를 절정으로 하여 이른바 생물학토론의 전기간에 걸쳐서 좋지 못한 방법을 리용하였다. 전문적생물학적리론을 관념론적으로 묘사하는것은 자연과학의 분석에 대한 맑스-레닌주의적태도에 심히 모순되는것이다. …

쎄묘노브원사의 글을 귀담아들은 계응상은 가슴이 후련히 열리는것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쏘베트과학자들의 정신이라는것, 무엇보다도 형제적인 쏘련생물학계에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것, 그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되찾게 됐다는것이 참으로 기뻤다. …

《나는 1957년 8월 영광스럽게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였으며 이어 진행된 최고인민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피선되여 국사에 직접 참여하게 되였다. 그리고 전후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원회가 조직되자 동위원회 위원으로, 조쏘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 조중친선협회 위원, 조프문화친선협회 부위원장, 농림수산기술련맹중앙위원회 위원, 인민상수상위원회 학위학직수여위원회 위원의 직책들을 겸직에 겸직으로 맡아 활동하였다. …》

계응상박사가 자서전에 이렇게 쓴것은 응당한 일이였다. 그는 1948년 첫 대의원선거때 도대의원립후보자로 추천되는것을 사양했다. 자기자신이 그런 인민의 신임을 받을만큼 한 일이 없다고 겸양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거니와 분수에 없는 직책에 관여했다가 과학연구에 장애가 될가봐 두려워하기도 했던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그는 이러한 중책을 지니게 된것을 크나큰 영예로 생각하였다. 그가 뇌혈전이 경하게 와서 근 석달동안 병원침대에 누워있다가 갓 퇴원하여 집에 와있을 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 참가하라는 통지문이 왔었다. 여느때는 이런 통지문이 와도 범상하게 여겼었건만 이때에는 웬일인지 회의에 늦겠다고 몹시 초조해하면서 운전사를 재촉하여 평양으로 나갔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에 의하여 이러한 직책에서 사업하는것이 과학활동에 몹시 필요하다는것을 점차 리해하기 시작했던것이다.

최고인민회의에 참가하여 로항일투사들과 교제를 하면서 그는 그들로부터 유익한 조언과 방조를 적지 않게 받군 했다.

한번은 항일투사 최현동지와 나란히 앉아 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계박사는 휴식시간에 최현대장에게 자기의 연구사업에서 느끼고있는 고충에 대하여 실토했다.

《나는 지금 청주라는 희귀한 비단천을 뽑을수 있는 귀한 누에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있는데 렌트겐촬영기가 없어서 애를 먹고있습니다.》

《원, 그럴수야 있습니까. 선생이 김일성동지께서 기뻐하실 누에를 만드는데 필요한거라는데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내 수령님께 말씀드리고 우리 군의국에서 쓰는거라도 보내드리겠습니다.》

뚝 찍어 흔연히 말한 최현은 잠업과 자기가 사업하는 무력부문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건만 회의를 끝마치고 돌아간지 반삭도 되지 않아 군용차에 렌트겐촬영기를 실어서 연구소까지 보내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의 잠업발전전망을 토론할 때에는 더 말할것 없고 3개년인민경제계획이며 제1차 5개년계획을 작성하면서 전망계획기간의 잠업발전규모를 확정하실 때에도 꼭 계응상박사를 부르시여 그의 의견을 먼저 들으시군 하시였다.

계응상은 무엇때문에 한 과학자를 중요한 국사를 토의결정하는 직책에 천거했는가를 가슴뜨겁게 느끼게 되였다.

일제때 그는 정치의 몽둥이를 휘두르는 권력자들을 도깨비향내만큼이나 싫어하였다. 때문에 그런자들과는 될수록 담을 쌓고 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정치밖에서 자유롭게 살수가 없었다. 아무리 세상만사를 오불관언하고 살려고 매삼질쳐도 일제관헌들은 그를 결코 가만두지 않았으며 애무하게 옥밥을 먹이기가 일쑤였다.

해방이 되였지만 그는 의연히 괴뢰당국자들을 경원시하였으며 북반부에 들어온 후에도 정치를 멀리하고 시험장당조직의 활동에 대하여 담너머 남의 집 울안을 넘겨다보듯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거나말거나 그의 연구사업은 해가 바뀔수록 당의 활동과 깊이 련결되고있었다. 그는 근래에 와서 자신에게 묻군 했다.

《나는 지금 경애하는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직접 받아가지고 사업하는 특전을 지니고있는데 그것은 곧 당의 지시를 관철하는 사업이 아닌가.》

연구소내 당원들은 저녁마다 자주 선전실에 모여앉아 그의 연구사업을 어떻게 하면 잘 도와주겠는가에 대하여 의논하고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홀로 방안에 앉아 수령님의 저작선집을 읽으며 생각이 번거로와지군 했다.

(나는 당의 중요한 결정을 집행하면서 어느 때까지나 이렇게 당밖에 서있어야 하는가.) 그는 인민이 주인행세를 하는 내 나라에서 당이야말로 강철의 의지이며 무적의 힘이라는것을 인식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정치와 굳게 손을 잡고나가야만 과학연구를 잘해나갈수 있다는것을 절감했다.

하기에 그는 66살의 로년에 이르러 당조직에 입당청원서를 썼다.

《본인은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 이즈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 나라 과학에 더 적극적으로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영명하신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조선로동당조직의 일원이 되여야 한다는것을 깨달았으며 조국의 륭성번영에 한몸 바치려는 나의 리상도 조선로동당의 지도하에서만 이룩될수 있다는것을 굳게 확신하게 되였습니다. 이제라도 년로한 이 몸을 당에 받아준다면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께 끝없이 충성다하렵니다.》

계박사의 청원은 당조직에서 즉시에 기꺼이 수락되였다. 당에서는 오래전부터 그가 스스로 이런 결심을 내리길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군당위원회에 입당심의를 받으러 가는 날 아침이였다. 연구소초급당부위원장은 계박사의 집앞에 승용차를 대기시켜놓고있다가 차비하고 나선 그를 정중히 맞이하였다.

《날씨가 사납습니다. 어서 차에 오르십시오.》

그런데 계박사는 《부위원장동무! 오늘은 걸어서 가겠습니다.》라고 하며 승용차옆을 지나 곧장 정문밖으로 걸어나가는것이였다.

군당위원회청사는 연구소에서 오리가량 떨어져있었다. 바람이 미친듯이 불어치고 거리에는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계박사는 흰머리를 바람에 마구 흩날리며 고개를 수굿하고 더벅더벅 군당으로 걸어갔다.

군당위원장도 자전거를 타고다니던 때였다. 순간이 황금같이 귀중한 계박사의 사업에 도움을 주기 위해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승용차는 못 가는 곳이 없었다. 계응상박사는 사업상용무로 이 승용차를 타고 최고인민회의며 내각에도 버젓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승용차를 타고 군당정문으로 들어서기를 삼갔다.

이날만은 일개의 입당청원자로서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제발로 걸어서 군당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계응상은 인생말년에 이르러서야 주체형의 혁명가들의 전투적인 조직체인 조선로동당의 일원이 되였다. 그가 참가한 가운데 처음으로 진행되게 된 연구소초급당총회에서는 《새로운 여름철 누에육종에서의 당원들의 과업》이라는 안건을 토론하게 되였는데 당조직에서는 그에게 이 안건을 토의하기 위한 보고를 제기할것을 위임하였다.

계응상박사는 전에 없던 새로운 열정에 북받쳐 당총회보고를 준비했다. 자신이 일생동안 하여온 사업의 련속이였으나 이 시각부터는 그것이 벌써 사회주의위업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하는 조직적이고 당적인 사업으로 전환되였다는것을 의식했던것이다.

날이 갈수록 계응상박사는 자신에게 직접 돌려주시는 경애하는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에 감복하여 더욱 어엿한 과학적성과를 거두려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하듯이 조급하게 갈길을 재촉했다.

계응상박사의 살림집을 덩실하게 지으라고 수령님께서 해당 부문일군들에게 지시를 하시여 목재와 세멘트, 유리를 차판으로 실어보내주었을 때에도 그는 그 자재를 겨울에 산누에를 연구하기 위한 온실건설에 고스란히 쓰도록 했으며 1960년 9월 9일, 그에게 인민상이 수여되여 상금이 나왔을 때에도 상금전액을 연구소가까이에 건설되고있는 잠업기술학교 건설에 기부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동지달 27일은 계응상박사의 환갑이 되는 날이였다. 원산농업대학과 시험장에서는 서로 련계를 맺고 남몰래 그의 환갑차비를 하고있었다. 이러한 기미를 눈치챈 계박사는 불시에 황해남도 배천온실(당시 배천에는 피마잠연구분실이 있었다.)로 떠나면서 잘라 말했다.

《지금 내가 무슨 면목으로 상을 받는단 말인가. 50나이에 장군님의 품에 안겨 과분한 은혜만 받아안았으니 한 일도 없이 환갑상을 받으면 내 마음이 기쁘겠나. 송구해서 어쩔바를 모를 그런 자리에 앉아서 무슨 락을 누릴수 있겠나. 10년후에 보세.》

계박사가 이렇게 말한것은 좀더 보란듯 한 연구업적을 이룩하고 70돐생일을 환갑삼아 지내려고 해서였다. 그때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계응상박사는 나라의 잠업발전에 특출한 기여를 한 공로로 인민상을 수여받았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농업과학원 원장으로 국사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생일날이 가까와오자 계응상박사는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말년에 세계잠업계에서 미지의 문제로 여기고있는 2가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중의 하나는 누에알의 색갈에 의하여 암누에와 수누에를 선별하여 누에사육을 수누에만 치도록 하자는것이였다. 수누에는 생활력이 강할뿐만아니라 고치도 암누에에 비하여 월등하게 크고 무겁게 지었다. 하기에 양잠업자들은 그 누구나 수누에만 따로 알을 받아서 키울수 없겠는가를 바라고있었다. 이 문제는 항일투사 최현대장이 수령님께 보고드려 시험장에 보내준 렌트겐촬영기를 리용하여 연구사업을 추진시켜서 돌연변이체를 얻게 되자 인차 걸린 매듭이 풀리여 마침내 성공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연구과제로 설정한 산누에와 가둑누에와의 원친교잡에 의한 새로운 누에육종사업은 좀체로 성공의 싹을 볼수가 없었다. 해는 자꾸 바뀌는데 연구사업에서는 전진이 너무도 굼떴다. 계응상박사는 환갑이 지난 몸이였지만 황해남도 구월산에 올라가 초막에서 지내며 새롭게 고안한 수십가지 방법으로 교잡실험을 하여보았다. 이 과정에 류연이 먼 누에에서는 도저히 후대를 얻을수 없다고 해왔지만 그는 두 종간에 완전히 새로운 후대를 얻는데 성공했다. 그는 그 누에에 《반》이라는 명칭을 달았다. 허나 산누에와 같이 실풀림이 좋고 가둑누에와 같이 알을 많이 낳는 품종으로 고정시키자면 아직 많은 문제를 풀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완전히 종간교잡을 실현하여 새 품종을 얻어낼것인가, 자나깨나 그의 머리속에는 이 생각밖에 없었다.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나갈 때에도 그는 차창에 복잡한 도식을 그려놓고 오직 그것만 들여다보며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마음속으로 경애하는 수령님께 삼가 올리자고 속다짐한 소중한 누에를 아직 만들지 못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생일상을 받는단 말인가!)

계응상은 이번에도 상을 받지 않으려고 남몰래 나들이차비를 하고있었다.

정오가 가까와올무렵 밤새 내린 눈이 수북이 깔린 연구소정원으로 한대의 승용차가 소리없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뜻밖에도 차안에서는 낯익은 농업위원회 위원장이 내리였다.

정원을 거닐던 계응상은 의아하여 주춤주춤 그리로 다가갔다. 보통키에 푸수하게 생긴 농업위원회 위원장은 계응상의 손을 따뜻이 부여잡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님의 생일을 축하해드리라고 친히 상까지 마련해서 보내주셨습니다.》

농업위원회 위원장의 목소리는 깊은 감동에 젖어있었다.

《생일상을요?》

계응상은 선자리에 굳어진채 중년의 농업위원회 위원장을 뻔히 쳐다보기만 했다. 농업위원회 위원장은 정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제 아침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정치위원들과 함께 농업과학원을 현지지도하시였습니다. 휴식시간에 우리는 계선생 70돐생일이 멀지 않았는데 몇사람 모여서 축하도 해드리고 국가표창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수령님께서는 〈벌써 계응상선생의 70돐생일입니까? 무슨 표창을 주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시며 좌중을 둘러보시였습니다. 우리는 선뜻 대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힘주어 말씀하시였습니다.

〈계응상선생은 우리 나라 과학발전에 큰 공로가 있는 주체가 선 과학자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치고있는 1대잡종의 우수한 누에들은 모두 그가 해방후에 새로 육종하여 보급한것들입니다.

특히 세계생물학계에서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던 종간교잡을 실현하여 남방지대에서만 칠수 있던 피마주누에를 조선의 누에로 만든것을 비롯하여 산누에를 육종하기 위해 기울인 유전학자로서의 그의 리론실천적공적은 자랑할만 한것입니다.

계응상선생이 무엇을 탔습니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이고 박사, 교수, 원사이고 인민상계관인이지, 우리 나라의 최고영예는 다 받았구만. 내 생각에는 로력영웅칭호를 주는것이 좋겠다는 의견입니다. 여기에 정치위원들이 다 참가했는데 이동정치위원회를 합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이동정치위원회를 열고 선생께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시면서 수령님께서는 계응상선생의 선집을 빨리 내도록 해야겠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습니다.》

계응상은 숙연히 머리를 들어 푸른 하늘이 아득히 틔여있는 하늘을 하염없이 우러렀다. 눈부신 태양의 광휘에 싸여있는 그 하늘아래 어디엔가 그분이 계신다. 정녕 그분이 이 땅의 중심에 서계시지 않다면 맑은 하늘에선들 어찌 태양이 저렇게 따사로운 빛발을 찬란히 뿌릴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의 말년이 이런 크나큰 영광에 휩싸여 고요히 저물어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좀전에 문득 농업위원회 위원장이 정원에 나타났을 때에도 그는 저 사람이 무슨 일로 찾아왔을가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짐작할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령님께서는 항상 그의 생을 굽어살피고계시였고 그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한 그런 선물을 아름으로 안겨주신다. 로년에도 생의 열정으로 뒤끓어번지는 뜨거운 심장을 주시는것이 아닌가.

예로부터 70돐생일상은 자식들이 년로한 부모의 장생불로를 축원하여 효자의 정성으로 고이는것이다. 그러나 계응상의 생일상은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원수님께서 친히 차려보내주신것이다.

상 한가운데는 천고의 밀림을 헤쳐온듯 이끼오른 두쌍의 사슴뿔이 정중히 놓여있고 그 좌우에는 100년 묵은 산삼뿌리를 드리운 두병의 장생불로주가 금빛을 뿌리고있었다.

접시우에서 꼬리를 치는 대동강의 숭어며 수풍호의 잉어, 성천의 밤과 옹진의 감, 임당수에서 건져왔다는 서해의 해삼, 묘향산의 두릅…

산해진미가 다 오른 이채로운 상도 볼만 했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필로 써보내신 한장의 글발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로지 조국과 인민을 위한 계응상선생의 고귀한 과학연구사업에서 더 큰 성과가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앞을 다투어 계응상에게 잔을 권하는 그의 제자들이 꼬리를 무는통에 계박사의 아들딸들은 무색하여 한쪽으로 비껴나설 지경이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이때 잠학계에서는 계박사가 키운 학사만 해도 십여명이 되였다. 그들을 대표하여 최필호가 계응상박사에게 술을 찰랑찰랑하게 부은 잔을 두손으로 권하였다.

흰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잔을 받아쥔 계응상은 감회에 잠겨 흉중에 깊이 간직했던 말을 뜨직뜨직 꺼냈다.

《여러분!

자그마한 누에를 다루는 학자에게도 우주와 같이 무한대한 자유의 공간과 인력권과 같은 거대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는 누에에서 진리를 찾기 전에 수백수천억을 헤아리는 은하계에서 새로운 별을 찾는 천체물리학자와 같이 인간세상에서 먼저 진리를 탐색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나는 마침내 비상한 자력권을 가지고있는 신비한 별천지에 도달했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과학탐구의 세계,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 살고있기때문입니다. …》

계응상의 두눈에는 구슬같은 눈물이 맺혀있었다.


X


《왜 이렇게 더디게 가나?》

승용차의 속도계는 100을 넘어섰건만 계응상박사는 벌써 몇번째인지 모르게 운전사를 재촉했다.

1967년 4월 25일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제3기 7차회의에 참가하고 시험장으로 돌아가는 계응상박사의 얼굴에서는 줄곧 초조한 기색이 떠나지 않았다.

젊은 운전사는 전속으로 달리는 승용차도 더딘것만 같아 자주 갈길을 재촉하는 계박사를 불안한 눈길로 여겨보며 가속판을 밟았다.

머리를 높이 쳐든 계응상은 두눈을 지그시 감고있었다. 그는 회의에 나가있는 기간 농업출판사에 들려 그의 선집 1권과 2권, 1분책, 2분책이 인쇄에 회부되였다는것을 알았다. 선집 3권도 집필을 거의 끝내가고있었다. 그런데 일이 자꾸만 굼뜨게 진행되는것 같아 조바심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어찌 그렇지 않을수 있었으랴.

드디여 그의 눈앞에는 안개속에 잠겼던 천태만상의 누에의 세계가 그 정체를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응상은 그것들을 손금처럼 들여다볼뿐만아니라 손으로도 만져보고있었다.

그렇지,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시험부에 먼저 들리자, 산누에의 그 완고한 고집을 돌려세우기 위해서는 보통방법으로는 안된다. 충격적인 그러한 자극이 필요하다. 섬광과 같이 머리에 떠오른 너무도 기발한 생각에 그는 숨이 가빠났다. 그리고 오는 봄 첫 사육기부터는 이제껏 아끼고 축적해온 그 모든 교잡결과를 종합하여 빨갛고 파랗고 노란 천연의 누에고치를 척척 만들어내놓자.

계박사의 입가에는 한없이 행복하고 다감하고 정겨운 미소가 남실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눈부신 해볕을 받아 황홀하게 반짝이는 보석이 한벌 쫙 깔려있었다. 그는 어느것을 먼저 주어 바구니에 담아야 할지 모를 지경이였다. 한개도 놓치지 말고 모조리 주어담아야겠는데…

그의 나이는 이미 75살에 이르렀지만 엄밀한 섭생의 덕분으로 아직 안경을 끼는 법을 몰랐으며 썩은 이 한대 없이 이가 든든하고 식욕이 왕성하여 하루 12시간씩 일을 해도 피곤한줄 몰랐다.

그러나 눈앞에 지천으로 깔린 희한한 보석들을 도저히 해떨어지기 전에 다 주어담을수 없다는것을 헤아린 그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안되겠다. 이렇게 해선 저 귀중한 보석을 반에 반도 주어담지 못하겠다. 분과 초를 쪼개가며 부지런히 일을 해야겠구나.

《운전사동무, 좀더 빨리 갈수 없겠소?》

계응상이 이렇게 말하려고 하는 순간 굽인돌이의 옆길에서 불쑥 황소를 메운 달구지가 승용차앞에 나타났다. 당황하여 조향륜을 돌리려던 운전사는 흠칠 전신을 떨었다.

《쾅-》

아, 애석하구나. 그는 일생토록 붙잡으려던 문고리를 쥔채 마지막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말았다.

그의 사후 20여년이 지난 오늘 계응상박사가 채 완성하지 못한 산누에는 세계시장에서 금값으로도 사기 어려운 가장 값진 누에고치로 되였다.

계응상박사는 우리 인민들에게 가장 많은 저작과 과학적업적을 남긴 저명한 학자였다.

그는 결코 돈을 멸시하는 청교도인이 아니였다. 부언하건대 그가 젊은 시절 남중국으로 건너갈 때 그곳에서 장차 자립적인 과학연구를 위한 밑천을 마련할수 있다는 담보가 없었다면 그렇게 흔연히 길을 떠날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어머니조국의 품에서는 그 모든것을 완전히 초월한 인간으로 순결하게 살수 있었던것이다.

1970년 11월 2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는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가 열리였다. 오전 정각 9시, 만장의 폭풍같은 환호를 받으시며 연탁앞에 나서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장내에 꽉 들어찬 대표들을 숙연한 눈길로 일별하시고는 갈리신 음성으로 개회사를 하시였다.

《우리 당 제4차대회로부터 5차대회에 이르는 기간 당과 조국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혁명을 위하여 몸바쳐 투쟁한… 계응상동지… 들이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나는 본대회에 앞서 대회의 이름으로 조국과 혁명을 위하여 자기의 고귀한 생애를 바친 혁명동지들을 추모하여 묵상할것을 제의합니다.》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 천수백여대표들이 숭엄하게 고개들을 숙이였다. 어머니대지우에 깊이 머리숙인 이삭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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