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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3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10 장


2


세사람, 계응상박사와 신철웅국장, 국기사장이 내각청사의 정문을 나섰을 때는 사위에 어둠이 깃들고 가로등이 푸릿한 빛을 인도우에 던지고있었다. 재촉하여 갈길도, 뇌리속에서 갈래를 풀어헤쳐야 할 일들도 까맣게 잊은듯 계응상은 깊은 생각에 잠겨 걷고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있던 장대한 체구의 철웅국장은 턱을 쳐들고 얽힌 나무가지들사이로 엿보이는 뭇별들을 어이없이 올려다보았고 탄탄한 체구에 담차게 생긴 기사장은 꾹꾹 마음속에 고이는 생각을 옮기는 걸음발에 새겨놓고있는듯 하였다.

《계선생!》

마침내 신철웅은 넓은 어깨우에 걸친 밤색외투를 추스르며 무게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선생은 여전히 피마주누에를 당장 생산에 도입하는걸 반대하신다는겁니까?》

《국장선생!》 계응상은 고집스럽게 뇌이였다.

《나는 이제 다른 말을 더 할것이 없습니다.》

《?!》

짙은 눈섭밑에서 번쩍이는 두릿한 눈으로 계응상을 건너다보는 신철웅의 미간에 깊은 주름살이 잡혔다. 기사장도 긴장된 눈초리를 응상의 얼굴에서 떼지 않았다.

동안이 흐르도록 거쉰 숨소리만이 높아갔다. 일어서는 물너울을 잠재우는 산같은 자제력만이 이들사이에 평온이 깃들게 하고있는듯 하였다.

이윽고 철웅은 마음속 깊이에서 울려나오는 웅글은 음성으로 말했다.

《난 계응상선생의 심중을 도저히 리해할수 없습니다.》

단순한 의사표시가 아니라 자신의 견해야말로 그 누구에게도 론의에 붙일 여지가 없는 확정적인것이란 그런 위엄이 풍기는 말이였다.

하나 그 말을 듣는지 마는지 계응상은 소리없이 천천히 걸음을 내짚었다. 입을 꾹 다문 그의 갸르스름한 얼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착잡한 빛이 얼른거리다가도 불현듯 엄숙한 기색이 비끼는것이였다.

말없이 세사람은 걸었다. 저앞에 우중충하게 서있는 다층주택의 륜곽들은 몽롱한 어스름속에 잠겨 뚜렷치 않는데 총총히 박힌 창문들마다에서 쏟아지는 불빛들은 가없는 람청색허공에서 신기하게 번뜩이는 눈동자들 같았다.

초연히 걸어가는 계응상을 앞세우고 나란히 걷는 두사람의 생각은 무거웠다.

그들은 계응상이 평양에 올라올 때마다 늘 들군 하는 대동강호텔마당에 서있었다.

더는 나눌 말도 없는것 같았으나 또한 그들은 아직 결정적인 의견들을 교환하지 못했다는것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신철웅은 팔을 홱 내저으며 단호한 어조로 선언하듯 말했다.

《선생님도 수령님께서 피마주누에를 두고 얼마나 걱정하시는가를 보셨지요. 저는 이제 피마주누에를 대대적으로 치도록 하는것이야말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바라시는바를 진심으로 받드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것은 수령님께 말씀드린 계응상의 견해에 한치의 동의도 표시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태도이며 자신의 생각에 대한 깊은 확신으로부터 출발하여 단호한 행동도 서슴지 않겠다는 결심을 드러낸것이다.

《아니, 당장 그렇게는 할수 없습니다.》

계응상은 이마를 번쩍 들고 완강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는 또다시 그런 피해가 재현되여 수령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게 해선 안된다고 봅니다.》

계응상의 목소리는 떨리고있었다.

… 피마주누에가 방직섬유로서 유망하다는것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그것은 차차 원산지를 벗어나 서쪽으로는 지중해연안까지, 동쪽으로는 중국, 일본지경에까지 퍼지였다.

일제는 자기 나라에서 이 누에를 렴가로 사육할 목적밑에 우리 나라에서 수백석의 가중나무씨앗을 략탈해다가 어린 나무로 키워 야산들에 심었다. 피마주누에는 피마주잎과 함께 가중나무잎도 잘 먹는다. 1942년 봄 놈들은 조선에서 피마주누에를 대대적으로 사육케 하여 2차대전에 소요되는 섬유를 략탈보충하려고 이를 대만에서 조선총독부산하 남조선 수원농사시험장으로 끌어들였다.

어떤 동식물이든 위도를 넘어설 때에는 적응시험이 필요한것이다. 하지만 리윤과 략탈에 눈이 어두운 놈들은 성급하게 누에알을 생산하여 남도지방 농민들에게 강매하고 의무적으로 수매하도록 강요해나섰다.

그러나 한해도 되기 전에 누에의 암병이라고 할수 있는 무서운 연화병이 누에사육구역전반에 급속히 만연되여 새로 들여온 피마주누에는 전멸되다싶이 했다.

누에의 사육구역은 병균의 오염구역으로 전락되고 더는 이 누에를 칠수 없게까지 만들었다. …

《우리도 자칫하면 아름답고 정결한 광활한 농촌과 도시주변을 죽은 누에의 매몰지, 병균들의 오염구역으로 만들수 있습니다. 피마주누에만은 연구사업을 계속해서 우리의 누에로 만들라고 하신 수령님의 말씀을 절대로 소홀히 할수 없다고 봅니다. 》

계응상은 이런 예리한 말로 오금을 박아 이야기를 그쳤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떤 맵짠 말도 국장의 마음속에 파고들수가 없었다. 신철웅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선생은 지난 초가을에 수령님께서 몸소 치시던 피마주누에를 연구소에 보내주신 일을 잊었습니까.》

잠자코 국장의 말을 귀담아듣는 계응상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깃들었다. 또박또박 뒤말을 잇는 신철웅의 두눈에 깊은 감회의 빛이 어리고있었다.

…간해 말복더위가 숙어들고있던 어느날 아침, 부르심을 받고 수령님저택의 어느 한 방에 안내된 신철웅은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후원으로 창문이 나있는 크지 않은 방에 난생처음 보는 파르스레한 누에가 잠박마다에 빼곡 차있는것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싸리바구니에 수북이 담긴 피마주잎을 손저울에 달아 잠박우에 골고루 뿌려주시였다. 보통누에보다 몸체가 어방없이 큰 고운 누에는 손바닥만 한 피마주잎을 잘도 먹어댔다.

문헌을 통해서만 알고있던 남방지대에서 자란다는 피마주누에가 분명했다. 창밖의 공지에 피마주를 길차게 자래운것도 이때문이였다는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수령님께서는 방안에 가득찬 누에잠박들을 한눈에 일별하시며 말씀하시였다.

《내가 관찰해본데 의하면 피마주누에는 뽕누에보다도 자래우는 기일이 닷새나 짧습니다.》

한쪽 덕대우에는 가시리에 지은 고치가 하얗게 열려있었다. 그이께서는 탐스러운 고치를 한줌 따드시여 국장에게 주면서 물으시였다.

《손맛이 어떻습니까?》

《부드럽고 포근합니다.》

《그것 보시오. 확대경으로 다른 고치와 대조하여 들여다보니 고치실이 매우 가늡니다. 여느 솜과 섞어서 천을 짤수도 있고 양털대용으로 쓸수도 있겠습니다. 흥미있는 누에입니다.》

신철웅은 수령님의 고매한 풍모에 고개가 수그러졌다. 수령님께서는 목화송이같은 피마주누에고치를 정겹게 눈여겨보시며 힘주어 계속하시였다.

《이 누에들을 내가 관찰한 일지와 함께 고스란히 잠학연구소 계응상박사한테 전해주시오. 욕심이 나는 누에인데 어떻게 하면 널리 보급할수 있겠는가를 연구해보라고 하시오.…》

…신철웅은 몇번째인지 모르게 곱씹던 그날의 이야기를 젖은 음성으로 되뇌이며 힘주어 말했다.

《동서고금의 그 어느 나라 수령이 누에종자를 구하여 손수 쳐보며 나라의 잠업발전에 기여한 그런 실례가 있습니까. 전 수령님께서 저택의 한방을 내시여 피마주누에를 쳐보신 그 자료야말로 그 어떤 과학적실험보다도 더 귀중하다고 봅니다. 그이께서는 한장의 누에를 쳐서 12키로 500그람의 고치를 따시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그 이상 또 어떤 실험자료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런데 수령님의 물으심에 선생이 당장 곤난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저는 정말 아연실색했습니다.》

불을 뿜듯이 진정을 터놓는 신철웅의 목소리는 격정에 젖어있었다.

은행나무밑에 놓인 의자에 그린듯이 앉은 계응상의 얼굴에도 숙연한 빛이 깃들었다.

어찌 계응상박사인들 잊지 못할 그 저녁 신철웅이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주신 피마주누에를 싣고 수도에서 수백리나 떨어진 동림읍에까지 찾아와 감동에 겨워 들려준 그 이야기들을 잊을수 있으랴.

그날 계응상도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누에를 받아안고 소리없이 뜨거운 눈물을 머금었다. 그딴에는 이 누에를 으뜸가는 조선의 누에로 만들어놓을 속셈을 단단히 하고 연구사업에 달라붙었었다.

한데 어찌 그가 수령님의 그 큰뜻을 받드는 일에 발벗고 나서지 않을수가 있단 말인가.

계응상을 지그시 바라보던 신철웅은 말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우리는 어쨌든 금년부터 피마주누에를 대대적으로 치도록 하겠습니다.》

계응상은 도고하게 머리를 들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맵짜게 뇌이였다.

《물론 국장동무나 기사장동무는 나의 승인없이도 피마주누에를 치도록 내려먹일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난 그걸 결정적으로 반대합니다. 자연적인 조건에서 피마주누에의 생활력검증을 충분히 해보고 우리의 누에로 개량하기 전에는 생산에 도입할수 없다고 봅니다.》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귀중한 누에일수록 과학적으로 면밀히 타산하여 한점의 실수도 없게 하는것이야말로 양보할수 없는 자신의 본분이라는듯 계응상은 엄엄한 기색을 짓고있더니 몸을 홱 돌려 호텔안으로 총총히 걸어들어가는것이였다.

신철웅과 기사장은 아연해하면서도 심각한 표정이 엇갈린 얼굴로 호텔 2층의 한 창문을 쳐다보았다.

신철웅은 1946년 여름에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를 받고 38도선 장풍지구에 나가 직접 남반부에서 넘어오는 계응상을 맞아온 사람이다. 그는 우여곡절에 찬 계응상의 지난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정녕 수령님의 빛나는 예지와 자애로운 손길이 아니였더라면 그는 반동학자의 루명을 쓴채 매장된지 오랬을것이며 그이의 세심한 보살피심이 없었더라면 일시적인 후퇴시기에 적들의 마수에서 더는 벗어날수 없었을것이다.

정녕 그가 의리와 도덕을 지닌 참인간이라면 어찌 수령님앞에서 그렇게 행동할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마땅히 수령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가지고는 할수 있느냐 없느냐를 론할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해내겠는가를 론해야 할것이다.

(아니, 그럴수 없다. 현미경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그런 안목으로 모든것을 결단할수는 없다.)

철웅국장은 팔을 홱 내저으며 대동강유보도를 따라 씨엉씨엉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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