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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1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9 장


6


1952년 12월 1일 과학원개원식이 열리게 된 모란봉지하극장은 전국각지에서 모여온 과학자들로 흥성거렸다. 태반이 누비솜덧저고리에 천신을 신거나 허드레양복들을 걸치고있었지만 전등불이 은은한 빛을 뿌리는 긴 통로의 여기저기에 두셋씩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얼굴마다에는 자못 근엄한 빛이 넘쳐흘렀다.

계응상박사는 6년만에 만난 리승기박사와 회의장 한쪽구석에 마주앉아 깊은 감회에 잠겨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리승기박사는 두눈에 정채를 띠우고 말을 꺼냈다.

《나도 계선생과 같이 46년도에 이미 장군님의 품에 안겼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치않은 가정사정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놓치다보니 5년이란 세월을 허무하게 보내다가 이렇게 늦게야 찾아왔습니다.…》

적들이 패주할 때 서울에 남아있던 리승기박사는 어느날 서울시인민위원회에서 사업하는 한 일군이 찾아와 공화국북반부에서 파견되여온 서울주재 산업성대표가 자기를 찾는다는 전달을 받았다.

란리통에 웬걸 자기와 같은 과학자를 찾는 사람이 있으랴. 폭격을 피해 촌으로 피난이나 가있으리라 하고 주섬주섬 짐을 싸고있던 그는 들뛰는 가슴을 부여안고 대표부청사가 자리잡고있다는 경성주식회사 사무실자리로 찾아갔다.

거기에는 위대한 수령님을 몸가까이에 모시고 사업하던 한 일군이 나와있었다. 그는 리승기박사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자 마주 달려나와 반갑게 맞아들였다.

《기다렸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다.》

자리에 앉자 그 일군은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내가 평양을 떠나 이리로 올 때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번엔 리승기박사를 꼭 데려와야 하겠습니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선생을 찾아 안전한 지대에 들여보내여 연구사업을 계속할수 있도록 조건을 보장해주라고 하시였습니다.》

발명한지 10여년이 되도록 빛을 보지 못한 비날론론문을 붙안고 남모르게 모대겨오던 그에게 있어 이보다 더 감격적인 소식이 어디에 있으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장군님의 고마운 은덕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머금었다.

이리하여 그는 온 가족을 이끌고 북반부로 들어오게 되였다.…

그는 수령님께서 꾸려주신 평북도 연구실에서 실험기구들을 차려놓고 비날론을 공업화하기 위한 연구사업을 줄기차게 벌려나가다가 개원식에 참가하게 된것이다.

《나도 수령님의 한없이 넓으신 도량과 은정깊은 사랑이 아니였더라면 벌써 저승의 나락에 묻혀버리고말았을거요.…》

계응상박사도 깊은 감회에 잠겨 이야기를 꺼냈다. 이때 반대쪽 회의장구석에 마주서서 이쪽을 자주 건너다보며 나직나직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사람이 있었다. 그들중 허우대가 크고 머리가 긴 사람은 배부상이였고 마주서서 지어낸 음성으로 말을 건늬는 중년의 남자는 최택민국장이였다.

이들은 이날 모임에 방청으로 참가했다.

《배선생, 찰스 다윈의 자서전을 보았겠지요?》

배운권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거기에는 이러루한 대목이 있지요. 명망있는 과학자가 제때에 죽을수 있다면 그야말로 행복한 일이라고 말이지요. 나는 처음 그 대목을 읽어보고 무슨 역설인가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참 명언이였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로년에 이르면 례외없이 보수적인 인물로 되기때문이겠지요.》

그리고는 두 박사쪽으로 또다시 눈길을 보내며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배운권은 알만 하다는듯 턱을 끄덕이며 뇌까렸다.

《완고하기 그지없는 저 계박사가 채령동에서 자강도 장강군 (당시 원산농대가 소개하여 가있던 곳)까지 찾아와 전선에서 돌아온 7명의 대학생을 앉혀놓고 고전유전학강의를 했다는 말을 듣고는 내 혀를 털었소.》

《그 령감 하늘소 발통같이 완고퉁이라는거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요. 그 소란한 란리통에도 매일같이 현미경앞에 앉아 가둑누에를 들여다보고있었으니까요.》

《우에서는 모르는바 아니요. 개원식뒤끝에 농업과학위원회가 조직되는걸 보면 다 알게 될거란 말이요.》

《글쎄 그럴테지요. 전선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앞에서 반동적 멘델- 모르간학설을 설교한다는거야 언어도단이지요.》

《됐소, 됐소. 좀더 인내성을 시위해봅시다.》

신호종소리가 길게 울리였다. 넓다란 지하극장안에는 력사적인 모임의 주빈격인 과학자들과 그들을 축하하기 위하여 래빈으로 온 교육, 문화, 출판계인사들로 꽉 들어찼다. 장내에서 갑자기 술렁거리는 소음이 일어났다. 주석단에 당과 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이름있는 박사, 교수들이 등단했던것이다. 박수갈채가 일어났다. 참가자들의 대부분을 이루고있는 과학자들속에서 활기있는 속삭임과 흥겨운 박수소리가 일어났다. 그들은 해방후 새 조국의 품속에서 대학을 마친 첫 세대의 과학자들이였다. 몇달전에 잠학과를 졸업한 늘씬한 키의 최필호며 중앙잠업시험장과 그 지장들에서 연구사들로 자라난 젊은이들도 무리를 이루어 뒤줄 한가운데쯤에 주런이 앉아있었다.…

배운권부상은 어느새 경애하는 김일성동지께서 과학원개원식 참가자들에게 보내주신 축하문을 전달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귀결에 김일성동지의 가르치심에 의하여 계응상박사를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조직되는 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한다는 말을 듣고는 흠칠 놀랐다. 큰 나라에서는 더 말할것도 없고 다른 사회주의나라들에서도 농업과학연구기관에서 고전유전학자들 대신에 《신유전학》자들을 책임일군들로 내세우고있는 때에 우리 나라에서만 고전유전학자를 농업과학연구기관의 책임자로 내세우다니?

얼마후 여실히 드러난바와 같이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도 배운권부상이며 최택민국장들은 한사코 계박사의 주장을 경원시하고 중학교와 고등교육기관들에서 《신유전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러면서 자기네만이 가장 혁명적인 과학건설원칙에 충실한것처럼 행동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더는 수수방관할수 없으시여 이들을 단호하게 해당 직책에서 해임시키시였다. 가장 공정하고 엄격한 세월의 흐름만이 그이의 이 조치가 얼마나 정당했는가를 증명할수 있었다.

계응상은 자서전에 조국해방전쟁시기의 생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연구소에서는 단 하루도 시험사업이 중단되여본적이 없었다. 1951년에는 누에고치 장구형계통중에서 몸이 강건한것과 고치의 질이 좋은것을 재료로 하여 봄, 여름, 가을에 걸쳐 세차례나 치면서 생활성이 강한 개체를 골라내여 신115호를 육성했는바 이는 전쟁이 끝난 후 1954년부터 장려품종으로 선정되였으며 1948년 봄사육기부터 1953년까지 단 한번도 번짐이 없이 6년동안 12차례나 계대하면서 도태육종한 가둑누에 54호는 전후 첫해부터 장려품종으로 선택되여 산간지대의 가둑누에림들에서 대대적으로 칠수 있게 되였다. 일시적후퇴의 어려운 시기에 집필을 시작한 〈가둑누에학〉도 전승의 해에 출판에 회부할수 있었다. 당과 정부에서는 맡은 소임을 다했을뿐인 미거한 나의 연구사업을 공훈으로 인정하여 1952년 1월 23일 국기훈장 제3급을, 1953년 8월 21일에는 로력훈장을 수여해주었다. 로력도 공훈으로 빛내여주는 자애로운 손길에서 나는 일생을 송두리채 맡길 둘도 없는 소중한 품을 가슴뜨겁게 느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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