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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62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8 장


3


밤바람이 창문을 흔들며 지나갔다. 정원에서 울리는 나무가지들의 흔들림소리도 은은하였다. 밤도 깊어 연구사들의 하루사업보고를 청취할 시간이 되였지만 누구도 그의 방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응상은 두손으로 턱을 고이고 굳어진듯 움쩍하지 않았다. 그는 무서운 고독의 심연속에서 지나온 일생을 돌이켜보고있었다. 불현듯 그의 갸르스름한 얼굴은 치명상을 받은듯 무섭게 이그러졌다.

응상에게는 과학보다도 더 신성한것이 없었다. 조국과 인민의 복리를 위해 이바지하게 될 과학적성과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달갑게 받아들였고 그것을 오히려 행복으로, 자랑으로, 무상의 영광으로 여겼다. 그 누가 무엇이라 해도 그는 자기의 이 신조를 추호도 굽혀본적이 없다. 한데 이제 그는 무엇에 마음을 의지해야 하는가. 그의 유일한 벗이며 살붙이나 다름없는 과학적결실마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고있지 않는가. 그는 과학이 아니라 자기의 전 존재를 부정당하고있는듯 하였다.

그는 문득 악몽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었다. 갑자기 두눈을 슴벅이며 놀람에 차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어디선가 가장 가까운곳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울려나오고있었다.

《계선생, 무엇을 생각하고계십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헐벗은 인민들에게 옷을 해입히는것이 급합니다.》

응상은 두눈을 번쩍 뜨고 문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무도 없었다. 하나 잊어버린지 오랜 다감한 어머니의 애무의 속삭임인양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 소리에 심신을 고스란히 맡겨보는것이였다.


4


계응상은 며칠동안 눈에 뜨일 지경으로 수척해졌다. 빠름한 턱은 더욱 예리하게 벼려진듯싶었고 가무스레한 눈섭아래 까딱하지 않는 두눈은 류달리 날카롭게 번뜩이였다. 하여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례사롭지 않은 깊은 인이 찍혀진듯 했다. 그는 전보다 더욱 집요하고 완강하게 연구사업에 달라붙었다.

뽕밭우로 떠오른 해가 기웃이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밀고있었다.

창문 맞은켠 벽을 어루만지던 해는 스름스름 책상우로 기여올랐다. 밖에서 웅성웅성하는 말소리와 조심스레 옮겨짚는 무거운 신발소리가 났다. 범상치 않은 소음이였으나 그는 여전히 바닥없는 사색의 나락으로 깊이 잠겨들고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미닫이출입문이 가만히 열리는가싶더니 어느결에 창문이 소리없이 열리였다. 하나 응상은 손바닥으로 한쪽 볼을 고인채 움직이지 않았다.

《여보-》

흐느끼는듯 한 안해의 목소리에 응상은 머리를 들었다. 안해는 입귀를 실룩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장군님께서 시험장에 와계셔요.》

《?!》

《그분께서 방금 당신의 사무실뜨락까지 찾아오셨댔어요. 문밖에서 걸음을 멈추신 장군님께서는 출입문에 새겨놓은 글자를 띄여보시고는 같이 오신분들에게 말씀하셨어요. 〈계선생의 연구사업을 방해하지 말고 우선 시험장구내나 걸어봅시다.〉라구 하시면서 신발소리를 죽이시며 발길을 돌리셨어요.》

《장군님께서?!》

응상은 말끝을 흐리였다.

《그런데 왜 이제야 나한테 찾아와 그 말을 하오?》 그는 안해를 나무리였다. 그리고는 황황히 무명바지저고리에 털등거리를 걸치고 집안에서 일하던 차림새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여보, 그 옷.》

《그렇지.》

응상은 급히 명주바지저고리로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열었다.

《응상선생!》

뜨락에서 서성거리던 중년의 남자가 웅글은 목소리로 부르며 다가왔다. 퇴우에 놓인 흰 고무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서던 응상은 눈가에 가시주름을 지으며 상대를 쏘아보았다. 거기에는 농업대학에서 만났던 배부상과 최택민국장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오?》

응상은 그들의 차디찬 손에서 자기의 손을 거두며 싸늘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무엇때문에 나를 찾아왔소?》

《…》

응상은 두사람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배부상과 최택민은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얼마간씩 사이를 두고 덤덤히 정원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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