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61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8 장


2


날이 어두워 계응상이 집으로 내려오자 사이문을 열어제낀 아래웃방에 한가득 모여서 욱적거리던 아들딸, 며느리며 손자손녀들이 앞을 다투어 일어나 인사들을 하는것이였다.

전날 맏아들이 안해와 자식들을 거느리고 우둑우둑 들어서길래 《너 왔느냐?》하고 심상히 여기며 재령지장에서 하고있는 저잠시험정형만 자세히 묻고말았는데 이제보니 저희들끼리 무슨 내통을 하고 이렇게 모여든 모양이였다.

《웬 일들이냐?》

응상은 깔끔한 눈초리로 방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모두들 우물쭈물하며 맏아들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맏아들이 상반신을 약간 좌우로 흔들며 공손히 대답했다.

《래일이 아버님 생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일?》

계응상은 허거프게 웃었다.

《때아닌 때 무슨 생일놀이란 말이냐. 옛사람들이 태평세월에 출생일을 뜻깊게 기념하려고 모여앉아 희희락락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건국사업을 위해 인민들이 모두 뛰는 때에 무슨 생일놀이냐 말이다.》

계응상은 휭하니 복도로 나가 서재로 올라가려 했다.

《아버님!》

맏아들이 부친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이거 너무 이러지 마십시오. 우리 일가식솔이 언제 한번 한자리에 모여앉아본적이 있습니까.

해방전엔 아버님이 늘 타향살이를 하시느라고 집을 떠나계시다보니 생일놀이는 고사하고 저희들은 아버님의 축복도 없이 성례를 이루고 딸자식을 낳고 살게 되였습니다. 며느리, 사위들은 말할것도 없고 손주손녀들도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삽니다. 이런 사정을 모두들 어려워서 아버님한테는 말 못하고 나한테만 성풀이하듯 얘기합니다.

사람살이가 이래서야 되겠느냐구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는 용단을 내려 모두 아버님집에 모이게 했습니다.》

《그래.》

계응상은 추연한 기색으로 아래웃방들에 가득찬 식솔들을 바라보았다.

《내 집 식솔들이 이렇게 많단 말이냐?》

그는 푸접좋게 옷자락에 매달리는 몇째손자인지 모를 총각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그렇구나. 내가 천길 땅속을 파들어가는 광인처럼 내 일에만 몰두하다보니 사람답게 살지 못했구나. 저 애는 뉘집 애냐?》

응상은 얼굴이 갸름하고 이마가 훤한 네댓살난 총각애를 가리켰다. 그 애는 제 할아버지의 피줄을 받았던지 신통히도 계박사의 모상을 닮았던것이다.

《저의 둘째아들이예요.》

맏며느리가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둘째라…》

계응상의 눈에 물기가 핑 어린듯 하였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듯이 아들딸들이 눈물을 좔좔 흘렸다.

해방되기 네해전에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의학공부를 하던 둘째아들이 방학도 아닌 때에 수원에 있는 집으로 찾아왔었다. 본처의 몸에서 난 세 아들이 다 총명하고 똑똑했지만 둘째는 뛰여난 수재였다. 소학교를 4년에 졸업하고 5년을 다녀야 하는 중학도 3년에 마치고 일본에 건너가 규슈제대 의학부에 1석으로 입학했는데 대학에서도 촉망되는 학생이였다. 그런데 타향의 토질이 몸에 맞지 않았던지 아니면 학비를 푼푼히 주지 못하여 빈약한 식생활을 한탓인지 결핵에 걸려 몸을 추세우려 집에 돌아왔던것이다.

그는 부친의 성미를 아는지라 페염을 앓고나서 안정치료를 하려고 잠시 귀가했노라고 말했다. 응상은 인사를 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며 탓했다.

《거기는 병원이 없다더냐. 따끈한 밥이나 제집 아래목만 찾아가지구서야 무슨 공부를 하겠느냐.

하루밤 자고는 당장 돌아가거라.》

아들은 원망에 차서 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엄한 눈초리앞에 기가 질려 고개를 떨구고말았다. 안해는 울상이 되여 남편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여보, 당신의 눈에는 병색이 도는 애얼굴이 보이지 않아요? 저 몸으루 어떻게 공부를 한다구 그래요?》

《객적은 소리 마오.》

응상은 안해의 손을 떼놓으며 잘라말했다.

《나는 독한 마음을 먹고 학문을 파고드는 사람한테 병마가 달라붙는것을 못 봤소.》

이튿날 응상의 안해는 아들을 바래우며 돈 100원을 내놓았다.

《옛다, 네 아버지가 주더라.》

그런데 그 아들이 석달후에 한줌의 재가 되여 화장함에 담겨 고향으로 돌아와 묻힐줄을 어찌 알았으랴.

누구보다도 큰 과학자가 되리라고 촉망해마지 않던 둘째의 객사는 계응상의 마음속에 영원히 아물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자신의 불찰로 고국의 학계에 혜성처럼 빛날 수재를 죽인것만 같아 둘째란 말만 들어도 눈빛이 흐려지는 계응상이였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둘째라, 둘째란 말이지.》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창문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런즉 셋째를 내놓고는 다 모였단 말이냐?》

남향천에 걸린 재빛구름마저 저 먼 남쪽하늘아래 어디엔가는 미처 련락을 못 띄워 데리고오지 못한 막내아들이 있을것이다. 한데 그 아들은 왜 데려오지 못했던가. 그가 조금만 관심을 돌렸어도 다시는 이 자리에 올수 없는 둘째에 대한 가슴아픈 미련우에 또 하나의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을것이다.

응상은 상을 차려놓은 아래목에 앉아 아들딸, 며느리며 사위들이 정성들여 부어주는 술잔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일일이 술을 한잔씩 부어주며 말했다.

《자, 그럼 앉아서 즐겁게들 놀아라. 나는 시험장에 나가보아야겠다. 꼭 해야 할 일감들이 있어서 그런다. 너희들도 래일은 돌아들가서 제맡은 소임들을 잘 수행하라.》

계응상은 홀연히 일어나 시험장으로 나갔다.

아들딸, 사위들은 아연하여 재령지장을 책임지고 일하는 맏아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부엌에 대고 새 어머니에게 희떱게 웨쳤다.

《자, 이젠 지지고 볶는건 그만하고 내인들두 다 들어들 오라요.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들 앉기가 어디 쉽소. 아버님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즐겁게 놉시다.》

성미가 활달한 맏아들은 부친의 일에 더는 신경을 쓰지 말라는듯 엉너리를 쳤다. 그러나 모처럼 아버님생일상을 차린다고 먼길에 한임씩 이고 와서 돌아치던 며느리며 사위들은 손맥이 풀려 어쩔바를 몰랐다.

응상은 잠실에 나가 누에고치를 교잡할 도롱이들에 번호를 써붙이고있었다. 이 일은 명길동이 해야 할 일이였으나 그가 시험장을 떠났으니 대신할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허나 잠시도 뒤로 미룰수 없는 일이 있어 아들딸네들과 생일날을 즐기지 못하는것만은 아니였다.

새 조선 생물학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것을 생각하니 잠시도 셈평좋게 앉아있을수가 없었던것이다. 게다가 성미가 곧은 그는 이러한 사실이 자식들한테까지 알려져 그들조차 마음고생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해질녘에 얼핏 집에 들어온 계박사는 맏딸이 그냥 집에 있는것을 보고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있느냐?》하고 물었다.

맏며느리며 사위들은 여느때없이 침중한 부친의 기색을 살펴보고는 그의 눈에 띄울가봐 웃방에 박힌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부친의 축복도 없이 성례들을 치르었다가 벼르고 별러서 찾아온 그들은 자기네를 일부러 경원시하는것 같아 못내 서운해하였다.

사무실에 나갔다가 밤늦어 집으로 들어서던 응상은 문밖에 우뚝 멈춰섰다. 반쯤 열린 출입문안에서 울음섞인 맏딸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오빠, 친어머니도 없는 본가집에 찾아왔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랭대를 하니 섭섭해서 견디겠어요. 판판 모르는 남들이 찾아왔어두 이렇게 괄세하지는 않을거예요. 아버지는 우리를 만나는것조차 싫어하는군요.》

맏딸은 문문한 맏오빠한테 지청구를 했다. 그러자 맏아들은 엄한 기색으로 나무랐다.

《쓸데없는 소리들 말아, 너흰 아버지성미가 그런줄을 이제야 알았단 말이냐. 자식들 생각은 끝이 없지만 너희들을 일일이 상대하고 그간 살아온 얘기를 들어주고 손주손녀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면 인자한 가장노릇이나 하기 좋지.

아버지일이 얼마나 중하고 바쁜지 아느냐. 교수에 박사 시험장, 아버지한테 매달린 사람이 수백명이다.》

《알만 해요. 그렇지만 나두 어디선가 들었는데 이름있는 어느 한 박사는 그러지 않구두 큰일을 한대요.》

맏딸의 맺힌 말이다. 응상은 잡았던 문손잡이를 놓고 뒤뜰의 향나무밑 긴의자에 주저앉아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였다.

《너희들의 말이 옳다. 내 언제한번 젖내나는 너희들을 얼싸안고 보듬어준적이 있으며 등에 업어 잠재워주며 자장가를 불러준적이 있었더냐. 그런가하면 술, 담배를 즐겨보길 했나. 눈만 뜨면 그저 과학연구밖에 모르며 미친듯이 살아왔지만 크게 해놓은 일이 없구나, 아.》

머리를 흔들며 긴 한숨을 내쉬던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아버님, 철없는 자식들의 지청구를 나무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고개를 들고 쳐다본 응상은 맏아들과 맏딸이 눈물이 그렁하여 앞에 서있는것을 보았다.

《애들아, 이 애비를 용서해다오.》

젖은 목소리로 뇌이는 응상의 눈에서는 뜨거운것이 번뜩이였다.

《아버지.》 맏딸은 부친의 가슴에 와락 안겨 꺽꺽 흐느끼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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