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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58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7 장


4


계응상이 자기의 사택으로 돌아오자 뜻밖에도 그의 서재에는 한수민교수가 한발 먼저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방안에는 담배연기가 뽀얗게 차있는데 한수민의 손에서는 저절로 타드는 담배가치가 연기를 피우고있었다.

그는 그 무슨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는지 계응상이 방안으로 들어서고있는것도 감감 느끼지 못했다. 털외투에 털모자를 쓴채 방바닥에 주저앉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초점잃은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있던 한수민은 숨을 깊이 들이그었다가 《후우-》하고 내쉬였다.

문가에 서있는 응상을 띠여보고는 알릴듯말듯 머리를 흔들뿐이였다.

수민은 재털이를 앞에 놓고 바닥에 앉아있고 응상은 책상밑에 밀어넣었던 의자를 끄당겨놓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숨막힐듯 한 무거운 침묵이 오래동안 방안에 깃들어있었다.

《이걸 보게.》

한수민은 외투주머니에서 둘둘 만 공책 한권을 내놓았다.

《자네를 위해서 우정 품놓고 도서관에 입수된 외국잡지들에서 뽑아 정리한걸세.》

응상은 한수민이 자기쪽으로 밀어놓은 공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거기 놔두게. 차차 보겠네.》

《친우의 마지막부탁으로 될지도 모르니 이제 보아주게.》

《친우?》

《그렇네,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자네를 도저히 어떻게 할수 없는 옹고집쟁이로 치부하고 돌아서버렸네. 얼마전에두 내가 자네한테 찾아가보겠다고 하니까 어느 한 일군은 뭐라고 말했는지 아나.

〈부질없는짓을 그만두시오. 암만 말해도 소귀에 경 읽기요. 그런 사람은 죽기 전에는 자기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소.〉 이런단 말일세. 하자 그옆에 앉아있던 다른 일군은 〈가시덤불은 잘라도 없어지지 않고 란꽃은 심어도 퍼지지 않네…〉 라는 시구를 읊어주는게 아니겠나.

이제는 자네를 우리와는 다른 길을 걸을 사람이라고 보고있는 사람조차 있네.

그러나 나는 자네를 그렇게만 볼수는 없네. 아니, 유익하고 쓸모있는 일을 얼마든지 할수 있다고 보고있네.》

한수민은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에는 의례히 그러하듯이 눈꼬리를 착 내리깔고 참회승같은 태도로 응상의 대답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공연한 걸음을 했네. 닭알로 바위를 깨겠다는 격이지. 그렇게도 나는 어쩔수 없는 인간이거던.》

계응상은 날카롭게 응대했다.

그는 집에까지 와서 자기를 괴롭히는 이런 일을 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그런줄은 아네, 이러나저러나간에 생물학계에서 20여년을 같이 일해오면서 나도 자네가 어떤 사람이라는걸 알만큼 알고도 남았지. 그러나 나는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간절히 부탁하네. 아니, 내 말대로 할것을 강경히 요구하네. 자네가 계속 이렇게 나오다간 아주 망하고마네. 끝장이란 말일세, 응. 사태가 어망처망하게 벌어지고있다는걸 좀 알란 말일세. …》

한수민은 진정 눈물을 머금고 애타게 호소했다.

《정말 코막구 답답해서 볼수가 없네. 자네는 마른 삭정이같은 인간이야. 발로 밟으면 딱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지. 그러나 버들가지를 보게. …》

《그만두게.》

《아니, 나는 절대로 그만두지 못하겠네. 오늘은 자네한테 항복서를 받아내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네. 이걸 보라구.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응.》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밀어놓았던 공책을 나꾸채듯이 집어들고 벌컥 소리가 나게 겉장을 번지였다.

《지금 세계생물학계는 쏘련사람들이 출판한 〈농업과학원총회회의록〉을 받아들고 귀가 아플지경으로 소란하게 떠들어대고있네. 특히 서방세계에서는 명망있는 과학자들조차 체면을 잃고 반쏘선전에 열을 올리고있단 말이네. 자네도 거기에 한몫 끼일셈인가?!》

한수민은 서방의 생물학자들중에서 계응상이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릐쎈꼬학설을 비난한 내용들만 골라가며 읽어나갔다.

《승벽이라도 다투듯이 벌어지는 이 비난전은 하나의 전쟁을 방불케 하네. 이 지독한 열전의 선코에는 자네가 지상을 통해 잘 알고있는 도브쟌스끼교수, 뮬러교수, 세포학자 쟉스, 집단유전학의 권위자 라이트교수들이 포함되여있네. 이 학자들은 한쪼각의 리해도 표시하지 않고 앞을 다투어 반릐쎈꼬의 기발을 날리고있어. 또한 미국에서 반릐쎈꼬선전이 얼마나 적의에 찬것인가 하는것은 미국유전학회의 기관지 〈유전학잡지〉주필 쿡크의 글을 보면 잘 알수 있을것일세. 괴로운 일이겠지만 사실을 귀중히 여기는 자네에게는 무익한 일이 아니라고 보네.》

한수민은 목소리를 죽이긴 했으나 박력이 있으면서도 침투력이 있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료들을 읽어나갔다.

계응상은 총이 센 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두눈을 감고있었다.

…쿡크는 1948년 여름 쏘련의 농업과학원총회를 《요마의 집회》라고 비난하고나서 이 회합은 릐쎈꼬에게 있어서 영예가 차례진 날이였다, 총회에서 한 그의 연설과 결론은 회의의 전부를 이루고있다고 하였다.

…한수민은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쿡크가 독침이 박힌 적의의 화살을 날린 내용을 끝까지 전하고나서 계속했다.

《다음은 영국에서의 반향을 들어보세. 영국에서 1947년에 출판된 오스트랄리아 야슈비의 쏘련의 과학에 대한 책은 서유럽의 반릐쎈꼬주의자들이 자주 인용하는것만큼 그의 말을 들어보는것도 필요하리라고 보네.》

눈꼬리를 아래로 착 내리깐 한수민은 집요하다할만큼 끈덕지게 서방의 목소리를 읽어내려갔다.

무엇때문에 수민은 서방생물학잡지들에 삽입되여있는 이러한 글들을 깐깐스레 뽑아내여 그의 머리속에 박아넣어주고있는가.

그는 응상의 반릐쎈꼬적립장이 서방의 비평가들의 그것과 같다는것을 이런 방법으로 강조함으로써 더는 무모한 고집을 부리지 말라고 경고하고있는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미묘한 립장을 이런 교묘한 간판뒤에 숨기고 쏘련생물학계에서 벌어지고있는 비정상적인 사태를 이른바 《제3자》의 립장에서 신빙성있게 강조함으로써 다른 측면이긴 하지만 우의 경고와 일맥상통하는 위험을 느끼고 처신을 바로가지도록 일깨워주자는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 나라 학계에서 일어나고있는 이러한 거친 파도 역시 세계생물학계에서 휘몰아치고있는 폭풍우의 여파라는것, 그러고보면 계응상의 문제는 그 거대한 파도에 밀리고있는 모래알과 같이 보잘것 없는것임을 귀띔하는것인지?

어쨌든 계응상의 심리는 아리숭하고 착잡한, 개일줄 모르는 안개속에 잠기고말았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농군출신이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사회주의자들이 로동자, 농민, 지식인들을 위한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피어린 투쟁을 벌리고있는데 대해서는 항상 동정심을 가지고 대해왔다.

그런 연고로 세계의 첫 사회주의국가인 쏘련에 대해서도 언제나 선의를 가지고 대해왔다.

그런데 문제의 그 《회의록》을 보면 확실히 쏘련생물학계에서 일부 과학자들이 과오를 범하고있는것이 틀림없다.

농업생물학을 릐쎈꼬와 같은 광인의 손에 맡겼으니 장차 만회할수 없는 큰 손실을 볼것이 아닌가. 응상은 이 점이 무엇보다먼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신생쏘련에서 전진도상에 하나의 약점을 발로시켰다고 해서 이때라는듯 환성을 올리며 반쏘선전의 열기를 올리는것이야말로 악한들만이 할수 있는 행동이 아닌가.

승승장구하는 새로운 제도의 도도한 기세와 위력에 겁을 먹고 배가 아파하는자들만이 그 하나를 가지고 앞을 다투어가며 《쏘련에서 과학의 죽음》(미국 펜실바니아대학의 자클이 쓴 책), 《모스크바는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영국의 과학기자 데이비스가 쓴 책)고 웨쳐대며 이 기회에 반공선전에 열을 올릴수 있는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그가 혐오를 자아내는 한수민의 끈덕진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은밀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고 뼈속까지 스며드는듯 한 한수민의 말은 끊임없이 계속되였다.

응상이 수민의 끈덕진 말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냥 그에 귀를 기울이는것은 그가 몹시 알고싶어하는 릐쎈꼬에 대한 그럴듯 한 분석이 흘러나오기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그 어떤 리유때문인지 그자신도 리해하기 어려웠다.

응상은 몸서리를 치며 더는 듣기를 그만두었으나 한수민은 BBC방송(영국방송협회)이 신유전학을 평한 자료까지 자상히 전하고나서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 역시 멘델의 법칙을 전적으로 무해한것으로는 보지 않네.

그러나 자네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원쑤의 말도 필요한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품놓고 모아가지고 왔네. 지금 자네의 운명은 경각에 달렸어, 여보게.》

수민은 응상의 팔목을 부여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간청하듯이 속살거렸다.

《부디 내 말을 들어주기 바라네. 난 더는 자네를 방관시할수 없어 이렇게 찾아왔네. 이제라두 굽어드는척 하라구. 살아남은 사람이 이기는자란 말일세.》

응상은 축축한 수민의 손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나 부르짖었다.

《비렬한 사람같으니라구. 썩 물러나게, 물러나.》

수민은 아연하여 두눈을 치떴다.

진정을 기울여 장시간 설복하던끝에 이런 대접을 받게 될줄은 차마 몰랐다는듯이.

그는 부시시 몸을 일으키더니 팔을 내저었다.

《어서 담벽을 문이라고 내밀게. 달리는 기관차앞에 몸을 내던져봐, 아-》

수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신음하듯 뇌이고나서 지척지척 밖으로 나갔다.

문닫기는 소리가 나고 방안에 정적이 깃들어서야 응상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수민은 그의 운명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이 념려한다고 자처해오던 사람이다.

그딴에는 이것이 진정이였다는것도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일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웬일인지 공개적인 적보다도 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며 그를 괴롭히는 결과밖에 가져다준것이 없었다.

수민은 절교를 선포한듯이 하고 그의 곁을 떠났으나 조금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그들은 오래동안 함께 일해왔으나 마음은 벌써전에 갈라져있은것이나 다름없었던것이다. 응상은 안해가 저녁진지를 들라고 몇번씩이나 일렀지만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쥔채 움직일줄 몰랐다.

그의 머리에는 부지불식간에 수원농사시험장의 안상길과 한수민이 번갈아 떠올랐다.

안상길은 내놓고 계응상을 배반한 추악한 인간이였다. 그러나 한수민은 응상의 처지를 깊이 리해하고 동정을 표시하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사심없는 방조도 아끼지 않는 벗이였다.

그러나 그들 두사람의 차이는 그것뿐, 응상으로 하여금 자기의 지조를 집어던지라고 요구한 면에서는 한바리에 실어도 기울지 않는 한짝이 아닌가. 오히려 안상길은 드러내놓고 적의 편에 가담하여 계응상을 공격했기때문에 그렇게 무서운 적이라고는 할수 없었다.

그러나 한수민은 벗으로 자처하면서 내심속으로 파고들어 야금야금 그의 지조를 송두리채 뒤집어엎으려 했다는 점에서 더 《교활하고》 위험한 적이 아니였던가. 파렴치한자와 령리한자는 폭력이라는 검은 배속에서 나온 쌍둥이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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