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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55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7 장


1


실험잠실들에서 가을누에를 올리는 날 어찌된 일인지 해가 퍼지도록 계박사가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웬일인가 하여 그의 집으로 찾아간 명길동은 깜짝 놀랐다.

침상에 누워있는 계박사의 몸에서 열기가 확확 나고있는데 왕진을 나온 의사는 초조한 기색을 짓고 급히 큰 병원으로 후송해야 한다고 엄명했다. 병증세로 보아 전년에 룡골산에서 잘못된 젊은 연구사와 꼭같은 병에 걸렸다는것이였다.

시험장성원들은 황망히 뛰여다니며 계박사를 차에 태워 평양병원으로 후송했다. 잇달아 차체에 적십자표식을 한 차가 들이닥쳐 시험장성원들을 모조리 검사하고 뇌염예방주사를 빠짐없이 놓아주었다. 열에 떠서 구급차에 실려가며 계박사가 남긴 쪽지편지를 들여다본 시험장성원들은 저마다 눈물을 머금었다.

《룡골산 찰진드기는 뇌염의 매개물입니다. 산에 올라가는 성원들에게 시급히 예방주사를 놓으시오.》

반삭이 지나자 병의 차도가 생겼는지 계박사한테서는 편지로 연구사업에 대한 상세한 지시들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시험장사람들은 다소 마음을 놓았다. 사전에 뇌염혈청을 맞은 덕분에 가볍게 병을 치를수 있었다는것이였다.

그런데 이때 병문안을 간다고 평양에 올라갔다가 급히 내려온 리덕겸부장장이 심상치 않은 말을 돌리였다.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시험장에서는 곧 새 조국 농업과학의 순결성을 고수하기 위한 새로운 결정적인 조치들이 있으리란것이였다. 검열그루빠로 왔던 그들은 계박사가 산중에서 희생적으로 연구사업을 하다가 병에 걸렸다는데 대해서는 꼬물도 념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네 손을 대지 않고 계응상을 꺼꾸러뜨린 마땅한 징벌로 여긴듯싶었다.

《이제 두고보오. 결판이 날거요.》

표표한 기상을 하고 시험장을 돌아가는 리덕겸은 계응상의 운명이 끝장이라도 난듯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계응상이 병원에서 퇴원하여 시험장에 나타났다. 피기가 싹 가신 해쓱한 얼굴이며 허청허청하는 걸음새며 가늘게 떨리는 눈섭은 몸이 완쾌되지 못했다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선생님, 안색이 말이 아닙니다. 쉬셔야겠습니다.》

모두들 걱정스러워 이렇게 말하면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응대했다.

《일을 손에 붙이느라면 기운이 솟겠지.》

그는 퇴원한 이튿날로 시험장뜨락에 나섰다.

뜨락에는 선별을 하려고 내다놓은 누에고치들이 하얗게 널려있었다.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잠박앞에 붙어앉아 누에고치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하자 두눈에는 정채가 번뜩이고 깎일대로 깎인 볼편에는 홍조가 확 피여났다.

누에고치들을 척척 골라내여 관리공들이 받쳐든 잠박에 올려놓는 그의 손끝에서는 불이 이는듯 했다. 어찌나도 재치있게 움직이는지 오르내리는 손은 보이지 않고 희끗희끗한 누에고치만이 얼씬얼씬하였다.

그 누가 보든지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누에고치들을 마구 집어서 빈잠박우에 올려놓는것만 같다. 도대체 생김이며 크기들이 어슷비슷한 누에고치에서 무엇을 골라낼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계박사는 시험장을 맡아 관리하기 시작한 첫해부터 시험잠실들에서 고치들을 따내리면 수천개의 잠박들에 놓인 수십만개의 누에고치들을 일일이 골라서는 원종유지실이나 실험용의 가치를 상실하여 수매용으로 넘길 창고로 보내는것이였다.

계박사의 손길이 닿지 않았더라면 한해동안의 연구결과를 종합하는 이 마당에서 그 누가 저렇게 필요한 누에고치만을 골라낼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기에 계응상은 앞질러 병원에서 뛰여나왔던것이다.

시험장구내에는 눈같이 흰 고치들을 담아내놓은 잠박들이 발들여놓을 자리없이 꽉 들어찼다. 참으로 그 광경은 장관이라 아니할수 없었다.

흰 위생복을 입은 관리공처녀들이 잠박을 안고 날렵하게 드다니고 활짝 열어놓은 잠실들에서는 련이틀째 고치를 수북수북 담은 잠박들을 꺼내왔는데 아직도 관리공들은 정갱이에 자개바람이 일도록 잠박들을 꺼내온다.

국립중앙잠업시험장으로 개편된지 이태밖에 안되였지만 그사이 시험장에서는 얼마나 일을 어벙지게 벌려놓았는가. 연구사들은 먹통과 붓을 들고 계응상의 지시에 따라 선별이 끝난 잠박들에 해당한 표식을 써넣기도 하고 눈썰미있는 연구사들은 계박사에게 물어가며 한개한개의 고치를 병아리깨울 닭알 고르듯 정성스레 빈 잠박우에 올려놓군 했다. 계응상은 쉴새없이 고치를 골라놓으면서 연구사들이 고치들을 골라놓은 잠박에 시선을 던졌다.…

그는 얼핏 장고형의 고치를 집어들었다.

《이 교잡에서 우리가 얻자고 한것은 고치의 크기가 아니라 껍데기를 두껍게 하자는것이였네. 그러니까 이런 허부럭고치는 필요없네. 그리고 이 잠박에서는 장구형이 아니라 원추형의 고치를 뽑아내자는것이 아니였나…》

연구사들과 조수들이 골라낸 잠박을 들여다본 계응상은 별로 여겨보지도 않고 누에고치들을 골라내는데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것들은 영낙없이 장장의 말그대로였다.

무게를 높일것을 지향하고 육종해낸 누에고치에서 딴에는 단 한개의 실수도 없이 고치를 골라내느라고 한 비교적 경험이 있는 중년의 연구사는 계박사가 그 어느 잠박에서보다도 더 많은 이상고치를 자기의 잠박에서 골라내는것을 보고 심한 모욕감을 느끼였다. 그는 슬그머니 계박사가 골라놓은 누에고치들을 가지고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천평에 올려놓고 달아보았다. 순간 그는 《아.》 하고 신음소리를 내였다. 신통히도 그것들은 0.01그람정도의 무게가 모자라거나 그이하의것들이였다.

이런 일들이 있은 다음부터 시험장사람들은 현장에서 고치의 무게를 판정하거나 껍데기비률 혹은 암수컷을 판별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계량실로 가져다보이는것보다 계박사한테 가져다보이는것을 낫게 여기였다. 확실히 그에게는 고치를 구별하는 특별한 신경이 발달되여있었으며 보는 눈과 함께 손끝에도 특수한 눈이 있는듯싶었다.

이해에는 여느때보다도 더 품을 들여 깐깐스레 고치선별을 하고 새해에 리용할 고치며 빙고에 보관할 고치도 간 해의 몇배나 되게 선출해놓았다.

따라서 연구적가치를 상실하여 수매용으로 넘긴 누에고치도 창고천정에 닿을 정도로 쌓여 서무과사람들도 몽땅 동원되여 고치들을 등급별로 골라놓는 일에 달라붙다보니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잠시도 입을 놀릴새없는 최병달이도 언제 한가스레 퍼더버리고앉아 말장단을 칠새가 없었다.

시험장사람들은 밀원의 만개계절을 맞이한 꿀벌들처럼 분주히 뛰여다녔다.…

계박사가 어찌나도 극성스레 일을 벌려나가는지 시험장내에 쉬쉬하게 떠돌던 말들도 한동안 잠짓해진듯싶었다.

우수수…

한줄기의 쌀랑한 강쇠바람이 지나가자 불그죽죽한 락엽이 어수선하게 내려앉았다. 응상은 오수유나무곁에 놓인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 발밑의 어느 한 점을 골똘히 내려다보고있었다. 사무실 둥근창가에 뒤짐을 지고서서 계응상장장을 측은하게 내려다보던 리덕겸부장장은 홱 몸을 돌렸다. 단호한 표정을 짓고 방문을 힘있게 열며 복도로 나선 그는 곧장 계응상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간밤에 장장의 방에 들어갔다가 그의 사무상우에 대학에 가서 강의할 강의안이 무둑히 쌓여있는것을 보았던것이다. 그것을 보니 계박사가 금년에도 시험장사업을 일단락짓고 원산농업대학에 나가 잠학부사업을 지도하며 강의를 할 때가 되였다는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 이즈막에 와서는 고전유전학이 반동학설로 확정되다싶이한 형편에서 어떻게 대학에 나가 유전학강의를 할수 있단 말인가. 계박사는 리덕겸이 자기앞에 다가선것도 감촉하지 못하고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다.

《장장선생!》 덕겸은 갈린 소리로 불렀다. 응상은 조용히 눈을 떴다.

《금년에도 나가시겠습니까?》

《떠나야지.》 응상은 부장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가시지 않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왜?》

장장의 부드러운 눈에 돌연 노한 빛이 살아올랐다.

《제가 농업성에 올라갔을 때 들은 말이 있어서 그럽니다.》

《무슨 말을 말인가?》

응상은 이런 질문을 입에 올리기도 지겨운듯 치뜨는 눈언저리에 가시주름이 잡혔다.

《아마 교육성에서 선생이 강의하는 일부 과목을 과정안에서 빼낸것 같습니다.》

덕겸은 랭정하게 뇌이였다.

계응상은 품속에 손을 넣어 피봉을 뜯은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여 덕겸에게 내밀었다. 부장장은 얼떠름하여 그것을 받아쥐고 속지를 뽑아보았다.

《계응상선생, 사정에 의하여 금년겨울에는 선생의 강의를 받을수 없게 되였으니 그리 아시고 조처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원산농업대학 학장 xxx》

편지지에서 시선을 뗀 부장장은 두눈을 잽뜬채 계응상의 벗어진 이마아래에서 조용히 빛나고있는 눈매를 바라보았다.

(이쯤되면 사태는 너무도 명백하다. 한데도 굳이 대학으로 나가겠다는건 섶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는것과 같은 경거망동이 아닌가.)

흰서리가 섞이기 시작한 턱수염을 소리없이 쓸어내리는 계응상의 가늘고 긴 손이 바르르 떨리였다.

하나 그는 턱을 약간 쳐들고 도고한 태도로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대학에 나가서 강의를 하는것은 내가 더없는 만족으로 여기는 사업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먼저 김일성장군님께서 본인에게 직접 맡겨주신 사업이요. 그러니 감히 그 누가 내가 하고저 하는 그 일을 막을수 있단 말이요!》

계응상은 맵짜게 쏘아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총총히 걸어갔다. 그는 원래 시험장이나 집안에서 자신의 생활과 감정에 대하여 말해본적이 없었지만 더우기나 어떻게 되여 이런 위치에서 사업하게 되였는가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말해본적이 없다. 방금전에도 그는 격한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가슴속깊이 간직했던 한마디를 불쑥 터놓았지만 더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존귀하신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은덕에 만인이 공인하는 귀중한 공적으로 보답하기도 전에 그처럼 소중한 말을 소홀히 말하고싶지 않기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자기가 직접 장군님을 만나뵈옵고 그분의 은총을 받아안은 사람이라는것을 오직 그이께서 바라시고 기뻐하실 특출한 과학적성과로써만 이야기하고싶은때문이였는지…

응상은 사무실로 들어와 책상앞에 마주앉은 다음에도 한동안 까닥하지 않고 무둑히 쌓아놓은 강의안만을 내려다보았다. 깍지낀 두손을 책상우에 얹고 창문너머 퍼렇게 틔여있는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훤한 이마에 갑자기 잔주름이 잡혔다.

밤새 지동치듯 불어대던 북풍은 새날이 밝아온 다음에도 숙어들줄을 몰랐다. 계응상은 안해와 함께 여느때없이 일찍 집을 나섰다. 그의 한쪽손에는 낡은 가죽가방이 들려있었다. 아침출근을 하던 시험장 사람들은 장장에게 급급히 인사를 했다.

가벼운 걸음으로 사뿐사뿐 걸어오던 류지성로인은 뒤따라오는 최병달이 보란듯이 머리를 깊숙이 숙여 《박사선생님, 밤새 편안하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했다. 응상은 정중히 고개숙여 인사를 받았다.

계응상은 명주바지저고리우에 회색두루마기를 걸치고 재색버선에 흰 고무신을 받쳐신었다. 그가 이 근년에는 설날에 세배를 받을 때에만 집안에서 입고있던것이였다.

그의 류다른 차림새며 표표한 기상에는 그 어떤 운명적인 결전에로 나아가는 사람에게서만 찾아볼수 있는 비장한것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의 뒤에는 머리우에 커다란 무명보퉁이를 이고 한손에 버들구럭을 든 그의 안해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듯 고개를 다소곳한채 잰걸음을 옮겨놓고있었다.

시험장현관앞에서 응상의 뒤모습을 시푸념스레 바라보던 리덕겸은 곁에 사무원들 몇이 서있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참 슬픈 일이로군. 대학에서는 계장장을 학부장직책에서 해임시킨것두 모르고 무럭무럭 떠나가니…》

부장장을 힐끔 쳐다본 명길동은 몸서리를 쳤다. 그는 저쪽 집모퉁이로 급급히 사라지는 계박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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