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53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6 장


5


어둠이 나래를 편 연후였으나 시험장구내에서는 어수선한 바람소리만 일었다. 새파랗게 개인 밤하늘에는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다. 사위는 괴괴했다.

그러나 룡골산에서 내려온 계응상박사는 이전과 다름없이 밤이 깊어 누에해부생리실로부터 시작해서 원종부시험부의 연구사들을 한사람씩 불러들여 실험보고를 깐깐스레 듣고있었다.

맨나중에 계박사의 방에 들어온 명길동의 안색은 웬일인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입술이 부르트고 눈에 띄게 우멍해진 눈확에는 짙은 그늘이 고여있었다.

《자네 어디 아픈가?》 계박사는 명길동의 둥글납작한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아, 아닙니다. 고뿔이 와서 좀.》 길동은 군기침을 하였다.

《그래 제사실사람들이 산누에에서 뽑은 실로 짠 천은 받았나?》

《예, 이게 바로 그 청주입니다.》

명길동은 손에 들고온 종이에 싼것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어떤가?》

계응상은 하르르하고 부드러운 청주를 눈길로 어루만질뿐 집어들지는 않고 말했다.

《가져다가 시험부사람들한테 손수건감으로 나누어주게. 어서 가보게.》

명길동은 어안이 벙벙하여 계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꺼내놓았던 청주 두자를 조심스레 싸들었다. 옛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먼길을 가는 사람에게 비단으로 짠 손수건을 선물로 주군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생물체들에서 나타나는 강세현상은 혈연관계가 멀면 멀수록, 생활조건이 다르면 다를수록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계박사는 서로 종이 다른 산누에와 퉁경수라는 가둑누에를 교잡하여 산누에가 가지고있는 희귀한 성질은 살리면서도 가둑누에와 같이 대대적으로 사육할수 있는 성질을 가지도록 만들려고 착상한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간교잡은 노새와 버새를 교잡하거나 야생물오리와 집오리를 교잡하여 그 후대를 얻자고 하는것과 같이 어려운 일인것이다. 언젠가 계박사는 세계적으로 연구업적을 찾아보아도 아직까지 미지의 문제로 되고있는것을 우리가 해결하려고 하는 조건에서 잡도리를 단단히 하여야 한다고 몇번이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착상이 자기의 그릇된 반동리론을 정당화해보려는 부질없는 일이라고 비난한다는것을 알고나 있는지. 명길동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창문은 먹지를 붙여놓은듯이 까매졌다. 시험장은 무거운 어둠속에 깊이 묻혀버렸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지도 오랬다. 계응상은 까딱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계박사가 세전토끼처럼 정해진 산보길과 잠실로 가는 길외는 다니는 법이 없으며 자기의 방에 곰처럼 들어박혀 연구사업을 하는것밖에는 시험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있다고 생각하고있다. 그러나 이것은 계박사에 대하여 너무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그는 우연히 시험장구내에서 마주치는 장원들의 멋적어하는 눈길에서, 시험보고를 하러 들어와서 전에없이 공손한 태도를 짓는 연구사들의 깍듯한 공식적태도에서 그리고 실험잠실사료조리실에서 활기있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실험공들이 그가 들어서자 말을 뚝 끊고 죄를 지은듯 고개를 숙이는 태도에서 리해하기도 어렵고 미심쩍기도 한 그 어떤 착잡한 심리들을 나타내고있다는것을 포착하고있었던것이다.

계응상은 그것이 정서기가 말하던 그 《특집호》가 시험장에 날아든 때부터 생긴것이라는것을 짐작키 어렵지 않았다. 그는 꼼꼼한 정서기가 두툼한 학습장에 써놓은 번역자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눈코뜰새없이 바쁘기도 했지만 보겠다는 마음만 먹었다면 이 번역자료를 얼마든지 보고도 남았을것이다. 그는 그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지간에 그것을 하나의 참고자료로밖에 보지 않으려는 립장을 지니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쨌든 그 《특집호》를 당장 보아야겠다는, 보아도 신중하게 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에 익은 발자욱소리가 점점 더 가까와오더니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피곤하시겠어요.》

젊은 안해가 책상가까이 다가와 고뿌를 내놓고 주전자에 끓여온 우유 한고뿌를 찰찰 넘치게 담아놓았다.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그는 두달전에 새 안해를 맞아들이였다. 각박한 살림살이에 쪼들리며 홀몸으로 지내느라 남모르는 속도 어지간히 써온 교양있는 녀자였다.

그 역시 남편의 생활을 정성다해 받들어주고있었다.

그는 계응상이 우유를 좋아한다는것을 알고 이틀에 한번씩 읍에서 시오리나 떨어진 삼봉리 젖소목장에 찾아가 소젖을 받아다 하루 3번씩 식간에 꿀 한숟갈을 두고 따끈히 끓여다주고있다.

《고맙소.》

그는 안해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자료두루마리를 펼쳐들었다. 그런데 안해는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다.

《12시가 넘었어요.》

응상은 회중시계를 꺼내여 들여다보았다. 12시 10분이였다.

《알겠소, 먼저 들어가 쉬오. 난 하던 일을 마저 하고 들어가겠소.》

안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눈물이 그렁하여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자취를 크게 내지 않고 밖으로 나가 살림집인 아래채로 내려가는것이였다.

그의 뒤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계응상의 얼굴에 한줄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언듯 비꼈다가 사라졌다.

그는 사무상에서 물러나 흰천을 씌운 안락의자에 옮겨앉았다. 시력이 좋은 그는 전등불이 엇비슴히 비쳐오는 안락의자에 앉아서도 보기 좋게 쓴 정서기의 글씨는 더 말할것 없고 깨알같은 활자의 외국어사전을 들여다보는데도 별로 지장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지친 몸을 안락의자에 무겁게 싣고 번역자료를 읽어나갔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