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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2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3 장


3


계응상은 자정이 가까와올무렵에야 승용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무릎을 치마폭으로 감싸안은채 깜빡 풋잠이 들었던 덕녀는 문득 방안으로 들어서는 남편을 띠여보자 황급히 일어나 부엌으로 내려갔다. 남편이 새문을 열고 말했다.

《상을 챙기지 마오. 저녁은 친구네 집에서 먹었소.》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웃방에 올라가 있던 맏아들이 내려와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잘있었느냐. 너희 지장에서는 사람들이 안착돼서 일을 하느냐?》

응상은 맏아들이 지장책임자로 일하는 잠업시험장 재령지장의 일부터 물었다.

《일을 하잖구요. 재령지장책임자노릇을 하던 기시하라는 보따리를 꿍져가지고 달아나면서 이젠 북조선의 잠업두 끝장이라구 했지만 우리는 별일없이 일을 해나가지요. 처음엔 일본사람이 다 달아났으니 로임은 누가 주는가구 난색을 짓는 사람조차 있었답니다.》

맏아들은 지장얘기가 나오자 활기를 띠고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이구나. 남조선은 지금 말이 아니다. 일본놈들대신 미국놈들이 새 주인이 됐다. 굽신거리면 살구 제 주장을 내세우면 불순분자로 치부된다. 충주지장에 나가있던 네 동생도 어찌됐는지 모르겠구나. 그 애두 성미가 만만치 않은 아이라 그놈들한테 고분고분 굴지 않는 모양이더구나!… 떠나기 전에 그 애한테 뒤따라오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어찌됐는지 통 소식이 없구나!》

셋째가 말밥에 오르자 덕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하니 어리였다. 그는 슬며시 돌아앉아 옷고름으로 눈굽을 훔치였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응상은 움쭉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로 쓰는 맞은켠 방으로 건너가려는것이였다. 윤덕녀는 물론 맏아들이며 막내딸도 야속한 눈길로 계응상을 쳐다보았다. 응상의 갸르스름한 얼굴에는 전에 볼수 없던 흥분이 어려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는 그것을 허술히 터놓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맏아들이 부친에게 물었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였습니까? 농림국에 들리니까 아버님이 북조선공산당중앙조직위원회에 가셨다고 하더군요.》

《갔댔다. 내 방으로 좀 가자. 너한테 들려줄 말이 있다.》

응상은 맏아들만을 데리고 서재로 건너갔다.

그는 이때뿐만아니라 이후에도 자주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왔지만 특별한 기회를 내놓고는 그에 대해서 집에 들어와 말하는 법이 없었다.

수령님앞에서 중대한 국사를 론한 일을 가지고 집에 들어와 아녀자들에게 이야기하는것처럼 무엄하고 허술한 태도는 없다고 생각했던듯 싶었다.

맏아들이 누비돗자리우에 무릎을 꿇고앉자 계응상은 책을 보거나 연구자료들을 들여다볼 때에 늘 그렇게 하듯이 꿇어앉아 정색하고 말했다.

《내 오늘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웠다.》


…계응상은 나무계단을 조심스레 밟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대기실에 나와 기다리고계시였다.

《계응상선생님이십니까? 바쁘실텐데 먼길에 오시라고 해서 안됐습니다.》

활달한 몸가짐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신 장군님께서는 계응상의 손을 두손으로 감싸쥐시고 힘있게 잡아주시였다.

응상은 한동안 자기 눈을 의심했다. 름름하신 체구에 후리후리한 키며 시원한 이마아래 번쩍이는 눈매, 그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렇게도 젊은분이신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당황한 그는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하였다. 집무실에 들어서신 장군님께서는 계응상을 응접탁앞에 안내하여 의자를 들어 놓아주시면서 친절하게 말씀하시였다.

《어서 앉으십시오.》

《고맙습니다.》

계응상은 민망하여 어쩔바를 모르며 뒤늦게나마 깊숙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였다.

응상은 묵직한 밤색응접탁을 사이에 두고 장군님과 마주앉았다.

《북반부에 들어오시기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들어오실 때 해외에서 소중하게 모아들이였던 150여종의 희귀한 누에종자까지 가지고 오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큰일을 하셨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시였다. 티없이 결백하시고 선량한 품성을 아낌없이 드러내시는 한없이 매혹적인 그런 웃음이였다. 특히 시원하신 눈매가 인상적이였다.

걷잡을수없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이의 명쾌한 인상에 매혹된 응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색하고 말씀드리였다.

《저는 일생 누에를 다루어온 학자입니다. 누에종자를 떼여놓고 저의 과학사업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몸에 지니고왔을뿐입니다.》

《겸손한 말씀이십니다. 그전날 우리 조상들은 문익점이가 외국에 사신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대속에 목화씨 몇알을 감추어가지고 와서 퍼뜨린 일도 큰 애국적소행으로 여기고 두고두고 칭송했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무려 150여종에 달하는 비단실누에종자를 갈대속에 넣어가지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숨김없이 말해서 응상은 누에알을 자기의 운명처럼 귀애하고 애틋이 여기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고국으로 가져온 일을 미거라고 생각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한데 장군님께서는 한 과학자가 자기의 본분을 다했을뿐인 자그마한 일을 후세에 길이 전할 애국적소행으로 높이 평가해주시는것이 아닌가. 응상의 가슴은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래 이제는 생활이 안정되였습니까?》

장군님께서는 자애로운 눈길을 보내시며 물으시였다.

《예. 과분할 정도입니다. …》

응상은 사실대로 말씀드리였다. 장군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주의깊으면서도 신중한 눈길을 드시였다.

《매우 바쁘시겠지만 나라의 잠업발전문제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저 이렇게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의 잠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수 있겠습니까?》

장군님을 처음 대할 때는 보잘것없는 학자를 지나치게 정중히 대해주는것 같아 몸둘바를 몰랐으나 집무실에 들어서시여 손수 의자까지 권해주시고 스스럼없이 이렇게 중대한 국사문제에 대한 고견을 듣자고하시는 그이의 말씀까지 받아안고보니 생각이 깊어졌다. 이분은 높은 지성과 깊은 리해심을 지니신분이라는 느낌이 든 동시에 이런분과는 그 무엇이든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응상은 저도 모르게 그이의 숭엄한 세계에 깊이 끌려들고 다감한 감정에 젖어드는것을 어쩌지 못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글쎄요.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으면 좋겠는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일제통치 40여년동안에 조선고유의 잠업은 자취를 감추고 온통 일본것으로 되고말았습니다. 원래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쳐오던 누에들은 계절에 관계없이 잘 자라는 생활력이 강한 품종들이였습니다. 그런데 놈들이 수익성을 높인다고 하면서 조선의 기후풍토에 적응되지도 않은 제 나라 누에들만을 내려먹이다보니 조상전래로 내려오던 우리 나라 누에품종들은 멸종하고말았습니다. 수천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는 조선의 누에가 그렇게 망해버릴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제라도 남북사처에 흘어져있는 토종누에들을 모조리 찾아내여 거기에 숨어있는 좋은 성질들을 한데 모으고 현대적인 누에품종들과 결합시킨다면 선진국가들의 누에품종들보다 결코 짝지지 않는 우리의 누에품종들을 가질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계응상의 목소리는 점점 더 열기를 띠였다.

《일본놈들은 잠업기관을 총독부 직속기관으로 두고 시험장 장장으로부터 고원에 이르기까지 몽땅 일본사람들만을 배치하고 운영해왔습니다. 그때문에 우리가 이 잠업기관들을 관리하고 운영하자면 당장 급한것이 기술일군들을 길러내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손을 깍지껴쥐시고 계응상의 말을 신중하게 새겨들으시는 장군님의 안광에 밝은 빛이 확 피여났다.

《옳습니다.》

그이께서는 두눈을 번쩍이며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잠업부문이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이 되였기때문에 다른 나라의 힘을 빌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럴수 없다고 봅니다. 나는 잠업부문도 나라의 주인이 된 우리 인민자체의 힘으로 얼마든지 운영해나갈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자면 우선 인재들을 빨리 키워내야 하겠습니다. 새 조선을 건설하는데서 선생님이 많은 수고를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계응상은 뜨거워오는 눈길로 장군님을 우러렀다.

나라의 잠업을 우리 인민자체의 힘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시는 그이의 말씀이 응상의 가슴을 사정없이 뒤흔들어놓았다.

응상은 사뭇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장군님께서 나라의 주인이 된 우리 인민자체의 힘으로란 몇마디로 표시하신 그 말씀속에 그의 필생의 소원이 담겨져있는것이 아닌가. 그가 무엇때문에 맨주먹을 쥐고 집을 뛰쳐나가 서울로 달려올라갔던가. 무엇때문에 피골이 상접해가지고도 두눈에 쌍불을 켜고 공부를 하여 남들을 따라앞서고야말았던가. 아, 불우한 식민지의 인테리여! 그대는 무엇때문에 제 나라를 지척에 두고도 바다건너 머나먼 이국땅에까지 찾아가서 교편을 잡고 과학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더냐. 말해보라, 일신의 부귀영화를 바라서였더냐. 아니면 남한테 짓밟히고는 참지 못하는 억제할수 없는 인간고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더냐. 응상은 불현듯 번뇌와 고민에 찬 몸서리치는 나날들을 돌이켜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을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신 장군님께서는 천천히 방안을 거니시였다.

《계응상선생! 우린 백두산에서 일본놈들과 싸울 때 이런 생각을 하군 했습니다.

〈나라를 광복하고 조국에 개선하면 삼천리금수강산에 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리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리라.〉

그런데 마침내 우리가 피흘려 싸운 보람이 있어 조국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우리의 조상들이 바라마지 않던대로 이 땅우에 기와집을 쓰고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사는 그런 인민의 나라를 꼭 건설하려고 합니다. 나는 선생님이 이런 성스러운 사업에서 우리와 손잡고 나가리라는것을 굳게 믿습니다.》

장군님의 안광에 숙연한 빛이 번뜩이였다. 응상은 가슴이 확 달아올랐다. 그이의 안광은 웃으실 때에만 류다른 광채를 내뿜는것이 아니라 이렇게 신중한 기색을 띠우실 때에도 그 깊이를 헤아릴수 없는 심원한 세계가 찬연히 깃드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정문밖에까지 따라나오시여 계응상을 바래주시면서 당부하시였다.

《앞으로 애로되는것이 있으면 아무때고 서슴지 마시고 저한테 찾아와주십시오.》

그는 대학으로 돌아가는 승용차에 깊숙이 몸을 잠그고 부드러운 눈길로 석양볕이 엇비슴히 비쳐드는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불현듯 머리가 거뿐해지고 심신이 날듯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평양에 도착하자바람으로 교수직에 임명되고 북조선중앙잠업시험장 장장의 책임까지 겸임하게 되고 고관들이나 쓰고살수 있는 들썩한 집을 배정받았을 때에도 이름할수 없는 불안과 위구가 그의 머리에서 떠날줄을 몰랐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그의 모든 속박감이 한꺼풀, 두꺼풀 벗겨져나가는것을 명확히 깨달았다. 서방세계에서 사회주의에 대하여 갖은 험담을 다 퍼부은것들은 얼마나 졸렬한것들이였던가.

그는 두눈을 감고 턱수염을 내리쓸며 맏아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고나서 조용히 덧붙였다.

《젊고 겸손하고 로숙한 위인을 만나기는 어려운 법이니라. 왜냐하면 겸손이란 파란많은 세월만이 가져다주는것이고 원숙한 태도란 머리우에 흰서리가 내린 사람에게서만 기대할수 있는 값비싼것이기때문이다. 그런데 그처럼 젊으신 김일성장군님에게서 천성을 타고난 사람한테서만 찾아볼수 있는 현명하신 안목과 천근의 무게를 지니신 철석같은 결심을 보았을 때 나의 심정이 어떠했겠니. 내가 해외에서 다년간의 연구사업끝에 누에에서 새로운 유전인자들을 찾아낸 감격이 아무리 컸다 해도 새 조선의 국사를 조선사람자신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고 단호하게 언명하신 김장군님의 말씀을 접했을 때의 격동된 심정에는 결코 비기지 못할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보잘것없는 한 과학자에게 이 나라 잠업의 장래를 맡긴다고 하시면서 손잡고 같이 일하자고 격려해주실 때 나는 일생동안 애타게 찾아헤매던 귀인을 만난 심정이였다. …》

맏아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는 아버지의 숙연한 모습에서 더는 그 무엇으로도 흔들어놓을수 없는 비장한 결심과 새로운 신념을 엿보았다.

이날은 계박사의 인생행로에서 잊지 못할 가장 뜻깊은 날이였으며 마음속으로 이 제도와 더불어 영원히 운명을 같이하기로 굳게 속다짐한 새 출발의 첫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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