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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39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2 장


5



계박사는 정거장을 멀리 에돌아 조용한 오솔길을 밟으며 수원산성에 올랐다. 종일 산성을 돌아보고 숲속에서 메누에들까지 수십여마리를 수집한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지름길을 타고 역으로 내려가 준비해놓았던 차표를 보이고 나들문을 빠져나왔다. 이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 곁에 사람들의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계박사는 전등불을 켜지 않은 통근차에 올라 구석진 의자에 앉았다.

약속된대로 서울역홈의 2번선 맨끝 전주밑에서는 그 중년의 남자가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은 잠시 홈에서 서성거리다가 그 자리에서 개성쪽으로 가는 막차에 올랐다.

이튿날 오전 해가 퍼질무렵 한가한 관광객차림의 두사람이 개성시가의 선죽교우에 서서 다리에 배여있다는 피자욱을 굽어보며 옛시를 읊조려보더니 스적스적 고려왕실터자리로 걸어갔다.

밤새 폭우가 내린 뒤라 잔모래가 깔린 행길은 씻은듯이 정갈했다. 구름짬으로 쏟아지는 한줄기의 해발을 사선으로 받으며 삼공륙례가 자리잡고있었다는 옛성터를 한유스레 돌아보고나서 옛궁실 계단이였던 화강석바닥에 나란히 앉아 다리쉼을 하였다.

얼마후 그들은 손에 든 부들부채를 슬슬 저으며 산마루에 올라 들린 추녀의 한쪽 끄트머리가 바라보이는 저쪽 로송사이의 안화사를 바라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였다. 그들은 안내자를 기다리며 휴식의 한때를 보내고있는 계응상일행이였다.


계응상박사가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는 졸개들의 보고를 받은 제임스는 청청하늘에서 떨어지는 날벼락을 맞은듯 상이 하얗게 질리다못해 새까맣게 죽어갔다. 제정신을 차린 그는 두눈에 독기가 서려올라 울부짖었다.

《아니, 절대로 그럴수 없다. 어리석게도 그가 내 손에서 빠져나갈수 있다는것을 증명할 생각은 그만두라.》

그는 안상길을 호출하여 계응상이 가있을만 한 곳을 샅샅이 뒤져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계응상과 같은 인테리가 공산주의편으로 넘어갈수 있다는것을 믿지 않았던것이다.

제임스는 속심을 깊숙이 감추고 능구렝이처럼 실무처리를 할줄 아는 《미국신사》류가 아니였다.

그의 나이는 28살, 빈약한 지성의 소유자로서 일찌기 출세한 사람들이 대개 다 그러하듯이 늘 꿋꿋한 자세에 상반신을 뒤로 거만하게 제끼고 수하의 인간들을 고압적으로 대하고있었다.

제임스는 애당초 조선사람들을 미개한 족속으로 내려다보고 위압적으로 대함으로써 그들이 설설 기게 만들려고 하였다. 그는 신사냄새를 피우면서 조선사람들을 정중하게 대하며 그들을 휘여잡으려고 하는 동료들을 비웃었다.

《그따위 연극은 유럽에나 건너가서 연출하시오. 아시아인들을 다루는데는 인디안들을 휘여잡는 수법이외에 다른것이 요구되지 않소. 총과 칼! 이것이면 다요. 그들은 우리보다 수법이 졸렬하고 무지막지한 일본인들에게 40년동안이나 머리를 수그리고 사는데 관습된 족속들이란 말이요.》

그는 자기의 수법의 정당성을 안상길이와 같은 인간들의 행동을 보고 깊이 확신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계응상이 그의 수법에 정면으로 도전해나섰다. 두눈에 불이 일었다. 길길이 솟구치는 정복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계응상의 《팔다리》들을 무자비하게 잘라던졌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은 반작용을 일으켜 계응상이 사직을 선포하고 물러앉는 결과를 빚어내고야말았다.

흥미있는 실험과정을 지켜보듯이 제임스의 수법을 주의깊게 눈여겨보고있던 그의 상관은 로골적으로 제임스를 비난하였다.

《일본사람들이 조선인을 졸렬하게 다스렸다고 생각하는 군의 견해는 심히 잘못된것이요. 일본인들이 입버릇처럼 지껄인 〈내선일체〉라는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그들의 수법을 배울 필요가 있단 말이요.》

젊고 자존심이 강한 제임스는 자기 상급의 훈시가 진부하고 고리타분한것이라고 단정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속으로는 조선사람을 너무 속단하고 소홀히 취급했다는것을 인정하고 좀 더 정교한 《무기》를 써보기로 했다. 이렇게 되여 계응상의 사무상우에 가져다놓게 한 책은 그가 견주어 던진 두번째 《칼》이였다. 그는 안상길에게 이번에야말로 계박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휘여잡고야말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또다시 그의 기대와는 달리 어망처망한 결과를 빚어내고야말았다. 그러나 거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그는 이번에도 그 어떤 운명의 희롱으로 화살이 빗나갔다고 여기고 더욱 서슬이 등등해서 계응상을 붙잡아오라고 안상길을 다몰아댔다.

하지만 안상길은 상길이대로 만족되지 않은 야욕이 가슴에 맺혀 몸부림치고싶은 심정이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불안해한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어지러운 속내를 속속들이 꿰뚫고있는자가 어딘가에 살아있으면서 어느땐가는 징벌의 칼을 들수 있다는 우려가 들었던것이다. 그는 시험장 《대한청년단》원들중에서 돈만 쥐여뿌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나가는 우둔하지만 힘 깨나 쓰는 졸개들 네댓명을 선발하여 선금을 몇만원씩 쥐여주고 어떤 일이 있어도 계응상을 잡아오라고 38연선인 개성, 춘천 등지로 파했다. 그자들은 당시 경찰들의 방조를 받으며 월북하는 길목을 막아나섰지만 일주일만에 헛물을 켜고 후줄근하여 돌아오고말았다.

안상길은 다 잡아놓은줄 알았던 새를 놓쳐버린듯 너무도 분통하여 사흘동안 집안에 들어박혀 몸살을 했다.

상관한테 호된 추궁까지 받고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제임스는 앙앙불락하면서도 속이 뿌죽하여 상길을 달래였다.

《그 박사령감을 가르칠 기회는 조만간에 오고야말것이다. 실패를 자인하기는 아직 이르다.》

상전의 의미심장한 말을 음미해본 안상길은 정신을 가다듬고 기어이 오고야말 그 기회에 이 땅 한끝까지라도 찾아가 계응상과의 마지막결산을 치르리라 속다짐했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자기가 맘편히 살수 없다는것을 느끼고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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