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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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8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2 장


4


뒤산에는 밤꽃이 보얗게 피여나고 공기를 호흡할 때마다 씁쓸하면서도 상크무레한 밤꽃향기가 코를 쿡 찔렀다. 세상만사를 오불관언하고 서재에 들어박혀 《조선의 잠업》을 집필해나가던 응상은 무거운 머리를 쉬이려고 뒤산으로 올라갔다.

간밤에 내린 비를 흠뻑 머금은 새풀과 나무들은 싱싱한 잎새를 흔들며 바람결에 설레이고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부르고 화답하며 하염없이 쑹얼거리는 숲의 속삭임이 달콤한 추억인양 올려왔다.

새풀무더기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구수한 취잎을 씹으며 흰구름 몇송이가 한가롭게 떠도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는 응상의 눈에는 물기가 핑하니 어리였다.

며칠전 시험장 소사아이가 제임스고문관이 보내는것이라고 하면서 묵직한 지함 두개를 그의 집에 들여다놓고 사라졌다. 칠선녀어머니가 웬 희귀한 물건인가 하여 뜯어보더니 한 지함에는 가지각색의 미국제통졸임들이며 우유가루가 들어있고 다른 지함에는 흑사탕가루며 고급빠다가 들어있다는것이였다. 응상에게 대접할 찬거리가 없어서 속타하던 칠선녀어머니는 희색이 만면했으나 응상은 정색하고 그 지함들을 다치지 말고 그대로 놔두라고 엄하게 눌러놓았다.

그런데 전날 안상길이 그의 집에 나타났다. 여느때없이 공손한 태도를 지으며 그의 방으로 들어온 안상길은 지난날에 자기가 무례하게 행동한 일이 있으면 너그럽게 량해해달라고 하면서 아직까지 잠사부장자리를 비워놓고있으니 나와서 혼란에 빠져있는 잠업시험사업을 수습해달라고 간청하는것이였다.

《물론 우리들의 사업에서 선생님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들이 적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나라의 과학발전과 잠업이 손해를 입어서야 되겠습니까?》

단정하게 올방자를 틀고앉아 천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곡진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안상길의 태도는 얼마나 진지해보이는가. 그러나 승냥이가 둔갑을 하여 천하일색의 미인으로 되여 눈앞에 나타나서 얼른거린다 해도 응상은 더는 홀림을 당하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자네가 나를 그렇게도 극진히 위해주겠다는것이 진실인가?》

응상은 예리한 눈초리로 안상길을 쏘아보며 또박또박 힘주어 물었다.

《원참 선생님두,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무러면 제가 두번다시 선생님을 기만하겠습니까. 제가 한 말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서 문건이라도 남기라면 남기겠습니다.》

상길은 실눈을 재게 깜빡이며 엉너리를 쳤다.

《문건은 필요없네. 그대신 정태연을 석방시켜 원래의 직무에서 일하도록 한다면 자네의 말들을 믿겠네.》

《허허, 그건 곤난한데요. 그런 문제야 어디 제 권한에 속한 일입니까?》

《그런 말로는 나를 더는 납득시키지 못해. 아무러면 나를 잠사부장으로 임명하겠다는건 잠사부계원으로 해임시킨 제임스의 허락이 없이는 못하는 일이겠지?》

《…》

《왜 대답을 못하나. 그렇다면 자네하고 더 할말이 없네. 난 자네같은 친미분자두 아니구 공산주의자도 아니네. 그렇지만 일제때 민족적량심을 지키다가 그놈들의 감방에 잡혀들어가 옥밥을 먹고 나온 사람을 그것도 새 나라에서 제 바라던 과학연구사업을 해보겠다구 애쓰던 사람을 감방에 처넣은 사람들과는 자리를 같이할수 없네. 알겠나, 제임스한테 가서 그렇게 말하게.》

안상길은 입가에 살기띤 미소를 띠우고 응상을 표독스레 쳐다보더니 맵짜게 뇌까렸다.

《선생이 공산주의자건 아니건 어쨌든 선생은 악질적인 공산주의자와 같이 행동하고있습니다. 우린 선생의 일거일동을 예리하게 지켜보겠습니다.》

《어서 그렇게 하게, 얼마든지…》

이렇게 제임스의 마지막권고를 물리침으로써 그는 나라가 없던 지난날처럼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완전히 고독하게 과학연구사업을 진행해야 할 막부득한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지고말았다.

그 언제는 내가 남의 도움을 받으며 과학연구사업을 해왔더냐. 아직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리상적인 세계가 없는이상 과학자들에게도 가장 리상적인 연구조건이 마련된 그러한 땅은 영영 존재하지 않는다. 더는 남의 힘을 빌 생각을 말자. 한발자국을 내디더도 내 힘으로 길을 축내자. 그러자니 걸음은 더딜것이다.

하지만 어이하랴, 이것이 나에게 차례진 운명인것을… 어떤 날 저녁에는 마음의 태엽이 깨깨 풀리여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싶지 않을 때도 있다. 분과 초를 쪼개여가며 피나게 걸어온 지난 나날들이 허무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이러한 허탈상태에 빠져 종일 두세페지의 글도 쓰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때까지나 이렇게 맥을 놓고 주저앉아있을수는 없었다.

반생을 바쳐 쌓아올린 지식이 너무도 아까왔다.

그가 나선 이 길은 그 누가 불러서 들어선 길이 아니요, 스스로 자청하여 발을 들여놓은 운명의 길이였다.

물곬촌바우가 탈가하여 조끼입고 대님매고 기약없는 서울길을 떠날 때에는 굶기를 밥먹듯 하였다.

그러나 그때에도 락심하기는커녕 두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앞으로만 내처 달렸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현해탄을 건느다가 졸도하여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에도 쓰라린 후회로 가슴을 치기 전에 살아서 기어이 성공하고야말리라는 반발심이 노도쳤었다. 비록 일본땅에 건너가 일본천황에게 충성다할것을 강요하는 제국대학에서 공부를 하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티없이 맑은 고국의 하늘만이 비껴있었다. 화형의 장작더미도, 차디찬 감방도 그의 걸음을 멈춰세우지는 못하였다. 52살, 8. 15해방을 맞은 이날이때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진실하고 정당하다고 확신한 그대로만 살았지 다르게 사는 법을 몰랐다. 그 어떤 제왕도 감히 그에게 자기의 의사를 강요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이 마당에 와서 마음이 뒤흔들려 자신을 도무지 걷잡지 못할 지경에 이르다니 될법이나 할 일인가.

《쩝쩝…》 국수나무 덤불우에서 콩새 한마리가 가볍게 날아다니고 밤나무꽃속에서 꾀꼬리의 간드러진 노래소리가 울려왔다. 깊은 명상에 잠겨 버섯냄새 풍기는 으늑한 나무그늘밑을 걸어가던 계응상은 흠칠 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저쪽에 름름하게 늘어서있는 오리나무밑에서 아마직양복바지에 연록색줄이 간 와이샤쯔바람의 사나이가 한손에 작은 들가방을 들고 서둘지 않고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얼핏 보매 무더위를 피해 서울에서 피서를 온 사람의 차림새이다. 록음이 철철 흐르는 주위의 정경을 여유있게 둘러보는 그 중년사나이의 눈길은 침착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주의깊은데가 있었다. 유유히 옆으로 지나칠줄 알았던 그 사나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며 정중히 목례를 했다.

《농학박사 계응상선생님이 아니신지요?》

《그렇소이다, 한데 당신은 뉘신지요?》

응상은 의아하여 고개를 쳐들었다. 중년의 사나이는 두손으로 응상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놓으며 나직이 말했다.

《저는 북에서 온 사람입니다.》

《북에서?》

응상은 긴장한 눈빛으로 상대를 건너다보았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어제 와서 얘기 다 들었습니다.》

《?!》

응상은 잠자코 낯선 사람을 보기만 했다. 그 사람은 작은 들가방을 열고 흰 모조지로 만든 길쭉한 편지봉투를 꺼내여 두손으로 정중히 내밀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선생님에게 직접 보내시는 서신입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요?》

응상의 두눈은 한자리에서 까딱하지 않았다.

《백두산의 호랑이라 불리우는 김장군이 나한테?!》 응상의 목소리는 말끝을 여물구지 못하고말았다.

《그렇습니다.》

응상은 나직하면서도 위엄이 풍기는 목소리를 들었다기보다 심장으로 감득하며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는 자못 미심쩍기도 하고 산란하기도 한 번거로운 심정을 가라앉히지 못한채 편지의 봉투를 조심스레 뜯고 속지를 꺼내들었다. 하얀 종이우에 붓글로 쓴 위촉장이란 글발이 확 안겨왔다.


계응상선생 귀하

존경하는 박사선생을 평양에 새로 창립되는 본대학교수로 초청하오니 이를 수락하여주실것을 심심히 부탁하여 마지않습니다.

종합대학창립준비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싸늘하게 얼어들었던 가슴이 걷잡을수없이 설레이고 심장이 후두두 뛰였다. 계응상은 두눈을 지그시 감고 긴 턱수염을 조용히 쓸어내리였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중년의 손에게 물었다.

김일성장군은 지금 이북에서 무슨 직분을 맡아보고계신지요?》

《북조선에는 인민들의 창의에 의하여 도처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였는데 그분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거되시여 인민을 위한 정사를 맡아보고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응상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있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혹시 선생은 리승기라는 화학박사를 찾아볼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선생의 고향인 담양에까지 찾아갔다가 곧장 이리로 오는 길입니다.》

《그래요, 리선생은 요새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있던가요?》

응상은 궁금한 생각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중년의 련락원은 얼굴에 침통한 빛을 띠우고 대답했다.

《난 그가 대학에서 쫓겨나 고향에 내려가있다 해도 어디까지나 과학자인만큼 혼자서라도 연구사업을 계속하고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리승기선생은 사랑방에서 시골로인처럼 수수이삭을 털어 비자루를 매고있었습니다. 너무도 억이 막혀 저는 자신의 신분을 밝힐 생각도 못하고 그 선생의 두손을 덥석 부여잡았습니다.

〈그토록 고명하신 선생님이 이게 웬일입니까?〉하자 리승기선생은 서글픈 기색으로 말하는것이였습니다.

〈과학연구사업을 자유롭게 할수 없는 이 땅에서 나같은 사람이 무얼 하겠소.〉

나는 격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리선생을 모시고 오라고 하여 이렇게 찾아왔다고 말했지요. 하자 리선생께서는 목이 메여 말하는것이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떻게 이남땅 외진 촌구석에 박혀있는 이녁의 심정을 헤아려보시고 친히 사람까지 보내주셨습니까. 나는 이미 이북땅으로 찾아가기루 결심했습니다.〉》

《그럼 리승기선생은 벌써 떠났단 말인가요?》

계응상은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련락원은 저으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딱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80고령에 이른 리선생의 부친이 로환끝에 림종을 눈앞에 두고 자리에 누워계셨습니다. 그래서 리선생은 부친이 눈감는걸 보고야 곧 뒤따르겠다고 하는것이였습니다.》

《허어, 그렇게 됐군요.》

계응상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뜻있는 학자들은 앞을 다투어 북으로 찾아가고있었다. 그러나 그의 처지는 다른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르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서글픈 기색을 지었다.

《이렇게 이름없는 학자를 멀리 사람을 파하여 불러주시니 무엇이라고 감사의 뜻을 표했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습니다. 허지만 제가 전공하는 유전학이란 말썽많은 학문이지요. 할진대 인생말년을 눈앞에 둔 제가 거기에 가서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말썽많은 학문이란 또 무엇을 념두에 두시고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얼굴이 넙신하고 눈매가 부드러운 손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계응상을 쳐다보았다. 응상은 랭정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반문했다.

《선생은 본래 직업이 무엇인지요?》

《저는 평양농업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화학을 가르치던 사람입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려서 저는 유전학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수 있지요. 그러나 새로 창립되는 종합대학 농학부에 잠학강좌를 내오게 되는데 그 강좌를 맡길 적임자로 선생님을 내정하고있는것만은 확실합니다.》

응상은 묵은 밤나무에 등을 기대인채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중년의 손님은 나무그루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 역시 계박사에게서 즉석에 대답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모양인지 여유있는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응상의 심정은 착잡했다. 그가 남쪽땅에 눌러있는다면 너절한 인간쓰레기인 안상길이 밑에서 잠사부를 책임지고 연구사업을 하는것이 고작일것이다. 그러자면 일생동안 간직하고 살아온 제정신, 량심이며 지조따위는 제 갈대로 가라고 내동댕이치고 그저 그자들한테 굽신거리며 사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매일 매 시각 수치와 모욕을 꿀꺽꿀꺽 삼키며 눈멀고 귀먹은 사람처럼 행동해야만 숨쉬는 존재로 남을수 있을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있기때문에 인간이 아닐것인가. 그러기에 남의 나라 령토를 점령한 침략자들은 그 땅의 완전한 통치자가 되기 위하여 그 나라 민족의 넋을 지배하려고 악랄한 책동을 서슴지 않고 감행하는것이다.

일제놈들이 우리 나라 땅덩어리를 40년동안이나 병탐하고있었지만 끝내 조선민족의 뿌리깊은 넋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인간의 세계, 그것은 우주보다도 광대하고 무한대하다. 하거늘 어찌 저런 무뢰한들에게 한없이 고귀한 그 세계를 내여맡길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제는 낯선 이 중년의 사나이를 따라 사회주의정권이 서고있는 북으로 가는 길만이 남아있는것이 아닌가. 도대체 그것은 어떤 제도인가?

반세기를 자본주의제도하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반공선전에 의하여 사회주의제도란 타도와 청산, 무시무시한 독재와 인간의 개성을 짓밟는 통졸임같은 공동생활 등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외곡된 막연한 표상밖에 떠오르는것이 없었다.

북으로 가는것이 이리를 피하려다가 범을 만난 격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이 사람, 저 사람이 종잡을수 없이 떠드는 풍문에 불과한것이고 확실한것은 그의 손에 쥐여져있는 왜놈들이 말만 들어도 공포에 질려 치를 떨던 전설적명장 김일성장군이 직접 그에게 보내온 위촉장이였다.

그는 두눈을 쪼프리고 빨가닥거리는 종이장을 펼쳐들어 한자한자를 뚫어질듯이 들여다보았다.

정중하면서도 무게있는 글발이 새로운 의미를 띠고 확 안겨왔다. 깍듯이 거니는 인사치레도 없고 번들한 미사려구도 없이 간단명료하게 용건을 툭 터놓은것이 류달리 강한 인상을 주기도 했거니와 팔도강산 도처에서 손꼽히는 인재들을 찾아다가 인재육성부터 착실히 해나가려는 진지한 태도에 걷잡을수 없이 끌려드는것을 어찌할 길이 없었다. 어쨌든 그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을 때 이끌어주겠다고 멀리에서 찾아와 손을 내미는것은 이뿐이 아닌가.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그 어떤 신성한 교리보다도 더 귀중히 여기는 유물변증법을 통독해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물질을 관념보다 중시한다는것만은 틀림없다고 보았다. 하다면 그들도 먹고 입고 쓰고 사는 문제를 중시할것이며 그럴진대는 비단천을 뽑는 일에 종사하는 과학자를 천시할 까닭이 무엇인가.

아무러면 백두밀림에서 왜놈들과 피흘리며 싸운 김일성장군이 정사를 펴며 로동자, 농민이 주인된 제도라고 하는데 거기에서야 제집안에 왜놈대신 양놈들을 들여앉히고 그자들의 곤대짓대로 굽신거려야만 하는 그런 눈꼴사나운 꼴이야 더는 보지 않게 될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라의 재부가 국가의 소유인 그 땅에서야 과학자가 고립무원하게 혼자서 연구사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페단도 더는 없을것이 아닌가.

하나 정작 용단을 내리자고 해보니 그것이 너무도 큰 모험이라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것은 누에교잡실험과 같이 실패하면 다시 반복해도 무방한 그런것이 아니였다.

떼. 데. 릐쎈꼬의 학설이 북반부에서 채용되는 경우에는 예상할수 없는 일이 벌어질것만 같았던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유전학》이 북에 들어온다 해도 고전유전학을 도무지 쓸모없는 학설로 밀어던진다는것은 상상할수 없었으며 항차 그가 하는 학문은 조선의 잠업을 위한것이라고 생각하자 자기가 부질없는 로파심에 사로잡힌듯이 여겨졌다. 게다가 이제는 다른 출로가 없지 않는가. 조용히 눈을 뜬 계응상은 나직하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장군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적들은 은밀하게 선생님을 밤낮으로 감시하고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선생님의 신변안전을 위해 이렇게 하는것이 좋겠습니다. …》

중년의 손님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긴장하여 그의 속삭임을 새겨들은 계응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였다.


며칠째 세차게 내리던 줄기비도 멎고 하늘은 파랗게 개여왔다. 팔달산골짜기들에서는 흰 갈기를 날리는 탕수가 소란하게 울부짖으며 쏟아져내리였다.

계응상박사는 멜띠를 멘 누르끼레한 아마직바지를 입고 소풍이라도 하려는듯이 와이샤쯔바람에 집을 나섰다. 모처럼 바깥출입을 하는 그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인사를 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바람쐬러 나가십니까?》

《답답해서 수원성이나 한바퀴 돌아보자구 이렇게 나섰네.》

손에는 부들부채를 들고 머리우에는 탐탁하게 엮은 밀양밀짚모자를 쓰고 느럭느럭 비탈길을 내리는 그를 보고 고욤나무집 새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던 형사놈도 헤식적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것이 좋든 그르든 계응상박사가 다난한 몇해동안 정들이고 지내던 고장과 마지막 작별을 나누는 시각이라는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시험장에서 자퇴한 후에도 예나 변함없이 드나들던 제자들은 전날 밤에도 계박사의 집에 찾아와 연구사업에서 걸리고있는 문제를 물어보며 어지러운 시국형편을 론했지만 그 저녁이 잊지 못할 스승과의 마지막저녁이라는것을 아는 사람도 더는 없었다.

뽕나무밭에 몸을 숨기고 밤마다 계응상박사의 집을 감시하던 형사놈도 어뜩새벽에 소리없는 그림자와도 같이 산중턱집으로 들어가 큼직한 가죽트렁크를 메고 사라지는 형체를 보지도 감촉하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그 트렁크에는 계박사의 유일무이한 보물이라고 할수 있는 백수십종의 누에알이며 과학론문들, 미완성원고들이 빼곡이 들어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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