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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7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2 장


3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온밤 헤여날길 없는 악몽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눈을 떴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그는 답답한 심신을 쾌락한 기분으로 전환시켜보려는듯 전정가위를 들고 뽕나무가 늘어서있는 집뒤로 천천히 올라갔다.

6년전 중국에서 돌아와 산중턱에 걸린 이 집을 살 때 응상은 집보다도 집주변에 빙 둘러 심어놓은 뽕나무들에 욕심이 났었다. 과학연구사업에서 더는 그 누구의 방조도 받을수 없다는것이 확실해졌을 때 그는 조선봉건왕조 말기의 불우한 선비들처럼 《안빈락도》를 표방하며 이 나무를 가꾸면서 마음 내키는 연구사업으로 여생을 보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버림받은 인간이 자기를 위안하기 위한 서푼짜리 허세에 불과한것이였다. 나무를 가꾸는 일도 무위도식하는 선비의 소일거리로나 맞춤한것이다. 참말로 이 나라를 일으켜세우는데 이바지할 연구사업을 이룩하자면 큰 재력의 뒤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뒤떨어진 나라의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두눈에 쌍심지를 켜고 무서운 기세로 내달아도 발전된 나라들을 따라가기 바쁠것이다.

마침내 때가 와서 잃어버린 모든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불사신처럼 내달아야 할 시각에 보이지 않는 철쇄에 묶인 몸이 된 응상의 가슴에는 불이 일었다. 계박사가 전정가위를 든 손을 놀릴 때마다 《딱 딱 딱…》하는 소리가 쉴새없이 울리였다. 지난 가을에는 시험장사업을 맡아보느라고 덧거름도 주지 못했으니 햇순들을 놔두었다가 헛가지나 잔뜩 만들어놓을 필요가 무엇인가.

계박사는 손잡이에 힘을 주어 전정을 해댔다.

《수고합네다.》

억양이 뚜렷한 은근한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울렸다. 고개를 돌린 응상은 《아, 자넨가.》하고 반색하며 말을 건넸다.

한수민이 모처럼 찾아온것이다.

8. 15해방이 되자 수민은 한동안 집안에 들어박혀 움쩍하지 않았다. 일제 말기에 왜놈들의 한다하는 기관에서 우대를 받으며 살아가던 몸이고보니 얼굴을 내들고 다닐 체면이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에게 별반 해를 끼친 일이 없어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인생전환을 한듯 신문, 잡지들에 그의 이름으로 된 좌익적인 경향이 농후한 생물철학론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마후 서울대학에 입직하여 유전학강의를 하게 되고 최근 세계생물학의 성과들을 소개하는 그의 글들이 자주 출판물에 발표되였다. 특히 그가 쏘련의 신유전학을 《동아일보》에 소개하자 일정한 계층들속에서 그에 대한 인기가 커갔다.

계응상은 전정을 그만두고 스적스적 길로 나섰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세.》

연갈색봄가을외투를 걸치고 중절모를 쓴 그는 천천히 응상을 따라섰다.

식모가 들여다주는 조반을 먹은 그들은 서재로 쓰는 웃방으로 올라갔다. 애연가답게 담배를 붙여물고 훌훌 내뿜은 연기를 실눈지어 바라보던 한수민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자네 리승만박사를 보기 좋게 한대 먹였다면서?》

《누가 그러던가?》

《허허, 어떤 사람은 자네가 수원성에 내려온 리승만을 만나서 그의 귀쌈을 후려친것처럼 얘기하는 사람이 다 있다네. 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응?》

《어떻게 되긴, 고인물도 밟으면 용솟는다지 않나. …》

계박사는 흥심없이 그간에 있은 일을 뜨적뜨적 얘기하고는 덧붙였다.

《그러니 세상이 어떻게 돼가는 모양인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네그려.》

두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계응상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한수민은 입맛을 쩝쩝 다시였다.

《자네의 그 고지식하고 대바른 성미가 또 일을 저질렀네그려. 형편을 보면 리승만이가 그런 사람이란걸 모르겠나. 제임스고문관은 더 말할것 없구 안상길이 같은 협잡군을 상대하는것두 그렇지, 그따위 하나 얼려넘기지 못한단 말인가. … 겉으루 예, 예 하고 수긍하는체 하면서 제 할일을 하면 될게 아닌가 말일세.》

한수민은 진정으로 안타까와했다.

《그럼 나보고 그자들을 어떻게 대하라는건가?》

《허허허…》

수민은 계응상의 어린애같은 질문이 어이없는듯 허거프게 웃었다.

《그자들이 노는 꼴을 보기만 하란 말일세. 지켜보구는 생각두 하구 궁리두 하란 말일세. 왜 그자들한테 딱딱 맞서가지구 복잡한 회오리바람에 말려드나. 그게 과학자가 할 일인가? 난 자네가 하는 일이 한심해서 못 보겠네. 공연한 일루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지 않았나 말일세.》

응상은 한수민의 뾰족한 눈꼬리를 바라보며 그가 진심을 기울여 건네는 말의 요점을 잡아쥐려고 해보았지만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말았다. 보고 궁리만 하고 끼여들지는 말라, 그런데 어떻게 끼여들지 않을수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제자 태연을 잡아가둬두 가만있고 학천을 내쫓아도 모른체 한다는건 결국 안상길이처럼 남이 내 집에 침입하여 무엇이라고 호령질을 해도 웃으면서 예, 예 하고 살라는거나 같은 말인데 로보트가 아닌 이상에야 사람이 어찌 그렇게 살수 있단 말인가. 두눈을 지그시 감고 턱수염을 쓸어만지고있던 계응상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그렇게는 할수 없네. 차라리 이보다 더 가혹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렇게는 못하겠어. 자네는 마치나두 보구 판단만 정확히 하면 지조를 지킬수 있는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럴수 없다고 보네. 한가지를 양보하면 열가지, 백가지를 양보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네. 속으루 생각하는것하구 그것을 표현하는것이 얼핏 보면 큰 차이가 없는것처럼 생각되지만 그건 질적으로 달라.》

한수민의 눈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 어떤 말로써도 계응상을 설득시키지 못하게 된 수민은 안타까와 어쩔바를 몰랐다.

《여보게, 누군 자네만 못해서 그자들한테 예, 예 하는줄 아나. 자네만 정의감이 있구 지조가 있는 사람처럼 행세하지 말란 말일세. 그래 자네가 그렇게 행동한 덕분에 어떻게 됐나. 조선의 자랑이라구두 할수 있는 유전학자가 무장해제당한 군인처럼 한심하게 되지 않았냐 말일세.》

응상은 한수민이 자기의 재능을 귀중히 여기고 진심으로 과학연구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서울서 예까지 찾아와 이런 절절한 충고의 말을 해주고있다는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계응상이 과학연구기관에서 쫓겨난것을 안타깝게 여기고있었다. 그러나 한수민이 긴 한숨을 내쉬며 《여보게, 이제라두 제임스고문관을 찾아가 사죄하는척 하구 시험장을 다시 인계받도록 하게.》라고 권고하자 자못 놀라운 눈초리를 들었다.

수민은 응상에게 있어 가장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사람이였다.

가깝다는것은 그가 함께 유전학을 연구하는 많지 않은 동업자이며 생활에서도 남달리 교제가 많기때문이라고 할수 있으며 멀다는것은 그들이 인생에 대한 견해에서 큰 차이를 가지고있기때문일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 비렬한들이 지껄이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는 충고의 말이 나오자 안색을 흐리우고말았다. 그러나 한수민은 응상의 착잡한 생각을 자기나름으로 해석하고 한수 더 뜨는것이였다.

《자네가 그렇게 타산없이 행동하다나니 스스로 자기가 물러설 자리에 함정을 파놓은셈이 되고말았네. 솔직히 말해보게. 아마 자네는 이남에서 과학연구를 할수 없으면 이북으루라도 갈 생각을 하고있겠지, 그렇지 않은가?》

《자네한테야 무얼 숨기겠나. 북에서는 토지개혁이 실시되여 처가 가지고있던 땅을 몽땅 몰수해버린것 같네. 그렇지만 난 과학연구만 할수 있다면 그리루 가는것두 마다하지 않겠네.》

《그것두 자네가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수나롭게 될 일이 아닌것 같네. 자네가 자신의 래일의 모습처럼 생각한 쏘련의 저명한 유전학자 바빌로브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는가 하는건 자네도 알고있겠지?》

《그 비슷한 말을 듣긴 했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정확치 않다고 보네.》

응상은 상대방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허허, 천진한 사람 같으니라구.》

한수민은 또다시 입가에 쓴 웃음을 머금으며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자네도 자기의 눈으로 릐쎈꼬의 〈유전과 그의 변이성〉을 보았겠지?》

《보았네.》

《세계생물학자들속에서 그처럼 큰 론의를 불러일으킨 책이 자네한테는 어떤 감상을 느끼게 했나?》

한수민은 실눈을 짓고 응상을 건너다보았다. 계응상은 뜨직뜨직 말했다.

《뭐라고 하겠는지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 설은 후천성유전론이라고 보아졌네. 생물체는 직접 환경의 영향에 의하여 받은 획득형질을 유전시킨다는것이더군. 그러한 설대로 한다면 농군들이 흔히 말하듯이 집짐승기르기에서는 전적으로 최선의 관리가 중요하다는것이 아니겠나. 이야말로 〈농군의 과학〉이며 어느 정도의 실천적효과가 있는 사고방식이라고 할수 있겠지. 때문에 현재의 농업을 지도하는데는 그러한 주장이 리해받기도 쉽고 접수되기도 헐하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을 과학적인것이라고 할수는 없다고 보네.》

턱을 쳐들고 솔잎무늬가 돋힌 천정을 이윽토록 올려다보며 응상의 말을 듣고있던 한수민은 돌연 긴장한 표정을 짓고 응수했다.

《신통히도 자네는 릐쎈꼬설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서방의 유전학자들과 꼭같은 소리를 하는구만.》

《나는 내 견해를 터놓았을뿐이네.》

응상은 정색하고 힘주어 말했다. 방안에는 침울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한수민은 저으기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자네의 일을 우려한게 부질없는짓이 아니였구만. 그러니 자네의 학문은 사회주의정권이 수립되고있는 북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그러한것이 명백하단 말일세. 장담건대 북에서는 자네같은 유전학자를 절대로 환영하지 않을걸세. 그러니 자네일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응?》

계응상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러나 한수민은 단념하지 않고 나직나직 곡진한 어조로 재빨리 많은 애기를 했다. 응상은 그 말을 어느 하나도 똑똑히 리해할수 없었다. 그러나 놀라운것은 한때 고전유전학을 선전하고 보급하는데서 그렇게도 열을 올리던 그가 어느새 신유전학의 옹호자로 나서고있는가 하는 점이였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릐쎈꼬의 주장이 전통유전학의 불비한 점을 찌르고있다고 한것이라든가 종래의 유전학은 유전성이 뚜렷한것 즉 특수한 유전현상을 해명한데 불과하고 신유전학은 그렇지 않은 일련의 생물체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유전현상이 분명하다고 한것으로 보아 두개의 유전학에 대해 자기나름의 론거를 세우고 이런다는것을 짐작키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문제로 되고있는 《두개의 유전학》은 불행하게도 정치적으로 둘로 갈라진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있으므로 문제가 왕왕 정치적측면에서만 론의되는 점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종래의 유전학이나 신유전학이나 할것없이 그것들이 정치적인것이기 전에 생물학적인 문제라는 견지에서 론쟁을 해야 옳을것이 아닌가.

응상은 가슴속에 솜뭉치가 꽉 들어차기라도 한듯 숨쉬기조차 가빠났다. 숨김없이 말해서 그는 이날이때까지 오직 과학연구에만 골똘하면서 꾸밈없이 진실하게 살기 위해 모지름을 써왔을뿐이였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살던 나머지 그에게 차례진것이란 헤여날길 없는 미궁에 빠진것뿐이 아닌가.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나온 나날을 더듬어보면 그의 생활에는 어느 한때도 안정과 평온이 깃들어본적이 없다. 평온이란 벌써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될만큼 그는 수난을 치르는데 습관되였다.

하나 자기 한몸이 곤경을 겪는것은 아무래도 참을수 있었지만 이제라도 두눈에 쌍심지를 켜고 재촉하여 가지 않으면 어녕 일어서지 못할것만 같은 내 조국 과학의 장래를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듯 괴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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