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35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2 장


1


밤사이에 오래뜰에는 이슬이 비내리듯 내리였다. 계응상은 잡초만 무성한 집뒤 뽕밭을 시적시적 거닐다 동녘에 노을이 물들기 시작해서야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때 마당에서는 낯선 손님이 우뚝 서서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고향 정주에서 내려온 창술이였다.

방안으로 들어선 창술은 눈섭우까지 푹 내려썼던 캡을 벗어서 상우에 던지며 수선을 떨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를 찾아오면 계장자리라도 하나 얻어 할가 했더니 뭐 오는 복두 차던지고 집안에 들어앉았다면서?》

창술이는 예나 다름없이 시뻘건 상판에 능글능글한 빛을 띠우고 떠들어댔다.

《자네가 여기를 어떻게 나왔나?》

계응상은 앉은뱅이책상에 펴놓은 원고를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하, 말두 말게.》

창술은 팔을 휘저었다.

《북은 온통 수라장이야. 마른 하늘에 생벼락 내리듯이 토지개혁령이요, 산업국유화령이요 하구 법석 떠들어대면서 조상대대로 물려오던 땅들을 주인들한테 피전 한푼 주지 않구 강탈해서 알거지들한테 나눠주구 과거의 채무란건 모조리 무효루 선포했네. 그바람에 난 쫄딱 망했어.

자네네 집두 말이 아닐세. 그게 어떻게 마련한 땅인가. 타향만리에 건너가서 피나게 번 돈으루 자네 처가 한두락두두락 사놓은 땅이지. 그런데 그 땅을 한평두 남기지 않구 몽땅 몰수해버렸다네. 자네 처는 집까지 뺏기구 투출돼서 누이동생네 집에 얹혀지내는데 이제나저제나 남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있단 말일세.》

《그게 정말인가?》

《원참 사람두, 내가 늘 허풍을 떨구 다니니까 헌놈인줄 아는 모양이구만. 옛네, 내가 월남하기 전에 자네 누이동생네 집에 들렸더니 막내딸이 이 편지를 줍데.》

양창술이는 안주머니에서 편지 한장을 꺼내놓는것이였다. 응상은 후두두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황급히 편지를 받아쥐고 속지를 꺼내 펼치였다. 옥필로 또박또박 박아쓴것이 막내딸이 쓴 편지가 분명했다.

《존경하는 아버님!

이 편지가 아버님한테로 제대로 가닿겠는지 의문스럽지만 이렇게 쓰지 않을수 없군요. 신문을 보시고 짐작하셨겠지만 우리 마을에서도 3월 초순에 토지개혁이 있었습니다. 제 손으로 부치지 않는 땅은 모두 몰수되였습니다. 우리도 어머니가 사서 남에게 주었던 3정보의 땅을 모두 몰수당했습니다. 뭣하러 푼수에도 없는 땅을 사가지고 이런 봉변을 당하는지요.

동리에서는 아버님이 이남에서 한자리 한다구 쉬쉬하면서 큰 반동네 집이나 되는것처럼 생각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버지 얘기를 합니다. 숯 구어 내다팔면서 고생스레 공부를 하여 성공한 사람인데 어떻게 미국놈들한테 붙어서 일을 하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구요. 그럴 때면 저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면 급히 소식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수 없는 몸들이니 아버지의 분부대로만 할 작정입니다.》

응상은 딸애의 편지를 손에 쥔채 굳어진듯 움쩍하지 않았다. 응상의 거동을 지그시 건너다보던 양창술이 말을 건네였다.

《내 여기 와서 말을 다 들었네. 리승만박사하구두 단단히 틀어졌다면서? 그따위 자존심은 해서 뭘하나. 원참 사람두, 이러나저러나간에 자네는 다른 곳으로 갈데가 없네. 우리하구 운명을 같이할수밖에 없단 말이야.》

양창술은 열이 올라 떠들어댔다. 계응상은 두눈을 지그시 감은채 한뼘이나 드리운 턱수염을 쓸어만지기만 했다.

과연 그가 양창술이와 같이 무위도식하는 무뢰한이나 등치고 간 빼먹는 안상길이와 같은 비렬한자들과 한마차를 타고 석양길을 가야 할 운명의 막바지에 다달았단 말인가.

자기의 주견과 립장은 집어던지고 스위치를 누르면 동작하는 로보트와 같이 상부의 지령에 의해서만 행동할줄 아는 인간으로 사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단 말인가.

《시험장으루 나가서 미국고문관과 화해를 하게. 그 사람들은 아직도 자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있습데. 공연히 권력에 맞섰댔자 리날건 하나두 없네. 그저 그 사람들 하자는대루 슬슬 하면서 제 리속을 차리면 되잖아.》

양창술은 있는 정력을 다하여 응상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계응상이 한사코 도리머리를 치자 창술은 더럭 화를 냈다.

《그럼 어서 보따리를 싸가지구 북으루 들어가보게. 아마 정주고을에 들어서자마자 그 무지막지한 빨갱이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어 자네를 요정내고말걸세.》

창술은 이렇게 한바탕 으름장을 놓고는 나가버렸다.

시험장으루 나가서 입직청원을 해보겠다는것이였다.

창술이 사라진 다음에도 계응상은 여전히 앉은뱅이책상에 붙어앉아 원고집필을 계속하려 했으나 뒤숭숭한 마음을 걷잡을수 없어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고말았다.

양창술이 가져온 뜻밖의 소식은 계응상의 마지막기대마저도 산산이 흩날려버리고말았다. 그는 우리 나라가 일제통치밑에서 해방되여 자기 손으로 제 나라를 훌륭히 일떠세울 날을 얼마나 학수고대하여왔던것이랴.

이날이 오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오직 과학연구에만 일심정력을 다 기울여 남들이 수백년동안 쌓아올린 과학의 봉우리를 몇십년내에 점령하고야말리라 굳게 속다짐했었다. 그런데 이 무슨 란장판이란 말인가.

해방된 내 나라에는 량심과 신념을 가진 학자를 용납할 곳이 더는 없단 말인가. 사실 그는 해방직후부터 처자가 있는 고향쪽으로 갈 생각을 루차 했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서울이 나라의 중심으로 될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여기에 주저앉았던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얼마나 암둔했던가.

그러나 그에겐 자기의 땅이 필요한것이 아니라 일생을 바쳐 투신할수 있는 과학연구사업이 요구되였다. 그가 한생을 두고 심혈을 기울여온 유전학을 연구할수 있는 조건만 보장해준다면 자기의 땅을 몰수한 북으로 가는것도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북에서는 김일성장군이 령솔하는 항일유격대가 나라를 다스리는 핵심으로 되고있다는것을 풍문을 듣고 알고있지만 거기에 아직 쏘련군대가 진주하고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의 갸르스름한 얼굴에는 착잡한 빛이 어리였다.

과학의 기초가 약한 북에서는 남에서 미국의 통치를 받는것과 마찬가지로 어차피 쏘련이 달성한 과학적성과와 경험을 그대로 채용할것이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는 책상 한쪽에 놓여있는 영문, 일문으로 된 생물학잡지며 쏘련의 과학에 대해 론한 여러 나라 과학자들의 소책자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번져보기 시작했다.

오스트랄리아의 식물학자 야슈비의 단행본 《쏘베트의 과학자》에는 계응상의 관심을 끌만 한 문제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식물학에 대한 야슈비의 흥미있는 저서들을 여러번 본바있어 어쩐지 쏘련의 과학에 대한 그의 견해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쏘도전쟁이 쏘련의 승리로 결속되여가고있던 1944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부르죠아자유세계의 전형적인 과학자인 야슈비는 아주 날카로운 비평가이지만 어쩔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쏘련과학원은 1725년 뾰뜨르대제시대에 창립되여 발전해오다가 10월혁명이 지나 1925년에 재편성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이 과학원에는… 과학원산하의 각 분야에서 엄선된 원사 198명의 자리가 있다. 원사의 평균나이는 65살이상이라 하니 대부분이 로대가들이다.… 원사로 되면 원사라는 리유만으로도 한달에 5천루블리가 지불되며 특별한 상점에서 물건을 살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승용자동차가 지급되며 주택에 대한 특전도 있고 여름에는 특별한 피서지도 제공된다.…

농업과학원은 전쟁전에 356만루블리의 예산으로 100여개의 연구소, 865개의 시험장이 운영되고있다. 거기에서 일하는 연구사와 연구소 조수는 24만명에 달했다.

이 연구소들에서 새로운 품종, 례하면 〈북극권용감자〉라든가 〈사막용양〉, 〈다수확밀〉과 같은것을 만들어내면 연구자에게 5만루블리의 상금이 나온다. 등등…》

이러한 자료들은 쏘련과학의 폭과 중심을 총체적으로 리해하는데는 너무나도 빈약한 자료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나 쏘련에서 과학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지위에 있는가를 판단할수 있는 일단의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계응상은 이 점에 주의를 돌렸다.

그는 《과학》잡지에 실린 미국의 유전학자 단의 론문을 펼쳤다. 단은 1927년에 쏘련을 방문한 사람인데 그는 쏘련의 과학계를 돌아본 감상을 경탄에 차서 이야기하고있었다.

《…쏘련과학계에서 받은 가장 큰 인상은 연구사들이 세력적이고 활동적이며 사물에 대한 추구욕이 왕성한 점이였다.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것을 지향하고있었다. 이러한 정경을 보고 외래자들은 한결같이 과학계의 문예부흥적인 분위기, 약동하는 젊음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한편 응용을 떠난 순수과학에 대한 연구가 부진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1927년에 내가 방문한 여러 나라들중에서 순수 과학의 가장 활동적인 중심은 유럽대륙에서는 쏘련으로 생각되였다.

유럽 또는 미국의 사회와 쏘련사회와는 구조적으로 다르며 이것이 학자들의 태도에 그대로 반영되고있다. 또한 여기서는 사회적전통의 의의도 다른 나라들과 같지 않으므로 그들이 하는 방식에는 특이한것이 있다. 유럽의 학자는 보통 전통의 선을 따라 앞문을 열려고 노력하지만 이들이 하는 방식이 뒤문에서도 뛰쳐나오고 방바닥을 뚫고나오기도 하는 식이다.…》

계응상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단이 쓴 이러한 구절들을 몇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야!)

계응상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쏘련이 세계적인 대과학자들인 멘델레예브나 로모노쏘브, 찌올꼽쓰끼와 빠블로브들을 배출한 나라라는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세계제패를 야망한 파시스트도이췰란드를 타승한 나라이고보면 그 나라의 과학도 막강한 힘과 폭을 가지고있다는것은 미루어 짐작키 어렵지 않았다.

2차대전의 중하를 한몸에 받다싶이 한 쏘련의 수수께끼같은 위혁앞에서는 계응상도 경탄을 금치 못하고있었다. 파쑈도이췰란드를 전률케 한 무적의 땅크부대들을 편성하고 까츄샤를 만들어 전선으로 보낸 거기에 뛰여난 과학자들의 대군단이 존재한다는것은 자명한 일이였다.

그런데 쏘련생물학계에서 어찌 그런 놀라운 일이 있을수 있단 말인가.

계응상은 다나까 요시마로가 최근에 쏘련의 《신유전》을 비평한 론문 《이른바 새로운 유전학설》을 괴로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다나까 요시마로는 썼다.

《…릐쎈꼬(뜨로핌 데니소비치 1898- )는 우크라이나농군의 아들로 태여나 끼예브의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했을뿐이나 화본과의 콩과식물에서 발육계단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봄맞이처리(야로비자찌야)를 고안하고 남부지방에서의 감자퇴화방지 등을 연구도입함으로써 농업생산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자신의 독창적인 실험은 생각하는것보다 적으며 특히 1940년경부터는 전적으로 부하, 협력자의 손에 의하여 실험이 진행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농업과학원 원장, 과학원 상무위원회 위원 등의 요직에 있어 쏘련의 농업과학계에서 나는 새도 떨구는 세력을 가지게 되였다.…》

그는 몇가지 실례를 들어 릐쎈꼬설의 허황성을 비판하고 일본에서 릐쎈꼬설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의 론문을 비난하였으며 끝으로 신랄한 어조로 부인했다.

《…이 글에서 〈새로운 유전학〉의 환영에 홀려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내 길게 서술하였는지 모른다. 저자는 수년후에 이 글이 단순한 력사적흥미밖에 없는것으로 되리라는것을 기대하지만 현재는 필요상 몇페지를 소비한바이다. …》

계응상박사는 오래전부터 남모르게 쏘련의 과학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서방세계에서 쏘련에 대하여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비방을 해도 웬일인지 모르게 그 제도를 선망의 감정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자신이 눈물겨운 고학생활을 하며 자본주의제도에 몸서리를 치게 된 사정때문인지 몰랐다.

그런데 그가 중국에 건너가서 연구사업을 할 때부터 서방나라들에서는 쏘련의 생물학계에서 벌어지고있는 움직임에 대하여 앞을 다투어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들이 울려나오고있었다.

그것은 마치나도 이단의 세계를 적의에 차서 지켜보고있다가 거기에서 허물들이 나타나자 환성을 지르며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것인듯 했다.

식물생리학자인 떼. 데. 릐쎈꼬는 오데싸농사시험장에서 연구사업을 하며 식물의 발육계단설과 같은 엉뚱한 문제를 들고나와 시험장의 장장이던 저명한 유전학자 바빌로브도 그의 재능을 각별히 귀애하였다. 그것은 1932년에 있은 국제유전학회의 석상에서 바빌로브가 릐쎈꼬의 사업을 각국의 유전학자들에게 소개하고 이 사업과 유전학을 결합시킨 방향에 장래의 유전학의 발전이 기대된다고 말한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계응상이 입수하여본 자료에 근거하여보건대 릐쎈꼬가 쏘련의 국내에서 자기의 연구와 유전학의 관계를 처음으로 발표한것은 1929년 레닌그라드에서 열렸던 쏘련유전육종학회였다. 이 회의에는 쏘련각지에서 모여온 1 400명의 회원이 참가했으며 340여명의 연구자들이 연구발표를 하였다. 봄맞이화에 관한 젊은 릐쎈꼬의 연구 및 유전에 대한 새로운 견해는 학회참가자들의 주의를 끌긴 했으나 이것이 그후 쏘련의 국내에서뿐만아니라 외국의 유전학자들속에 물의를 일으킨 학설로 발전하리라고는 당시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다.

릐쎈꼬는 1932년에 오데싸의 도태유전연구소에 부임하여 거기에서 감자의 퇴화방지연구에 착수하였다. 이 연구는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쯤부터 릐쎈꼬의 《발육계단설》에 공감하고 동조해나선 연구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중에서 레닌그라드대학 생물철학교수 프레젠트는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주어 릐쎈꼬의 사업에 리론적인 뒤받침을 해주었다.

1935년에 모스크바에서 발표된 두사람의 공동론문은 쏘련국내에서 종래의 유전학에 대한 《선전포고》로 되였다. 기관잡지로서는 《야로비자찌야》가 가장 힘있게 릐쎈꼬학설의 보급에 노력하였는데 이에 호응하는 육종, 원예, 림업 등에 관한 잡지의 수가 점차 늘어났다. 그러다가 1936년의 학회론쟁을 고개마루로 하여 1939년말 《맑스주의기치밑에》편집부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릐쎈꼬-프레젠트네들이 결정적으로 승리한 결과 쏘련의 국내에서 두 진영간의 투쟁은 대세가 결정되고말았다. 1940년에 농업과학원의 원장으로 바빌로브의 자리에 릐쎈꼬가 올라앉았다.

《지금까지의 유전학은 장기나 축구와 같은 놀음이다.》 이것이 1939년 뉴욕타임스지에 릐쎈꼬가 세계의 유전학자들을 향하여 내쏜 최초의 도전장이였다. 이때부터 릐쎈꼬와 바빌로브의 과학적론의는 도저히 어떻게 할수 없는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1937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국제유전학회가 열릴 예정이였다. 뉴욕타임스지에는 우에 인용된 릐쎈꼬의 도전장과 함께 바빌로브의 체포에 관한 보도를 실었다.

광동에 있을 때 일본에 다녀온 중산대학교수를 통하여 이 소식을 처음 들은 계응상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바빌로브와 상면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바빌로브는 쏘련에서 10월혁명이후에 유전학자로 자라난 사람이 아니라 명성높은 유전학자들인 꼴쪼브, 쎄레브롭스끼, 체뜨웨리꼬브와 마찬가지로 제정로씨야때부터 유전학을 깊이 연구한 대학자로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였다.

계응상은 그의 과학활동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엔. 이. 바빌로브가 자국의 경내를 벗어나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과학활동을 적지 않게 했다든가 실험유전학에 특별한 관심을 돌린것 등은 다년간 해외에서 과학연구를 진행한 계박사의 과학활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았던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계박사가 그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것은 바빌로브가 과거인테리로서 사회주의정권에 복무하는 과학자라는 점이였다.

쏘련에서 출판물에 소개된데 의하면 바빌로브는 사회주의쏘련에서 두 기관-전련맹농업과학원과 전련맹식물육종연구소 원장으로 사업하고있었다. 이 과학연구기관들에는 쏘련의 전역에 널려져있는 100여개의 시험농장이 소속되여있고 거기에서는 광활한 쏘련의 각이한 기후와 토양에 적합한 재배품종들을 육종하는 실험들을 진행하고있다고 한다.

또한 바빌로브와 그의 조수들은 전세계의 농업국들에서 수집한 20만종에 달하는 재배식물들의 종자들을 연구사업에 리용하고있다는것이다.

바빌로브에게는 제1차 5개년계획과 제2차 5개년계획시기 쏘련의 농업을 과학적으로 지도할 큰 책임이 지워졌다. 그것은 계박사가 부러워할만 한 사실이였다. 모름지기 그것은 나라의 모든 재부가 국가의 소유, 전인민적인 소유로 된 쏘련과 같은 사회주의나라의 과학자만이 지닐수 있는 직책이며 권한이라고 보아졌다. 그런데 그가 체포되다니…

얼마후 뉴욕타임스지에는 바빌로브자신이 쓴 서한이 발표되여 그의 체포가 허위라는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후 바빌로브는 어떻게 되였는가.

1939년 8월에는 제7차 국제유전학회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열리게 되였으며 그의 회장으로는 바빌로브가 선거되였다. 개회가 박두한 어느날 바빌로브에게서 한통의 편지가 준비위원회의 사무실에 날아왔다. 《쏘련의 유전학자와 육종가들은 학회에 출석할수 없을것이다.》라는것이였다.

들려오는 소리로 판단하건대 바빌로브의 신상에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것만은 사실인듯 하였다.

그러나 계응상은 중국 광동의 중산대학에서도 그렇고 고국땅으로 돌아와 생물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열을 올리며 떠들어댈 때에도 굳이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모든것이 돈으로 시작되고 돈으로 끝나는 이 제도하에서는 제 눈으로 보고 확인한것이외에 참말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하기에 그는 그 어느때도 남의 말을 듣고 그에 대한 자기의 소신을 표시해본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는 릐쎈꼬의 《신유전학》을 평한 서방과학자들의 론문을 통채로 받아들일 생각은 꼬물도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것을 일소에 붙이기에는 그가 50이 넘도록 제국주의통치하에서 살아오며 귀에 담아 골수에 박힌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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