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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4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1 장


3


이튿날 아침 시험장 정문담벽에는 안상길을 부장장으로 임명하고 정태연과 최학천을 해임한다는 고문관의 지시가 나붙었다.

격분한 시험장성원들은 계응상장장실에 모여들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째서 안상길이같은 놈이 대가리를 쳐들고 돌아가게 만드는가요?》

그들은 흥분하여 응상에게 들이대는것이였다.

응상은 두손으로 머리를 싸쥔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게 다 그 암쾡이같은 안상길이놈의 작간질일세.》

《그놈이야 누구든 등에 업지 않고는 한시도 살지 못하는 놈이니까 오늘은 간에 가붙었다가 래일은 섶에 가붙으며 요술을 피우거던. 줄창 그렇게 살다간 제명에 죽지 못해.》

《흥, 요즘세월엔 그렇게 약은 놈들이 더 잘산다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덤덤하니 장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지시를 기다리는것이였다.

그런데 과연 그가 무엇을 말할수 있었겠는가.

그는 제임스가 밤사이에 취한 이 조치가 시험장내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첫걸음인 동시에 종국적으로는 계박사에게 자기들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던가 아니면 물러나야 한다고 경고하는것이라는것을 뚜렷이 감득했다.

계박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가 어찌 왜놈들의 턱밑에 붙어돌아가던 안상길이같은자를 충복으로 삼고 정태연이같이 참다운 인간들을 내쫓을수 있단 말인가.

아니다. 절대로 그렇게 할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때 사무실 뒤채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났다. 와당탕, 퉁탕 무엇이 부서져나가는 소리며 비명소리가 울리더니 《꽝.》하는 총소리가 시험장을 뒤흔들어놓았다.

계박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

《죽여라, 죽여.》

집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우물가에 몰켜선 사람들이 윽윽 고아대는것이였다.

어마지두 그리로 다가선 계박사는 흠칠 놀랐다.

청년들 네댓명이 달라붙어 검정제복을 입은 경찰을 우물에 꺼꾸로 박아넣고 그놈의 대가리에 물을 붓고있었다.

《이 망나니새끼야, 어따대고 총질이냐, 엉.》

《물을 콱 먹여 다시는 사람잡이 안하겠다구 빌게 하라구.》

계박사는 황급히 젊은이들의 팔을 잡았다.

《이 무슨 무례한짓들이요, 엉?》

《장장선생, 간참하지 마십시오. 이런 망종놈의 새끼는 혼싸발을 내서 버릇을 뚝 떼주어야 합니다.》

《글쎄 이 수원망종놈이 순사복이나 입었다구 자치위원회에 달려들어 간판을 떼구 정태연부장을 잡아가겠다구 하지 않습니까. 이 자식을 그저.》

청년들은 막무가내로 경찰놈이 제발 살려달라고 발을 흔들며 애걸할 때까지 물을 먹였다.

그제서야 그자를 꺼내서 우물가에 앉혀놓았다.

《이 자식아, 누가 너보구 총질을 하면서 사람잡이하라구 시키던?》

《자… 자청한기 아니요. 시…시켜서 왔소.》

경찰놈은 연방 재채기를 하면서 팔을 내젓더니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엠완총을 주어들고 비칠거리며 사라졌다.

그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던 계박사는 비참한 안색을 지었다. 사태는 점점 더 험악해지고있었다.

과연 이런 곳에서 어떻게 과학연구를 할수 있단 말인가.

그는 하찌야마가 살던 시험장구내 한가운데에 자리잡고있는 지붕이 뾰족한 함석집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하찌야마의 사택에 제임스고문관이 들고있었던것이다.

제임스는 원탁앞에 안상길과 마주앉아 양담배를 피우고있었다.

안상길은 방금 시험장구내에서 벌어진 사태를 제임스에게 낱낱이 고해바친 모양이였다. 멀쑥한 상이 벌겋게 달아오른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뇌까렸다.

《당신은 방금 시험장에서 경찰에게 가한 폭력행위에 대하여 책임져야 하오.》

《제임스씨.》 계박사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진정 우리 시험장에 평온이 깃들기를 기대하오?》

《…》

제임스는 버릇처럼 입귀에 문 담배를 거느즉이 드리우고 계박사를 마주보았다. 대꾸하는것조차 체면이 깎이는 일로 여긴듯 입을 꾹 다물고있었다.

그러거나말거나 계박사는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시험장의 주인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아보는것이 필요하다고 보오.

당신이 해산을 명령한 자치위원회사람들이야말로 여직껏 시험장재산을 제것처럼 지켜준 진실한 사람들이요. 당신이 딱지를 붙여 내쫓기로 한 그들이야말로 시험장 일군들의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나무랄데 없는 기술자들이란 말이요. 그러니 시험장을 불안하게 만든게 누구요?》

계박사의 말을 끝까지 들은 제임스는 더욱더 표독스러운 기색을 지었다.

《이제야 알만하오. 당신이야말로 저 사람들의 우두머리, 우리를 반대해나서도록 부추기는 선동분자가 분명하오. 그렇지 않소?》

제임스는 계박사를 조롱하듯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안상길은 고문관의 의사에 동감이라는듯이 연방 턱을 끄덕이였다.

그들은 도무지 계박사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애당초 리치를 따져가며 사태를 해명하기를 그만두고 덮어놓고 이미 작정한대로만 일을 내밀려고 서두르는게 분명했다.

《좋습니다. 당신들이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달리 어떻게 할수 없습니다. 우리의 두 부장을 해임시킨다면 나도 장장사업을 그만두겠습니다.》

계박사는 단호하게 언명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번거로운 심정을 눅잦혀보려고 잠실로 올라가 방금 따놓은 누에고치들을 돌아보며 허부럭고치들을 골라냈으나 종시 뒤설레이는 마음을 잠재울수가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원종부와 잇달린 아담한 벽돌집으로 옮겨졌다.

창호지를 바른 사이문을 거쳐 은은히 비쳐드는 해빛은 좌우켠에 촘촘히 얹어놓은 잠박들을 포근하게 어루만지고있었다.

한쪽구석에 쭈그리고앉아 종자누에고치를 고르고있던 정태연이 허리를 펴며 계박사를 쳐다보았다. 두사람은 말없이 무거운 시선을 주고 받았다.

태연이 알알이 골라 잠박우에 올려놓은 누에고치며 그것들을 일일이 세며 또박또박 적어놓은 사육일지를 들여다본 계박사는 눈굽이 시큰해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전 선생님이 지금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는걸 알고있습니다.》

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 걱정은 말게. 오히려 자네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네. 그렇지만 한동안만 좀 참아주게.

래일 내 서울에 올라가 리승만박사를 만나 여기 일을 의논해보겠네. 이런 형편에선 도저히 연구사업을 할수가 없네.》

계박사는 계속하여 리승만이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는다는 소문이 떠돌고있다는 말을 하면서 그래도 한때 조선독립운동을 하면서 감옥살이까지 한 사람이니 이런 실정을 모르쇠할수 없을것이란 확신을 표명했다.

《글쎄요.》

태연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리승만은 미국사람들을 등에 업고 조선독립을 해보자는 속심인것 같습니다. 견실한 애국자들이 일제놈들과 피흘리며 싸울 때에 미국에 건너가 연설이나 하면서 큰 나라한테서 조선독립을 선사받으려고 생각한것도 그렇지만 고향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자식들을 키우는 본처를 배반하구 애리스라는 미국녀자를 얻어가지고 귀국한 처사를 보면 크게 의지할 사람이 못된다고 봅니다.》

《물론 미국인들이 제 나라 비행기에 태워가지고 온 사람이니 미국식을 본받을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박사가 아닌가. 얼마 안되는 우리 나라 과학자, 기술자들의 운명에 대해서 그가 아주 무관심할수는 없다고 보네.》

계박사는 리승만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선생님!》

태연은 두눈에 절절한 빛을 띠우고 말했다.

《정문담벽에 붙여놓은 〈미군정〉령 2호를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만 보아두 리승만의 처지가 어떻다는거야 뻔하지 않습니까.》

《자네가 말하는 뜻은 알만 하네. 그렇지만 나는 아무리 사람들의 평판이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이렇다저렇다 말하고싶지 않네. 어쨌든 나는 서울에 올라가 리승만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아야겠네.

내 얼마전에 그 사람이 쓴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읽어보았는데 우리 나라를 구원하고 개화발전한 나라를 세우려는 열렬한 지향을 피력했더구만.》

계박사는 리승만에게 기대를 품고있다는것을 숨기지 않았다.


X


팔달산중턱에 자리잡고있는 계박사의 집에는 수원녀중에 다니는 막내딸과 맏누이가 와있었다.

맏누이는 꽃나이에 돈 30원에 팔리워 50줄에 든 병든 남자한테 시집을 갔는데 사내자식 하나를 남겨두고 남편이 죽는 바람에 청상과부로 애섧게 살아가고있었던것이다.

계박사의 안해 윤덕녀는 남편의 시중을 들려고 수원에 나와있다가 가을철이 다가오자 서둘러 정주에 있는 본집으로 가버렸다.

안해는 여전히 정주에 사놓은 땅에 미련을 가지고 기회만 있으면 그리로 달려가는것이였다.

이번에도 맏시누이가 찾아와 남편 때식도 끓여주고 집안살림도 맡아할수 있게 되자 황황히 정주로 가버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고향으로 간지 두달이 되여오도록 안해는 종무소식이다.

재령잠업시험장에서 일하고있는 맏아들한테서도 반년째 소식이 없다. 그리고 얼마전에 다녀간 둘째는 충주잠업원종장에서 책임자로 사업하고있는게 확실했지만 38도선이 생겨 북과 남의 장벽이 점점 더 높아가는 형편에서 남북사처에 널린 처자들의 운명에 대해서 근심이 커지는것을 어쩌지 못했다.

어슬녘에 계박사가 집에 들어서자 맏누이와 막내딸이 고향으로 가겠다고 짐을 꾸리는것이였다.

《내 아무래두 아들네 집에 가봐야 할것 같네. 아이에미라도 올가하구 오늘만 래일만 기다려봐두 어디 나타나야지.》

머리가 희끗희끗한 누이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여느때같으면 의도 좋지 않은 며느리네 집에 가서 무얼 하겠느냐고 불편한대로 같이 있자고 권해보았겠으나 계응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트렁크까지 내놓고 짐을 꾸린 막내딸을 보고도 꾸중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자신의 운명조차 어찌될지 모르는 형편에서 제 갈곳으로 가겠다는 그들을 만류했댔자 별로 좋은 일이 있을것 같지 않았던것이다.

호된 꾸중이 있을줄 알고 찔끔해있던 막내는 의아하여 부친을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정주에서는 여전히 소식이 없느냐?》

응상의 물음에는 그 어떤 말 못할 기대가 어려있는듯싶었다. 막내딸은 동실한 얼굴에 서거운 빛을 띠우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지문을 열고 웃방으로 올라갔던 응상은 저녁진지를 들라는 막내의 재촉을 듣고서야 아래방으로 내려왔다.

그는 수저를 들다 말고 밥그릇을 들고 새문으로 들어오는 누이에게 말했다.

《누이생각이 옳은것 같습니다. 길이 막히기 전에 막냉이를 데리구 먼저 올라가십시오.》

의문에 찬 눈길을 응상에게 던졌던 누이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튿날 아침 계응상은 누이와 막내딸을 앞세우고 수원역으로 나갔다. 텅빈 량통집은 이럴 때마다 올라와서 가사일을 맡아주던 서호가의 칠선녀어머니가 보살피게 되였다.

누이와 딸에게 개성까지 가는 차표를 끊어준 계응상은 서울서 수원까지 왔다가는 교외렬차를 타고 곧장 서울로 올라갔다.

역에서 내린 그는 친구들의 집에도 여러곳 들릴데가 많았지만 우선 《미군정청》이 자리잡고있는 《중앙청》부터 찾아가 리승만을 만날 심산으로 북악산행 전차를 탔다.

종점에서 내린 응상은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포석을 깐 다님길에는 방울나무의 마지막잎새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바삐 오가는 행인들의 얼굴에는 이름할수 없는 흥분과 불안이 얼른거리고있는듯싶었다.

《신문 사세요. 〈동아일보〉, 〈중앙신문〉, 〈서울신보〉 …》

철부지 신문팔이소년들의 쨍쨍한 웨침만이 철늦은 부르짖음처럼 멋없이 거리를 흔들어놓을뿐이였고 《아리랑》이니 《백가만또》니 하는 얼핏얼핏 눈에 띄는 영화광고들도 어수선한 감정만 자아냈다.

헛눈 한번 팔지 않고 꼿꼿이 걸어가던 응상은 웅성웅성하는 행인들의 말소리와 자동차경적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고르로운 발동소리를 내며 월리스 한대가 포장한 큰길로 경쾌하게 미끄러져가고있는데 차안에는 조선치마저고리를 입은 미국녀자와 반백의 양복쟁이가 앉아있는것이 얼핏 눈에 띄였다.

옆에서 천천히 걸어가던 이마 벗어진 신사가 나란히 걷고있는 동료에게 넌지시 말했다.

《리승만박사와 그의 처 애리스요.》

중앙청 정문으로 사라지는 월리스를 이윽토록 지켜보던 계박사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리승만이 문명국이라고 떠드는 미국에 건너가서 철학박사칭호를 받은 지성인이고 제나름의 우국충정을 피력한 사람이므로 새조선의 농업과학을 우려하는 자기의 견해에 대하여 깊은 리해를 표시해주고 적절한 방조를 주리라는것을 의심치 않았다.

일제시기에 그는 자기의 론문에서 쓰기를 나라가 없으면 집이 없고 집이 없으면 부모처자와 형제자매들이 살 곳도 없다고 하면서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잃지 않으면 살수 있다고 역설하고 민족정신을 송죽같이 지킬데 대하여 열렬히 부르짖었다.

그럴진대 그가 이 엄숙한 마당에서 달리 행동할수가 있겠는가. 《군정청》접수실에는 중절모, 파나마모, 캡, 수건을 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가득차서 웅성거렸다.

미닫이뙤창너머 전화기를 놓은 사무상앞에 매끈하게 생긴 젊은이가 꼿꼿이 앉아 찾아온 사람들을 접수하고있었다. 차례가 되자 응상은 뙤창으로 명함을 들이밀었다.

《리승만박사를 만나러 왔소.》

명함을 받아쥐고 응상을 힐끗 쳐다본 그 사나이는 하얀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리승만각하의 비서실에 대주시오.》

잠시후 비서실과 몇마디 말을 주고받은 그 사나이는 랭정한 어조로 뇌이였다.

《미안하지만 리승만각하는 지금 자기 방에 없답니다.》

《?》

계박사는 어안이 벙벙하여 매끄럽게 생긴 접수원사나이를 바라보았다.

《그 다음손님.》

접수원은 계응상에게서 시선을 떼며 재촉하듯 뇌까렸다.

옆으로 밀려난 응상은 한동안 어찌할바를 모르고 그자리에서 서성거리다가 밖으로 나왔다.

불쾌한 생각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었으나 큰일을 하는 사람이니 그럴수도 있다고 너그럽게 여겼다.

가까운 려관에서 하루밤을 묵고난 계응상은 이튿날 아침 또다시 《군정청》으로 찾아갔다. 그는 리승만을 기어이 만나야 했다. 그래야만 시험장사태를 바로잡을수 있는 방조를 받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날의 그 접수원은 여전히 랭담한 태도로 응상을 맞이하였다.

이런 엄숙한 자리에 앉아있는 그는 인간다운 태도를 가지는것을 허용할수 없는 일로 여기고있는듯싶었다.

접수원은 응상이 내미는 명함을 기계적으로 들여다보고 리승만비서실을 찾았다. 한참동안 저쪽에서 웅얼거리는 말소리를 귀담아듣던 그자는 입가에 랭소를 지으며 말했다.

《리승만각하는 지금 맥아더사령관과 회견중이기때문에 만날수 없답니다. 후에 다시한번 와보랍니다.》

모욕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응상은 어금이를 꾹 다물고 밖으로 나왔다.

정문좌우켠에는 철갑모를 쓰고 엠완총에 수류탄까지 착용한 미군 쌍보초가 서있었다.

응상은 그 저쪽 우중충한 건물들의 창문에서 흐느적이는 커피색창가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거리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리승만이 맥아더사령관과 회견을 한다는것은 거짓이였다. 그시각 리승만의 사무실에는 농사시험장고문관 제임스가 리승만과 마주앉아있었다.

제임스의 말을 통해 계응상의 견해를 짐작한 리승만은 그를 만나지 않는것이 상책이라고 여겼다.

설사 그를 만났댔자 할말도 없었던것이다.

계응상은 이러한 내막을 알리 없었지만 이틀째나 품놓고 다닌 길이 헛걸음으로 되자 그가 의식적으로 자기를 만나지 않으려 한다는것을 륙감으로 느꼈다.

맥이 풀려 전차에 오른 그는 곧장 서울대학으로 향했다. 화학부의 리승기박사를 찾아간 그는 호된 방망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은듯 뗑하여 그자리에 굳어졌다.

리승기는 한주일전에 교수직에서 해임되여 고향인 담양으로 내려갔다는것이였다.

《무엇때문에 리승기박사를 대학에서 내쫓는단 말이요?》

응상은 넓은 직원실에 십여명의 교원들이 둘러앉은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어째서 세계적인 비날론발명가인 리승기선생을 몰아냈단 말인가?》

《내몬것이 아니라 불순한 행동을 했기때문에 응당한 처분을 받은것이지요.》

한쪽구석에 앉아있던 우럭진 사나이가 툭하게 내쏘았다. 검실검실한 얼굴에 광대뼈가 모나게 두드러진 그자는 어느모로 보나 무지막지한 깡패임에 틀림없었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던 교원들도 그자의 낯짝을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어버리는것이였다.

응상의 입귀가 바르르 떨렸다. 리승기박사가 일본 교또에 있는 한 대학연구소에서 폴리비닐알콜로부터 새로운 합성섬유 비날론합성에 성공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것이다.

그의 연구성과는 응상에게 각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같은 조선인과학자로서 민족의 슬기를 떨친것도 그렇지만 대를 두고 헐벗어오던 우리 인민의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바지하려는 서로의 지향이 같았기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얼마후 일본연구소에서 연구비마저 주지 않고 나중에는 《반전독립사상자》라는 딱지까지 붙여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처넣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얼마나 분개했던가.

리승기의 죄목이란 제놈들이 요구하는 군수과제연구를 거부했기때문이라는것이였다.

이렇게 제 나라가 없는탓으로 일제놈들에게 갖은 천대를 받던 명망높은 과학자를 어쨌다고 해방된 내 나라에서 학대를 하고 쫓아버린단 말인가.

이것이 그가 그렇게도 일일삼추로 고대하던 조국해방이며 내 나라, 내 땅이란 말인가. 응상의 눈에서는 불이 일었다.

그런데 시험장에서는 또다시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응상을 기다리고있었다.

자치위원회사업을 맡아보면서 잠업연구실장을 하던 정태연을 끝내 경찰에서 체포해갔다는것이였다.

그것은 계박사가 수원역에서 기차에 오를무렵이였다고 한다. 태연이 잠실에서 빙고에 보관할 누에알들을 품종별로 봉투에 넣고있을 때 갑자기 사복을 입은 형사들이 달려들어 포승줄로 묶으려 하였다.

태연은 그들을 뿌리치며 당당하게 말했다.

《놔라! 네놈들이 기어코 나한테 용무가 있다면 내 발로 찾아가겠다.》

그리고는 형사놈을 뒤에 달고 앞장서서 수원경찰서로 걸어갔다는것이였다.

이날 수원에서는 시험장뿐아니라 읍내와 각 면에서 활동하던 인민위원회들도 해산하고 그 핵심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읍에서 제일 가까운 면에서는 류혈적인 충돌까지 벌어졌다. 북에서 도망쳐왔다는 황해도 강순사라는자가 엠완총을 벗어들고 탈곡이 한창인 오리나무집마당으로 기여들었다.

밀정을 통하여 이 집에 리인민위원회 위원장이 숨어있다는것을 통고받은 강순사는 마당 한복판에 서서 공중에 대고 총을 《꽝꽝.》하고 쏘면서 부르짖었다.

《빨갱이 나오라, 나오지 않으면 쏴죽이겠다.》

탈곡을 하던 이웃들은 공포에 질려 뿔뿔이 흩어지고 주위는 괴괴했다. 단독으로 체포령을 내린 《빨갱이》를 잡아내여 공훈을 세우려고 작정한 강순사는 방문을 총창으로 열어제꼈다.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하자 강순사놈은 구두발로 장판방에 들어서서 두리번거리며 뇌까렸다.

《끝내 나타나지 않겠단 말이지. 좋다, 그럼 무사할줄 아느냐.》

강순사는 벽장문을 열어제꼈다. 이때 벽장안에 숨어있던 리위원장이 와닥닥 뛰쳐나오며 발길로 강순사를 걷어찼다.

찰나 《꽝.》하는 총소리와 함께 리위원장이 쓰러졌다.

상판을 채운 강순사도 의식을 잃고 나자빠졌다.

허벅다리에 부상을 당한 리위원장은 농민들이 어디론가 은신시켜버리고 강순사는 경찰서에서 병원으로 실어갔다.

수원일경은 온통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해졌다. 적대적인 세력을 이루고 서로 힘을 겨루던 량측에서는 피를 보자 증오의 불꽃이 일었다. 거리와 마을에서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시험장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체포령을 받은 최학천을 비롯한 재능있는 연구사들이 몸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계응상은 두귀를 솜으로 틀어막고 소란한 회오리에서 벗어나 조용히 연구사업을 계속해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오른팔이던 정태연은 감옥에 들어가있고 관리공처녀들도 불순한 청년단체에 들었다는 죄목으로 쫓겨나고말았다.

연구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연구조건을 찾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계응상박사는 항거의 표시로 연구소에 출근하기를 거부했다.

수원땅에 눈보라가 사납게 불어치는 2월 초순 어느날 시험장 사무실담벽에는 새로운 공문이 나붙었다.


공시

1946년 1월 31일 미군정청에서 발표한 관제령 8호에 따라 금후 시험장의 관리권과 감독권, 관리인 임명권은 당지에 파견된 미고문관이 행사한다. 우에 지적된 사항에 의하여 시험장인사배치를 다음과 같이한다.

장장 안상길… 총무… 재정계장…


이렇게 렬거한 공시는 잠사과 장원 계응상이라고 찍어놓았다.

이것은 제놈들에게 불복하는 사람에게 차례질것이란 이런것밖에 없다는것을 너무도 로골적으로 표시하고있는것이였다. 똑똑히 알아두라, 너희들에겐 오직 복종할 의무밖에 없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이렇게 부르짖었다 해도 이들이 시험장에 내붙인 공시보다는 신사적이라고 할수 있었을것이다.

큰 희망을 안고 시험장으로 찾아왔던 사람들은 쓰디쓴 실망의 그림자를 안고 뿔뿔이 흩어져가고있었다.

장차 재능있는 육종가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최학천은 야밤에 응상의 집을 찾아와 작별인사를 했다.

《선생님! 저는 북반부로 가보겠습니다. 거기서는 지식있는 사람들을 귀중히 여기고 국가사업에도 널리 참여시킨다고 합니다. 선생님도 저와 함께 그리로 가십시다.》

《북반부로!》 이렇게 반문한 계박사는 침중한 안색을 지었다. 그 역시 남쪽의 형편이 이렇게 어수선한 형편에서 고향집과 부모처자가 있는 북반부로 가려는 생각을 한두번만 해본것이 아니였다.

속심을 터놓는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이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했다고 해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그가 주저하는것은 과연 공산제도가 인테리를 좋아하겠는가 하는것때문이였다.

그는 나이 50이 되도록 자본주의제도에서 살아오면서 《인테리는 공산주의의 적》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것이다.

그런데 북에 대해서 그렇게도 단순하고 명백한 견해를 확신성있게 표현하는 최학천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젊은이인가.

《자네는 자기 신념대로 하게. 난 이 생활을 좀더 지켜보겠네.》

계응상은 떠나는 제자에게 이렇게 잘라말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 마음속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와의 영원한 리별이 될줄을 어찌 알았으랴. 제임스의 지시를 받고 수원서부터 학천을 미행하던 사복경찰이 38도선까지 따라갔다가 끝내 월북하는 그를 소문없이 사살해버리고말았던것이다.

계응상이 이 사실을 알게 된것은 이때로부터 5년이 지나서였다.

계박사는 무거운 기색을 짓고 시험장구내를 뜨직뜨직 거닐고있었다. 그는 착잡한 눈매로 흰눈이 듬성듬성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달전까지만 해도 그는 얼마나 크나큰 희망과 포부를 안고 시험장의 래일을 설계했었는가. 생각할수록 분했다.

《계선생.》

간지러울 정도로 은밀한 목소리에 응상은 고개를 홱 돌렸다. 안상길이 호인다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있었다.

마치나도 파직된 전 장장에게 야박스레 굴 필요가 있겠느냐는듯 득의만면한 기색이였다.

《전 선생님의 연구사업에 지장이 없도록 모든 방조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곧 계선생을 시험장촉탁으로 천거하겠습니다. 지금 우에서 취하고있는 조치를 널리 리해해주시겠지요?》

그는 안상길의 반질반질한 이마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이거야말로 등치고 배 어루만지는 격이 아닌가. 도대체 이자는 어떻게 살아가는 족속인가.

엊그제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싸우던 병사가 정황이 불리해졌다고 해서 훌쩍 적편으로 넘어가 돌연 자기의 동료들에게 총질을 한다고 하자. 군대에서라면 이러한 행동은 용서할수 없는 명백한 배신행위로 인정하고 총살에 처할것이다.

그런데 계응상과 함께 연구사업을 하며 그를 극구 찬양까지 하던자가 한순간에 돌아서서 계응상을 반대하여나선 행동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옳단 말인가.

도대체 인간의 갖춤새를 완전히 포기한 인간만이 이렇게 행동할수 있는것이 아닌가. 그런데 다년간 유심히 관찰해보니 이자는 량심과 지조따위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있는게 분명했다.

그처럼 거치장스럽고 불필요한것은 없다고 인정한지가 오랜 모양이다.

그러니 그자는 도대체 자기의 신념과 견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게 되였다. 바람따라 돛다는 격으로 아무때건 권력을 쥔 사람에게 붙어사는 길만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있는것이다.

아마 이제는 그렇게 사는것이야말로 정직하고 량심적인 생활이라고까지 여기고있는지 모른다.

계박사는 비로소 남쪽땅에 세워지고있는 《정권》이 어떤 정권인가 하는것을 석연히 알게 된것 같았다.

그는 완강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절대로 너따위들 밑에서는 일하지 않겠다.》

안상길의 작은 눈에 몸서리칠 정도의 싸늘한 랭기가 풍기였다. 하나 계박사에게로 눈길을 돌리자 그의 눈빛은 놀랄만치 빠르게 변하였다.

《허허, 그러실겁니다. 리해됩니다. 그렇지만 과학적실험을 통해서 얻어진 사실적자료만을 인정하시는 선생님이 어째서 현실적으로 사고하기를 거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봐두 우리 조선은 미국의 보호를 받아야만 살아나갈수 있게 되여있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한사코 대세의 흐름에 역행하려고만 들거던요. 이런걸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네가 나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기에는 너무 이르다. 난 왜정때에도 내 살고싶은대로 산 사람이야.》

더 상대하기가 역겨운듯 응상은 문이 열려있는 실험잠실로 쑥 들어가버렸다. 아직도 잠사부는 그의 지시가 없이는 한걸음도 움직일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2층으로 된 이 잠실들의 매 방마다에 가득찬 누에품종들이 무엇을 하던것이며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것은 지금 감옥에 들어가있는 정태연과 계박사밖에 아는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계응상은 한숨을 내쉬였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저렬한 인간밑에서 굽신거리기에는 그의 정신이 너무도 도고했으며 그렇다고 홀연히 이곳을 떠나자니 가슴이 아팠다.

이국땅에서 천신만고하여 가지고 들어온 귀중한 누에품종들에 눈길을 주자 오장륙부가 녹아내리는듯 하였다. 계박사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채 허술한 잠실관리원방의 책상앞에 시름없이 앉아있었다. 이때였다.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벌컥 열리였다.

안상길이 가쁜숨을 몰아쉬며 급히 뇌이였다.

《계선생, 서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서울 어디에서?》

《〈중앙청〉에서 온것 같습니다.》

응상은 내키지 않는 걸음걸이로 장장실에 올라가 송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녀교환수의 간지러운 목소리가 울리였다.

《어서 말하시오.》

《리승만박사께서 전화를 하시겠습니다.》

《리승만박사?》

응상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살이 잡히였다.

《계응상선생입니까? 내 리승만입니다.》

나직한 음성이 전선을 타고 지척인듯 울려왔다.

《…》

《여보시오…》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예, 내가 계응상입니다.》

계응상은 짧게 응대했다.

《아, 그렇습니까.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일전에 저를 만나러 서울에 올라오셨댔다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여간만 친절하고 삽삽하지 않았다. 비린내가 날 지경으로 간지럽기까지 했다. 응상은 듣고만 있었다.

품놓고 《군정청》에 이틀씩이나 찾아갔던 일을 생각하니 가라앉았던 모욕감이 다시 욱하고 치밀어오르는것이였다.

《여보시오.》 재촉하듯 부르는 소리가 연거퍼 울렸다.

《듣습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서울에 다녀온 후 계박사는 이 사람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니, 험오감마저 느끼고있었던것이다.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실은 선생과 나라의 농학발전문제를 두고 상론하고싶은게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 문제는 시험장을 실제적으로 책임진 제임스고문과 의논하는게 더 낫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것은 도전적이라고 할만큼 쌀쌀한 질문이였다. 그러나 두눈을 지그시 감고있는 그의 얼굴에는 놀랄만치 평온이 깃들어있었다.

《충분히 리해합니다. 마음고생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거는겁니다. 이제 제가 승용차를 내려보낼테니 좀 올라와주실수 없겠습니까?》

계박사는 잠자코 있었다.

《내 말을 듣습니까?》

《듣고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나한테 짬이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저에게 말해줄수 없습니까?》

초조해하면서도 노염기가 없지 않은 목소리였다.

《뭐 별다른 일은 아닙니다. 해지기 전에 누에선별을 끝내야 하니까요. 저는 자그마한 벌레를 다루는 사람이지요.》

《흠.》

실망한 목소리. 수화기에서는 진동판이 울리는 웅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리였다. 얼마후 저쪽에서는 다시 목소리를 돋구었다.

《계선생,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가요. 내가 래일 수원성도 돌아볼겸 시험장에 나가보겠습니다.

그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가요?》

응상은 리승만의 어조에서 진지한 태도가 엿보이는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도 그의 말에서는 계박사에게 있는 성의를 다하려는 태도가 보이고있었다. 그러나 달콤한 말은 문제가 아니였다. 설사 래일 리승만을 만난다면 그가 《미군정》에서 채택한 관제령 8호를 철회시킬수 있겠는가. 과연 그가 시험장에서 체포해간 사람들을 석방할수 있겠는가.

리승만은 하나의 허깨비였다.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이제는 그 무엇으로써도 이 상태를 달리 어떻게 하지 못한다.

그를 만난다고 해서 얻어질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의미한 시간의 랑비, 감정의 희롱.

이 모든 유형무형의 허깨비들과 결별을 선포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계박사는 더는 롱락당하고싶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또박또박 힘을 주며 말했다.

《래일 나는 서호기슭에서 누에를 치는 한 로인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은 어디까지나 약속이니까요. 미안합니다.》

계박사는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옆에 지켜서있던 안상길은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계박사를 노려보았다. (닭알로 바위를 깨려고 달려드는 가련한 인간 같으니라구.) 밴질밴질한 이마아래서 반짝이는 그의 눈매에는 이런 비난의 빛이 력력히 드러나있었다. 과연 누가 가련한 인간인가.

안상길을 지그시 건너다보던 계박사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오늘부터 시험장에서 일하지 않겠네. 돌아갈 때에는 내가 시험장에 들여놓은 누에품종들을 가지고 가겠어.》

《계선생, 그렇게는 안됩니다. 가져올 땐 마음대로 들여놓았지만 내갈 때는 그렇게 못할걸요.》

《어째서?》

《불순분자들한테 넘어가는걸 방지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렇게는 안되네. 자네가 신주모시듯 하는 〈미군정〉에서도 개인의 재산은 신성불가침으로 여기고있거던.》

계박사는 휭하니 사무실을 나섰다. 곧장 실험잠실옆에 껴달린 원종유지실로 걸어간 계응상은 미리 이런 일이 있을것을 예견하고 내다놓았던 가죽트렁크에 원종누에알뿐만아니라 계대하여 도태육종하고있던 누에알들도 차근차근 넣었다.

계박사가 시험장을 아주 떠난다는것을 안 연구사들과 로동자들이 거의다 원종유지실로 모여왔다.

그들은 억이 막혀 무엇이라고 말을 건넸으면 좋을지 몰라했다.

너나없이 이런 날이 오리라는것을 벌써 전에 예측하고들 있었다. 장장이던 계박사를 해임시켜 장원으로 임명하던 그때 벌써 그의 운명은 결정되나 다름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시험장을 아주 떠난다고 나서자 저마다 눈물을 머금고 비분을 토했다.

《이젠 다야, 알맹이는 모조리 골라내치고 쭉정이만 남겼으니 무엇을 한단 말인가!》

《참, 세상은 차차 더럽게만 돼가누만.》

저마다 암담한 표정을 짓고 이렇게 개탄했다.

오래지는 않았지만 다난한 몇달동안 계박사와 함께 일하던 연구사들과 로동자들이 트렁크를 맞들고 정문으로 밀려나갔다.

경비실에서 《대한청년단》원들 몇명이 달려나왔으나 숱한 시험장성원들에게 둘러싸여 걸어나가는 계응상을 보자 비실비실 한쪽으로 비켜서고말았다.

이리하여 계응상박사는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뽕잎을 사오고 잠박을 빌려다가 혼자서 고립무원하게 연구사업을 하던 그 집으로 돌아왔다.

후줄근한 검은색양복을 입고 누에알이 든 가죽트렁크 하나를 들고 가파로운 팔달산언덕길을 걸어올라오던 몇해전 초겨울 그날처럼 지척지척 비탈길을 걸을 때 계응상박사는 때늦게나마 이제 자기가 갈 곳은 최학천이가 찾아간 북반부밖에 없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과연 북에서는 자기와 같이 자그마한 벌레를 다루는 학자를 환영하기나 하겠는지. …

그는 먼저 북으로 간 최학천이한테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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