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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1 장


2


그때로부터 한달이 지난 어느날.

수원농사시험장 춘천지장에 출장을 나갔던 계응상은 한주일만에 본장으로 돌아왔다.

길좌우편에 름름하게 늘어서있는 은행나무들은 며칠사이에 단풍이 곱게 들었다.

한잎 뚝 따서 책갈피에 끼워놓고 오래도록 들여다보고싶을 정도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잎은 서둘러 락엽을 날리는 적갈색미루나무와 그 저쪽에 고개를 숙이고있는 록색수양버들과 조화를 이루어 가을의 정취를 한껏 돋구고있었다.

며칠사이 눈에 띄게 달라진 시험장정원을 정겹게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던 계응상은 문득 정문벽에 붙여놓은 낯선 광고용지에 시선을 주었다.

《미군정청 법령 제2호》

첫눈에 확 안겨오는것은 특호활자로 찍은 인쇄체의 이런 글발이였다.

주춤주춤 벽가까이 다가선 응상은 엄격한 명령투로 씌여진 다음과 같은 글발을 읽었다.

일본인에게 소속되였던 공사재산의 권리는 미군정청에서 그 소유권을 접수한다. …

사무실 아래층 창가에서 장장을 내다본 잠사부장 정태연이 황황히 밖으로 내달아왔다.

《이제야 오십니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정태연은 2층 중앙창문쪽으로 불안한 눈길을 보내는것이였다. 현관앞에는 소형스리쿼다 한대가 서있었다.

《무슨 일이요?》

응상은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 재빨리 물었다.

《저쪽 시험잠실쪽으로 좀 가십시다.》

태연은 또다시 경계하는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갔던 일은 다 잘됐습니까?》

《됐네.》

계응상은 잠사부장의 긴장한 눈길에 신경이 쏠리는것을 어쩌지 못하며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섰다.

정태연은 사무실뒤에 외따로 떨어져있는 잠실관리원방으로 들어서자 나직하나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장장선생님이 춘천으로 떠나신 이튿날 〈미군정청〉에서 제임스라는 농산기사가 시험장고문으루 배치되여 왔습니다.

그러자 여적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자들이 구원자나 만난듯이 제임스한테 매달리고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서무계장 안상길이도 어느새 제임스의 통역 겸 서기로 돌아칩니다.》

《안상길이가?》

응상은 놀라와서 부르짖었다.

《예, 시험장 인사임명도 고문관이 새로 한다는 말이 돌아가고있습니다.》

《음.》

응상은 어두운 기색으로 신음하듯 뇌이였다.

그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제임스라는 고문관은 어디에 있나?》

《계선생님 사무실에 틀고앉아있습니다.》

《내 방에?》

그는 어이가 없어 넙죽한 태연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았다.

실험잠실을 나선 계응상은 꼿꼿한 자세로 사무실 2층을 향해 총총히 걸어갔다.

벌컥 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들어선 응상은 우뚝 멈추어섰다.

그의 회전의자에 새파란 미국고문이 비스듬히 기대앉아 이쪽을 건너다보고있었다.

서무계장 안상길은 그옆에 꺼꺼부정하니 서서 제임스에게 그 무슨 문건인가를 섬겨주다가 흠칠하여 굳어져있었다.

응상은 서무계장에게 미국고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예, 이분은 미군정청에서 우리 시험장에 파견되여오신 제임스고문관님이십니다.》

전에없이 실무적인 태도로 응대한 서무계장은 두손을 마주쥐고 제임스에게 허리를 굽히며 류창한 영어로 《저분은 그동안 시험장책임자로 사업하고있는 계응상박사선생입니다.》라고 했다.

《케은산박사!》

제임스는 입귀에 물었던 담배를 깊숙이 빨아 연기를 후 하고 내뿜더니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탁앞으로 자리를 옮겨앉았다.

자기를 지그시 건너다보는 계박사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감촉하고 초보적인 례의라도 지키지 않을수 없는듯싶었다.

계박사는 제임스 맞은켠에 앉았다.

제임스는 상관의 권위를 보이려는듯이 상반신을 뒤로 제빠듬하니 제끼고 려송연을 한쪽입귀에 붙여물었다.

《내 그동안 시험장실태를 초보적으로 료해해보고 당신을 몹시 기다렸소. 시험장에 좋지 않은 기운이 떠돌고있소. 당신 빨갱이들한테 롱락당하고있단 말이요.》

계박사가 영어를 잘한다는것을 안 서무계장은 통역을 하지 않았다. 응상도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러운 표정을 짓고 우리 말로 응대했다.

《당신은 무엇을 념두에 두고 그렇게 말하고있소?》

안상길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 말을 제임스에게 영어로 통역하였다.

응상의 쌀쌀한 대꾸에 모욕을 느낀듯 제임스는 미간을 찌프렸다.

《내 알아본데 의하면 당신 끌어들인 잠사부장 정태연, 벼재배육종부장 최학천 다 좋지 않은자들입니다. 그 사람들 내보내야 합니다.》

응상의 얼굴은 해쓱하니 질리였다.

해방이 되여 서대문감옥에서 출옥한 정태연은 농학박사 계응상이 수원농사시험장을 책임지고 운영한다는 말을 듣고 안해와 딸이 기다리고있는 고향으로 찾아가기 전에 먼저 여기로 찾아온 사람이다.

수원고농을 마치고 안동고등학교 교원을 하면서 생물연구실을 운영하던 그가 어찌하여 맑스-레닌주의독서회사건에 관여했다가 서울서대문감옥에 감금되였었는가 하는 내막은 자세히 알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10년형을 지고 감방안에 갇혀있을 때에도 멘델과 모르간의 저서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차디찬 감방에 누워 꿈을 꿀 때에조차 과학실험실에 앉아있는 자기를 그려보았다고 한다.

폭양이 쏟아지던 8월의 한낮 피골이 상접한 태연이 바로 이 방에 찾아와 응상의 손을 꼭 붙잡고 여기서 밤을 패며 연구사업을 할수 있게 해준다면 여한이 없겠노라고 목메여 말하던 그 광경을 어찌 잊을수 있단 말인가. 웬일인지 계응상은 무작정 이 사람을 돕고싶었다.

그는 태연을 집에 청해다가 몸이 추서라고 닭곰을 해먹였고 자기가 가장 중시하는 잠사부를 그에게 맡기는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벼재배육종부장으로 임명한 최학천은 응상이 중국 광동에서 귀국하여 신의주 헌병대감옥에 감금되였다가 나온 후 농촌을 돌아보면서 경기도 부평에서 만난 농민과학자였다.

그는 검정시험으로 수원농전을 마치고 소작을 하는 자택에서 눈물겹게 연구사업을 하면서 돌피와 벼를 교잡하여 새로운 벼품종을 만들어내고있었다.

시험장 장장이 된 계응상은 누구보다먼저 농촌에 묻혀 혼자서 연구사업을 하려고 모대기고있는 학천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람을 띄워 그를 데려오게 했던것이다.

그런데 무슨 리유로 이들을 시험장에서 내보낸단 말인가. 그는 끓어오르는 격분을 지그시 누르며 조용히 대꾸했다.

《그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이 일본놈들한테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요.

그리고 그들은 재능있는 과학자들이란걸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보오.》

서무계장이 응상의 말을 통역하자 제임스는 두눈을 찌프리며 팔을 내저었다.

《당신 모르고있소. 그들은 공산당이요. 당신 박사란 사람이 빙고에 보관한 누에알 부패시킨것도 모르지 않소.》

계박사는 낯이 벌개졌다. 그 역시 제임스가 말하는 두 부장이 저녁마다 그 어떤 비밀모임에 참가하고있다는것을 모르는바 아니였다.

그러나 응상이 알고있건대 그들은 맡겨진 연구사업을 근기있게 밀고나가는 완강한 사람들이며 례절바르고 진실한 사람들이였다.

각자는 자기가 공명하는 사상을 지닐수 있다.

그에 대하여 이래라저래라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것이 아닌가. 그러기때문에 응상도 이들에게 그에 대해서는 별로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응상이 격분한것은 주인도 무관해하는 일을 가지고 나그네가 이러쿵저러쿵하는것때문만이 아니였다.

새파란 젊은놈이 고문관이랍시고 남의 집안에 뛰여들어 반말질을 하는 꼴을 참고있자니 기가 막혔다.

모름지기 그가 조선젊은이였다면 귀쌈을 붙이고 상대도 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초면에 만난 외국인의 소행이므로 이 점도 꾹 참았다.

하지만 그가 빙고의 누에알이 어쩌고저쩌고하는데는 화가 천둥같이 났다. 해방직후의 혼란통에 빙고에 건사했던 누에알들을 소홀히 한탓으로 더러 부패된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검사해본데 의하면 그것들이 아주 못쓰게 된것은 아니였다. 허나 누에알 몇장이 부패되였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의 오만무례한 태도에는 주인이 하인에게 하대하는것 이상의 모욕적인것이 엿뵈고있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계응상을 격분케 했다. 그동안 계응상은 주인노릇을 하며 보란듯이 시험장을 운영해나갔다.

이제는 그 누구도 조선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할수 없다. 그들에게는 30년간 노예살이를 한 쓰라린 력사의 교훈이 있지 않는가. 한데 바다를 건너온 이 《신사》는 오만무례하게도 또다시 그들에게 호령질을 하는게 아닌가.

그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저 사람 보구 말하시오, 남의 상에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지 말라구 말이요.》

《계선생!》

안상길은 제법 엄숙한 기색으로 말을 건넸다.

《우리 한국을 원조하기 위해 원로에 찾아오신 신사인데 신사답게 대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상은 하루아침에 자세가 홱가닥 달라진 서무계장을 혐오에 찬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는 안상길이 인간의 신의에는 신의로 보답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고 성큼 서무계장의 자리에 등용했었다.

한데 이자가 그동안 한짓이란 정태연과 같은 진실한 사람들의 뒤를 캐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던것이란 말인가.

계응상은 험오에 차서 안상길을 쏘아보며 쌀쌀하게 뇌이였다.

《어서 내가 말한대로 고문관한테 고하게.》

서무계장은 턱을 쳐들고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응상이 한 말을 영어로 제임스에게 전달했다.

우묵한 눈확속에 박힌 제임스의 파르스레한 눈이 바글바글 끓었다.

제임스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조선말로 쏘아붙이는것이였다.

《당신 미군정청 법령2호를 보지 못했습네까?》

응상은 놀라와서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이자는 조선말을 곧잘 번지고있었다.

그런데 계박사를 떠보기 위하여 조선말을 모르는체 하고있었던것이다. 계박사는 몸서리를 치며 침착하게 응대했다.

《알고있소.》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정식으로 언명하오. 적산으로 인정된 수원농사시험장의 재산과 관리권은 미군정에 속하게 되였소. 알만한가?》

계박사는 까딱하지 않고 상대방을 빤히 건너다보았다. 제임스는 입귀에 물었던 려송연을 뱉어버리며 씨벌였다.

《그러나 우리 미국사람 관대합니다. 당신 농학박사라는걸 고려하여 시험장 장장으로 그냥 둬두겠습니다.》

《…》

《새 장장은 우선 자치위원회를 해산하고 불순분자들을 시험장에서 내몰아야 하오. 첫째로 불온사상 퍼뜨리는 적색분자 정태연, 최학천.》

《…》

《다음으로 안상길을 시험장 부장장으로 임명하오. 알겠소?》

응상은 억이 막혀 독을 내뿜는 제임스를 뻔히 쳐다보았다. 그는 제임스에게 미국은 조선땅에 해방자로 나타났는가 아니면 일본 《총독부》를 대신하는 새로운 통치자로 나타났는가고 묻고싶은것을 간신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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