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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 회


후 편
보석은 빛발을 받다


제 1 장


1


참새도 아직 깨여나지 않은 어뜩새벽 계응상은 밤이슬이 흠뻑 내린 시험장뽕밭사이길을 천천히 걸었다. 길차게 자란 뽕밭에서는 상크무레한 뽕잎향기가 물큰하게 풍겨왔다.

끝을 가늠할수없이 아득히 펼쳐진 뽕밭을 정겹게 둘러보며 걷던 계응상의 발걸음은 점점 떠지다가 우뚝 한자리에 멎어선채 움직일줄을 몰랐다.

참으로 인생이란 변덕스러운것이여서 애타게 갈망할 때에는 만사가 글러지기만 하더니 바라지도 원치도 않을 때에는 덜썩 모든것이 일순간에 성취되기도 하는것이였다.

해방후 시험장에 조직된 자치위원회성원들의 일치한 권고에 의하여 응상이 시험장 장장으로 선거된지도 벌써 반삭이 지났으나 그는 아직도 이 모든것이 일장춘몽과 같이 여겨지군 했다.

은은한 은빛서광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우뚝 솟은 2층사무실에서는 창문들을 여는 소리, 웅성웅성하는 말소리들이 활기있게 울려왔다.

간밤 밤참을 해다먹으며 밤늦도록 일을 하던 장원들이 어느새 깨여나 새날을 맞은것이다.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지은 계응상은 언뜻 시원한 이마를 번쩍 들고 사무실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정숙이 깃든 연구사들의 방에서는 이른아침부터 소리없이 일이 시작되였다.

그는 시험장에 질서가 잡히자마자 아침청소를 금지시켰다. 주위의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하는 그런 일은 하루일이 끝난 다음에 하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깊이 사색하며 능률적으로 일할수 있는 시간에는 그 누구도 번잡스럽게 굴어 학구적인 분위기를 흐트리지 않게 했던것이다.

정문수위는 응상의 지시대로 낮시간에는 그 누구도 들여놓지 않겠다는듯 철문을 굳게 닫고 통로옆에 엄숙히 서있었고 사뿐사뿐 발끝걸음으로 마주 걸어오던 실험공처녀는 공손히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계응상은 사무탁앞에 다가앉아 남도지방에서 사육할 목적으로 육종하고있는 새로운 누에교잡도식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잡힐듯말듯 하는 복잡한 교잡식에 한껏 주의를 집중하던 응상은 소리없이 사무실문이 열리고 중년의 한 사나이가 자취도 없이 방안으로 들어서는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박사선생님!》

가늘게 떨려나오는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고야 머리를 든 계박사는 흠칠 놀라 두눈을 슴벅이며 마루바닥에 넙적 엎드린자를 내려다보았다.

후줄근한 양복차림에 부수수한 머리며 재게 깜빡이는 예리한 눈초리는 너무도 혐오스러운 존재를 상기시켰다.

《네놈이 어떻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그는 불이 이는 눈으로 그자를 노려보았다.

《선생님, 부디 너그럽게 생각하시고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응상은 불길한 환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었으나 그자는 분명 지난 8. 15때 하찌야마장장과 함께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던 안상길이놈이였다. 응상은 서리발같은 눈초리로 그자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너는 도대체 네 하내비인 하찌야마를 붙잡고 바다건너로 갈것이지 어째 여기 나타났는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무러면 제가… 흑흑.》

상길은 억울하다는듯 눈물을 좔좔 흘리며 흐느끼였다.

《제가 그놈들한테 종사했던거야 할수 없어서 그런짓을 했지요.》

《더는 사람들을 롱락하려고 하지 말라. 인간이 량심을 팔면 벗들의 버림을 받고 민족을 등지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법이야. 썩 물러나 네 갈곳으로 가라!》

응상은 그자의 몸뚱이에서 시선을 뗐다.

하자 안상길이는 비통하게 흐느껴울며 애절하게 용서를 빌었다.

《박사선생님, 사람이란 실수를 할수 있지 않습니까. 제발 저를 저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단 한번만 회개할 기회를 주시면 꼭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아무리 제가 비렬한 행동을 했다고 해도 쪽발이놈들을 따라갈수야 없지 않습니까.》

이때 방문이 펄쩍 열리면서 잠사부장 정태연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마루바닥에 엎드려 흑흑 흐느껴울며 사죄하는 상길을 내려다보았다.

《저자가 시험장성원들이 말하던 그 안상길이란 작자일세.》

《그래요?》

정태연의 눈매에 노기가 피여올랐다.

《왜놈보다 더 얄밉게 놀았다는 그 서무계원.》

《그렇다네.》

《그런데 제 지은 죄를 벌로 씻을 생각을 하지 않고 속죄부터 구걸해나선단 말인가요. 나같으면 계선생님한테 다시는 얼굴을 내밀지도 못할겁니다. 그런데 또 기신기신 찾아와 청을 대다니.》

복도에서 마루를 구르는 발자국소리가 어수선하게 나더니 네댓명의 젊은 장원들이 우르르 장장실로 밀려들었다.

팔소매를 거둬붙이고 앞장에 서서 방안에 들어선 장대한 체구의 젊은이는 상길을 띠여보자 대뜸 그자한테 달려들어 멱살을 거머쥐고 일으켜세웠다.

《잘 만났다, 이 박쥐같은놈의 새끼야!》

상이 새파랗게 질린 안상길이는 그 젊은이를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푹 떨구었다.

태연부장이 방금 그자가 지껄인 소리를 뇌이자 체구가 장대한 젊은이의 두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흥, 개버릇 남주는걸 보셨습니까. 이놈이 왜정때 우리 조선사람사정 봐주는척 하며 간빼서 하찌야마한테 고자질해먹던걸 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 이놈은 이미 8. 15때 요정냈어야 할 자입니다.》

그 젊은이는 상길의 멱살을 마구 잡아흔들었다.

《저, 지당한 말입니다. 저, 저는 더 할말이 없습니다. 그저 처분만 바, 바랄뿐입니다.》

상이 해쓱하니 질린 상길은 숨을 할딱이며 입을 놀렸다.

《그만하게, 시체앞에서 머리 수그리지 않는 사람이 없고 고개를 떨구며 사죄하는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사람 없다네.》

응상 역시 그자의 치졸한 행동에 구역질이 났지만 이렇게 만류해나섰다.

모여선 사람들은 미간을 찌프리며 마루바닥에 기신없이 쓰러져 어깨를 들먹이는 안상길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상길이놈은 품속에서 조선남부지구의 토종누에알을 붙인 대지 여라문장을 사무탁우에 내놓고 중얼거렸다.

《왜놈 시험부장이 없애버리려던것을 제가 흑흑…》

안상길은 설음에 겨워 흐느껴울었다. …

풀자루가 되여 지싯지싯 돌아가 한동안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박혀있던 안상길은 얼마후 아들놈을 시켜 계박사한테 입직신청서를 냈다.

분노가 사그러지자 응상도 더는 성을 낼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자도 제 나라를 빼앗긴탓으로 왜놈들밑에서 어처구니없는짓까지 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 아닌가.

시험장자치위원회 위원들은 응상의 방에 모여 안상길이 문제를 놓고 론의가 분분했다.

《장담하지만 그런자는 절대로 개심하지 못합니다.》

《그게 어디 조선사람입니까. 그런 종자는 바위짬에서 나온 개아들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자치위원회 위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의 말을 끝까지 듣고난 응상은 심각한 기색을 지은채 침묵을 지키고있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안상길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것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는 지난날 자기와 안상길이 사이에 있었던 몸서리치는 사실들을 상기시키면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누구보다도 안상길의 치졸한 행동에 대하여 분격을 금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참으로 자유로운 환경이 요구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지난날의 흠집을 탓하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마다하면 누구를 데리고 새 나라의 과학을 일으켜세우겠습니까. 그 역시 기술자인만큼 너그럽게 생각하고 개심할 기회를 줍시다.》

계응상이 곡진한 어조로 이렇게 설득시켰으나 자치위원들은 여전히 수긍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박사가 자신이 꼭 책임지고 사람을 만들어놓을테니 용서해주자고 말해서야 마지못해 자치위원들도 수긍해나서게 되였다.

그리하여 응상은 안상길을 시험장 서무계 계장의 자리에 등용했다.

그날 상길은 응상장장앞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하해같은 이 은혜에 결초보은하겠노라고 몇번씩이나 되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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