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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에서 얻은 교훈

 

남조선에서의 나의 사회생활이 사범학교를 졸업한 1956년에 시작되여 의거입북한 1988년에 끝났으니 그것은 만 32년간이라고 할수 있다. 이 기간의 첫 10년간에는 국민학교 교사로부터 대학교수자격까지 따느라고 책에 파묻혀있는 때가 많았고 교수가 된 다음의 20년간에도 문자그대로 명색이 대학교수였던지라 강의를 보장하느라고 또 많은 시간을 책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결코 책에만 포로되여있는 글뒤주가 된것은 아니였다. 정의로운 남조선민중은 내가 글뒤주가 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력사의 관조자가 아니라 력사의 참여자가 되도록 나를 부단히 떠밀어주었다.

남조선인민들은 정의감이 강한 인민이며 용감한 인민이다. 8. 15이래 오늘까지 항쟁에서 항쟁에로 점철되여온 남조선의 민중사가 이것을 말해주고있다.

내가 사회생활을 한 30여년간은 남조선에서 특히 갖가지 사변이 많은 기간이였는데 나는 이 기간에 리승만《정권》을 붕괴에로 몰아넣은 1960년의 4. 19인민봉기와 반통일적《유신》체제의 파멸의 시초를 열어놓은 1979년의 10월민주항쟁, 동방인민들의 반파쑈투쟁사에 큰 흔적을 남긴 1980년의 광주인민봉기 그리고 전두환일당의 장기집권책동을 저지한 1987년의 범국민적인 6월인민항쟁도 체험하였는가 하면 한편 4. 19의 열매를 찬탈한 5. 16군사정변과 7. 4공동성명을 유린한 《10월유신》, 남조선민중의 자주, 민주, 통일투쟁을 압살한 12. 12숙군쿠데타와 5. 17폭거와 같은 력사의 비극도 겪었다.

8. 15직후에 있은 10월인민항쟁과 2. 7구국투쟁, 단선반대투쟁 때에는 소학시절의 소년으로서 흥분속에서 그 모든 사변을 지켜보기만 했지만 전후에 있은 제반 사변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전후에 있은 사변들이 정의의 화신인 청년학생들과 관련되지 않은것이 없었으니만큼 량심을 가진 교육자로서 내가 그 모든것에 대해 관조자로 될래야 될수 없었던것이다. 그 과정에 정의를 위해서라면 결단코 나서고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할줄 모르는 나의 성격이 리념상에 앞서 체질상에서 굳어지게 되였다.

물론 이 과정에 개인적으로 볼 때 나는 잃은것이 많았다.

뼈저린 잃음의 첫 체험은 4. 19인민항쟁때였다.

앞에서도 언급되였지만 국민학교 교편을 잡고있던 나는 1960년 4월 고등학교 교원자격시험의 실기, 구답시험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갔다가 거기에서 4. 19인민항쟁을 맞았다.

그때 내곁에는 고부국민학교시절의 제자인 박성학이 있었다. 똑똑하고 대가 바르며 정의감이 강한 그는 내가 교실에서 갑오농민전쟁과 관련한 이야기를 펼칠 때면 누구보다도 열중해서 듣던 학생이였으며 방과후에는 늘 나를 쫓아다니면서 많은것을 묻군 하던 학구열이 높고 교원들이 총애하는 학생이였다. 그는 소학시절의 옛 담임선생이 상경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 숙소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그리하여 그는 나와 함께 항쟁의 거리에 뛰쳐나가 시위투쟁에 참가하게 되였다.

4월 26일 시위대오가 경무대로 육박하기 위해 광화문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내곁에서 구호를 웨치며 기세를 올리던 박성학이 갑자기 《야!》 하며 군, 경찰의 저지선을 향해 뛰여나가다 푹 쓰러졌다. 경찰의 흉탄에 맞았던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며 그를 안아들었다. 그의 가슴팍에서는 피가 솟구치고있었다. 나는 손으로 총상자리를 꽉 눌렀으나 솟구치는 피를 멈춰세울수 없었다. 그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손에 쥐여져있는 돌멩이를 자기의 총상자리를 누르고있는 내 손에 쥐여주면서 꺼져가는 목소리로 《선생님! 이 썩은 정치를 꼭 뒤집어엎어주세요.》라고 말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박성학학생은 4. 19항쟁에서 희생된 208명의 청소년학생, 시민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때로부터 25년의 세월이 지난 1985년 11월 나는 부조리로 가득찬 이 반인민적사회에서 또 한번 큰것을 잃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반《정부》시위투쟁에 참가했다가 희생되였던것이다. 잊을수 없는 국민학교 교사시절의 제자를 잃은 바로 그 서울에서 나는 귀중한 아들까지 잃었다.

당시 남조선전역에서 1 000만명개헌서명운동이 벌어지고있었는데 그 투쟁의 일환인 한 시위현장에서 전투경찰대의 추격을 받다가 어느 건물에서 추락하여 목숨을 잃었던것이다.

자식은 죽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내 가슴에 묻은 아들을 두벌죽음시키는것과 같아서 원래 이 글에서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당초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교분석의 방법으로 력사를 고찰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부득이 그것을 회고하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었다.

우에서도 썼지만 4. 19로부터 1985년까지라면 4반세기세월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4반세기동안에 이 남《한》땅에서 과연 변한것이 무엇인가.

나는 아들의 죽음이 절통하여 하늘과 땅에 대고 울분을 토했다. 과연 이 땅에 달라진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4. 19항쟁용사들이 피를 뿌리면서 그토록 민주주의와 자유를 절규했건만 그것은 이 땅에 오지 않았다. 바로 그래서 4. 19의 연장으로 3. 24봉기, 6. 3봉기, 3선개헌반대투쟁, 10월민주항쟁, 광주봉기와 같은 항쟁들이 련발되여온것이 아닌가.

5. 16군사정변과 《10월유신》, 9개의 긴급조치와 12. 12숙군쿠데타 그리고 5. 17폭거와 같은 파쑈독재를 반대하여 항쟁의 불길속에 뛰여든 수많은 용사들이 민족의 제단에서 산화되여갔으니 력사의 반동들에 의해 정의의 사자인 우리 젊은이들이 무참히 희생당하는것을 언제까지나 보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자문하면서 가슴을 쳤다.

나는 4. 19세대에 속한 사람이며 1985년당시 어언 50줄에 다달으고있었다. 그런데 4. 19세대가 중년이 되여 다시금 자기 아들딸들이 반동들의 총칼에 희생되는것을 보아야만 하는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비극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면 왜서 이런 비극적인 일이 생겨난것인가.

나는 그 원인을 캐보기 시작하였다.

나는 우선 자신의 무능의 원인을 파고들면서 교훈을 찾아보았다.

우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나는 원래 불의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며 불의와 맞다들면 먼저 싸움을 걸기도 주저치 않는 사람이였으나 싸움의 결과는 빈번히 실패였다.

돌이켜보니 나는 첫 투쟁에서부터 고배를 마셨다.

국민학교 교사시절에 나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선거에 참가했는데 그때 고부면의 이웃인 소성면의 선거구에서 자유당의 부정협잡이 드러났었다. 투표후 투표함을 차로 이송하던중 여당패들이 투표함에서 야당표를 걷어내고 여당표를 쓸어넣었다가 들장났다. 투표함호송순경이 목격하고 량심선언의 발표로 그것을 폭로했던것이다. 이것이 언론에 공개된 박재표환표사건이다. 그때 군적으로 큰 규모의 투쟁이 벌어졌었는데 그 투쟁의 앞장에 나도 서있었다. 그러나 그 투쟁에서 나에게 차례진것은 체포구속과 고부국민학교에서 이평국민학교에로의 추방뿐이였다. 물론 환표협잡은 질질 시간을 끌다가 공개적으로 묵인되였다.

나는 이렇듯 첫 출전에서 실패를 면치 못한데 이어 4. 19항쟁마당에서는 사랑하던 제자를 잃고 그때로부터 4반세기가 지나는 기간 수많은 용사들이 자주, 민주, 통일을 부르며 쓰러지는것을 목격한데 이어 나중에는 귀중한 아들까지 잃게 되였던것이다.

나는 마침내 찾아야 할 교훈을 찾고야말았다.

민중은 기승부리는 력사의 반동들을 어찌하여 압도하지 못했느냐? 그것은 위대한 사상으로 정신무장하지 못했기때문이였다. 바로 그것이였다. 내가 찾은 교훈은 정의감과 정열만으로는 안된다는것, 향도의 사상이 있어야 한다는 바로 그것이였다. 위대한 사상 다시말해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사상으로 무장하지 못했기때문에 이남의 민중항쟁은 룡두사미격으로 끝나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자주, 민주, 통일투쟁에서 승리하려면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혁명사상으로 무장하는것을 급선무의 과제로 제기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이것은 4. 19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내가 찾게 된 교훈이였다.

민중이, 나자신이 잃어온 하많은것에서 얻어낸 진리이기도 하였다.

이 진리는 망망 백사장에서 얻어낸 미세한 사금알갱이 천만개와도 바꿀수 없는 더없이 고귀한 재부였다.

이런 확신이 심장을 틀어쥘수록 나의 시선은 더욱더 북으로 쏠리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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