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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 회


전 편
집없는 나그네


제 6 장


5


1940년 이른봄, 계응상은 경기도 수원 팔달산중턱에 지어놓은 자그마한 기와집 한채를 샀다. 중국에서 귀국할 때 몸에 지니고온 돈이 요긴하게 쓰이였다. ㄱ자로 지은 이 집은 나지막한 산릉선의 맨 꼭대기에 자리잡고있어 조용하기도 하거니와 앞이 환히 트이고 숨쉴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어 좋았다. 구태여 흠을 찾는다면 뜨락에 우물이 하나 있긴 했으나 가물철에 들어서면 인차 바닥이 드러나버려 산밑에 내려가 고욤나무집 우물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고 구들에 불이 잘 들지 않아 방이 찬것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반생을 타향살이에 시달린 그는 이런 조용한 집에서 그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연구사업을 할수 있게 된것이 오랜 숙망이 실현된것만침이나 대견스러웠다.

그는 땅이 풀리기가 바쁘게 뽕나무모 여라문단을 사다가 집뒤 경사지에 심고 가중나무도 산에서 몇그루 떠다가 마당귀에 심었다. 그는 허드레 잠뱅이를 걸치고 인분을 퍼다가 터밭에 죽죽 뿌렸다.

《피-》

응상이 중국으로 건너간 후에 태여난 막내딸은 책가방을 메고 소학교로 가다가 역한 내가 난다고 코를 싸쥐였으나 그는 껄껄 웃었다.

《그래두 여기서 주먹같은 올감자를 캐면 선참으루 삶아달라구 조르겠지.》

응상은 안해와 함께 땅이 녹자마자 싹틔운 올감자며 완두콩을 심었다. 두둑에는 올감자, 골바닥에는 완두콩, 부루, 쑥갓을 심고 도랑섶에는 근대를 박았다.

그릇가지며 솥 등속을 대수간 싸가지고 덕다리에서 나온 응상의 안해는 결혼후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제집에서 살림살이를 시작했으나 정주에 있는 집이며 거기에 사놓은 땅에 더 마음이 끌리여 새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였다.

근 30년동안 과부처럼 홀몸으로 소작살이를 하며 애면글면 살아온 그는 남편이 중국에서 돈을 부쳐오자 그 돈을 한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꼭꼭 모아 땅을 사놓았던것이다. 농사군의 딸인 그는 땅보다 더 소중한 재산이 없어보였다. 돌각밭 몇두락 얻어부치노라고 피눈물을 짠 생각이 들어 더 땅뙈기들에 마음이 끌렸는지 몰랐다.

계응상이 팔달산중턱에 집을 잡고 연구사업을 시작하자 전국각지에서 잠업과학에 뜻을 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찾아왔다. 어느날 차림새가 단정하고 하이칼라머리를 한쪽으로 매끈하게 빗어넘긴 안상길이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저는 오래전부터 선생님의 제자가 되길 몹시도 갈망해왔습니다.》

그는 응상이 게면쩍어할 정도로 머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는것이였다. 알고보니 그는 계응상이 다닌 고등잠사전문의 2년후배였다. 수원농전시험포에서 고원으로 일하는 그는 틈만 있으면 응상을 찾아왔다.

엉뎅이가 가볍고 붙임성이 좋은 그는 응상이 미처 손을 대지 못하는 집주변의 잡초도 뜯어주고 터밭을 일구어 남새씨앗도 묻어주었다. 그는 응상이 새롭게 육종하려고 하는 가잠의 품종적특성에 관한 열띤 이야기를 귀담아듣고는 모난 턱을 재게 끄덕이였다.

《정말 훌륭한 착상입니다. 왜놈들은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쳐오던 누에품종들을 멸종시키고 조선기후풍토에는 잘 맞지도 않는 제나라 누에품종들을 잔뜩 가져다 퍼뜨려놓았지요. 그때문에 농민들이 얼마나 애를 먹고있는지 모릅니다. 생활력이 약해서 누에는 자꾸 죽지, 수확고가 낮아서 수입은 적지, 그저 제놈들 제사공장수익성을 높이는데 유리하게 실 잘 풀리는 품종이면 그만인셈이거던요.》

응상은 자기의 의도를 쉽사리 리해하고 격려의 말을 해주는 상길이 진정 고마왔다. 고독하게 그 누구의 방조도 받지 못하면서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연구사업을 하고있던, 그 어느때보다도 방조가 필요한 그런 때에 상길이 자기를 찾아준것이야말로 천만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흥분에 겨워 말했다.

《면바로 찔렀네. 일본자본가들에게 조선농민들의 리해관계가 무슨 상관이겠나. 조선과학자가 조선에 필요한 누에품종을 만들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것을 해주지 않네. 그러니 우리가 이것을 꼭 해내잔 말일세.》

《저도 선생님의 육종사업을 힘닿는껏 돕겠습니다.》

상길은 응상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응수해나섰다. 대답을 쉽게 하는 사람치고 신중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졌으나 상길의 처사는 경솔한 태도라기보다는 민감하고 열정적인 성미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상길의 생활에서 잘 리해되지 않는것은 그가 공부를 하는 동안 촌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고생한 안해를 배척하고 기생퇴물인 젊은 안해를 데리고사는것이였다. 수원바닥에서 상길이와 면식이 있는 사람치고 그를 표리부동한 인간이라고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휴가를 받고 찾아와서 연구사업을 군말없이 도와주는 그를 응상은 나무랠수 없었다. (흠이 없지 않은 사람이지만 과학탐구에는 애착심이 있는 일군이야.) 그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응상이만은 이렇게 항상 그를 호감을 가지고 너그럽게 대하였다.

1943년 여름에 계응상은 마침내 고치가 크고 생활성이 강한 새 품종의 가잠을 육종해냈다.

그는 이 품종의 이름을 애국품종이라는 의미를 담아 《국잠43호》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누구보다도 안상길이 이에 대해서 흔연히 찬성해나섰다.

《멋있습니다. 이제 이 품종을 개인종란업자들에게 넘겨주어 보급하면 농민들이 조상적누에가 환생하여 나타났다구 좋아들 할겁니다.》

《국잠43호》는 수확성이 높고 실풀림도 왜품종 못지 않았다. 품종선정을 위한 심사회는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수원농사시험장에서 왜부장 스쯔하라의 주관하에 열렸다. 이날 모임에는 중앙잠종취체소 검사계원으로 취직한 한수민이며 안상길이도 참석했다.

수민은 끝내 수치를 무릅쓰고 새파란 왜계장밑에서 잠종검사도장을 누르는 하급계원노릇을 하게 되였다. 응상이 감옥에서 풀려나와 채하동에 있는 그의 집에 들렸을 때 우려를 느꼈던 일이 저질러지고야만것이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응상이네 집에 전과 같이 드나들며 신세타령을 하군 했다. 밥술은 제대로 먹게 되였지만 수치감을 무릅쓰고 살자니 사람사는것 같지 않다는것이였다.

연탁앞에 나선 스쯔하라는 뜻밖에도 처음부터 메마르고 딱딱한 어투로 《국잠43호》가 《내선일체》를 흐리게 하는 매우 유해로운 품종이라고 딱지를 붙였다. 작달막한 키에 근시안경을 낀 스쯔하라는 매섭게 뇌까렸다.

《우리 일본에서는 전시체제에 맞게 실풀림이 좋은 누에품종에 중점을 두고 누에품종을 육종보급하고있습니다. 그런데 〈국잠43호〉란 품종은 그 명칭부터 모호한데다가 실풀림중점이 아니라 농민들의 리익존중이라는 그럴듯한 미명하에 조선고유의 품종을 되살리려 하고있는것입니다. 가쯔라씨가 의식적으로 이렇게 했다면 우리는 이를 결코 소홀히 할수 없습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과학계는 이런 불순한 의도를 용납하지 않을것입니다.》

단죄하듯 열을 올려 부르짖는 스쯔하라의 말을 들은 응상은 숨이 컥 막히는것 같았다. 그는 애당초 이런 곳에다 품종을 선택해달라고 내놓은 자신의 처사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이들이 이렇게까지 그의 연구성과를 짓밟으려들자 강한 반발심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이 육종한 《국잠43호》의 우월성을 왜놈들이 육종한 누에품종과 대비하여 설명하면서 힘주어 언명했다.

《당신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던간에 〈국잠43호〉가 높은 생산성을 가진 품종이라는것은 부정하지 못할거요.》

《로골적인 도전인가?》

벌떡 일어난 스쯔하라는 불이 이는 눈초리로 응상을 노려보았다. 그가 눈짓을 하자 키가 멀쑥한 잠사부의 왜고원이 일어나 그럴듯한 론거를 내걸고 응상이 육종한 품종을 사정없이 족치기 시작했다. 미리 짜고 준비한 판에 박은 토론들을 일일이 귀담아듣는다면 신경이 바줄처럼 든든해도 견디지 못할것이다. 응상은 그자의 횡설수설을 귀전으로 흘려보냈다. 이때 뜻밖에도 안상길이 연탁앞으로 걸어나갔다.

응상은 자못 놀람에 차서 앞을 주시했다. 상길은 연탁의 량모서리를 두팔을 벌려 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 저는 가쯔라선생을 존경하는 제자들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러나 선생이 오늘 심사회에서 내린 의견에 마땅한 주의를 돌리지 않는 조건에서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군요. 물론 저는 여직껏 가쯔라선생의 연구사업을 방조해왔습니다. 하지만 방금 스쯔하라선생이 하신 말을 정심해 들은 저는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보십시오. 국잠이란 국은 무슨 뜻입니까. 애국이란 뜻을 상징한게 아닙니까?》

응상은 아연실색하여 안상길을 쳐다보았다. 그는 상길이 갑자기 정신이상이 생겨 본의아닌 실언을 하고있다고 믿고싶었다. 과연 그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이라면 어찌 엊그제까지 제 입으로 극구 찬양하던 품종에 대해서 험구질을 할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안상길이 조금도 정신이상이 생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어느때보다도 천연스러운 태도로 장내를 향해 인사를 하고 유유히 걸어내려오는것이였다. 응상은 너무도 억이 막혀 고개를 돌리고 상길의 반질반질한 상판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순간 상길은 군기침을 깇으며 시틋하여 턱을 쳐들었다. 랭기가 확 풍기는 돌발적인 그의 태도는 이전의 그들의 관계를 무자비하게 잘라던졌다는것을 그대로 말해주고있었다.

고국에 돌아와 그가 그리도 애써 육종한 《국잠43호》는 매장직전의 위기에 처했다. 응상은 행여나 하는 애타는 기대를 품고 한수민에게 눈길을 돌렸다. 한데 한수민은 두눈을 내리깐채 입을 굳게 다물고있었다. 하긴 왜놈들한테서 계원자리까지 얻어 하는 몸이니 용빼는수가 없을건 당연한 일이였지만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심사희에서는 《국잠43호》가 무익한 품종이라는 락인을 내렸다.

이 일이 있은 후 안상길은 응상의 집에 발길을 끊어버렸고 얼마 뒤에는 조선사람으로서 유일하게 수원농사시험장 고원으로 발탁되는 특전을 지니였다. 또한 그가 계응상에게서 벗어나자바람으로 어찌나도 왜장장의 턱밑에서 삽살개처럼 돌아치는지 하찌야마도 상길을 1등일본인으로 추어준다는 소문이 짜했다.

인간에 대한 신의도 의리도 없는 더러운 놈! 응상은 길가에서 맞다들린 안상길의 상판에다 침을 탁 뱉고는 돌아섰다. 제 일신의 출세와 안락을 위해서는 민족도 스승도 서슴없이 팔아먹는 이런 인간쓰레기와는 두번 다시 상종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다.

며칠후 어느날 저녁 느지막해서 한수민이 응상의 집에 찾아왔다.

《여보게, 난 자네 덕에 취체소일도 그만두어야 할가보네.》

응상은 의아하여 수민의 둥실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수민은 큰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내 심사회장에서 그놈들한테 몇마디 한댔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렇지만 난 스쯔하라한테 할 말은 다 했네. 그랬다구 저자들이 어쩌는지 아나? 내가 마치나도 자네와 한짝이 되여 뒤에서 조종이나 하는것처럼 욱박지르더란 말일세. 한사코 자네와 무슨 모의를 했는가고 따집데. 대지 않으면 재미없다나. 무서운 세상이야.》

(그런 일두 있었단 말인가. 하긴 철부지 소학교애들이 조선말 한마디만 해도 귀쌈을 치고 벌금을 받아내는 세상이니 무슨 일인들 없으랴.)

응상은 애무하게 욕을 본 벗을 좋지 않게 여긴 자신을 자책했다.

응상은 겨울동안 집안에 꾹 배겨있었다. 불이 들지 않는 랭방에 앉아서도 곱은 손을 화로불에 녹이며 이를 사려물고 그간 진행해온 연구사업을 종합하여 《뽕누에의 고치색 및 알형의 유전에 관한 연구》라는 론문을 집필했다.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과학으로 무장한 그는 과학으로 싸우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던것이다.

그는 이 론문을 규슈제대박사원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 론문에는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근 10여년동안 누에를 실험자료로 하여 유전연구를 진행한 계응상의 과학적업적이 집대성되여있었다. 규슈제대교수협의회에서는 저자인 계응상의 참가없이 그의 론문을 심의하고 교수전원의 찬성하에 계응상에게 농학박사를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때 그의 박사론문은 출판될수 없었다. 후날 여러 나라 말로 출판된 그의 선집에 수록된 그의 론문은 그때 어찌하여 빛을 보지 못했는가.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기때문에 그때 이야기하기로 하자.

어쨌든 관청의 도움이 없이는 연구사업을 해나갈수 없다고 한 정주원종장 왜장장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였다.

응상은 웃방 한간을 내여 실험실이며 잠실들을 꾸리긴 했으나 자금이 많이 드는 렌트겐촬영기나 특수화학시약에 의한 돌연변이시험 같은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종자누에들을 유지해나가기도 힘에 겨웠다. 게다가 누에고치공출이 심한 때여서 날이 갈수록 뽕잎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매일 점심밥을 싸가지고 집에서 퍼그나 떨어져있는 백운산정까지 톺아올라 산뽕을 따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안해와 막내딸도 가까운 팔달산에 올라 좀뽕을 따왔다. 종일 산을 헤매이다가 멜빵을 하여 뽕포대를 등에 지고 집에 내려오면 온몸이 매시근하여 책상앞에 마주앉아도 도무지 글줄이 눈에 밟히지 않았다.

그러나 두주먹을 부르쥐고 수원성주변의 광교산, 오락산, 동학산까지 오르내리며 아무리 산뽕을 따내려도 넉잠 자고난 숱한 누에를 제대로 먹일수는 없었다. 한 나라의 생물학을 세계적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 박사가 뽕잎을 따내리느라고 산을 메주밟듯 해도 시험누에 하나 제대로 키울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허나 무엇보다도 가슴아픈것은 그가 누에사육에 맥을 뽑다보니 과학자가 과학자다운 일을 하지 못하고 앉은방아를 찧으며 세월을 보내야 하는 그것이였다. 이웃들은 그의 딱한 처지를 동정하여 말했다.

《시험장 개밖의 채뚝뽕을 따다먹이슈. 족제비두 낯짝이 있다구 아무러면 남의것을 강짜루 빼앗은 뽕나무의 뽕을 돈주고 따다먹이겠다는데 그것조차 마다하겠소.》

개밖의 뽕나무들이란 시험장울밖으로 흘러내리는 개울건너 내뚝에서 자라는 묵은 뽕나무들을 말하는것인데 원래 이 뽕나무들은 조상때부터 임자없는 동리뽕나무로 불러오던것이였다. 그러던것을 왜놈들이 여기에 시험장을 세우면서부터 주변구역까지 시험장부지로 정해놓고 어쩌다가 동네농민들이 뽕잎을 한바구니만 따가도 도적놈으로 몰아 벌금까지 물리우고있었다. 선조들이 자손들에게 넘겨준 제 뽕나무에서도 마음대로 뽕을 따내지 못하는것이 어이없는 일이였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계응상은 더는 뽕잎을 대기가 힘겹게 되자 수원농사시험장까지의 십여리길을 터벌터벌 걸어내려가 하찌야마장장을 만났다.

《시험장에선 뽕잎이 남아돌아가는것 같군요. 개밖의 채뚝뽕나무에서 뽕잎을 좀 따다 먹입시다.》

하찌야마는 응상의 청탁에는 응대하지 않고 슬쩍 딴전을 피웠다.

《내 일전에 볼일이 있어서 규슈에 건너갔다가 대학에 들려 다나까 요시마로선생을 만났댔소. 계응상군의 안부를 묻더군. 》

하찌야마는 응상과 같은 해에 규슈제대 농학부를 졸업한 사람이다.

일본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복무하다가 제대되여 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딱딱한 관리풍이 몸에 푹 밴 인간이였다. 응상과 동기동창인만큼 마주앉으면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법도 하건만 그런 기미를 털끝만치도 드러내지 않았다.

《최근에 다나까교수선생이 세상에 내놓은 거작 〈유전학〉을 보았겠지?》

이렇게 묻는 순간에도 그의 얼굴에는 랭담한 빛이 깃들어있었다.

《보았네. 증정본을 한권 보냈더군.》

《아, 그래. 다나까교수는 아직도 자네에게 큰 기대를 걸고있더구만. 그러면서 나보고는 자네를 잘 도와달라구 당부하데.》

《고맙네.》

응상은 정색하여 례의를 표시하며 용건을 다시 상기시켰다.

《난 큰것을 바라지 않네. 개밖의 묵은 뽕잎이라도 팔아주면 좋겠네.》

《흠.》

하찌야마는 응상을 지그시 건너다보며 물었다.

《끝내 혼자서 연구사업을 계속할셈인가?》

《그렇네.》

《허허.》

허거픈 웃음을 터뜨리는 하찌야마의 입언저리에 싸늘한 미소가 스쳐지났다.

《좋네. 서무계장한테 말해두지. 신청서를 내서 문건을 나한테 올려보내도록 하게. 질서가 그러니 어쩌겠나. 달리 생각지 말게.》

《알겠네.》

응상은 두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계응상을 맞아들인 서무계장은 용건을 듣더니 싱글벙글하면서 옆방에 있는 자기네 계원한테 가서 청구서를 해가지고 오라는것이였다.

응상은 온몸을 불길처럼 태우는 수치와 모욕을 씹어삼키며 말없이 옆방으로 건너갔다. 한데 뜻밖에도 그 방에는 그의 마지막 한오리의 머리오리까지도 치욕에 떨게 하는 대상인 안상길의 밴질밴질한 상통이 기다리고있는것이였다. 생활이란 얼마나 공교롭고도 야살스러운것인가.

《헤헤, 이거 선생님이 어떻게, 어녕 저를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것 같더니 먼저 이렇게 찾아오십니까. 가쯔라선생, 인생이란 그렇게 속단할것이 아니지요. 어제는 원쑤였지만 오늘은 벗으로도 되지 않을수 없다는걸 잊어서는 안된단 말입니다.》

상길은 제법 입가에 여유있는 미소를 띠우고 능갈쳤다. 응상은 으스러지게 부르쥔 두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더러운 개야, 어제는 원쑤였지만 오늘은 벗이 어쩌구어째? 너 따위한테 굽신거리면서까지 청구서를 내야만 과학연구를 할수 있다면 나는 그것과도 깨끗이 결별하고말테다. 알겠느냐, 이 치사한 놈아, 그리구 똑똑히 명심해둬라. 나더러 두번다시 가쯔라선생이란 말을 했다간 절대루 용서하지 않을테다.》

청구서를 좍좍 찢어 상길의 상판에 줴뿌린 응상은 출입문을 《꽝.》하고 닫으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시험장마당을 가로질러 씨엉씨엉 걸어나오던 그는 마당가운데서 하찌야마와 정면으로 맞다들렸다. 그는 천연스레 물었다.

《왜 신청서를 가져오지 않나. 계장이 없던가?》

《됐네, 나한텐 시험장 뽕이 필요치 않네.》

응상은 분노로 뒤끓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르며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두눈을 간잔조롬히 쪼프리고 허청허청하는 응상의 걸음새를 여겨보는 하찌야마의 눈찌에 사나운 빛이 번뜩이였다.

집으로 돌아와 웃방문을 와락 열어제낀 응상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먹이를 달라고 머리를 휘젓던 손가락같은 누에들이 방바닥에 허옇게 너부러져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물큰한 누에를 한줌 거머쥐고 정신없이 내려다보는 응상의 두눈에서 불이 일었다.

《아, 분통하구나. 너희들을 이렇게 몰살시키게 되다니!》

그는 뿌옇게 흐린 하늘을 내다보며 통탄해마지않았다. 그것은 불볕이 삼라만상을 찌삶으며 내려쪼이던 1945년 8월 중복더위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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