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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 회


전 편
집없는 나그네


제 6 장


3


감방에서 풀려나와 트렁크를 찾아든 응상은 고개를 푹 수그린채 터벅터벅 경찰부현관을 나섰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기신없이 몇발자국 걸음을 옮기던 그는 길섶에 주저앉아 황급히 트렁크를 열어보았다.

어림짐작으로 눈에 익혀둔 갈대 한대를 뽑아든 그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참지에 붙여놓았던 금황색누에알들이 하얗게 피여버린것이였다.

그는 갈대를 길바닥에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두주먹을 불끈 틀어쥐였다. 그는 담장우에 전기철조망을 늘인 어둠침침한 경찰부의 건물을 녹여낼듯이 쏘아보았다.

(이 천하에 악독한 살인마들아!) 그 누군가의 멱살을 잡아흔들며 결판이라도 내려는듯 두눈에 불길이 펄펄 일었다.

분하고 원통했다. 오매에도 그리던 고국땅에 안기여 애지중지 키워온 금황색누에알을 한놈도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몰살시켰다고 생각하니 오장륙부가 녹아내리는듯 애가 타기도 했던것이다. 어찌 보면 누에가 당하는 수난이자 그의 수난인듯만싶었다.

아 불쌍한 누에들아, 너희들은 언제 가야 편안한 제집 잠박우에서 마음껏 뽕잎을 먹고 고치를 틀수 있겠느냐. 애타는 갈망을 하늘에 붙여보려는듯이 희뿌연 하늘을 우러러보는 응상의 눈에 눈물이 글썽하였다.

이때 가죽가방을 옆구리에 낀 한 양복쟁이가 지척지척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네였다.

《저, 농학사 계응상선생이 아니신지요?》

응상은 눈길을 돌려 허름한 홈스빵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를 의아하여 쳐다보았다.

《방금 감옥에서 나오시는 길이 아닙니까?》

응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복쟁이는 응상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이틀전에 살인미수로 재판을 받고있는 한 젊은 녀성의 운명에 대하여 취재를 하다가 뜻밖에도 선생이 해외에서 돌아오자마자 감옥에 잡혀들어가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응상은 초점이 흐린 눈길로 양복쟁이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만사가 귀찮았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요. 오히려 해외에서 돌아온 조선사람을 검속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고 보는것이 고국의 실정이 아닐가요?》

계응상의 심드렁하면서도 쓰디쓴 대꾸에 《동아일보》신의주지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응상과 나란히 시소방대탑이 있는 네거리까지 걸으며 말을 붙였다. 그러나 응상은 고개를 수굿하고 맥없이 걷다가 골목길로 꺾어드는 길이 나지자 먼저 말을 뗐다.

《인터뷰를 요청해주신것은 고맙습니다. 저는 지금 몹시 지쳤습니다. 후날 적당한 기회에 만나는게 어떨가요?》

지국장은 응상이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고싶어하지 않는다는것을 뚜렷이 감촉했다. 그것은 아마도 고국땅에서 받아안은 쓰라린 환멸때문인듯싶었다.

그는 허름한 봄가을외투에 중산모를 쓴 응상의 초라한 모습이 골목길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런 우연한 상봉이 계기가 되여 후일 《동아일보》의 문화생활란에는 《방랑하는 과학자》라는 표제하에 십수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계응상의 구슬픈 정상에 대한 짧은 기사가 실렸다.

시퍼런 하늘아래 음랭한 바람이 멋대로 불어치고있었다. 가냘픈 나무아지를 휘잡아흔들고 전선줄을 울려놓은 하늬바람은 좁은 행길우로 미친듯이 줄달음치며 먼지를 뽀얗게 말아올렸다.

응상은 옷깃속에 얼굴을 깊숙이 묻고 쫓기듯이 걸어갔다. 정주출신의 농학사 한수민이 채하동입구어름에서 리론유전을 붙안고 몸부림치며 생활을 유지하려고 사진관을 겸하고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었던것이다. 응상이 일본에서 수민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자연철학을 전공했는데 이후 전과하여 농학부를 마쳤다고 한다.

땅에 납작 붙은듯 한 단층집에 《정주사진관》이라고 붓글로 새긴 간판만이 우뚝한 집이 한수민의 사진관이자 살림집이였다. 수민은 손님없는 텅 빈 사진관의 난로앞에 혼자 앉아있었다.

그는 불덩이가 거의 사라져가던 난로에 번들거리는 비게탄덩어리를 한개 집어넣었다. 기름칠을 한것 같은 비게탄덩어리는 《부지직 탁탁…》 부산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활활 타올랐다.

그는 때이르게 잔주름이 촘촘히 얽힌 갸름한 얼굴을 들고 난로불을 들여다보며 시름에 겨워 말했다.

《탄값도 안되네. 종일 가야 한두사람 찾아오나마나 하다네.》

본처가 딸만 4형제를 내리낳는 바람에 아들 하나를 볼가 하여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댁네를 둔 그는 생활난에 시달리여 얼이 빠진듯싶었다.

가슴이 아팠다. 책상우에 널려있는 생물학잡지들만이 그가 그래도 자기 전공을 잊지 않고있었다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옛친구가 찾아왔다고 그는 본처를 시켜 동태 두마리를 사다가 생선국을 끓이게 했다. 응상은 수민의 본댁네가 지은 당콩밥에 얼벌벌한 동태국을 훌훌 불며 달게 먹었다. 오래간만에 청주 몇잔에 된장찌개며 시원한 김치국을 들이키니 정신이 번쩍 들고 몸이 날것만 같았다.

《수민이, 난 너무도 어리석었네. 고국으로 돌아온댔자 달가운 일이 기다릴리 만무하다는걸 짐작하지 못한바 아니지만 그래도 화물선에 몸을 싣고 인천항으로 들어서게 되자 희망과 기대로 부푸는 가슴을 어찌할길이 없었네. 참 인간의 미련이란…》 응상은 자기를 걷잡을수 없었다.

술기운이 온몸에 퍼지자 잠자던 감정이 온통 깨여나고 억눌렸던 심정이 칼끝처럼 예리해졌다.

한수민은 침통한 기색으로 응상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나오는 말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였다.

계응상의 존재야말로 여직껏 학문을 연구하는 조선청년들속에 초인간적인 노력을 경주하여 기적을 이룩한 유일한 사람으로 알려져있었다. 그만큼 그는 의지가 굳센 사람이였고 자기의 마음속에 단 한갈피의 나약성도 끼여들것을 허용하지 않은 억센 인간이였다.

그는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학업을 포기한 학생들이나 재능이 없다고 자기를 탓하며 물러서는 젊은이들에게 계응상의 이야기를 그 무슨 신기한 전설처럼 들려주며 확신에 차서 말하군 했다.

《조건타발을 하는 사람들은 나약한 사람들일세. 우리 조선청년들이 모두 계응상이처럼만 공부를 해보게. 그가 기울인 노력의 반에 반만 기울여도 자네들은 례외없이 큰 학자들이 되였을거네.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할수 없는 어엿한 사람들로 됐을거란 말야.》

그러나 그렇게 눈물겨운 생활을 이어가며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박사가 되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 나라가 없고보니 아무 죄도 없는 과학자를 달포지경이나 감옥에 처박아두고 만리타향에서 구해들인 누에알을 얼쿼죽여도 상소할데조차 없지 않는가.

《수민이, 내가 무서워하는게 무언지 아나. 왜놈들에게 붙잡혀들어가 〈자백서〉를 쓰지 않으면 풀려날수 없는 우리들의 불우한 처지때문이라면 내 가슴이 이다지도 괴롭지 않겠네.

우리 인민의 과학이 이렇게 짓밟히고 억눌린다면 조선의 미래는 더욱 암담해지리라는 그것일세.

미래가 없는 민족의 운명이란 과연 무엇이겠나. 왜 저놈들이 아무 죄도 없는 과학자를 생짜로 감방에 가두어놓고 고통을 주는지 아나? 민족의 넋을 탕쳐놓자구? 아니, 저놈들두 바보는 아니라네. 그네들은 그게 불가능하다는걸 모르지 않네.》 응상은 지긋지긋한 달포동안의 감옥살이를 돌이켜보며 마냥 괴여오르는 쓴물을 내뱉았다.

《그자들은 내가 초조하게 하루를 일년맞잡이로 치달아오르려고 한다는걸 알고 어떻게 하나 내 뒤다리를 잡아당겨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자는걸세. 눈먼 장님이나 바보들, 깨지 못한자들을 다스리는건 총명한자들을 다스리는것보다 쉬운 법이니까.》

창문으로는 기울어진 초생달의 어슴푸레한 빛이 흘러들고있었다. 연약한 달빛의 잔광이 얼비친 응상의 눈에서는 린광과 같은 푸른 빛발이 발산하고있었다.

한수민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응상의 눈길을 피하며 뇌이였다.

《그만하게. 그러다간 심장이 상처를 입어 견디겠나. 다년간 해외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고국에 돌아와보면 그런 생각이 칼끝으로 가슴을 후벼내듯이 그렇게도 뼈저리게 느껴질거네.

하지만 별수 있나. 우리는 그런걸 참구 살아가고있다네.》

《별수 없다니?》

응상은 수민을 뻔히 쳐다보며 정색하여 말했다.

《그래서 자네는 사진관을 경영하게 됐나!》 깊숙이 숙인 머리를 두손으로 쥐고있던 수민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겪어보게, 제가 당해보지 않고는 몰라.》

수민은 무거운 한숨만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응상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모처럼 만난 친우에게 지나치게 아픈 말을 던진것만 같아서 …

물론 인정사정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무자비한 생활의 강요에 의해서 그렇게 됐겠지만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환경을 무시할수 없는것이 인간이지만 악영향을 이겨나가는 거기에 참인간의 삶이 있을것이 아닌가.

이튿날 아침 응상은 말수가 적어진 침울한 친우의 배웅을 받으며 신의주역으로 나갔다. 객차에 오를무렵 한수민은 몹시 망설이다가 시답지 않아하는 기색으로 웅얼거리였다.

《자네가 언짢아할가봐 엊저녁엔 말을 안했네만 일간 내겐 달갑지 않은 일자리가 하나 생길것 같네.》

《그게 무슨 소린가?》

응상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벌써전부터 나더러 잠종취체소에 나오라고 하지 않나.》

《〈총독부〉직속으로 되여있는 거기에?》

《그럼 어찌겠나.》

수민의 목소리가 어찌나도 애처롭게 들렸던지 응상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꽥-》 새된 기적소리가 울렸다. 어성버성하여 마주보던 그들은 재촉하는 호각소리에 떠밀리여 황황히 헤여졌다.

여직껏 지조를 지키며 살던 사람들조차 이리되고마는가. 분명 차창밖에는 소리없이 피여오르는 운무가 연하게 대지를 감싸고있었고 그 은빛안개속에서 눈부신 태양이 빛을 뿌리고있었건만 응상의 눈에는 모든것이 시뿌연 장막속에 잠겨있는듯싶었다. 연보라빛하늘도 먹장구름이 뒤덮인 재빛하늘로 보였다.

지치고 맥이 빠진 그는 기신없이 차창가에 앉아있었다. 그가 이역의 하늘밑에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해 피눈물을 뿌리며 방황할 때에는 고향땅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일생의 숙망이 다 실현될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찾아오고보니 그 누구도 그가 돌아오는것을 바라지 않았다는것이 확실해졌다. 그는 한갖 청하지 않은 불손한 길손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무엇때문에 그렇게도 애면글면 애써 과학탐구의 길을 걸어온것인가.

렬차가 선천, 곽산을 지나 하단을 벗어나자 정주에서 내릴 손님들은 당반우에 얹어놓았던 짐들을 내리워들고 슬렁슬렁 승강대쪽으로 빠져나가고있었다. 응상은 속력을 죽인 기차가 전철기를 넘어서며 차체를 몹시 흔들 때까지도 굳어진듯 움쩍하지 않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며 분수에 어긋나게 너무도 큰것을 바란듯싶었다. 그때문에 그 기대가 여지없이 허물어지자 헤여날길 없는 실망에 빠지고만것이 아닌가. 응상은 자기의 존재란 식민지예속국의 불우한 학자에 불과하다는것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나들문을 빠져나가 역전식당에서 온반 한그릇을 사먹고 고향마을로 올라가리라 마음먹었다.

응상은 신의주경찰부감옥에서 놓여나올 때 이 땅에서 자기가 할일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이상의것을 바라는것이 허망하다는것이 명확해진 이상 더는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현실적으로 사고하기로 결심했다.

서울교외의 외따른 농촌마을에 자그마한 집을 한채 사놓고 집둘레에 뽕나무를 심어 가꾸면서 조용히 연구사업을 하며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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