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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회


전 편
집없는 나그네


제 5 장


4


38년 여름에 접어들자 일본군대가 광동으로 쳐들어온다는 흉흉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안에 일본군함이 출몰했다는 신문보도가 나고있었다. 시가지에서는 매일 수만명의 인민들이 내륙의 산간지대로 떠나가고있었다.

중개농공학교에서도 안전한 지대로 소개하기 위해 짐을 꾸리고있었다. 량반걸의 얼굴에는 나날이 침통한 빛이 짙어갔다. 그는 어느때까지나 계응상과 함께 일하고싶었다. 그러나 대세의 흐름은 각일각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것을 귀띔해주고있었다. 끝없는 동란에 휩싸여 몸부림치는 이 땅에 계응상을 한사코 붙들어두는것처럼 지각없는 행동이 어데 있겠는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본군대에 대한 위험도 위험이지만 사곳에서 국내전쟁의 불길이 무섭게 타오르는 형편에서 장차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키 어려웠다.

이런 혼란통에서는 과학연구는 고사하고 일신의 생명을 보존키도 어려웠다.

밤이슬이 축축히 내리는 밤이였다. 계응상과 량반걸은 정원 무화과나무밑에 놓인 교의에 나란히 앉아 밤하늘에서 가물거리는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새들의 지저귐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사위는 괴괴했다. 누구도 먼저 입밖에 내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더는 함께 연구사업을 계속할수 없게 되였다는것은 실험실에서 짐을 실은 마차를 련달아 떠나보내고있다는 사실이 그대로 말해주고있었다.

그들의 연구사업은 한창 꽃피는 시기를 맞이했다. 새로 육종한 누에품종들은 농민들속에서 호평을 받고있었고 실험유전연구에서도 나날이 새로운 성과를 올리고있었다.

미구하여 유전연구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내리란 확고한 전망을 내다보고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또다시 이 모든것을 버리고 방향없이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된것이다.

계응상은 정작 잊지 못할 친우와 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기는듯 한 애달픈 심정을 어찌할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길을 떠나면 어디로 갈수 있단 말인가. 마음은 두말할것없이 그리운 부모처자들이 기다리고있는 고향으로 가야 한다고 백번도 더 애타게 부르짖고있었으나 리성은 그렇지 못했다.

중국에 머무르는 기간 그는 남에게 수모를 당하며 과학연구를 하는 고통이란 무엇인지를 몰랐다. 물질생활에서도 부족을 몰랐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때때로 가슴을 뜨겁게 지져대는 향수와 부모처자에 대한 그리움이였다.

그러나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면 지성인에게 있어서 공기처럼 필요한 자유로운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우울해지는것이였다.

아, 언제면 내 조국에 돌아가 마음껏 과학연구사업을 하며 후대들을 키워볼것인가. 응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응상은 량반걸과 연구조수에게 누에육종연구실사업을 인계하기 시작했다. 잠실에서는 넉잠 자고난 누에들이 한창 뽕을 먹어대고있었다.

응상은 두눈을 지그시 감고 잠실복도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쉼없이 내리는 봄비와 같이 차분한 소리가 잠실안에 가득찼다. 정작 《중개1호》로부터 《중개585호》에 이르는 누에품종들과 작별을 하자고 생각하니 뜨거운것이 가슴속에 그들먹이 차오르는것이였다.

그는 광동에 온 첫해부터 이날에 이르도록 38대를 거듭하여 도태 육종해낸 누에앞에서 발길을 뗄수 없었다. 그는 그 잠박에서 충실치 못한 누에 네댓마리를 골라내여 빈 잠박에 옮겨놓고 벽에 매달린 사육일지를 벗겨들었다. 일지에 매달린 연필이 데룽거렸다. 그것도 언젠가 그가 손수 매달아준 연필이 아닌가.

그는 그 연필을 들고 방금 골라낸 누에수자를 일지에 적어놓았다. 그리고는 젊은 조수에게 낯을 돌리였다.

《이 누에는 아직도 도태육종의 한계점에 도달하지 않았소.》

《알겠습니다. 선생님이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계대를 반복하면서 도태육종을 계속…》

젊은 연구조수는 끝내 말끝을 맺지 못하였다.

《쎄쎄.》 (고맙습니다.)

그는 중년의 사육공녀성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했다.

《예.》

중년의 녀사육공은 황공하여 머리수건을 벗어들고 고개를 깊숙이 숙이였다. 언젠가 그 사육공은 잠실관리를 잘하지 못하여 쥐구멍이 난것도 모르고있었다. 여러날이 지나서야 생쥐가 들락날락하면서 네댓마리의 누에를 날라간 사실을 발견한 사육공녀성은 겁이 더럭 나서 일반누에잠실에서 키우는 같은 년령기의 누에들을 치포에 감추었다가 채워놓았다.

실험잠실들을 돌아보던 계응상은 그 잠박들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느 사육공들의 눈에는 섞인 누에가 알리지 않았지만 응상은 그것을 대뜸 알아보았다. 그는 아무말없이 다른 누에들을 골라서 빈 잠박우에 올려놓고 나갔다.

녀사육공은 속이 찔끔하여 어쩔바를 몰랐다. 며칠후였다. 사육공들이 한자리에 모인 휴계실에 나타난 계응상은 느닷없이 류창한 중국말로 옛말이야기를 꺼냈다.

《옛날옛적 어느 한 깊은 산골농가에 삼부자가 살고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는 맏아들을 불러앉히고 말했습니다. 〈내 요즘 두통이 너무 심해서 의원한테 찾아가뵈웠더니 이 약초를 주면서 독한 술 한잔에 담그어 먹으라고 하는구나. 네 어디 부엌찬장에 술이 있나 찾아보아라.〉

맏아들은 부엌에 내려가 찬장을 열고 술병을 꺼내서 밑바닥에 조금 남은 술을 사기잔에 부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반잔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잠시 생각을 해본 맏아들은 독에서 맹물을 슬쩍 퍼내여 술잔에 가득 채워서 아버지한테 가져다드렸습니다. 술잔에 약초를 담그어 마시던 아버지는 미간을 찌프렸습니다.

다음날 그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불러다놓고 전날 맏아들에게 한 말과 꼭같은 말을 했습니다. 둘째아들은 부엌에 내려가 찬장을 열고 술병을 꺼내서 밑바닥에 남은 술을 사기잔에 부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반잔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둘째아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둘째아들은 반이나 곯은 술잔을 그대로 들고 부친앞에 다가가 죄송스레 말했습니다. 〈불효막심하옵니다. 술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흠.〉 아버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그 술잔에 약초뿌리를 담그어 마시면서 말했습니다.

〈과연 너야말로 효자로구나!〉》

그 중년의 녀사육공은 귀밑을 붉히며 몸둘바를 몰랐다. 계응상교수는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 녀성은 이 일을 두고두고 잊을수 없었다. 한 잠박에 200마리씩 세여놓고 키우는 실험잠박에서 한마리만 섞갈려도 0. 5%의 차이가 나고 그 0. 5%때문에 공들여온 다년간의 과학연구가 종잡을수 없는 오리무중에 빠진다는것을 그는 뼈에 새길수 있었던것이다.

이때로부터 그 녀자는 거짓을 어녕 모르는 가장 책임성높은 사육공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자기를 말없이 새로운 생활에로 떠밀어준 이국의 과학자를 영원히 잊을수 없는듯 그 녀자는 잠실문밖에 선채 오래도록 움직일줄 몰랐다.

그는 다른 잠실로 들어가 한참 가시리에 오르는 새로 육종한 잠박앞에 쭈그리고앉았다. 잠박우에 골고루 펴놓은 딴딴하게 영근 누에고치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잠간사이에 한 잠박에서 허부럭고치며 충실치 못한 고치들을 골라내고는 또다시 다음잠박에서 누에고치들을 선별해나갔다. 따놓은 누에고치들을 선별할 때는 언제나 응상이 며칠이고 잠박앞에 붙어앉아 자기 손으로 마지막고치까지 골라냈다.

기계처럼 재빨리 움직이는 그의 손은 단 한개의 헛고치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이렇게 그가 일일이 골라내여 키운 누에는 몇십, 몇백만마리였으랴.

《오군!》

응상은 젊은 조수에게 유표하게 단단해보이는 누에고치를 손에 쥐여주면서 물었다.

《고치가 어떻소?》

오군은 뾰족한 손쪽으로 고치를 집어들자 별로 생각지도 않고 대답했다.

《고치가 뾰족한 앞쪽이 두껍고 다른쪽은 얇은것이 껍데기가 균일하지 못하여 골라내야 할것 같습니다.》

응상은 입가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 사람에게 자기가 맡아하던 품종도태도 안심하고 맡길수 있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이십여개의 잠실을 돌아보는데 옹근 하루가 걸렸다. 마지막으로 응상은 량반걸과 더불어 잠실끝방으로 들어갔다.

두사람은 다리쉼도 할겸 사육공이 일지를 쓰는 자그마한 책상을 마주하고앉았다.

《량선생, 내 부탁할것이 하나 있소.》

계응상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자기 나라의 누에종자를 타국으로 내가는 사람을 엄하게 처벌하는 법이 있다는것을 알고있소. 그렇지만 난 이 누에종자들을 우리 고국으로 가져가고싶소.

남이야 알아주든말든 내 할 일을 하리라는 시구절이 있듯이 제 나라는 빼앗겼지만 내 마음속에 조국이 있는 이상 나는 빈몸으로 귀향하고싶지 않구려.》

응상이 말을 맺기 바쁘게 량반걸은 성큼 응대해나섰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여기 있는 적지 않은 누에종자들은 선생이 우리 나라로 올 때 가져온것이고 그리고 나머지도 우리 나라 각지 수만리를 편답하면서 손수 수집하여다가 순계로 분리하고 새로운 품종으로 육종해놓은것들이 아니요.

옛법은 어쨌든간에 내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선생이 연구하던 누에품종들을 빠짐없이 보내드려야겠소.》

량반걸은 세심하고 빈틈이 없는 사람이였다. 그는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사육공에게 당부하여 받아놓은 누에알들을 품종별로 말끔히 가죽 트렁크속에 준비해두고있다가 선뜻 내주는것이였다. 응상은 10여년동안 정을 나누던 벗의 뜨거운 신의에 다시한번 가슴이 후더워졌다.

그는 만약 경우를 생각하여 누에알들을 갈대묶음속에 간수하고 트렁크속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때로부터 한주일이 지난 8월 어느날, 광동에서 웰남쪽으로 가는 밤려객차의 활짝 열어놓은 차창가에는 회색양복바지에 푸른 줄이 촘촘히 간 흰 와이샤쯔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당반우에 얹어놓은 트렁크를 여겨보는 그는 다름아닌 계응상이였다. 광동 앞바다를 일본군함들이 봉쇄하였으므로 하이퐁이나 하노이항에서 조선으로 건너가는 안전한 배편을 얻을수 있을가하여 남행렬차에 오른것이다.

그는 무거운 가슴을 안고 뒤로 흘러가는 재빛광야를 내다보고있었다. 그가 량반걸이며 가까운 제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광동역을 떠난것은 전날 저녁이였다. 응상은 출발의 기적소리가 울릴 때까지도 량반걸의 손을 꼭 쥔채 놓을줄을 몰랐다.

10여년전에 이국땅에서 서로 만나 언제 한번 떨어져있은적 없는 그들이였으나 이번의 작별은 상봉을 다시 기약할수 없는 길인것만같아 목이 메였던것이다.

《다시 만납시다.》

《기어이 또 만납시다.》

솟구치는 눈물을 씹어삼키며 서로 몇번이고 이렇게 다짐했지만 그것은 작별의 서운함을 메꾸기 위한 간절한 념원에 불과함을 어찌 모를수 있었으랴.

기차가 광동역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떠나온 역쪽에서 비행기폭음과 해안포파렬음이 아츠럽게 울려오고 무시무시한 화염이 하늘을 찌를듯 솟구쳐올랐다.

그는 기차가 중간역에 멎자 밖으로 뛰쳐나가 둔중한 폭음이 끊임없이 울려오는 광동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자신도 기약할수 없는 묘연한 길을 가고있었지만 다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벗을 폭연이 자욱한 속에 남겨두고 떠나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것이다.

이렇게 홀연히 떠난 길이 량반걸과 두번다시 만날수 없는 리별의 길이였다는것을 어찌 알수 있었으랴.

기차는 어느덧 윁남국경을 가까이 하고있었다. 그는 가죽트렁크속에 들어있는 누에때문에 마음이 조급했다.

먼 려행을 예견하고 갓 받은 누에알만을 갈대속에 채워넣었지만 이런 무더운 날씨에는 한달이 되기 전에 개미누에로 까나올수 있었던것이였다.

그래서 광동을 떠나기 전에 왕아바이가 장마당에 나가서 랭혈동물인 구렝이를 사다가 베천을 물려 독침을 빼고 자루에 담아 트렁크에 넣고 그것으로도 안심치 않아 고무주머니에 얼음을 가득 채워 낮은 온도에서 알을 유지하도록 했지만 안심치 않았다.

더우기나 맞은켠에 앉아 약담배를 지독하게 피우는 두 늙은이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와졌다. 차문을 활짝 열어놓았지만 시누런 담배연기는 천정에 구름처럼 끼여 사라질줄을 몰랐다.

독한 담배연기는 정갈하고 예민한 누에가 질색해하는 유독물질이였다. 안절부절 못하고 객실안에 떠도는 담배연기에 신경을 쓰고있던 응상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 가죽트렁크를 내리워들고 승강대로 나갔다. 밤바람이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승강대는 차안보다 한결 서느러웠다.

그러나 응상은 웰남의 수도 하노이가 가까와올수록 불안한 마음을 다잡기 어려웠다. 이십여일내로 배편을 얻지 못하면 누에알들이 모두 개미누에가 되여 깨여날것이 아닌가, 생각만 해도 숨막히는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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