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20 회


공신을 차례로 봉작하는데
남방에서 란적이 또 소란하다


대내상과 숙록후가 자기를 애타게 찾는것을 알리 없는 설중매는 이무렵 칠보산 개심사에서 삭발녀승으로 세월을 보내고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락은 황처사집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아들 황기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것이였다. 젊어서 동경룡천부에서 훈련교관노릇을 하였다는 황처사는 무예에 뛰여났다. 그는 남달리 영특하고 담력있는 황기를 친자식처럼 키우면서 설중매의 부탁대로 황기에게 십팔반무예를 비롯한 갖가지 무예를 배워주었다. 황처사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며 황기는 세상에 보기 드문 무예를 갖추게 되여 린근에서는 소년장수가 났다고 떠들썩하였다. 끌끌한 아들을 볼 때마다 설중매는 언제면 이 란리가 끝장나고 대내상을 다시 만날 날이 있을가 생각하며 한숨을 쉬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이날은 불가의 명절인 사월 초파일이다.

이날을 맞으며 개심사에서는 녀승들의 요란한 의식이 벌어졌다. 개심사는 나라의 수백개의 절간중에서 녀승들만 있는 큰 절이였는데 해마다 이날이 오면 개심사로는 온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녀승들이 모여와 의식을 벌리고 불가의 행사를 거행하군 하였다.

나라의 도처에서 모여든 수많은 녀승들중에는 황성의 월명사에서 온 늙은 녀승도 있었다. 그 로승이 의식이 끝난 후 차린 연회에서 황성소식을 꺼냈다.

《이번에 죽었다던 태자가 새 임금으로 등극했수다. 듣자니 황대내상과 설숙록후가 엄평과 전왕의 란을 평정하고 태자를 새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안의 질서를 세웠다고 합디다. 그래서 요즘 황성은 물론 항간에서 대내상과 숙록후와 같은 충신은 고금에 있어보지 못했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한곁에 심드렁히 앉아있던 설중매가 그 말에 앞으로 나앉으며 와락 로승의 손목을 그러잡았다.

《그게 정말이오이까?》

《정말이오. 온 나라에 소문이 짜하게 퍼진지 언제라구.》

《아니, 그럼 상공과 마님이 끝내…》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리며 설중매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로승이 얼빠진 사람마냥 중얼거리다가 흐느끼는 설중매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우? 스님.》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손을 뗀 설중매의 뺨으로는 구슬같은 눈물이 비오듯 흘렀다.

이튿날 설중매는 개심사의 주지를 찾아갔다. 설중매의 신분을 그제야 알고 주지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간 자기를 돌봐준 주지에게 사례하고 황성으로 떠날 의향을 밝혔다.

《몸둘 곳이 없던 소녀를 십오년세월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봐준 그 은혜를 어찌 한두마디 말로 다하리까. 후날 황성에 올라가 상공을 만나면 그 은혜의 천분의 일이라도 갚겠소이다.》

설중매가 대내상의 집안사람이라는 소식을 어느새 알았는지 개심사의 녀승들이 저저마다 떨쳐나와 황성으로 떠나는 그를 바래주었다.

이날도 황운이 숙록후와 설중매의 소식을 몰라 걱정하고있는데 시비가 들어와 웬 녀승이 꼭 대내상부부를 만나겠노라며 찾아왔다고 하는것이였다.

(시주받으러 왔는가?) 하고 짐작하며 황운은 들여보내라고 하였다.

정작 들어선것을 보니 아니 이게 누군가 그렇게도 찾고찾던 설중매가 눈앞에 서있었다.

대내상 황운은 믿어지지 않아 우두커니 서서 지켜만 보고있는데 숙록후 설봉선은 벌써 맨 버선발로 뛰여나갔다.

《마님!》

《살아서 끝내 돌아왔군요.》

설봉선과 설중매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웃으며 기뻐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설중매가 그간 사연을 울면서 이르니 대내상과 숙록후는 듣고 탄복해마지 않았다. 이어 그자리에서 사람을 띄워 개심사에 많은 시주를 보내고 황처사부부와 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설중매가 낳은 아들을 만나본 황운과 설봉선이 너무도 대견하여 혀를 찼다. 이름을 그냥 황기라 부르도록 하고 황처사부부를 양부모로 삼도록 한 다음 그들더러 함께 살자고 하니 황처사내외가 고집부리면서 거절하였다. 두세번 권하다가 할수없이 성안에 집 한채를 마련해주고 한집안식구처럼 허물없이 다니라고 당부하니 황처사내외가 황송해하였다.

이어 황위를 불러 동생과 대면시키고 서로 무술을 겨루게 하였는데 황기의 무술솜씨가 황위에 짝지지 않았다. 더우기 황기의 뽐창던지는 솜씨는 황운과 설봉선의 감탄을 자아냈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몸을 솟구쳐 휙- 휙- 왼손으로 뽐창을 던지고 달려오는 말에 다시 올라앉았다. 날아간 뽐창들은 하나같이 과녁에 명중되였다. 황기의 솜씨앞에 황운부부는 물론 황위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설중매의 말이 다른 무예도 뛰여나지만 달리는 말우에서 몸을 솟구쳤다가 뽐창을 던지고 다시 달리는 말을 잡아타는것은 황기의 특기타는것이였다.

며칠후 새 임금이 대궐에 태평연을 크게 차리고 황태후와 황후, 숙록후, 심원공주를 데리고 나왔다.

설중매와 출전장수들의 부인들, 선임금때 공신들의 부인들이 다 참례한 성대한 잔치였다. 한쪽에는 대내상 황운과 계루왕, 반안왕, 조명걸과 우시춘을 비롯한 장수들과 선임금시기의 공신들이 앉고 반대켠에는 부인들이 앉은 가운데 임금이 조서를 내렸다.

《제장수들의 공로로 천하를 회복하고 즐기는 이자리에 유독 미영이만 참석하지 못했도다. 이 어찌 천고의 원한이 아니랴.

제신들은 짐의 쓸쓸한 마음을 위로하여 미영의 동신(동으로 만든 형상)을 만들어 이 좌석에 참례시켜 함께 즐기게 하라.》

격정을 금치 못하며 조명걸이 나섰다.

《이미 죽고 없는 애인데 정문이나 세우게 해주소이다.》

임금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니라. 정문은 후세에 한갖 이름을 남기기 위함이거늘 짐이 오늘의 이 잔치석상에 미영의 동신이 없이 어찌 홀로 즐길수 있으리오.》

임금의 어조가 자못 절절한지라 감히 그 누구도 나설 생각을 못하였다. 대내상 황운이 임금의 령대로 동신을 얼른 만들게 한 다음 임금앞에 내세웠다. 임금이 한참동안 동신을 살펴보다가 두손으로 쓸어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짐의 오늘은 미영이로 하여 있거늘 짐은 이 동신을 늘 곁에 두고있으리라.》

특별히 좌석을 주어 동신을 앉히게 한 다음 잔치를 행하였다.

임금이 가운데 앉고 동쪽에 대내상 황운, 계루왕, 반안왕, 조명걸이 자리를 정하고 출전장수들이 렬을 지어 앉았다. 임금이 어주를 내려 장수들과 대신들을 위로하니 대내상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손 높이 들어 만세를 불렀다.

임금이 대만족해하며 공신들을 차례로 봉작하는데 대내상 황운을 비롯한 공신들을 높이 평가하여 제후의 칭호를 내렸다.

제1등 황운은 허왕으로, 숙록후 설봉선은 허왕비로 봉하고 중경현덕부를 식읍으로 정해주었으며 설중매는 정렬부인으로 봉하였다.

제2등 조명걸은 남왕으로, 심원공주는 남왕비로 봉하고 남경남해부를 식읍으로 정해주었으며 제3등 미영은 도왕으로 추증하고 사당을 세워 제후의 례로 사계절 향화를 드리게 하였다.

제4등 우시춘은 소왕으로 봉하고 고려후국에서 발해국의 정사를 펴나가는 특별어사로 임명하였으며 제5등 염성태는 북왕으로, 제6등 서하수는 동왕으로, 제7등 홍윤은 서왕으로, 제8등 류우는 소왕으로, 제9등 마맹달은 신왕으로, 제10등 왕연은 호왕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제11등 황위는 충렬후로 봉하여 대내상으로 삼고 제12등 하룡은 철룡후로 봉하여 철리부의 이만호를 식읍으로 정해주었으며 제13등 륙합은 정당성 좌사정으로, 제14등 맹학신은 정당성 우사정으로, 제15등 강수천은 선조성 좌상으로, 제16등 장달은 중대성 우상으로 봉하였다. 특별히 제17등으로 죽은 협객 곽종을 정하고 충렬공으로 추증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제18등 서익배는 호주자사로, 제19등 상괄은 지부경으로, 제20등 설중매의 아들 황기는 대장군으로, 제21등 덕남은 례부경으로 봉하였다. 이밖의 장수들도 차례로 벼슬을 돋구어주고 기린각을 높이 짓고 공신화상을 그려 이십여명의 공덕을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안원부와 동평부, 흑수말갈은 삼년동안 조공을 면제하고 금수산 선인에게 주변의 삼백리를 떼주고 봄, 가을에 향화를 그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어 허왕부부는 아직 봉읍지인 중경현덕부로 가지 말고 오년동안 황성에 있으면서 정사를 보좌하라는 특별조서를 내리니 허왕부부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엄평에게는 엄신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현주성에서 엄평은 사생결단하고 성을 나설 때 아들을 피신시키며 이런 당부를 남겼다.

《이 아비가 만일 황운에게 패하고 죽는다 해도 넌 어떻게든지 살아남아 아비의 원쑤를 꼭 갚아야 하느니라.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 아비가 못다한 일을 네가 해야 하느니라.》

현주성이 함락될 때 엄신은 탕주자사 엄술의 아들 엄수, 호주자사 조열의 아들 조석 그리고 손시오의 아들 손락 등과 도망하여 남해바다가에 이르렀다. 마침 포구에는 남해를 건너 다른 나라와 무역하는 상선이 있었는데 배가 막 떠날무렵이였다. 상인에게 사정하여 배에 오른 그들은 날바다 한복판에서 상인일행을 다 죽여 바다에 처넣고 그 배를 빼앗아가지고 남해바다가운데 자리잡고있는 화도라는 섬에 올랐다.

이 섬에는 해적들의 소굴이 있었는데 엄신 등은 배에 실은 재물을 주어 그들의 환심을 산 다음 그들을 휘동하여 고을자사를 죽이고 섬을 장악하였다. 엄신은 화도자사로 자처하면서 병선 수백척을 준비한 다음 바다를 건너 남만으로 찾아갔다.

《우리는 다 전왕의 신하이고 엄승상의 족속들입니다.

황운이 반안왕 류도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우리 부친을 죽이고 삼대를 멸족하려 하기에 우리는 화도에 은거하였소이다. 헌데 고을의 자사가 딴마음을 먹고 우리를 잡아 황성으로 압송하려 하기에 사내대장부로서 원쑤를 갚지 못하고 그냥 죽을수가 없어 자사를 베이고 그 인수를 앗아 대왕에게로 왔나이다.

대왕은 전날에 엄승상과의 의리를 중히 여겨 우리를 휘하에 두어 전왕과 엄승상의 원쑤를 갚게 해주사이다.

간특하기 그지없는 황운은 태자가 이미 죽었지만 딴사람의 자식을 태자로 둔갑시키고 반안왕 류도를 기만하여 군사를 일으켰고 설연과 조명걸 등이 또 황운과 합세하여 황성을 탈취하였나이다.

전왕과 엄승상이 다 죽은 이때를 타서 황운이 스스로 자기가 임금이 되려 하였으나 민심이 두려워 아직 찬역을 행하지 못하였나이다. 지금 그가 허왕이 되여 민심을 수습하고 먼저 대왕의 나라를 쳐서 파한 다음 그 기세로 대병을 끌고 황성을 침범하려고 꾀한지가 오래되였나이다. 대왕이 황운의 흉계를 모르고 방심하고있다가 만일 불의에 황운이 대병을 몰아오면 어찌 대적하리까.

엎드려 빌건대 대왕은 천하를 도모하여 발해국 임금이 되시고 우리는 대왕을 모시고 산같은 은덕을 입어 자그마한 땅이라도 얻어 제후의 락을 누리면 대왕의 위엄과 덕택은 온 세상을 진동하리니 어찌 아름답고 희한하지 않겠소이까.

대왕은 심사숙고하여 빨리 결심하소서. 그러면 신들이 다 맡아 나서리다.》

황운과 설연의 충의지심과 뛰여난 재능을 알고있는 만왕이였다.

더구나 야생들개처럼 횡포하고 사나운 거란도 오년전에 발해지경을 침범했다가 되게 두들겨맞고 다시는 움쩍 못하고있는 때가 아닌가. 헌데 자그마한 저희네 남만국으로 발해를 들이친다는것은 맨발로 바위차기나 같은 도저히 승산없는 노릇이라는것을 잘 알고있는 만왕은 한참이나 온갖 감언리설로 든장질하는 엄신 등을 뜨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황운과 설연은 부부간이니 몸과 마음도 하나이고 두사람은 지용을 겸비한 용장이 아닌가. 대공을 이룬 후 그 지반이 반석같거늘 어찌 우리 남만국의 군사로 그들을 당하리오. 그건 맨발로 바위를 차는 격이라 도저히 성사될수 없거늘 수닭더러 알을 낳아달라는 그런 미련은 차라리 집어던짐이 좋을듯 하도다.》

엄신이 안타깝다는듯 제 가슴을 두드렸다.

《황운과 설연이 비록 지용을 겸비했다지만 죽은 태자가 살았다고 거짓말을 꾸며 민심을 속이고있소이다. 무식한 백성들은 그 말에 속아 그들에게 진짜충의가 있는줄 알고있지만 유식한 군자들은 다 황운을 역적으로 알고있소이다. 그런즉 황운이 천하민심을 얻었다고 하나 실지로는 천하민심을 잃었다고 해야 옳소이다.

이제 대왕이 군사를 일으키고 발해국을 위해 황운역적을 치노라고 대의명분을 세우면 천하가 다 바람따라 돛달듯 대왕을 따를것이니 이는 하늘의 운수가 대왕님께 돌아오는것이 아니옵니까.

하늘이 주는 운수를 받지 않으면 도리여 그 재앙을 받는다고 했거늘 대왕은 깊이 살펴보시고 때를 잃지 마소서. 대왕이야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로장인데 어찌 햇강아지같은 황운과 설연따위를 두려워하나이까.》

원래 만왕은 무도하고 변심이 많은 오랑캐왕이였다. 게다가 륙지와 동떨어진 섬에 위치하다나니 사계절 때없이 풍랑이 들이쳐 재해가 많은 남만국이다. 그럴 때면 사람살기엔 안성맞춤인 바다너머 발해의 수려한 산천과 비옥한 평야를 생선반찬을 훔쳐먹으려는 도적고양이처럼 넘겨보며 닭알침을 삼키던 만왕이였던지라 매양 기회만 있으면 발해국을 쳐들어갈 흉심을 품고있었다. 허나 황운과 설연이 두려워 어쩌지 못하고있었다. 엄신의 달콤한 말에 만왕의 그 흉심이 볼끈거렸다.

《발해국을 타고앉는건 우리 남만이 대대로 바라던 숙망이였지.… 헌데 황운과 설연이가 목에 걸린 가시란 말이야. 그 두사람만 없으면 발해국을 한입에 삼켜버릴수 있는데 그래,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느뇨?》

만왕의 반신반의하는 태도에 마음이 부쩍 동한 엄신이 그 기회를 놓칠세라 흰소리를 쳤다.

《그건 추호도 근심마소이다.

소장 등은 일찌기 검술을 배워 천하무적의 무예를 지녔으니 황운과 설연을 한칼에 벨수 있소이다. 그러니 대왕은 의심말고 신들을 믿으소서.》

미련이란 항상 욕심많은자들의 공통된 심리가 아닐가. 호시탐탐 발해국을 쳐들어갈 기회만 엿보던 만왕인지라 방금전까지 들물처럼 엄습하던 근심을 씻은듯이 잊어버리고 천번중에 한번이나 있을가말가 하는 그 미련에 기대를 걸고 엄신 등이 젓는 위태로운 쪽배에 성큼 뛰여올랐다.

《어떻게 했으면 하느뇨?》

엄신은 성수가 나서 저들의 계획을 떠벌였다.

《대왕께서 한시바삐 병선을 준비해서 남해를 건너가 대군으로 발해의 해변가를 먼저 치소이다. 그러면 황운이 직접 싸우러 나올것이옵니다. 황운이 출전하면 소장 등은 검술을 부려 그자부터 베겠나이다. 황운이 죽으면 설연이 또 출전할것인데 설사 그가 출전한다고 해도 지아비없는 아낙네에 불과한 설연은 그림속의 범이나 같사오이다. 결국 황운과 설연이 없는 발해군사는 궁이 없는 졸의 신세라 그런 군사는 아무리 백만이래도 무섭지 않소이다. 그 기세로 대왕이 신들과 함께 군사를 몰아 황성으로 진군하면 천하를 능히 도모할수 있나이다.》

만왕의 입이 터진 팥자루마냥 다물줄 모른다.

엄신 등의 입김에 횡포성이 되살아난 만왕은 정병 십만과 바다싸움에 능한 수군 오만을 끌고 발해의 남쪽변방인 고려후국으로 쳐들어갔다.

선봉장은 엄신, 좌군장은 조석, 우군장은 엄수, 후군장은 손락으로 하고 이천척의 병선으로 남해를 건너간 오랑캐의 무리들은 불의에 고려후국의 해변가를 침입하여 닥치는대로 백성들을 찌르고 죽였으며 재물들을 마구 강탈하고 인가를 불태웠다.

고려후국의 남해관문이라고 말할수 있는 연주성을 점거한 오랑캐들의 만행에 대한 급보가 황성에 잇닿았다.

출전장수들의 공로를 평가할 때 고려후국에 특별어사로 임명된 사람은 우시춘이였는데 이무렵 우시춘은 병이 심하여 임금의 지시에 따라 황성에서 치료중이였다.

당시의 고려후국 연주의 자사는 오구라는자였는데 이 오구로 말하면 전왕과 엄평이 반란을 일으키고 옥좌를 차지한 다음 앉혀놓은, 말하자면 엄평의 심복으로서 고려후국의 제후도 이 오구를 손에 걷어쥐지 못하고있었다. 새로 등극한 발해임금이 우시춘을 고려후국의 특별어사로 임명한데 대해 불평불만을 품고있던 오구는 남만의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각 고을들에 싸우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엄신무리와 오랑캐들은 연주에서 이렇다할 큰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이에 기세가 오른 적들은 살기등등해서 고려후국을 점거하고 황성으로 쳐들어가려고 꾀하였다.

남만오랑캐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가 북으로 잇닿았다.

임금이 놀라며 조회를 열고 대신들과 의논하였다.

《엄평역적무리를 방금 평정하였는데 또 남방에 오랑캐가 쳐들어왔다니 이 무슨 황당한 일인고?

참 괴이하도다. 오랑캐가 남해변경에 침범했다는 봉화는 올랐는데 어이하여 고려후국의 관문인 연주에서는 변란과 관련한 상주문은 오지 않느뇨? 무슨 까닭이 있는게 틀림없도다.》

허왕 황운이 아뢰였다.

《자고로 오랑캐가 강성하면 변방을 침노하는 법이옵니다. 남만은 본래 엄평의 심복으로 전왕을 섬기다가 엄평이 죽으니 저에게 죄가 미칠가 두려워 선손을 쓴것 같소이다. 상주문이 당도하지 않는것은 분명 현재 고려후국의 연주자사 오구의 작간인줄로 아오이다. 오구는 본래 엄평에게 붙어살던 작자로서 고려후국의 제후까지도 우습게 보는 오만방자한자입니다. 모름지기 그자가 오랑캐와 한짝이 된듯싶소이다.

허나 페하는 너무 근심마소이다. 흉악무도한 엄평의 무리도 소탕하였고 지금 사방에는 충정스러운 제후들이 있는데 어찌 조그마한 남만왕따위를 근심하리까.》

이때 이번 변란의 자세한 실상을 알리는 고려후국 왕의 장계문이 당도하였다. 침략군의 괴수인 남만왕의 적장은 엄신과 엄수, 조석, 손락 등이며 연주자사 오구가 배반하여 적들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이였다.

허왕 황운이 다시 아뢰였다.

《엄신은 엄평의 아들이고 엄수와 조석, 손락 등도 다 엄평도당의 자식들이라 도망하여 엄평의 원쑤를 갚으려고 만왕을 부추긴것이 분명하옵니다. 이는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막으려는것과 같은 부질없는짓이오니 페하는 근심마소이다.》

반렬에서 우시춘이 비칠거리며 나섰다. 병상에 있던 우시춘은 남만오랑캐가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듣고 병상에서 일어나 이자리에 참례한것이였다. 대신들의 시선이 우시춘에게로 쏠렸다.

《오늘날의 변고는 소신의 죄인줄 아오이다. 페하의 은총으로 고려후국을 총찰하는 특별어사라는 중임을 맡고서도 병을 리유로 황성에 머물다나니 제때에 오랑캐의 침입을 방비하지 못했소이다. 소신은 이제라도 내려가 오랑캐들과 엄신잔당들을 소멸하고 나라에 드리운 구름을 가시겠나이다.》

가벼운 소요가 일어나는 속에 반렬에서 한 소년장수가 씩씩하게 나섰다. 대장군 황기였다.

《그래서는 아니되오이다.

소왕전하의 위국충정에 소장은 감동을 금할수 없고 깊이 머리를 수그리게 되나이다. 허나 전하의 병세가 완쾌되지 못하였는데 어찌 출전할수 있겠나이까. 전하를 위하시는 성상의 그 은총에 되려 근심만 덧지울수 있나이다.

페하! 소장은 비록 나이가 어리고 재주가 없사오나 오랑캐와 야합한 역적들의 머리를 베여 변방을 안정시키고 성상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가 하오니 출정하게 해주사이다.》

임금이 고개를 가벼이 끄덕거리는데 대내상 황위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좌중에 울렸다.

《소신도 나이가 어리고 특별한 재주는 없으나 출전하여 오랑캐들을 멸하고 다시는 우리 발해국을 넘보지 못하도록 버릇을 가르치겠나이다. 맹세컨대 남만왕과 엄신잔당들의 머리를 베여 페하의 탑전에 드리겠으니 소신이 출정하도록 허락해주소이다.》

임금이 반색하며 황운을 돌아보았다.

《그래, 어떡하면 좋겠소?》

《그들의 소청을 들어줌이 좋겠소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남만의 오랑캐왕이 저승에 가서도 잊지 않게 호되게 답새기며 고려후국의 오구도 징벌해야 할줄 아옵니다.》

임금이 그 의견을 받아들여 황위를 대도독으로, 황기는 부도독으로 삼고 철기군 오만과 수전에 능한 군사 오만을 선발하여 남방원정군을 뭇고 준비를 갖추었다가 이틀후에 출정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출정을 앞둔 전날밤 황운과 설봉선은 전장으로 떠나는 황위와 황기를 위해 간단한 음식상을 차리고 온 식솔이 모여앉았다. 엄평의 반란이 있기 전해에 황사정과 설시중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좌석에는 설중매도 있었고 동리화도 있었다.

두 아들을 바라보는 황운의 눈가에 이름할길 없는 회억의 물결이 굽이쳤다. 이십여년전 선임금이 마련한 황금대의 무술시합장이 눈앞에 떠오르고 진권과 엄평역적들을 소탕하던 가렬처절한 싸움들이 어제런듯 생생하였다. 황금대의 무술장에서 봉선이와 함께 임금이 하사하는 부월을 받을 그 당시 자기 나이도 황위, 황기와 다름없었다.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이 앞서기도 하였다.

《너희들이 어린 나이에 성상의 은총으로 대장군이 되여 출정하는데 명심할것이 있다. 아무리 뛰여난 재능이 있고 공이 크다 해도 그것이 제 이름이나 내고 저 하나만을 위함이라면 그건 벌써 심지가 흔들리는것이니라. 알겠느냐?》

《아버님의 말씀의 뜻을 골수에 새기겠나이다.》

황운이 설봉선을 돌아보고나서 엄하게 신칙하였다.

《잊지 말것은 절대로 적을 과대평가해서도 안되지만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는것이다.

엄신이나 조석과 같은 놈팽이들은 단순히 제 애비의 원쑤를 갚겠다고 마지막최후발악을 하는 패잔병무리들인데다가 재주도 신통치 못하니 멸하기 수월할것이다. 그렇지만 만왕은 원래 포악하고 흉측한 오랑캐왕이라 싸움에 쩌들었고 거기다가 바다싸움에도 능하니 절대로 가볍게 보지 말라.

이미전에 그놈에게 버릇을 가르쳐야 하는건데 일이 그만 여의치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더니 너희들이 그 일을 맡았구나. 너의 어머니랑 아녀자의 몸으로 사선을 넘나들며 지켜내고 다시 회복한 이 나라를 자식들인 너희들이 지켜내는것은 응당한 도리이다.

나라와 임금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목숨도 불사한 부모들의 넋을 이어 너희 형제가 이번 싸움에서 성공하길 우린 믿는다.》

황위가 새별같은 눈을 반짝이며 묵직하게 대답하였다.

《아버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원쑤를 기어이 소멸하겠소이다.》

황기의 씩씩한 목소리가 그뒤를 이었다.

《부모님들의 뜻과 기대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을테니 믿어주소이다.》

설봉선과 설중매, 동리화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어렸다.

다음날 황위와 황기가 이끄는 십만군사가 남방으로 출정하였다.

황위형제가 대장기를 앞세우고 전진하는데 그 름름한 위풍, 엄정한 군률, 정예로운 대오는 조금도 빈 구석이 없었다. 보는 사람모두가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범이 범을 낳지 강아지를 낳을가.》

고려후국의 연주성은 륙지에서 바다로 삐죽이 나온 만에 위치하고있었다.

만왕과 엄신의 반란군사들은 연주성에 웅거하지 않고 바다에 배를 띄워놓고 그곳에 둥지를 틀고있었다. 연주성앞바다에는 만왕의 십만군사들이 틀어박힌 함선들이 새까맣게 덮여있었다. 황운과 설연의 용병술에 위험을 느낀 만왕은 만일 발해군이 공격해오면 바다로 인차 도망칠수 있게 바다에 배를 띄워놓고 륙지와 배다리로 련결해놓고있었다. 이 야만의 무리들은 낮에는 이리떼마냥 뭍에 달려들어 민가를 략탈하고 밤에는 바다에 떠있는 병선에 처박혀있었다.

연주자사 오구는 연주성에 붙박혀 만왕과 엄신이 파한 사자와 련계를 맺으면서 적들에게 량곡과 마초를 비롯한 군량물자를 조달해주고있었다.

남해변강에 당도한 황위는 어둠을 리용하여 불의에 연주부터 점거하였다. 만왕의 수족노릇을 하던 오구와 그 패당들이 도망치려다가 꼼짝 못하고 잡혀 징벌을 받았다.

연주성에서 간신히 도망친 사자로부터 연주성이 점거되고 오구가 처형되였다는 소식을 듣던 만왕이 낯을 찡그리며 물었다.

《적군의 장수는 누구더냐?》

사자가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도독은 황위이고 부도독은 황기인데 발해국의 대내상과 대장군벼슬에 있다고 하옵니다.》

만왕이 혼자 소리로 되뇌였다.

《황위와 황기라…》

엄신이 제꺽 설명을 달았다.

《황위와 황기는 다 황운의 자식들이옵니다.》

만왕이 머리를 기우뚱거렸다.

《어째서 황운이 제가 직접 오지 않고 애녀석들을 보냈을고?

그러니 이 과인이 자기 애새끼들의 상대밖에 안된다는 소리인데, 황운이 과인을 우습게 봐도 분수가 있지 어디라구 감히 풋병아리같은 애새끼들을 백전로장인 과인과 맞서라구 내보내?!》

만왕이 성이 독같이 올라 언성을 높였다.

《어디 두고보자, 황운이 이놈! 내 네 애새끼들을 갈기갈기 찢고 칼탕칠테다. 그러면 네놈이 직접 안나오고 어디 견디나 보자.》

만왕은 바다우의 함선에 꾸린 지휘처를 떠나 바다기슭에 진을 치고 엄신 등을 내몰아 싸움을 걸라는 령을 내리고 만왕 자기는 뭍에 차려놓은 지휘대의 호피안석에 뚱뚱한 몸을 푹 잠구고 전장을 관망하려고 하였다.

연주성을 점거한 황위는 성우에 올라 적진을 살펴보았다.

바다우에 갈가마귀떼와 같이 떠있는 각종 병선들속에 류별나게 큰 병선은 만왕의 지휘선이 분명하였다. 지휘선을 중심으로 벌려서있는 적병선들은 배다리를 통해 륙지와 련결되여있었다. 뭍에서 돌아치던 적들이 그 배다리를 통해 밤이면 배에 오르고있었다.

황위는 전령장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싸움배를 더 준비해야겠다. 각 고을들에 명령하여 하루이틀사이에 싸움배 오백척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원정군이 남방으로 떠날 때 황운은 황위에게 바다싸움을 예견하여 삼백척의 싸움배를 미리 준비하여 떠나보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대내상 황위는 서경압록부의 절도사에게 지시하여 삼백척의 싸움배를 준비하고 압록수에 띄워보내였는데 원정군이 연주에 당도함과 동시에 삼백척이 남해에 도착하였었다. 황위는 수군장을 시켜 그 싸움배를 연주만의 도래굽이에 은페시켜놓고 차후 지시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허나 적의 병선이 무려 이천여척을 넘는 형편에서 많은 싸움배가 절실히 필요했던것이였다.

《알겠소이다.》

전령장이 사라지자 황위는 황기를 불러 의논하였다.

《내 생각에는 싸움배가 준비될 때까지 접전하지 않고 시간을 끌자는거다. 일단 싸움이 붙으면 적들이 바다에 떠있는 병선에로 도망칠터인데 그때엔 싫든좋든 바다에서 싸워야 한다. 헌데 우리에겐 싸움배가 너무 적거던.》

황기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럼 형님의 생각은 무엇이오이까?》

황위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네 생각부터 먼저 말해봐라.》

《적들이 만약 쳐들어오면 우린 기필코 싸워야 하오이다. 그러니 접전하지 않을수 없소이다.

저걸 보오이다. 벌써 적들이 뭍으로 나와 진을 치고있지 않소이까. 내 생각은 이렇소이다.

형님의 의도대로 작전을 펴자면 우선 저놈들이 우리가 시간을 끌고있다는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하오이다. 그러니 저놈들이 싸움을 거는 이상 속는체 하고 나가 싸우자는것입니다. 그러되 절대로 져서는 안되오이다. 왜냐면 첫 싸움의 승패가 군사들에게 주는 영향을 생각해야지요.》

황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네 생각이 옳다. 그러니 이렇게 하자.

네가 먼저 출전하여 첫 싸움의 승전고를 울려야겠다. 분명 엄신이 나올건 뻔한데 그놈만 목베면 적군사들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바다로 도망칠거다. 바다로 도망친 적들이 뭍으로 다시 나오자면 저들끼리 옥신각신할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린 여유를 얻게 되고 그사이에 싸움배를 모을수 있지 않겠냐.

싸움배가 준비된 다음 다시 적을 뭍으로 끌어냈다가 총공격을 들이대고 그 기회에 싸움배를 우회시켜 적병선을 들이치면 적을 몽땅 물고기밥을 만들수 있지 않겠냐.》

황기가 형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환성을 질렀다.

《알겠소이다. 그럼 소제가 먼저 출전하겠소이다.》

성우에서 내려온 부도독 황기는 철기군사 삼만을 거느리고 성문으로 나가 진을 쳤다. 대도독 황위는 성우에서 싸움을 지휘하며 남은 이만의 철기군을 만단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만왕이 선봉장 엄신으로 하여금 싸우라 하니 엄신이 창을 꼬나들고 말을 몰아 달려나왔다.

황기가 맞받아나갔다. 엄신과의 거리가 열마장길이였다. 황기가 룡천검을 들어 엄신을 가리키며 추상같이 웨쳤다.

《네가 아비의 뒤를 따라 하늘에 죄짓고 전장의 무주고혼이 되자고 나왔구나.

네 살겠다고 그냥 도망쳤더라면 초목과 같이 편안히 썩을것이지만 오늘 외람되게 흑심을 품고 만왕을 꼬드겨 변방을 소란케 했으니 네 죄는 죽은 네 아비 엄평보다 더한 대역적죄이다.

제 흉심을 실현하려고 무도한 오랑캐까지 끌어들인 네놈을 발해의 공기와 물을 마시고 자란 사람이라면 그 누가 용서할소냐.

나라를 팔아먹는 이 흉악한 배신자야! 빨리 목을 늘이고 내 칼을 받으라!》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