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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회


손시혜는 삼경에 목없는 귀신되고
황운의 딸 순애를 황후로 봉하다


가슴을 서늘케 하는 추상같은 격서를 받아쥔 전왕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의 잔등으로 식은땀이 물흐르듯 흘러내려 아래도리까지 적셨다.

시에미역정에 개배때기 차듯 격서를 내흔들며 전왕은 엄평을 향해 입에 거품을 물었다.

《내 당초에 네 말을 듣고 옥좌를 앗았더니 이런 처지에 떨어져 당장 죽게 되였도다.

차라리 왕으로 그냥 있었더라면 여생을 제후로서의 부귀를 누리며 살게 아니냐.》

꿔온 보리자루마냥 우두커니 서서 엄평은 전왕의 푸념질을 고스란히 당할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이나 밸풀이를 해대던 전왕은 엄평의 낯색이 험상하게 이그러지고 그의 뱁새눈에서 물기가 번뜩이는것을 보고는 푸념질을 거두었다. 따져보면 엄평의 탓만도 아니였다. 전왕자신도 룡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선임금의 유지도 인륜도 성을 쌓다 남은 돌처럼 버리고 이 길에 들어선 전왕이였다.

전왕의 후회는 자기를 이런 곤경에 빠뜨린 황운과 설연에 대한 원한과 복수로 돌변하였다.

《어떻게 해야 그 황가와 설씨년을 료정낼수 있겠느냐?》

엄평의 입에서 비틀어짜는듯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이 충의를 다하여 페하를 섬기며 일찍 패함이 없었는데 천운이 불길하여 이런 념려를 끼치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백번 죽어도 씻을수 없소이다.

신이 오늘 밤에 적을 엄습하여 황운과 설연을 기어이 잡고야말겠소이다.》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이뇨?》

《신에게 생각이 다 있소이다.》

그 말을 남기고 엄평은 전왕에게서 물러나 로주자사 손시혜를 불렀다.

《그대는 빨리 병마를 선발하라.

내 오늘밤 사생결단하고 황운과 싸우리라. 만약 황운을 잡지 못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손시혜가 손을 저으며 만류한다.

《승상께서 한때의 분기를 참지 못하여 강적을 치려고 하니 이는 맨발로 바위를 차는것과 같소이다. 일시의 분기를 참지 못하고 어찌 사지판에 몸을 내대려고 하시나이까. 만약 승상마저 없으면 누가 천하를 돌보리까.》

손시혜의 그 말에 엄평은 눈굽이 달아올랐다.

《다른 방책이 없지 않느냐.》

비장하다고 할지, 단말마적발악이라고 할지 분간키 어려운 엄평의 결심을 변경시킬수 없음을 안 손시혜가 격동되여 부르짖었다.

《원컨대 소장이 승상과 더불어 출전하게 허락해주사이다. 소장이 비수를 속에 품고 나가 황운과 설연을 죽여 비명에 죽은 동생의 원쑤를 갚게 해주소서.》

엄평이 그의 어깨를 잡아 자기앞으로 끌어당기고 그의 눈을 찬찬히 응시하며 물었다.

《그대는 능히 설연을 당할수 있느냐?》

손시혜가 마른 장작개비마냥 몸을 꼿꼿이 폈다.

《소장이 용병은 잘하지 못하나 일찌기 검술을 익혀두었으니 어찌 설연을 두려워하리까.》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뗀 엄평이 서너걸음 옮기다가 홱 몸을 돌렸다.

《좋아, 오늘밤 삼경에 내가 황운을 잡을것이니 그대는 설연을 죽이라.》

이날 밤이였다. 삼라만상도 구름속에 빛을 잃은듯 짙은 어둠이 온 광야를 무겁게 짓누르고있었다.

낮에 있은 일로 하여 대내상 황운은 좀처럼 잠들수 없었다. 의리가 없고 뻔뻔스럽기 이를데 없는 전왕의 화친글에서 받은 충격과 분노의 여운이 채 가라앉지 않은 황운이였다. 선임금의 유지를 배반하고 언감생심 룡상을 빼앗은 역적들이, 후일이 두려워 나어린 《임금》을 서슴없이 죽인 패륜아들이 감히 인륜을 론하는 그 행위야말로 후안무치와 파렴치성의 극치가 아닌가.

불현듯 황운의 눈앞에는 전왕의 서신을 받고 골육간이라고 눈물흘리던 임금의 어진 마음이 밟혀와 저절로 눈굽이 뜨거워났다. 나라와 황실을 위해서도 그리고 하루빨리 나라에 드리운 비운을 끝장내기 위해서도 흉악하고 간교무쌍한 전왕과 엄평의 무리들을 송두리채 소멸해버려야 한다는 결심이 황운의 가슴속에 차돌처럼 더욱 굳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니 황운은 자리에 누웠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는데 불현듯 이상야릇한 륙감이 황운의 온몸을 휩쓸었다. 거의 습관적으로 황운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황운은 참룡검을 들고 살그머니 밖으로 나가 장막뒤에 몸을 숨겼다.

홀연 으시시한 찬 바람이 한바탕 휩쓸더니 이어 공중으로부터 손에 비수를 쥔 한 자객이 내려왔다. 가볍게 땅에 발을 붙인 자객은 주위를 일별해보고는 호위군사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황운의 장막문을 헤치고 들어가는것이였다. 황운이 정신을 도사리고 살펴보니 그 자객은 다름아닌 엄평이였다.

비수를 비껴들고 장막안을 둘러보던 엄평이 등촉은 명랑한데 인적이 없는지라 돌아서서 문턱을 넘는 그 순간 황운은 벽력같이 소리치며 그앞을 막아나섰다.

《그래도 명색이 천하용장이라는 네놈이 비렬하게 자객이 되여 나타나다니?!》

불쑥 나타난 황운의 모습앞에 엄평이 펄쩍 놀라더니 급기야 비수를 날렸다. 황운이 잽싸게 참룡검을 들어 비수를 막았다.

챙강 소리를 내며 비수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엄평의 뱁새눈에 광기가 어렸다.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엄평이 몸에 띠처럼 둘렀던 검을 뽑아들었다. 허공으로 몸을 조약하며 두세바퀴 돌면서 황운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황운은 엄평이보다 더 높이 몸을 솟구쳤다. 황운이 허공에서 두세번 공전하며 엄평의 목을 겨누고 참룡검을 휘둘렀다. 엄평이 몸을 뒤로 번지며 황운의 검타격을 피하더니 다시 옆공전을 하며 공격해왔다. 황운이 잽싸게 그 공격을 피하고 춤추듯이 참룡검을 휘둘렀다.

두 장수의 칼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챙강- 챙강-

어두운 밤하늘가의 고요한 정적을 깨뜨리며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한줄기 무지개가 공중으로 뻗어나갔다. 서로 맞붙어 수십여합을 어울리는데 엄평이 상한 팔이 아직 낫지 않았는지라 검법이 점점 둔해지기 시작하였다. 더는 지탱하지 못할줄 알고 엄평은 변신술을 부려 몸을 허공으로 서너길이나 솟구쳐 어둠을 리용하여 성안으로 달아뺐다.

이무렵 숙록후는 등촉을 밝히고 현주의 지형도를 보고있는데 갑자기 한가닥 음산하고 싸늘한 바람이 장막문을 흔들었다. 숙록후가 이상하여 머리를 드는데 한 자객이 검을 들고 자기의 가슴팍을 겨누고 정면으로 곧바로 날아들어오는것이 아닌가. 숙록후가 앉은자리에서 날쌔게 뒤로 공중돌이하며 검을 피함과 동시에 장막기둥을 발로 디디며 벽에 걸린 룡린검을 뽑아들었다. 이어 장막기둥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날리면서 땅바닥에 검을 들고 서있는 자객의 머리를 내리쳤다. 자객이 급히 검으로 막는 찰나 숙록후가 왼발로 검을 든 자객의 팔에 강타를 안겼다. 센 타격에 자객이 흠칫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땅에 내려서며 자객의 목을 겨누고 룡린검을 휘둘렀다. 검이 허공에서 원을 그리고 검광이 장막안을 빛발치더니 자객은 목없는 귀신이 되였다.

숙록후가 다가가보니 적장 손시혜였다.

쓰겁게 주검을 일별하고난 숙록후는 피뜩 뇌리를 치는것이 있어 장막문을 박차고 황운의 장막으로 주먹을 부르쥐고 뛰였다. 자기한테 자객이 왔다면 그에게도 자객이 왔을것은 불보듯 뻔하였다. 숨가쁘게 숙록후가 황운의 장막을 향해 뛰여가는데 맞은켠에서 또 황운이 부리나케 달려오고있는것이 아닌가. 황운도 숙록후가 걱정되여 뛰여오는 중이였다.

《상공!》

정신없이 달려가던 숙록후가 황운의 품에 그대로 뛰여들었다.

《그래 , 일없소?》

사랑하는 안해를 황운은 부서질듯 꽉 그러안았다.

《무사하셨군요.》

얼굴을 들어 황운을 쳐다보는 숙록후의 그윽한 두눈에 맑은 눈물이 찰랑거렸다. 황운이 큼직한 손으로 찰랑거리다가 굴러내리는 그 눈물을 훔쳐주었다. 숙록후가 부드러운 손으로 그 손을 꼭 잡아 자기 뺨에 살며시 가져갔다.

어느새 장수들과 군사들이 주위에 모여들어 두 장군을 향해 사심없는 요란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숙록후에게 죽은 자객이 다름아닌 손시혜임을 알고있는 그들이였다.

숙록후가 황운의 품에서 몸을 떼고 그 뒤에 숨자 유쾌한 웃음소리가 어둠을 밀어내며 울려퍼졌다.

황운이 군사들을 둘러보았다.

《궁해빠진 엄평이 자객이 되여 날 죽이러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꼬리를 사렸소. 엄평이 이제 두번다시 그런 비렬한짓을 하자고 오지 않을거요. 설장군의 손에 죽은 손시혜로 말하면 적장중에선 제노라는자인데 그마저 없으니 엄평이 누구와 손잡고 싸우랴.

그러니 장수들과 군사들은 성을 더욱 에워싸고 협박해서 그놈이 스스로 죽게 하라.》

장수들과 군사들이 와- 함성을 올렸다.

황운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성으로 돌아온 엄평은 행여나 손시혜가 설연을 죽이지 않았겠는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밤새도록 기다렸으나 서울에 감투부탁이였다.

다음날 날이 밝으니 파수장이 들어와 보고하였다.

《손장군의 머리가 적진의 문기에 매달려있소이다.》

《뭐라구?!》

엄평이 다급히 성우로 뛰여올라가 내려다보고는 곡성을 터뜨렸다.

《어이쿠! 손시혜마저 죽었으니 내 장차 누구와 손잡고 싸우리오. 이는 하늘이 우리를 망하게 함이로다!》

전왕과 엄승도 손시혜의 소식을 듣고 침통해하는데 벌써 황운이 거느린 대군이 현주성을 두겹세겹으로 에워싸기 시작하였다.

격랑이 밀려오듯 현주성을 향해 육박해오는 황운의 대군을 성우에서 바라보는 엄평의 입에서 락심천만해하는 탄식소리가 슴새나왔다.

《사면이 철통같으니 어찌 살아나리오.》

물샐틈없이 성을 겹겹이 포위한 황운은 글을 써서 화살에 매여 성안에 무수히 날려보냈다.

《발해국 대내상 황운과 숙록후 설봉선은 성상의 령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천륜을 배반한 역적도당들을 최종적으로 멸하기 위해 왔거늘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명심해 들으라!

우리가 이제 대군을 휘몰아 성을 공격하면 성의 운명은 말그대로 광풍앞의 초불신세와 같거늘 한줌도 못되는 역적들때문에 무고한 군사와 백성들이 상하는것을 우린 바라지 않노라.

살기를 원하는 군사와 백성들은 어리석은 죽음을 당하기 전에 엄평의 머리를 베여 바치라.》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그 글을 보고 골목골목 모여서서 수군거렸다.

《우리모두는 본래 발해국의 백성들인데 죄없이 죽게 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바엔 차라리 엄평을 찾아가 한번 싸워 사생을 결단하자고 청함이 어떠냐. 성밖을 나설수 있다면 그 기회를 타서 싸우지 말고 도망함이 좋지 않는가. 만일에 엄평이 우리의 청을 듣지 않거든 그때엔 성을 넘어 투항하자. 황대내상은 너그럽고 인정많은 군자이니 어찌 우리를 살려주지 않으리오.》

저저마다 엄평에게 몰려가 한소리로 청하였다.

《나라는 백성으로써 하늘을 삼고 백성은 밥으로써 하늘을 삼나이다. 허나 지금 성안에는 량식이 없어 조석을 보존키 어렵고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시시각각으로 늘어가고있소이다.

원컨대 우리 군사들은 성안의 남녀로소 할것없이 다 성밖으로 나가 한번 싸워 생사를 결단하자고 하나이다.》

한둘도 아닌 숱한 군사들이 백성들까지 끌고와 터뜨리는 항변에 엄평은 놀랍고 황당하기도 하여 할수없이 전왕을 만나 건의하였다.

《군사들이 기아를 견디지 못하여 모두 한번 싸워 죽기를 원하니 이제 허락해도 난사고 불허해도 난사라 차라리 그 청을 들어줌이 좋을듯 하옵니다.

만일 형세가 불리하거든 페하는 남문을 열고 몸을 피하여 현주로 가시옵소서.》

모든것을 체념한듯 전왕의 눈은 흐리멍텅하였다.

엄평이 허울만 남은 전왕을 바라보다가 자기가 제일 믿는 부하 열댓을 떼서 그를 호위하라 이르고 하직인사를 하니 전왕은 그저 멍청히 조개턱을 흔들뿐이였다.

부하장수들을 독촉하여 성중의 남은 군사와 늙은이, 젊은이 다 끌고 엄평은 동문밖에 나와 진을 쳤다.

성안에서 군사들이 밀려나와 진을 치는것을 일별해본 황운은 각 진에 령을 내렸다.

《엄평 반란적이 형세가 궁하여 성안의 백성들을 다 몰고나오니 이는 한번 싸워 생사를 결단하려는 심산이다. 이제 우리가 싸우면 무죄한 백성들이 많이 상할것이니 싸우지 말고 포위만 하고 함화를 들이대여 적진을 동요케 하라.

만일에 엄평이 도망하면 그때 그뒤를 쫓아 잡으리라.》

이어 황운이 준마에 올라 진앞에 나서며 현주성군사들과 백성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 군사들과 백성들은 다 발해국의 사람들인데 어찌 역적 엄평으로 말미암아 죄없이 죽으려 하는가! 무고한 죽음을 당하지 말고 어서빨리 다 흩어지라!》

말을 마친 황운이 참사검을 높이 쳐들고 장수들과 함께 엄평을 향해 돌진하였다.

엄평의 군사와 백성들이 다 기아를 참지 못하여 나왔고 또 이미전부터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던지라 순식간에 무너진 둥지에서 뛰쳐나온 개미마냥 산지사방으로 와- 하고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삽시에 적진중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속에서도 엄평이 부하장수 십여명을 데리고 평생의 기력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맞받아나왔다. 황운이 엄평을 향해 준마를 비룡같이 내몰며 참사검을 휘둘렀다. 마치 두 룡이 벽해를 뒤집는듯, 두 호랑이가 산을 흔드는듯 처절하고 격렬한 최후의 대결이였다. 백여합이 이르도록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때 숙록후가 우시춘 등과 함께 적장들과 대적하는데 그의 룡린검이 한번 번뜩일 때마다 적장의 머리 하나씩 땅에 나딩굴었다. 어느새 적장 다섯이 숙록후의 룡린검에 목없는 귀신이 되였다. 다른 적장들을 우시춘 등에게 내맡긴 숙록후는 엄평을 향해 룡린검을 추켜들고 번개같이 돌입하였다. 검광이 번쩍- 일더니 엄평이 탄 말이 룡린검에 찔려 풀떡 다리를 꺾으며 쓰러졌다. 엄평이 그 순간 변신술을 써서 말잔등을 박차고 하늘로 몸을 솟구쳤다가 한걸음에 삼십보를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황운과 숙록후가 그뒤를 맹렬히 따르니 바빠맞은 엄평이 다시 변신술을 써서 하늘로 솟구치니 어데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황운이 참사검을 들어 허공을 후려치며 주문을 외웠다. 홀연 황건력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엄평의 도술을 제압하거늘 엄평의 도술이 무용지물이 되고 엄평이 땅에 떨어졌다. 땅에 내려온 엄평이 몸을 날리며 창으로 황운을 찌르니 황운이 참사검으로 후려쳤다. 그찰나 숙록후가 철퇴를 들어 엄평의 왼다리를 내리쳤다. 뼈가 부서질듯 한 아픔을 애써 참으며 엄평이 다시 몸을 솟구쳐 변신하며 도술을 부리려 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로 내려왔다. 엄평의 몸이 땅에 내려오는 순간 황운이 질주하면서 참사검을 비껴치니 한줄기 시퍼런 검광이 무지개되여 하늘로 뻗으면서 엄평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나갔다.

성우에 올라 혹시나 해서 전장을 관망하던 전왕은 엄평의 목이 잘리우는것을 보자 호위군사를 거느리고 남문으로 줄행랑을 놓았으나 남문밖에 이미 매복하고있던 염성태에게 사로잡히고말았다.

아들의 죽음을 제눈으로 목격한 현덕부 절도사 엄승은 스스로 성밑으로 몸을 던져 즉사하였다. 엄평과 전왕의 무리들은 가뭇없이 소멸되고 드디여 싸움은 아군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황운과 숙록후가 엄평부자의 머리를 기에 달고 승전고를 울리며 본진으로 돌아오니 염성태가 전왕을 결박하여 원문밖에 꿇어앉히고 옥새를 거두어 대내상에게 바쳤다. 황운이 그 결박한것을 풀어주고 옥에 가둔 다음 옥새를 임금에게 올리였다.

임금을 모시고 입성한 황운은 승전연을 베풀어 장수들과 군사들을 호궤하고 창고에 저장한 곡식을 터뜨려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엄평부자의 주검을 온 나라에 돌려 징계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근 십오년간에 걸친 내란은 끝나고 발해국의 황실은 회복되였으며 천하가 평정되였다. 대내상 황운이 발해국을 재건하자는 대의명분을 추켜들고 안원부의 료양에서 군사를 일으킨지 오년만에 끝내 나라가 회복되였던것이다.

반란적들을 처벌하는 의론상에서 장수들과 신하들이 한결같이 대내상 황운에게 제의하였다.

《전왕의 처자와 엄평의 가속은 나라법으로 참해야 하오이다.》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듯 대내상 황운이 머리를 저었다.

《그건 옳은 처사가 아니로다. 전왕은 선임금의 친동기요, 엄평의 가속은 성상의 가까운 혈친이라 나라법을 실행하여 도륙하면 마음어진 성상의 심기가 편안치 않으려니 어찌 신하들인 우리가 군주의 마음을 불안케 하리오.》

대내상 황운은 숙록후 설봉선과 의논하여 전왕을 검산의 깊은 수림속에 옮겨 서인으로 만들어 숲이나 지키게 하고 엄평의 처자는 현덕부의 제일 막바지 시골에 거처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대내상 황운이 조처하는바를 보고 여간 탄복해마지 않았다. 검산에 옮겨간 전왕은 스스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음식을 전페하다가 굶어죽으니 임금이 듣고 추연해하며 제후의 례로 안장하게 하였다.

엄평과 전왕일당을 소멸하고 천하를 평정한 대내상 황운은 숙록후 설봉선과 함께 임금을 호위하여 황성으로 향했다. 황성의 백성들이 길옆에 나와 만세를 부르며 입성하는 임금과 대내상일행을 환호하였으며 계루왕은 이십리밖에 나와 어가를 영접하여 대궐로 안내하였다.

임금이 황태후를 뵈옵는데 땅에 엎드려 대성통곡하고 태후가 임금의 손을 마주잡고 목놓아 그 기간의 고초를 얘기하며 서로 위로하였다.

임금이 종묘에 제사하고 돌아오니 심원공주가 들어와 뵈옵는다. 공주도 임금도 서로 손을 마주잡고 눈물을 흘리는데 서리서리 엉키고쌓인 마음속사연을 무엇이라 하리오.

《매씨(누이)의 은덕과 대내상의 충정이 아니면 이몸이 어찌 오늘날 서로 만나보리오. 다만 미영이 참사함이 가련하고 애석토다. 각별히 표창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게 하리라.》

다음날 대내상 황운이 문무신하들을 전부 거느리고 임금을 정식으로 황제로 등극시키는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제는 아이가 아닌 젊은 임금이 발해국의 거룩한 룡상에 당당히 올랐다. 옥좌를 우러러 만세를 부르는 대내상 황운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 눈물에 담긴 사연을 어찌 한두글줄에 다 담을수 있으랴.…

즉위식이 끝난 후 례관이 아뢰였다.

《내전이 비였으니 바삐 간택하여 정하심을 바라나이다.》

대신들모두가 그 말이 옳다고 여기는데 대내상 황운이 그 심정을 대변하여 상주하였다.

《황후는 발해국의 국모이시니 한시도 비울수 없나이다. 란세를 당하여 간택할 여유가 없었으나 지금은 국난을 평정하였으니 여러 대신들중의 어진 녀아를 간택하여 정하시오이다.》

새 임금이 듣고나서 조서를 내렸다.

《선임금께서 붕어하실 때 유서를 주시면서 짐이 성장하면 뜯어보라 하셨도다.

그 유서에 가르치기를 〈대내상 황운의 충정과 숙록후 설봉선의 공덕은 하늘에 미쳤으니 군신간의 례로 대하지 말라. 그들의 녀아는 짐의 꿈에 나타났으니 심상한 일이 아니며 또 태자와 동년, 동월, 동일, 동시에 태여났으니 이는 하늘이 정한 아름다운 배필이라 하리다. 태자가 성장하면 대내상의 녀아를 황후로 봉하여 종사를 받들게 하라〉고 하였더라.》

황태후가 기뻐하며 또 조서를 내렸다.

《대내상의 녀아는 어려울 때 내 품속에서 십년이나 자랐으니 그 정이 친어미, 친딸과 다름없이 자별하거늘 어찌 선제의 유교를 저버리며 하늘이 정한 인연을 어이 어기리오.

대내상의 녀아 황순애를 페하의 황후로 정하노라.》

대내상 황운과 숙록후 설봉선이 사양치 못하고 길일을 택하여 성례를 치르니 경사에 경사가 났다고 나라안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환성을 지르며 기뻐하였다.

한편 대내상과 숙록후는 북해에 사람을 보내여 동리화를 데려오게 하였지만 설중매의 소식은 전혀 알길 없어 마음을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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