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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회


황실의 지위는 다행히 회복되고
목신의 괴술을 어찌 못당하리오


엄평이 도술을 부려 구름우로 솟구치는통에 그를 놓친 황운은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령을 내려 군사를 돌려세웠다. 엄평의 뒤를 쫓아오던 숙록후가 뒤미처 강녘에 이르렀다.

숙록후가 황운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엄평은 잡지 못했나이까?》

《엄평이 전왕을 업고 십장이나 솟아 구름타고 달아나기에 다급히 쫓아왔더니 공교롭게도 강변에 배가 있어 엄평이 그 배를 타고 건너갔소.

십중팔구 엄평이 강을 건너 현주로 갔을게요. 그러니 성안에 들어가 군사를 한숨 돌리고 다시 그뒤를 따르는게 좋을것 같소.》

황운과 숙록후가 군사들을 이끌고 성밑에 다달으니 황위가 성문을 열어 맞아주었다.

임금을 모시고 성안에 들어간 황운과 숙록후는 임금이 든 처소의 방비를 강화하게 한 다음 음식을 내여 군사들을 푸짐히 먹이였다.

이번 싸움에서 엄평의 군사가 죽은것이 이루 헤아릴수 없었다.

그에 대해 보고를 받은 임금이 통탄하여마지 않았다.

《국운이 불행하여 죄없는 장수들과 군사들이 전장고혼이 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황운과 숙록후는 마치 저들의 잘못이기라도 한듯 송구스러워하였다.

다음날 우시춘과 홍윤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이번 싸움에서 공을 세운 황위를 표창하자고 청하였다. 대내상이 어린 아이에게 무슨 표창이냐 하면서 도리머리를 저으니 우시춘 등은 임금을 찾아가 청하였다.

임금이 그 의견이 옳다고 하면서 황위를 직접 불러들였다.

비록 나이어리나 장부의 기개가 력력한 황위를 대견스레 바라보는 임금의 모습은 마치 제 동생을 대하듯 살뜰하였다. 임금이 직접 황위에게 어주를 부어주더니 그 즉석에서 호위장으로 임명하고 어가를 시위하라 하였다. 장수들이 모두 제일처럼 기뻐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군사들의 원기를 회복하고 병장기를 수습한 황운은 임금에게 아뢰고 다음날 현주로 출정하였다. 숙록후 설봉선은 오만대군을 거느리고 선봉장이 되고 충렬후 대내상 황운은 십만군사를 거느리고 중군장이 되고 반안왕 류도는 오만군사를 이끌고 황위와 더불어 후군이 되여 임금을 모시고 진군하였다.

높이 추켜든 룡봉기치와 창검은 해빛을 가리웠다. 대오가 지나는 크고작은 고을의 백성들이 울긋불긋 단장하고 나와 어가를 향해 만세를 부르며 나라가 하루빨리 평온하기를 기원하였다.

숱한 군사를 다 잃은채 전왕만 겨우 구원하고 허둥거리며 엄평일행이 현주성에 이르니 절도사가 나와 맞아주었다. 절도사란 엄평의 아비인 엄승이였다. 엄평일행을 맞아주던 엄승이 그의 몰골을 보고 기절초풍하였다. 아들의 행색을 보니 하지전 뜸부기마냥 호기를 부리며 위세등등하던 그전날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수 없으니 엄승이 어찌 놀라지 않으랴.

《어찌 이렇게 되였느냐?》

대답하기 싫었지만 엄평은 별수없이 패한 사연을 부친에게 그대로 말해줄수밖에 없었다. 피를 토하듯 엄평의 입에서 악에 받친 소리가 튀여나왔다.

《그놈들때문에 엄진과 엄술 두 동생이 다 죽었소이다. 내 이제 황운과 설연을 기어이 잡아 그 몸뚱아리를 갈기갈기 찢어놓고야말겠소이다!》

《죽다 겨우 살아난 주제에… 그래두 속은 살아 흰소리냐?》

엄승의 나무람소리에 엄평이 덥석 아비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제발 부탁인데 부친은 소자를 도와 군사들을 모아주사이다.》

아들을 바라보는 엄승의 눈귀가 젖어들고 밭고랑같은 주름살이 움푹 패인 볼편이 가늘게 떨렸다.

《하긴 물러설 길이 없지. 물고뜯고서라도 꼭 이겨야만 하는게 이 싸움이다.

이기면 충신이요, 지면 역적이라 이건 자고로 전해지는 법도이고 리치로다.》

엄승의 도움으로 엄평은 다시 군사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반란을 일으키고 전왕이 옥좌를 차지한 후 엄평은 자기의 심복들로 지방장관들을 임명했었다. 엄평이 각처에 널려져있는 자기의 패당들에게 련락하였으나 며칠이라는 시일이 흘러 모아들인 군사들이라는게 기껏해야 십만을 넘지 못하였다. 다시 기별하여 알아보니 지금 한창 현주성으로 오고있는중이라는것이였다. 엄평은 일단 모아들인 군사들로 맹훈련을 하게 하고 량곡과 마초를 운반하도록 하는 한편 원병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였다.

엄평이 현주성에 당도한지 얼마 안있어 황성에 파했던 간자가 돌아왔다. 엄평이 전왕과 자기 가족의 행처를 알아보라고 들여보낸 간자였다. 어느새 전왕이 소식을 듣고 엄평의 방에 들어섰다.

엄평이 다급히 물었다. 전왕의 얼굴이 긴장해진다.

《그래, 어떻게 되였느냐?》

간자가 쭈밋거렸다.

《주저말고 사실대로 페하께 아뢰이라.》

《불길한 소식이오이다. 황성에 입성한 후 부하장수들이 황후(전왕의 비)와 공주랑랑을 죽이겠다고 벼르는것을 설연이 만류하고 그냥 놓아주었다고 하오이다. 헌데 두 부인께서 그만 수치감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다고 하옵니다.》

《뭣이?!》

전왕이 소리내며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목을 놓아 꺼이꺼이 곡하는 처량하고 궁상스러운 전왕의 울음소리가 엄평의 가슴에 비장감을 더해주었다. 엄평은 눈물을 씹어삼키며 부르짖었다.

《당장 별궁에 쳐들어가서 황태후를 잡아오라! 그리고 계루왕과 심원공주도!》

부하장수들중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였다.

《어떻게 잡아오겠나이까. 조명걸이 황성을 차지하고 황태후부터 빼내여 방비를 철통같이 하고있소이다. 그리고 계루왕은 조명걸과 함께 황성을 지키고있고 심원공주도 황성에 있는데 어찌할 방법이 없소이다.》

《조명걸이?! 내 그놈을 살려준 덕을 톡톡히 받는구나!》

이제까지 청승맞은 까마귀처럼 곡성을 터뜨리던 전왕이 입에 거품을 물고 떠벌였다.

《짐이 이미전에 그놈을 죽이자고 했더니 경이 만류하지 않았는가!

우시춘도 같지. 그 무슨 덕이요 뭐요 하면서 관용을 베풀더니 이제 와선 그놈들이 우리 목줄을 물고 늘어지지 않는가. 독초는 당초에 모조리 뽑아버려야 하느니라. 짐을 받들지 않는자들은 처음부터 싹 쓸어버려야 하는건데… 당장 그 조명걸을 잡아다 내앞에 끌어오라!》

급작스레 태도를 일변하여 질책하는 전왕앞에 엄평은 너무도 황급해서 얼결에 허리를 구부렸다.

《알겠소이다. 이제 곧 떠나겠소이다.》

그러는 엄평을 잡아먹을것처럼 노려보다가 전왕이 방문을 걷어차고 나갔다.

엄평이 시위군사들에게 눈짓하니 시위군사들이 부랴부랴 그뒤를 따라섰다. 전왕이 사라지자 엄평은 뜻하지 않게 그한테서 당한 곤욕을 삭이느라고 한참동안이나 씩씩거렸다. 부하장수들이 몸을 옹송그리고 엄평의 눈치만을 살폈다.

이때 수문장이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엄평의 뱁새눈에서 새파란 불길이 일었다. 그 눈길을 피하며 수문장이 떠듬거렸다.

《야단났…소이다. 지금 황운과 설연이 … 대병을 휘동하여 이리로 막 … 밀려오고있소이다.》

엄평이하 장수들이 다급히 성우에 올라가 바라보니 새뽀얀 먼지가 하늘로 치솟고 정예군사들이 황운과 설연을 위시하여 짓쳐나오고있었다. 호호탕탕한 그 기세는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듯 하여 보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황황히 성을 내린 엄평이 부하장수들을 둘러보았다.

《성문을 굳게 닫고 각처의 원병들이 오기를 기다리라. 내 령이 없이는 한걸음도 성문을 나서지 못하니 그리 알고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있다가 원병이 당도하면 일격에 공격하라.》

엄평이 눈이 빠지게 기다렸으나 하루가 지나 원병이라고 당도한것은 철주자사 엄담의 오만군사와 로주자사 손시혜의 오만군사, 도합 십만군사뿐이였다. 엄평에게는 엄진, 엄술외에도 또 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엄담이 바로 엄평의 막내동생이였다. 그리고 손시혜는 설연을 막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손시오의 형인데 설연의 손에 죽은 동생의 원쑤를 갚겠다고 절치부심하고있었다.

《헌데 왜 철주와 로주군사들뿐이냐?》

마치 원병이 당도하지 않은 잘못이 손시혜에게 있기라도 한듯 엄평이 손시혜에게 다그쳐물었다. 그러는 엄평을 손시혜가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평소부터 황운과 설연의 지용을 잘 알고있던 고을의 관장들이 그들이 두려워 황성의 조명걸을 찾아가 스스로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고 하오이다.

지금 한창 조명걸이 그 십만군사를 이끌고 이리로 쳐들어오고있소이다.》

손시혜가 던진 그 말 한마디에 적장들의 얼굴에 동요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들을 일별하는 엄평의 눈에 침통한 빛이 흘렀다.

한동안 눈을 꾹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엄평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황운이 설연과 합세하고 또 조명걸이 정리부와 솔빈부의 병마를 총독하여 쳐들어온다니 그 형세를 깨뜨리기는 어렵도다.

슬프고 애닲도다! 어이하여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가.

방책은 오직 하나, 성문을 굳게 닫고 접전하지 않는것이다. 적들이 우리 군사의 병력수를 알지 못하니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니라. 만일에 적이 성을 에워싸면 위태로움이 조석에 있을것이니 그때는 형세를 보아가며 대처하리라.》

이때 다시 보고가 들어왔다.

《설연이 십만군사를 끌고 성밑에 이르렀는데 격서를 보내왔소이다.》

엄평이 격서를 받아쥐고 펼쳤다.

《역적 엄평은 듣거라!

네 하늘의 뜻을 모르고 찬역하여 죄없는 군사를 수많이 죽이고 이제 외로운 성안에 갇혔으니 어디로 가리오. 네 신세야말로 독안에 든 쥐이고 우리안에 잡힌 승냥이처지라 이제 이십만대군을 거느리고 내 이르렀으니 네 아무리 성문을 굳게 닫고 응전하지 않아도 우린 눈섭하나 까딱하지 않느니라.

성을 포위하고 일체 보급로를 차단하면 네놈은 곧 굶어죽을것이니 그래, 용장이라 뽐내는 네가 그렇게 맥없이 죽겠느냐. 아직 늦지 않았으니 빨리 스스로 목을 바쳐 무고한 군사들이 상하지 않게 함이 옳은 처사로다!》

《뭐, 뭐라구! 이 계집이 감히 누구더러 훈시질이야!》

엄평이 격서를 꾸겨쥐고 땅바닥에 휙 집어던졌다. 우리안에 갇힌 범마냥 방안을 오락가락하는 엄평의 눈앞에 자기의 동생 철주자사 엄담의 공포에 질린 모습이 걸려들었다. 시에미역정에 개배때기 차는식으로 엄평은 엄담을 다불러댔다.

《넌 왜 돈떼먹은 시에미상을 하고있느냐! 바지를 입었다는 사내자식이 치마두른 계집한테 잔뜩 겁을 먹고 떨고있으니 이게 무슨 꼴이냐. 네 사내대장부라면 당장 나가 저 설연을 막으라!》

분별을 잃고 길길이 날뛰는 제 형의 눈치를 살피며 엄담이 조심스레 한마디 한다.

《설연이 우리 성안에 군사가 적고 량곡과 마초가 부족함을 알고저하여 짐짓 싸움을 걸어 허실을 내탐하려 하는데 어이하여 형님은 좀전까지 하던 말씀과는 달리 적은 군사로 대군과 맞서려 하나이까.

오래지 않으면 적병이 반드시 해이될것이니 그때를 타서 싸우는것이 낫지 않겠소이까.》

부하장수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제 형에게 험창한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은듯 오히려 제할소리를 내뱉는 엄담의 기질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그 의견이 옳다고 여겼는지 엄평은 방금전의 분기를 가라앉히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엄담의 의견에 엄평이 딴소리를 하지 않으니 자연히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숙록후가 격서를 보냈으나 적진중에서 아무런 기별도 없자 대내상 황운은 한 계교를 생각하고 반안왕 류도로 하여금 전군을 거느리고 싸움을 돋구라 한 다음 날쌔고 젊은 군사들을 선발하여 성벽에서 백보쯤 되는 곳에 땅을 파게 하고 궁노수들을 매복시켰다.

이어 황운은 본진의 장대에 기치를 세우고 거짓으로 해이된것처럼 연기를 놀기 시작하였다.

하루종일 풍악을 울리며 숙록후와 술을 마시면서 희희락락거리고 대낮인데도 잠을 자는 시늉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홍윤을 시켜 군사들을 내보내여 성밑에 이르러 갖은 모욕적인 언사로 엄평을 자극하게 하였다.

《야, 엄평아! 너 요즘 우리 대내상과 숙록후가 두려워 밤마다 이부자리에 기딱막히게 희한한 그림을 그린다는게 사실이냐. 그 그림을 한번 좀 보자꾸나.》

《아마 그 그림을 저자에 내걸면 내인들이 그림에서 새우장사 코를 싸쥘 고약한 지린내가 난다구 생야단일거야.》

《핫핫! 그러면 그림에다가 거룩한 엄승상나리가 밤마다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서 그린것입니다 하구 써붙여야겠어.》

며칠동안 그런 일이 반복되자 엄담이 더는 참지 못하고 제편에서 형을 든장질하였다.

《황운과 설연이 저렇듯 라태하니 군사들도 분명 해이되였을것이고 또 저놈들이 이렇듯 우리를 중상하고 야료하니 더 참지 말고 한번 싸워 분한 마음을 속시원히 푸소이다.》

이번에는 엄평이 더 자제력이 있었던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황운과 설연의 간사한 꾀를 알지 못하니 어찌 저런 욕설따위에 귀를 기울이랴.》

요지부동으로 한사코 떡 버티고 나가지 않았다.

황운은 엄평이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는 류우와 왕전을 내보냈다.

이 두사람은 달변가로서 유모아와 야료가 기가 막혔다.

《엄평아! 너 밤마다 이부자리에 그림을 그리더니 이젠 네 망태기가 없어지고 민짜가 되였다면서? 혹시 너 계집이 되고픈게지?》

류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왕전이 또 야료한다.

《엄장수가 계집이 되면 그거 참, 소가 웃다 꾸레미 터지겠군. 배불뚝이 독처럼 커다란 팔척장신에 애들이 장난삼아 그어놓은것같은 뱁새눈에다가 사람이 되려다가 채 되지 못한 원숭이처럼 털이 부시시한 계집을 좋아할 사내가 어디 있을가. 하긴 전왕이 좋아할수 있어. 같은 뜨물이니까.》

서로 치고 받으며 계속 야료하는 목소리에 성우에 있던 장수들과 군사들이 키드득거리는 소리가 엄평의 귀전에도 들렸다. 처음엔 그까짓것 하며 방심하던 엄평의 얼굴이 말고기자반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장수들이 무섭게 변해가는 엄평의 기색을 두려운 눈길로 힐끔힐끔 곁눈질하였다.

끝내 분기를 참지 못한 엄평이 대노하여 엄담과 함께 오백철기군을 끌고 성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질풍같이 내달았다.

류우와 왕전을 향해 엄평과 엄담이 질주하니 두 장수가 창과 칼을 들고 마주나왔다.

서로 어울려 열댓합만에 류우가 창을 끌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엄평이 무슨 계교가 있다고 여기며 따르지 않았다. 돌아서서 엄담과 싸우는 왕전에게로 달려가려는데 달아나던 류우가 다시 돌아서서 엄담에게 덤벼들었다.

왕전이 엄평과, 류우가 엄담과 맞붙어 한창 싸우는데 그 창법과 검법이 엇비슷해보였다. 한동안 지나 왕전과 류우의 창법과 검법이 점점 둔해지더니 류우가 창을 버리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것을 본 왕전도 말머리를 돌려 뺑소니를 친다. 한칼만 먹이면 될터인데 하며 엄평과 엄담이 경계심을 늦추고 그뒤를 정신없이 따르는데 문득 방포소리 요란히 울리며 불쑥 오십보앞 땅속에서 삼백명의 궁노수들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일제히 화살을 날리는것이였다. 그 화살에 맞은 적의 군마가 다리를 꺾으며 넘어지거나 기승을 부리며 길길이 하늘로 솟구치니 말에 탔던 철기군이 그대로 나떨어졌다.

엄평이 탄 말이 비발처럼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꺼꾸러지고 엄평은 땅에 떨어져 코밀이를 하였다. 그찰나 궁노수들뒤에 숨어있던 숙록후가 재빨리 철궁을 날렸다. 그 화살이 엄평의 왼쪽팔에 면바로 날아와 박혔다.

《윽-》

팔을 싸쥔 엄평이 비명소리를 내지르더니 이발을 사려물고 제손으로 화살을 뽑아버렸다.

엄담이 허리를 굽혀 날쌔게 엄평을 그러안아 자기 뒤에 올려앉히는데 황운이 말을 재촉하여 그옆에 나란히 가붙으면서 엄담의 목을 겨누고 참룡검을 휘둘렀다. 검광이 번뜩하며 엄담의 목이 간데없이 사라지고 머리가 없는 몸뚱아리만 말우에서 그냥 가다가 맥없이 굴러떨어겼다.

숙록후가 말을 몰아 말우에 간신히 붙어있는 엄평의 동가슴을 창으로 찌르니 엄평이 오른손을 들어 창끝을 붙잡았다. 숙록후가 다시 기합을 쓰며 창끝을 높이 쳐드니 엄평의 몸이 따라올라가는데 그 순간 엄평이 하늘로 몸을 솟구치며 변신술로 한걸음에 삼십보를 뛰여 달아나버렸다.

엄평을 따라나섰던 오백의 적군사는 한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전장을 일별한 황운은 이어 엄담의 머리를 기에 달아매고 성밑에 이르러 군사를 시켜 큰소리로 웨치게 하였다.

《엄승아! 네 아들 엄담의 머리를 보아라!

네 목숨을 보존하려거든 네 아들 엄평의 머리를 보내라! 범을 잡으려다가 그만 그릇되게 강아지를 잡았구나.》

제 아들 엄담의 머리가 기대에 매달려 한들한들 춤추는것을 본 엄승이 가슴을 쥐여뜯었다. 그러지 않아도 둘째아들 엄진과 셋째아들 엄술을 잃은 엄승이라 막내아들마저 목이 없는것을 보고 그만 입에서 왈칵 피를 내뿜더니 기절하여 그자리에 쓰러졌다. 군사들이 황황히 그를 담가에 실어 들여갔다. 한참후에 정신을 차린 엄승이 제발 엄평만이라도 무사하기를 속으로 빌고있는데 팔을 상한 엄평이 피가 게발린 야차같은 스산한 모습을 하고 성안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된거냐?》

엄평을 부둥켜안은 엄승이 눈물을 좔좔 쏟으며 소리내여 울었다. 전왕의 눈에도 짙은 고뇌의 물기가 어렸다.

상처입은 팔을 부둥켜안은 엄평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 망할놈의 황운과 설연이한테 또 속아 이꼴이 되였소이다.》

신음소리를 련거퍼 내지르던 엄평이 모지름을 쓰며 독설을 내뿜었다.

《성밖의 적병은 강한데 성안에는 용장이 없고 게다가 신이 또 이렇게 중상을 입었으니 대적해야 이기기 어렵나이다. 오늘밤 적이 어둠을 타서 성문을 깨치고 들어오면 어찌 당하리까.

그러니 페하는 군사를 총독하여 주야로 성을 순찰하게 하옵소서. 신의 상처가 나으면 맹세코 황운과 설연을 잡아 사직을 안보하리다.》

전왕이 눈이 퀭해서 반문하였다.

《상처가 나은들 무슨 묘책이 있느뇨?》

《소장에게 다 생각이 있소이다. 페하는 너무 근심마소이다.》

그 어딘가를 주시해보는 엄평의 작은 눈에서 독기가 뿜어져나왔다.

본래 검산에는 천년묵은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높이는 수십장이고 둘레는 다섯아름이나 되였다. 일찌기 엄평이 검산에서 십년동안 검술을 익힐 때 매번 그 나무밑에서 쉬며 땀을 들이군 하였다.

하루는 엄평이 나무밑에서 땀을 들이는데 나무가지 하나가 뚝 떨어지는것이였다. 엄평이 집어서 보니 다리통만큼 굵은 나무가지였다. 새삼스레 나무주위를 살펴보니 부러져 떨어진 나무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심심풀이로 땅에 떨어진 그 나무가지중에서 제일 굵은 나무가지를 집어든 엄평은 거기에 칼로 《은수재》라는 글을 새기고 그다음부터 나무이름을 은수재라 불렀다.

헌데 이상한것은 그 은행나무가 이름을 얻은 후부터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것이였다.

눈이 넷이고 팔은 여섯이며 키는 십오척인데 온몸에서는 황금빛을 뿌렸다. 얼핏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스산하고 흉물스러운 괴물의 모색이였다. 매양 자기에게 이름을 지어준 엄평의 은혜에 감격해하던 은수재는 엄평이 검산을 내릴 때 만약 죽을 고비에 놓여 도움받을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저에게 기별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엄평은 이 시각 그 목신(나무신)인 은수재를 생각하고있었다.

상처가 좀 낫자 엄평은 여사여사한 일로 자기가 사경에 처했으니 급히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검산의 은수재에게 보냈다.

도움을 청하는 엄평의 서신을 받은 은수재는 이번 기회에 황운, 설연을 잡아 엄평의 은혜를 갚고 또 봄과 가을에 제향을 받을 속심밑에 순순히 그 요청에 응해 현주성으로 찾아왔다.

이튿날 전왕이 엄평과 어떻게 하면 황운과 설연을 막을가 머리를 맞대고있는데 수문장이 혼이 빠진 놈처럼 헤덤비며 들어와 괴상하게 생긴 거인이 찾아와 뵙기를 청한다고 하는것이였다.

《어떻게 생겼기에 그리도 놀래느냐?》

수문장이 말문이 막혀 갑자르는 모습을 일별하며 전왕이 들여보내라고 승낙하였다.

잠시후에 그 거인이 들어섰다.

어떤 놈이기에 수문장이 혼맹이가 빠졌을고 하고 생각하고있던 전왕은 정작 들어선 거인을 보는 순간 그 흉물스러운 몰골에 소름이 끼쳐 앉은자리에서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엄평이 부축해서야 일어나 가까스레 자신을 다잡은 전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어디에 있으며 성명은 무엇이뇨?》

목신이 대답하는데 그 목소리 또한 난생 들어본적이 없는 우뢰같은 소리였다.

《소장은 검산에 있는 은수재라 하옵니다.

대왕이 황운과 설연의 란을 당하여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엄승상을 돕기 위해 만사를 제쳐놓고 왔나이다. 소장이 황운과 설연을 능히 잡을수 있으니 대왕은 받아주시겠나이까?》

전왕의 얼굴에서 그제야 긴장감과 무섬증이 점차 사라지는듯 하였다.

《그대가 만일 황운과 설연 두 적장을 잡고 천하를 평정하면 그대의 공은 강산을 절반 나누어주어도 아깝지 않도다.》

《아니, 소장은 천하는 원치 않소이다. 다만 검산 삼백리를 봉읍으로 주어 편안히 몸을 붙일 곳만 가지는것이 소장의 평생소원이옵니다.》

전왕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적을 파하고 공을 세우면 어찌 검산뿐이리오. 그대는 심신을 다해 강적만 없애라. 그러면 그대가 원하는바를 다 들어주리다.》

그렇게 말해놓고난 전왕은 문득 그에게 군사가 없고 성안의 군사도 변변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의아해서 물었다.

《이 성안엔 군마가 적고 장수 또한 없는데 그대는 어떻게 적을 깨뜨리려 하느뇨?》

목신이 그게 무슨 대수냐 하는 태도를 지었다.

《소장이 단신으로도 잡을수 있소이다.》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 전왕은 입을 쩍 벌리고 은수재를 바라보았다.

전왕이 그러든말든 관계없다는듯 은수재가 고개를 외로 틀었다.

《믿지 못하겠거든 소장이 어떻게 싸우는가를 한번 보시옵소서.》

전왕에게서 물러나온 은수재가 여섯손에 칼과 창, 도채와 철퇴 등 병장기를 각각 들더니 성우에 올라가 성밑으로 몸을 날리는것이였다. 가볍게 땅에 발을 붙인 은수재가 커다란 몸통을 기우뚱거리며 단신으로 아군의 진앞으로 다가섰다. 한걸음이 일반사람의 열보씩 씽씽 걸어 아군의 진앞에 이른 목신이 산천이 떠나갈듯 고함쳤다.

《적진장수는 바삐 나와 내 칼을 받으라!》

천둥같은 소리에 황운이 이상하여 장대에 올라 바라보니 십오척장신이 네눈을 부릅뜨고 륙손에 창검을 들고 서있는것이 아닌가. 황운이 자세히 살펴보니 비록 사람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필경 사람이 아닌 흉악한 괴물이였다.

황운이 마음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숙록후와 대적할 묘책을 의논하니 숙록후가 의견을 내놓았다.

《저건 분명 사람이 아니라 요사한 괴물이오이다. 그러니 먼저 장수들을 출전시켜 그 능력을 시험해보는것이 어떻소이까.》

황운은 이런 괴물에 대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지라 말없이 머리속에서 생각을 굴렸다. 그 흉물스러운 생김모양도 놀랍지만 군사도 없이 저렇게 단신으로 나선것이 더 놀라왔다. 황운의 뇌리속에는 저 괴물이 옛말에나 나오는 불가사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어쨌든 저 괴물과 싸워야 하는것만은 피할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였다.

숙록후의 의견대로 각 진의 병마를 총동원하여 팔문금사진을 친 황운은 우시춘을 불러 한번 나가 접전하여 괴물이 노는 양을 시험해보라고 하였다.

《알겠소이다.》

우시춘이 응하고 달려나가 창으로 괴물을 가리키며 꾸짖었다.

《이건 어데서 나타난 도깨비야. 제법 사람흉내를 내는데 어서 나와 이 창을 받으라!》

은수재가 대척하지 않고 그저 눈을 부릅뜨고 한걸음한걸음 시춘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우시춘이 말을 질풍같이 몰아나가다가 그앞을 스치는 순간 창을 들어 힘껏 찔렀다. 은수재가 한손에 든 창으로 가볍게 막고 다섯손에 잡은 병장기를 휘둘렀다. 칼과 창, 도채와 철퇴 등 각종 병쟁기들을 줌안에 든 공기돌처럼 능란하게 다루면서 짓쳐나오는데 그 공격이 얼마나 사납고 맹렬한지 우시춘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황운이 우시춘이 상할가봐 징을 울려 회군령을 내렸다. 우시춘이 말머리를 돌리려는데 은수재가 윽- 하고 소리를 내지르면서 한다리를 들어 땅을 굴렀다. 그러자 땅이 푹 꺼져들며 커다란 웅뎅이가 생기더니 순식간에 우시춘을 삼켜버렸다. 아차하면 우시춘의 목숨이 위태로왔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황운이 전군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천병만마가 재빨리 은수재를 에워싸고 둥 둥 북소리 울리며 공격하였다. 웅뎅이로 다가서던 은수재가 한순간 주위를 휘둘러보며 주춤거렸다. 그찰나에 우시춘이 탄 말이 구뎅이에서 뛰쳐나와 아군의 진중으로 줄달음쳐왔다. 아군의 수십만 군사들이 날리는 화살이 비발처럼 은수재에게로 날아갔다. 허나 은수재의 몸에 가닿은 화살은 그의 살을 꿰지 못하고 꺾어지듯 맥없이 그자리에 떨어졌다.

《으하하!》

스산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은수재가 자기 몸에 돋아난 털을 뽑아 씹다가 뱉았다. 그러자 저같은 괴물이 사면팔방에 무수히 나타나고 주위는 안개가 자욱하고 청청대낮인데도 야밤처럼 캄캄하여 눈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였다. 안개와 어둠속에서 그 괴물들이 네눈을 부라리고 여섯손에 든 창과 칼로 돌아가며 아군을 치니 장수들과 군사들이 손쓸새없이 쓰러졌다. 너무도 놀라 허둥거리다가 앞이 보이지 않으니 서로 짓밟히고 창검에 찔려죽는 군사가 부지기수였다.

황운이 반안왕 류도에게 임금을 호위하여 빨리 피하라고 지시를 준 다음 징을 울려 진을 거두었다.

괴물에 의해 전장의 여기저기에 쓰러진 군사들의 시체가 두겹세겹으로 쌓이고 피비린내가 온 광야를 뒤덮었다. 괴물이 피냄새를 맡고 더욱 승이 나서 퇴각하는 아군의 뒤를 쫓아왔다.

황운은 별수없이 도술을 행하여 입속으로 주문을 외워 풍백(바람 신)과 우사(비신)를 불렀다. 곧 폭풍치며 센 바람이 일고 대줄기같은 큰 비가 짜락짜락 소리치며 세차게 내렸다. 폭풍이 들이치고 소낙비가 괴물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그제서야 괴물이 주춤거리더니 더 쫓지 않고 물러났다.

아군이 전력을 다하여 밤도와 남으로 수백여리나 물러나 압록부의 신주에 이르니 장수들과 군사들은 물론 군마까지도 기진맥진함이 더 말할나위가 없었다.

암만 생각해보아도 그 괴물은 사람이 아니라 불가사리같은 요물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황운은 좀처럼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앞일을 기약할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번 싸움에서 황운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멀리 내쳐버린 은수재가 범잡은 포수마냥 집채같은 몸통을 흔들거리며 돌아오니 성우에서 제눈으로 싸움의 전과정을 지켜본 전왕과 엄평이 입이 귀밑까지 째져 은수재를 임금의 칙사 모시듯 환대해주었다. 전왕과 엄평이 연해연방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은수재가 배를 내밀며 장담하였다.

《소장이 이번 싸움에서 황운과 설연을 거의 잡게 되였는데 갑자기 센 바람이 불고 큰 비가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나이다. 다음번 싸움에선 기어코 잡으리다.》

대군을 이끌고 수백리나 남쪽으로 후퇴한 황운이 압록부의 신주에 이르러 진을 치고 군사를 점검하니 희생이 많은지라 너무도 억이 막혀 말이 다 나가지 않았다.

장수들이 아직도 벙벙해서 서로들 얼굴만 쳐다보는데 얼굴엔 짙은 구름장이 드리워져있었다.

우시춘이 나서며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그 괴물이 능히 날을 어둡게도 하고 땅을 뒤흔드는 재주까지 가지고있으니 쉬이 잡을수 없소이다.

그럴바엔 차라리 황성으로 회군하여 군사와 군마를 휴식한 다음 다시 기병하여 요괴를 제어함이 어떠하오이까.》

우시춘의 말에 황운은 자기의 참룡검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이 참룡검을 내주면서 태명산 도사는 요괴를 무찌르는 참사검이 금수산 선인에게 있다고 말하였었다. 그리고 금수산 선인도 강적을 만나거든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황운은 아무래도 금수산 선인을 찾아가는수밖에 딴 방도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찌기 태명산에서 무술을 배울 때 스승은 나에게 검을 주시면서 〈이 검은 역적들을 멸하는 참룡검이고 요괴를 치는 검은 참사검이라 그 검은 금수산 선인이 가지고있다〉고 하였소.

그리고 내 황성에 왕래할 때 금수산 선인을 만난적이 있었는데 그때 선인은 어려운 일이 있거든 자기를 찾아오라 하였댔소.

지금 생각해보면 두분의 말씀이 다 까닭이 있었던것 같구려. 그러니 내 이길로 금수산 선인을 찾아가겠으니 장수들은 내가 올 때까지 군사를 정비하고 성방비를 강화하도록 하라.》

장수들이 머리를 수그리며 황운의 지시를 받았다.

그 즉시 황운은 천리준마를 재촉하여 금수산으로 줄달음쳤다. 주야로 준마를 몰아 금수산입구에 이른 황운은 산을 마주서서 두팔을 활짝 벌려 합장배례하고 내심의 진정을 담아 기도문을 지었다.

《소생이 충성이 부족하고 재주가 모자라 역적을 아직까지 멸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흉악한 괴물을 만나 허다한 군사들만 잃었나이다. 소생의 힘으로는 능히 당할수 없으니 어찌해야 그 요물을 잡아 공을 이루고 나라를 회복하리오.

묘책이 아득하여 전일 선생의 말씀을 생각하고 불원천리 찾아왔나니 엎드려 빌건대 선생은 외람타 마시고 훌륭한 묘책을 가르쳐 아득한 인생을 깨우쳐주소서.

역적들을 쓸어버려 천하를 평정한 후 이몸이 죽으면 후세에 제자되여 선생의 은덕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가 하나이다.》

그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있었다.

기도문을 다 읽고난 황운이 주위를 휘둘러보니 수려한 산천경개가 아름답기 이를데 없었다. 이름모를 갖가지 꽃들이 울긋불긋 다투어 피여나고 머리우로는 백학이 너울거리며 날아예고 길옆으로는 사슴이며 사향노루, 귀가 큰 토끼며 꼬리 긴 다람쥐들이 재롱을 부리며 내기하듯 줄지어 달리고있었다.

골짜기사이에 실오리마냥 가늘게 뻗은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따라 금수산의 정수리로 한동안 올라가는 황운의 앞에 불쑥 커다란 절벽이 막아섰다. 황운이 머리를 들어 절벽을 바라보는데 흰 구름이 뽀얗게 피여나더니 구름을 타고 한 청의동자가 앞에 내려와 서는것이였다.

《대인이 충렬후 황대내상이 아니오이까?》

황운이 놀라며 반문하였다.

《선동이 어찌 나를 아느뇨?》

흰 이발을 가쯘히 드러내며 선동이 방긋 웃었다.

《선생이 분부하시기를 금일에 황대내상이 오실것이니 소동으로 하여금 동구에 나가 맞아들이라 하셨습니다.》

황운이 반색하며 다시 물었다.

《선생이 어디에 계시느냐?》

동자가 대답대신 따라오라는듯 앞서 걸으며 벼랑을 오른다. 동자를 따라 벼랑에 오르니 정갈하고 자그마한 삼간초옥이 보이는데 그앞에 백발을 날리며 금수산 선인이 서있었다.

다급히 달려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황운의 귀전에 금수산 선인의 청아한 목소리 들려왔다.

《그대의 지혜와 묘략으로 어찌 그만한 요괴를 당하지 못하리오.》

황운이 얼굴을 붉히며 공손히 대답하였다.

《그 요괴는 사람이 아니오이다. 눈이 네개고 팔이 여섯인데다가 능히 천지를 밝게도 어둡게도 하니 그 변화무쌍함을 도무지 가늠할수 없소이다. 옛적의 용장이래도 그 천지조화와 용맹을 당할수 없을가 하오이다.

감히 묻사오니 대체 그 요괴는 어떤 놈이오이까?》

금수산 선인이 백발을 내리쓸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 요괴는 본래 사람이 아니라 검산에서 천년묵은 〈은수재〉라고 부르는 은행나무로다.

엄평이 그 이름을 지어주었지.…》

금수산 선인은 엄평과 은수재와의 연고를 설명하고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은수재의 재주가 변화무궁하고 조화무쌍하기 이를데 없네.

대저 은행나무에 혹이 넷인 까닭에 은수재의 눈이 넷이고 나무의 가지가 여섯이여서 은수재의 팔이 여섯이며 나무잎이 누런 연고로 은수재의 몸이 금빛이로다. 실로 은수재는 고금에 아직 있어보지 못한 흉악한 괴물이네. 그런즉 그대가 당하기 어렵도다.》

금수산 선인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황운은 온몸이 그대로 귀가 되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헌데 그 은수재는 세상에 없는 흉물이지만 엄평을 위해선 한몸을 아끼지 않는 의리도 있다네.

왜 그러는고 하면 그 은수재가 저에게 이름을 지어준 엄평의 은혜를 갚고 검산을 봉읍받아 봄과 가을에 제향을 받고저 하기때문일세.

그대가 전번 싸움때 만일 풍백과 우사를 부르지 않았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했을거네.

허나 세상에 요물이 도적을 도와 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또 괴이한 귀신이 나타나면 그를 제어하는 술법이 있는 법일세.》

황운이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을 가르쳐주소이다.》

금수산 선인이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다.

《내 일찌기 태명산도사와 함께 이 산봉우리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다가 검 두개를 얻었는데 하나는 참룡검이요, 하나는 참사검이라 참룡검은 도사가 그대에게 준 칼이고 참사검은 내가 가지고있는데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했지. 이제 그 요물이 나타났는데 참사검은 바로 사악한 요괴를 베는 검이라 만일 이 검이 아니면 가히 베지 못하네.

그 은수재가 분명 엄평의 청으로 온것이 분명한데 아마 이번 싸움에서 그대와 숙록후를 잡으려고 할것이네. 시간을 늦추면 위급하니 그대는 빨리 돌아가게.》

말을 마친 금수산 선인이 참사검을 꺼내 황운에게 주었다. 황운이 검을 받아안고 뜯어보니 생김과 크기는 참룡검과 꼭같은데 다만 《참사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것이 서로 달랐다.

황운이 검을 받고 감사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며 나직이 물었다.

《신기한 검을 주신 은혜 망극하기 그지없사오나 그 요물이 체통이 장대하고 산도 움직일 기력이 있어 서로 대적할 길이 없사온대 이 검이 있은들 어찌 베리까?》

《그건 념려말라. 그대가 이 검으로 그 요물을 비치면 그 요물이 스스로 마음이 옹송하여 오도가도 못하고 한곳에 설것이니 그때 들어가 베면 되네. 검광이 눈에 닿으면 은수재가 제아무리 요술을 부리려고 하여도 부릴수 없고 죽을 처지에 놓여도 능히 도망칠수가 없네. 그리고 이 검을 들어 공중을 후려치면 신장들이 무수히 나타나 요물을 에워싸며 그러면 은수재는 저절로 쓰러지고마네. 감히 도망칠 엄두도 못내고말이네.》

《잘 알겠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황운이 진심으로 감사하여 인사를 하자 금수산 선인이 그의 손을 꼭 쥐였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정이 하늘에 닿으면야 그 아무리 천만가지 변덕을 부리는 요물이라 해도 어찌 당하지 못할손가. 그대의 충의심에 난 감동을 금할수 없네. 어서 바삐 가서 그 괴물을 료정내고 나라를 평정하게.

마지막으로 내 부탁할것은 그대가 이제 도적을 멸하고 이름을 죽백에 드리운 다음에도 이 산을 잊지 말라는것이네.》

황운은 코마루가 찡해남을 어쩔수 없었다. 나라위한 애국의 마음이 활화산보다 더 뜨겁다면 그 어떤 횡포한 외적이나 간특한 역적이라 해도 제아무리 천변만화를 부리는 괴물이라 해도 반드시 멸할수 있으리라!

황운은 마음을 다잡으며 금수산 선인에게 두번세번 사례하고 금수산을 내렸다.

비단으로 수놓은듯 산좋고 물맑고 경치가 아름다운 금수산, 아름다운 이 강산을 외적들과 저 하나만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간신소인배들이 더는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리라 굳은 결의를 가다듬으며 황운은 금수산을 몇번이나 쳐다보았다.

금수산을 내려 단숨에 신주에 돌아온 황운이 임금을 뵙고 금수산 선인이 신검을 내여준데 대하여 아뢰니 임금이 못내 탄복해하였다.

이어 대내상 황운은 류도와 황위더러 임금을 모시고 신주를 지키라 하고는 정병 이십만을 거느리고 현주로 진군하였다. 현주로 진군하는 장수들과 군사들의 얼굴에는 은수재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증이 은연중에 비껴있었다.

현주에 이른 황운은 모든 장수들을 거느리고 성밑에 다가가 싸움을 걸었다.

멀리 쫓겨가 한동안 꿈쩍하지 못할줄로만 알고있던 황운이 성밑에 와 싸움을 청하니 은수재가 화가 독같이 치밀어 여섯손에 창검을 들고 나섰다.

전왕이 근심어린 어조로 당부하였다.

《저 황운과 설연이 지모와 용맹이 딴 사람과는 대비되지 않으니 장군은 경적치 말고 심중하게 대전하라. 만일 대공을 세우면 그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리라.》

은수재가 으시대며 배를 내밀었다.

《소장이 이 한손에 든 창검으로도 열장수는 능히 제어하는데 하물며 여섯손에 든 창검으로 어찌 서생같은 황운과 설연을 근심하리까.

오늘은 맹세코 저 두 도적장을 베여 휘하에 드리려니 페하는 근심마소서.》

은수재가 성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산같은 몸통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나왔다.

그 형용이 너무 흉악하여 보면 볼수록 마음이 자연히 떨리고 정신이 어질어질하여 아군의 진중에서 그 어느 장수도 감히 나설념을 못하였다.

장수들의 얼굴에 씌여진 불안한 심기를 가늠해보던 대내상 황운의 눈길이 숙록후와 마주쳤다. 숙록후가 고운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고 호심깊은 두눈을 슴벅이였다. 이미 황운으로부터 참사검에 대해 알고있는 그였다. 허나 출전하는 황운을 정작 마주보느라니 저도모르게 긴장해지고 걱정이 앞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내심을 애써 감추며 숙록후는 흰이를 가지런히 드러내며 뜨거운 격려와 고무의 웃음을 보냈다.

긴장한 눈빛들이 지켜보는 속에 대내상 황운이 천리준마에 올라 은수재를 맞받아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은수재의 앞에 이른 황운이 참사검을 높이 쳐들었다.

《흉악한 괴물 은수재야! 검산에 가만히 붙어있을게지 감히 어디라구 역적을 도와 이곳에 나타났느냐! 너따위 나무귀신이 역적무리를 도운다고 불의가 의로움을 이길것 같으냐!》

황운이 저의 본색을 알고있다는 생각에 은수재는 속이 뜨끔하였다. 저의 정체를 알았으니 방책도 있다는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감이 가슴을 치는데 미처 정신차릴새없이 다시 황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은수재의 귀청을 때렸다.

《너를 가차없이 베여버릴 신비로운 검이 지금 내 손에 들려있다!

그러니 네 죽기 전에 너를 한칼에 베일 이 검이 어떠한것인가를 한번 똑똑히 보아라!》

그러지 않아도 저의 정체가 드러나 은근히 속을 조이고있던 은수재는 그 말에 네눈을 부릅뜨고 황운이 높이 쳐든 검을 바라보았다. 해빛을 받아 령롱한 빛을 뿌리던 참사검의 검광이 은수재의 네눈으로 사정없이 그리고 고스란히 빛발쳐갔다.

그 빛발치는 검광이 은수재의 네눈에 와닿는 순간 은수재는 부지불식간에 정신이 아찔해지고 속이 메슥메슥해났다. 어찌된 일인지 여섯팔을 들려고 하여도 천근무게가 실렸는지 들수 없고 네눈에 모래알이 들어갔는지 깥깔한게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으며 움직이려 해도 말뚝에 박아놓았는지 온몸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천지조화를 부리려고 아무리 모지름을 써보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도술을 부릴수가 없었다.

황운이 장승처럼 우뚝 서서 네눈알만 더부럭거리며 밭가운데의 허재비마냥 멍청히 서있는 은수재를 경멸에 찬 눈으로 쏘아보다가 도술을 행하며 입속으로 주문을 외워 풍백과 우사를 불렀다. 곧 센 바람이 길길이 태치며 불어대고 함지로 퍼붓는듯 한 세찬 소낙비가 은수재의 우람찬 몸통을 마구 때리기 시작하였다.

은수재는 별안간 천길나락으로 떨어지듯 몸이 땅으로 잦아들고 눈에 비물이 가득 고여 강물이 출렁이는지라 더욱더 움쩍하지 못하고 그냥 한자리에 얼어붙은듯 서있을수밖에 없었다.

이때 황운이 벼락같이 소리치며 은수재를 향해 달려가는데 이미 약속한대로 숙록후가 또 쏜살같이 그뒤로 달려나갔다. 황운이 달려나가며 참사검으로 은수재의 가슴팍을 비껴치고 그뒤를 따라 숙록후가 룡린검을 휘둘렀다. 두 장군의 참사검과 룡린검이 은수재의 몸통을 사선으로 누비였다.

순간 요란한 우뢰소리 울리고 시꺼먼 구름이 하늘로 치솟았다. 비호같이 달리던 황운과 숙록후가 말을 돌려 다시 달려들려는데 별안간 구름은 사라져버리고 은수재는 어데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섰던 자리가 움푹 패여있고 그안에 검붉은 피가 그득히 고여있을뿐이였다.

진중에서 와- 와- 함성소리가 요란스레 터져나왔다.

황운은 군사를 거두어 진을 철통같이 친 다음 검산으로 날랜 군사 서넛을 보내여 알아보게 했더니 아니나다를가 천년묵은 은행나무가 허리가 끊어져 넘어졌는데 혹마다 물이 가득 고여있고 큰 나무가지모두가 부러졌다고 보고하는것이였다.

(전번 싸움때 그 요물이 바람과 비에 몸이 젖고 눈에 물이 들어가서 우리를 뒤쫓지 못했구나.)

즉시 은수재를 베인 첩서를 임금에게 상주한 황운은 이어 장수들과 엄평을 잡을 계책을 의논하였다.

이번 싸움에선 행여나 은수재가 황운과 설연을 잡아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전왕은 한창 싸움이 벌어지는 때에 갑자기 폭풍이 불고 소낙비가 오기에 이상해서 성우에 올라 전장을 바라보니 은수재는 보이지 않고 다만 황운과 설연이 함성을 올리는 자기 군사들에게 휩싸여 답례하는 모습만 눈에 뜨이는것이였다.

전왕은 황황히 뛰여들어와 엄평에게 아부재기를 쳤다.

《은수재가 분명 달아났도다!》

미리 짐작하고있던 엄평이 땅이 꺼지게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은수재는 신이 검산에서 검술을 익힐 때 이름을 지어준 천년묵은 은행나무오이다.》

은수재와의 연고를 일일이 설명하는 엄평을 멍하니 바라보는 전왕의 두눈에 생기가 씻은듯이 사라졌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하리오?》

《신의 상한 팔이 아직 채 낫지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성안에는 용장이 없고 또 량곡과 마초마저 부족하니 오래 버티기는 어렵나이다.

신이 죽기로써 결단코 한번 싸우는 길밖에 없나이다. 만일 황운을 잡지 못하면 신은 돌아오지 않으리니 페하는 후일을 기약하소서.》

공포에 질린 눈으로 엄평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전왕의 뇌리에 괜히 이 놀음에 끼여들었다는 때늦은 후회가 어렴풋이 갈마들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내 가만 있었더라면 제후로서 여생을 보낼수도 있지 않았던가.)

사람이 말타면 견마 잡히고싶고 만족을 모르는 야심이 굴뚝같으면 스스로 제몸을 해친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은수재를 격파한 대내상 황운은 서신을 보내여 신주의 본진을 다 옮겨오게 하고 현주성을 에워싸고 날마다 군사로 하여금 엄평을 욕설하며 싸움을 걸게 하였다. 그렇지만 성안에서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성급한 장수들이 나서며 화공전으로 성을 함락시키자고 건의하였다.

대내상이 어떻게 했으면 하는 의향으로 숙록후를 돌아보니 그의 낯색이 예상외로 어두웠다.

《화공술로 엄평을 치기는 어렵지 않소이다. 그러나 무죄한 백성들이 상할것이고 또 재물이 다 불탈것이니 성상이 근심하지 않겠나이까.

이전에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빌어 조조의 대병력을 적벽강에서 물고기밥이 되게 하니 하늘이 애처로와하였나이다. 그래서 제갈공명이 수년동안 그 죄를 빌었으나 끝내 용서받지 못하고 비명에 죽었나니 이는 인명을 살해함은 불길하기 그지없는 중죄이기때문이오이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자 하늘이 도와 복을 주도다〉라고 하였거늘 이미 괴물은 죽었고 또 성안에는 날래고 용맹한 장수가 없으며 군사도 패잔병무리라 죽기 직전이옵니다.

저따위 흉악한 엄평 하나를 잡자고 무고한 백성을 상하게 해서는 안되는줄 아오이다.》

장수들은 물론 대내상 황운도 새삼스럽게 숙록후를 바라보았다.

장수들이 자기를 처음보는 사람마냥 뚫어지게 쳐다보자 숙록후의 얼굴이 홍시마냥 붉어졌다. 그럴 때면 전장을 누비던 용장의 모습이 아니라 수집음을 타는 랑자의 황홀한 모습같았다.

황운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장수들을 둘러보며 령을 내렸다.

《성안에 량곡과 마초가 다 떨어졌을것이니 포위진을 더욱 바싹 조이면 기필코 적들이 나오리라. 그리고 한편으로 계속 엄평을 자극시켜 제스스로 나오도록 하라.》

은수재가 없고 엄평은 팔을 상하고 또 출전할 장수가 없으니 암만 생각해봐도 앞일이 막막한지라 전왕이 하루는 엄평과 의논도 없이 더 참지 못하고 성우에 올라서서 화친을 청하며 서신을 보내였다.

《불민한 과인으로 하여 애매한 인명이 많이 죽었으니 천도가 어찌 무심하랴만 골육상쟁은 불행한 재변이 아니겠는가.

과인으로 말하면 태자의 숙부이거늘 태자가 나이가 어려 능히 천하의 중임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붕어한 선임금의 친동기로서 스스로 제왕을 칭했노라.

과인이 비록 태자의 황위를 앗았으나 선임금의 위업을 계승함에는 별로 해로움이 없으며 또 태자가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있어 황실은 안정하지 않는가.

헌데 친혈육으로서 이렇게 과인을 모질게 핍박하니 이는 부자지간의 천륜을 절교함과 같노라. 그러니 어찌 태자인들 죄책이 없으리오.

이미 지나간 일을 말해야 유익함이 없으니 이제 더는 싸우지 말고 천하를 반분하여 현주이남은 남발해국으로 삼아 태자가 다스리고 현주 이북은 북발해국으로 하고 과인이 다스리게 함이 어떠냐.》

막다른 처지에 빠지니 자기를 과인이라 칭하며 비렬하게 목숨을 부지하려는 전왕의 서신에 황운과 숙록후를 비롯한 장수들이 분노로 치를 떨었다. 허나 화친을 청하는 전왕의 서신을 받아본 임금은 숙질간의 정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여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하였다.

황운과 숙록후가 눈물을 뿌리며 무릎꿇고 절절히 간하였다.

《페하! 숙질간의 정의를 저버리시기 어려우나 대의명분은 사정이 없사옵니다. 전왕이 비록 황실의 친척이라도 마음이 불측하여 선임금의 유지를 배반하고 옥좌를 찬탈하였소이다.

전왕의 말대로 그가 정녕 부자지간의 정과 선임금과의 의리를 중히 여겼더라면 어찌 페하를 열다섯살이 되기 전에 살해하려고 했겠나이까. 어린 미영이가 대신 그 참화를 받지 않았나이까.

신 등은 선임금의 유지를 받들어 페하를 충의를 다해 보좌하려 하지만 이 서신만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나이다. 설사 이자리에서 목숨을 끊는대도 한천지에 두 임금을 둘수 없나이다.》

그 립장이 너무도 절절하고 강경하니 임금이 딴 말을 더 꺼내지 못하였다.

이어 황운은 격분에 치를 떨며 전왕에게 격서를 보내였다.

《귀도 없고 눈도 없고 량심도 없는 후안무치한 전왕은 이 글을 보아라.

네 부자지간의 정과 의리를 중히 알것 같으면 어째서 선임금께서 승하하실 때의 유지를 어겼느냐.

삼년상도 마치지 못하였는데 황위를 찬탈하고 옥좌를 차지하였으며 또 간사한 엄적의 말을 듣고 나어린 〈태자〉를 살해하였으니 네 죄는 하늘땅이 용납 못할 대역부도죄거늘 이 천지에 과연 너를 용납할 곳이 있다더냐.

하늘을 속이고 인륜을 어기고도 감히 목숨을 부지하려고 요술을 피우는 뻔뻔스러운 너같은 역적을 천지신명이 어찌 도와주라고 일을 주선할소냐.

너야말로 세상에 없는 대역적이요, 이 나라 백성모두가 용서 못할 철천지원쑤로다.

이제라도 그만 요술을 피우고 무고한 백성들을 상하게 하지 말고 빨리 나와 목숨을 바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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