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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회


황위는 범의 굴에 자진해 들어가고
엄평은 계략에 속아 넘어가다


《제기랄, 함정에 빠졌구나. 빨리 돌아서라!》

엄평은 계교에 빠졌음을 알고 눈알이 뒤집혀져 돼지멱따는 고함을 질렀다.

선두에서 질풍같이 달려오던 부하장수들이 다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허나 물밀듯이 공격해나오던 오만의 군사를 한꺼번에 돌려세운다는것은 산꼭대기에서 굴러내려오는 커다란 바위돌을 맨손으로 막으려고 하는것과 같이 어리석기 그지없는 노릇이였다. 선두진에서는 돌아서라는 령을 들었다지만 제일 뒤에 있는 후진에 그 령이 전달될리 만무하였다. 밀고 들어오는 후진과 돌아서는 선두진이 한데 엉켜돌아가니 순식간에 적군이 혼란되여 마구 죽탕이 되여버렸다. 서로 부딪치고 말발굽에 밟히워 아우성치는 소리, 역정을 내며 제편끼리 멱살을 틀어잡고 쥐여박는 소리, 말들이 길길이 솟구치며 울부짖는 소리가 캄캄한 밤하늘가에 울려 적막을 깨뜨렸다.

이때 어디선가 한방의 포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사면에서 하늘을 찌를듯 한 함성소리 일시에 터져나오며 천병만마가 일시에 쏟아져나왔다.

둥- 둥- 뚜우-

요란한 북소리, 길게 울리는 천아성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속에 화살과 돌이 비오듯 날아들었다.

맨 선두에서 달리던 엄평이 바빠맞아 황급히 돌아서는데 그의 눈앞에 구레나룻이 보기 좋은 장수가 장창을 추켜들고 나타났다. 그뒤로 장검을 비껴든 다부진 장수가 짓쳐나왔다. 구레나룻장수는 곧장 눈을 부라리며 엄평을 향해 달려들고 다부진 장수는 엄평의 뒤를 따르는 엄진에게로 질풍쳐왔다. 구레나룻장수는 발해군의 왕연이요, 다부진 장수는 홍윤이다.

왕연은 엄평을 대적하고 홍윤은 엄진을 대적하는데 일합도 못되여 홍윤이 장검을 번뜩거리더니 엄진을 베여내치고 왕연을 도와 엄평을 협공하였다. 두 장수의 무서운 기상과 용맹에 엄평이 더는 당하지 못하고 저희군사들은 아랑곳없이 저혼자 성문으로 말을 재우쳐갔다.

이때 엄평의 앞에서 한 거쿨진 장수가 벽력같은 소래기를 지르며 막아나서거늘 이는 발해군 장수 우시춘이였다. 엄평이 우시춘과 맞붙어 수십여합이 되도록 승부를 결정치 못하여 안달복달하는데 뒤에서 쫓아오던 왕연과 홍윤 두 장수가 어느새 우시춘과 합세하여 세사람이 엄평 하나를 포위하고 사정없이 치고 찔렀다. 황급해난 엄평이 앞에 막아선 우시춘의 말을 창으로 찔렀다. 말이 다리를 꺾으며 자빠지자 우시춘의 몸이 앞으로 쏠려 땅에 떨어졌다. 그 기회에 엄평이 날쌔게 몸을 빼여 내닫는데 이번에는 체통은 그리 크지 않으나 날씬해보이는 한 장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앞을 막아나섰다.

《개같은 반적은 하늘에 죄를 짓고 감히 살기를 바라느냐!》

말갈기에 머리를 틀어박고 사생결단하며 내닫던 엄평이 고개를 쳐들었다.

《난 발해국의 숙록후 설봉선이다! 천륜을 어지럽힌 엄평은 내 칼을 받으라!》

《마침 잘 만났다. 치마두른 계집이 감히 나와 맞서보겠다구?!》

당황망조한 속에서도 엄평이 씹는듯 뇌까렸다. 흡사 승냥이의 단말마적인 울부짖음소리를 내지르며 엄평은 숙록후를 향해 맞받아나갔다.

허나 사오합을 접전하고 엄평은 자기가 그의 적수가 못됨을 깨달았다. 설연의 검술이 상상을 초월하였기때문이였다. 아차 까딱하면 목이 날아날 판이였다.

(과시 설연의 무술은 천하에 당할자 없겠구나!)

엄평은 다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이럴 때엔 삼십륙계가 상책이라고 병서에도 쓰지 않았던가. 엄평이 뇌리에 그런 생각이 들어 말머리를 돌리려는 찰나, 어느새 숙록후의 룡린검이 번뜩- 하면서 엄평이 타고있던 말의 목이 뭉텅 잘라져나갔다. 앞으로 몸이 쏠리는 순간 바빠맞은 엄평은 변신술을 부려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달아뺐다. 숙록후와 우시춘 등이 군사를 휘몰아 그뒤를 따랐다.

창황중에 변신술을 부려 허공으로 솟구친 덕에 목숨을 건진 엄평은 정신없이 성문에 이르렀건만 문이 닫겨져 들어갈수가 없었다. 엄평은 다시한번 몸을 한번 솟구쳐 성을 뛰여넘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엄평이 성안으로 도망쳐 들어가자 숙록후는 징을 울려 전군에 회군령을 내렸다.

어느덧 푸름푸름 새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전장을 돌아보던 숙록후는 오만이나 되는 엄평의 군사가 피흘리며 다 몰살된것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저 엄평이 하나때문에 무고한 군사들을 많이도 죽였으니 반드시 나는 천벌을 받으리다.》

장수들을 불러 주검을 다 묻어주라고 한 숙록후는 엄진의 머리를 기에 달고 승전고를 울리며 성중에 대고 고함치게 하였다.

《전왕과 엄평으로 말미암아 무죄한 백성들과 군사들이 많이 죽었으니 너희 두 역적들은 스스로 머리를 바쳐 더는 군졸들을 상하게 하지 말라!》

그 소리를 들은 성안에 남은 적진의 대부분 장수들이 혼맹이 빠져 사기가 저락되여 싸움할 생각이 없어졌다.

엄평이 한탄하여마지 않았다.

《내 황운의 꾀에 넘어가 패하더니 이번엔 설연의 간계에 빠졌구나. 숱한 군사를 죽이고 패하였으니 내 이제 무슨 수로 성을 지켜내랴.》

엄평이 가슴치며 아무리 통탄한들 어찌 황운과 숙록후의 재주와 용맹을 당하리오. 허나 엄평은 속은 살아서 어떻게 하나 황, 설 두 장군을 없앨 생각으로 머리를 쥐여뜯었다.

아닌밤중에 홍주성 북문쪽에서 굉장한 싸움이 터지자 대내상 황운은 척후대를 파하여 성을 에돌아가서 형세를 알아오게 하였다.

전장을 돌아보던 숙록후앞에 대내상이 파한 척후장이 나타났다.

《황장군께서 이곳에서 큰 싸움이 일자 소장더러 알아오라 하셨나이다.》

숙록후가 반색하며 황운에게 보내는 첩서(승전소식)를 척후장편에 보내였다.

그 서신에서 숙록후는 싸움의 전말과 함께 한시바삐 임금을 뵈오러 가겠다고 덧붙였다. 밤새 벌어진 싸움이 숙록후가 벌린 싸움이고 또 쾌승을 거두었다는 첩보에 접한 대내상이 더없이 기뻐하며 어서 빨리 와서 임금을 뵈올것을 승낙하였다.

이어 숙록후가 장수들과 군사들은 남아 본진을 지키게 하고 다만 백여기만 거느리고 임금을 뵈옵는데 네번 절을 하고는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죄를 빌었다.

《신첩의 죄 백가지, 천가지로 변명하여도 씻을수 없는 중죄옵니다.》

임금이 눈물을 머금고 위로하였다.

《대내상과 경의 충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이 있으리오. 다만 짐이 복이 없고 밝지 못하여 이런 변란을 당함이라 어찌 비감하지 않으리오.》

숙록후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황운의 눈에도 추연한 빛이 흘렀다.

이날밤 황운이 사랑하는 안해-설봉선과 만나는데 그 정회 무엇이라 말하리오. 엄평의 반란으로 십여년세월 서로 헤여져있던 부부였다. 봉선이 황운앞에 아들 황위를 내세우자 황운이 감개무량해서 아들을 그러안고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다. 심중에 고패치는 하많은 말을 어이 다 할손가.

황운과 봉선은 그동안에 있은 하많은 사연들을 주고받고 쌓이고쌓인 정회를 나누면서 밤을 지새우는데 한곁에서는 황위가 셈평좋게 자고있었다.

이튿날 대내상 황운이 성안의 동정을 알아야 하겠으나 보낼만한 사람이 없어 망설이는데 마침 황위가 곁에 있다가 앞으로 나섰다.

《소자를 성안에 들여보내주소이다. 소자가 아직 엄평을 상면한적이 없으니 엄평은 소자가 누구인줄 모를것이고 또 소자가 나이가 어리니 의심받을것이 없을것입니다. 때문에 이 일에선 소자가 제일 맞춤한 적임자가 아니겠나이까.

소자는 손쉽게 성안에 들어가 엄평을 달래고 계교를 시행할수 있나이다.》

황운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네 열두살난 아이로 어찌 범의 굴에 들어가겠다고 하느냐. 무슨 묘책이 있어 횡포하기 그지없는 엄평을 유인한다고 그러느냐.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다시 꺼내지 말아라.》

황위가 고집스레 머리를 오똑 쳐들며 황운을 바라보았다. 봉선이 옆에서 아들에게 눈짓하고는 한마디 여쭈었다.

《애가 비록 어리나 용맹과 지모가 족히 일을 감당할만 하니 한번 보내봄이 어떻소이까.》

그 말에 황운이 아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황위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자에게도 생각이 다 있으니 아버님은 너무 념려마소서.

소자가 성안에 들어가 엄평을 부추긴 다음 몰래 성우에 기를 세우겠나이다. 홍기를 세우면 어머님이 진을 엄습하고 백기를 세우면 아버님이 영채를 탈취하옵소서.》

황운의 심중에 의아함과 대견함이 엇갈리는데 황위가 거듭 청하고 봉선이까지 나서서 지지해주니 어쩔수 없이 승낙하고말았다.

제 소원이 달성되자 황위가 기뻐하며 벙글거렸다. 자기가 한 약속을 두세번 다짐한 황위는 선동의 복색을 차리고 푸른 하늘소에 올라 표연히 성으로 향하였다. 당시 황위의 나이는 열두살이라 용모와 기질이 짐짓 선인동자요 전혀 속객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라지는 아들을 근심스레 바라보는 황운에게 봉선이 조용히 다가와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저애가 첩을 따라 말갈의 흑수부까지 갔다왔소이다. 어머니인 첩으로서도 그애의 재능에 탄복할뿐이오니 너무 마음쓰지 마소이다.

제딴에 무슨 궁냥이 있으니 믿어보소서.》

숙록후에게 크게 패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엄평이 군사를 점검해보니 군졸들은 태반이 죽고 장수는 몇명 남지 않았는지라 원통하기 그지없어 끙끙거리며 가슴을 앓았다. 물고 뜯고서라도 오직 황운과 설연을 복수할 그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산해진미가 그득한 옥소반의 진수성찬도 소태를 씹는듯 하였고 분향내 풍기는 미녀도 흥미가 없었으며 단술도 구정물처럼 여겨졌다.

며칠동안 끙끙 앓던 엄평은 자기가 이렇게 손맥을 놓으면 십여년세월 공들여 꾸미고 누려온 권세와 부귀영화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신을 수습하고 부하장수들을 불러다놓고 황운과 설연을 깨뜨릴 방책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야 신통한 수가 나오지 않아 갑자르고있는데 수문장이 들어섰다.

《서문밖에 한 선동이 왔는데 자기는 검산 도동이라 하며 엄승상을 뵙기를 청하나이다.》

그 말에 엄평이 소스라치듯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검산을 떠난지 근 이십년이 되여오지만 검산에서 언제 한번 나에게 사람을 보내온적이 없었거늘 이 무슨 소리인가. 혹시 황운이 보낸 간자가 아닌가?)

잠시 머리를 굴리던 엄평이 나직이 내뱉았다.

《그럼 들여보내라.》

파수장을 따라 용모가 끼끗하면서도 눈빛이 초롱초롱한 애어린 선동이 들어섰다. 방안에 들어서는 그 선동을 엄평이 뱁새눈을 쪼프리며 노려보았다.

방안에 들어선 황위는 그 어마한 분위기에 다소 긴장해졌다. 평상우에 높다랗게 앉아 병아리 채려는 번대수리마냥 자기를 노려보고있는 엄장 큰 사내는 분명 엄평이라고 짐작되였다. 엄평의 좌우에는 여러 장수들이 벌려서고 그뒤로 창과 칼을 쥔 군사들이 석줄로 쭉 늘어서있었다.

황위는 마음을 도사려먹고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절은 하지 않고 가벼이 읍하고 단정히 서있는 황위의 귀전에 엄평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어디에 있으며 무슨 일로 나를 보려 하느뇨?》

황위가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또랑또랑하게 대답하였다.

《소동은 검산 도사의 제자인데 사부의 명으로 승상을 뵈우러 왔나이다.》

엄평의 뱁새눈에서 파란 불이 일었다. 요란한 언성이 방안을 들었다놓았다.

《네가 도사의 제자란 말은 거짓말이다. 내 도사를 리별한지 이십여년이 지났으나 서로 문안한적이 한번도 없거늘 어찌 오늘날 란세를 당하여 나를 찾는단 말이냐!

이는 필경 황운이 간계를 부려 너를 군중에 보내여 우리의 허실을 내탐하고저 함이로다!

내 너를 먼저 목베여 위엄을 보이리라.》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좌우에 잡아내리라고 령을 내리니 단박에 살벌한 분위기가 떠돌았다.

황위가 조금도 낯색을 변하지 않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깔깔거렸다.

《참, 어처구니가 없네. 소가 웃다가 꾸레미터질 노릇이야! 하하!》

엄평이 엉거주춤 엉뎅이를 반쯤 들며 꾸짖었다.

《네 이놈! 조꼬만 놈이 감히 뉘앞이라고 날 조롱하며 웃는거냐!》

황위가 새별눈을 초롱거리더니 웃음을 그쳤다.

《내 승상을 두고 웃는것이 아니라 우리 사부님이 사람을 볼줄 모르기에 웃노라.》

《뭣이, 어찌고 어째?!》

황위의 얼굴에 비웃음이 짙게 어렸다.

《내 일찌기 사부님에게 듣자니 승상의 지혜가 세상에 적수가 없다고 하던데 이제 보건대 필부의 지혜와 아녀자의 지각만 못하도다.》

엄평이 너무 기가 막혀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단쇠마냥 시뻘개졌다.

《꼭대기에 피도 안마른 놈이 감히 백전로장인 나를 야료하니 네 죄는 죽어도 씻지 못하리다.

네 살고싶거든 방금 그 노란 입으로 말한 나의 지혜와 지인지감을 상세히 이르라. 만일에 네 말이 리치에 가당하면 용서하고 그렇지 못하면 단칼에 너를 베리라.》

황위가 당당한 태도로 서슴없이 대답하는데 그의 말을 듣는 부하장수들의 눈이 소눈깔만 해졌다.

《내 사부의 명을 받아 승상을 구하러 왔거늘 내 말을 미처 듣지 않고 먼저 황운을 겁내서 선생의 안부조차 묻지 않고 죽이려 하시니 이는 필부의 소행이요, 남의 언사와 처신을 살펴본 후 죄를 주어도 늦지 않겠건만 아녀자의 소견으로 급급히 일을 처리하시니 이는 대장부가 행할바가 아니오이다.

옛적에 제갈공명의 부인은 녀자였지만 가군을 위해 계책을 내였다 하던데 어찌 사내대장부인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엄승상을 위해 계책을 내지 못하리오.

내앞에 있는 엄승상으로 말하면 당대의 영웅으로 천하가 우러르는데 자기 선생의 제자도 몰라보니 어찌 천하를 다스리며 강적을 파하리까. 내 한번 죽는것은 두렵지 않으나 다만 우리 사부님이 지인지감이 없어 승상같은이를 제자로 둔것이 애달프기 그지없나이다.》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청산류수와 같이 말을 쏟는 황위였다. 그의 도고하고 당당한 언변과 의젓한 자세에 엄평은 위압되고말았다.

황황히 평상에서 내려온 엄평은 황위에게 자리를 권하며 사죄하였다.

《그대는 나를 꺼리지 말라. 때가 때인것만큼 량해하라.

밖에는 강적이 있고 안에는 어진 장수가 없어 진실과 허위를 알려고 그대를 한번 시험해본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하라.

그래, 그대는 성명이 무엇이며 스승의 훈계는 어떠한것인지 듣고저 하노라.》

황위가 자리에 앉아 손을 내저으며 대답하였다.

《소동의 성명은 위황이요, 다섯살때 선생을 쫓아 검산에 들어가 도를 배웠나이다.

근일에 선생이 소동에게 이르시기를 〈지금 엄승상이 황운으로 하여 위태롭기가 조석에 놓였으니 바삐 가서 구하라.〉고 하시기에 불원천리하고 왔소이다.》

엄평이 비로소 기뻐 어쩔줄 몰라하며 성안에 머물게 하였다.

엄평이 때때로 황위에게 몇마디 질문해보니 그가 조금도 주춤거리지 않고 척척 대척하는지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과연 검산도사가 보낸 제자가 분명하다고 푹 믿고 드디여 황위와 더불어 적을 깨뜨릴 일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이러구러 황위가 대내상과 약속을 정한 날이 다가왔다.

대내상 황운은 초인을 만들어 자기의 전포를 입히고 술에 취해 자는듯 장대우에 눕히고 좌우에 기치를 세우고 장수들이 호위하게 한 다음 자기는 몸을 피하여 엄평의 진중을 엿보았다.

이날 황위가 성우에 올라 엄평과 함께 황운의 장대를 살펴보고나서 나직이 속삭였다.

《누가 황운이 지모가 있다고 하나이까. 한번 싸움에서 이기고는 저렇게 해이되였으니 우선 승상이 성머리에 나아가 한번 싸워 그 교만한 예기를 꺾어버리소서.》

그렇지 않아도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우에 누워 술에 취해 잠만 자는 황운을 바라보면서 밸이 꼴리던 엄평이였다. 자기를 깔봐도 분수가 있지 저거야 이 엄평을 무시하는것이 아닌가. 성우의 숱한 군사들이 그러지 않아도 황운의 방자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을 보고 《황운이 엄승상 알기를 개똥처럼 여긴다.》고 수군거린다는 소식이 엄평의 귀에도 날아들었다.

황위의 그 말에 엄평의 손상당한 자존심이 되살아났다. 엄평은 황위의 의견을 쫓아 철궁을 빼들고 말을 타고 성문을 나섰다.

《이 오만방자한 황운아, 내 화살맛을 봐라!》

이를 사려물고 엄평이 철궁을 당겨 쏘니 그 화살이 정통으로 황운의 가슴을 명중하였다. 좌우에서 시위하던 호위군사들이 놀라서 다급히 화살을 뽑아버리고 황운을 맞들어 장막으로 날라들어갔다.

엄평이 그 모습을 띄여보고 하마입이 되여 성안으로 도로 들어와 황위에게 떠벌였다.

《황운이 내 화살에 맞았으니 십중팔구 중하게 상했으리라.》

이때를 놓치지 않고 황위가 귀띔하였다.

《황운이 죽기 십상이니 이때를 타서 치는것이 좋을것 같소이다.》

엄평이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성우에 올라 자세히 발해진중의 동정을 살펴보는데 설연이 자기 진을 떠나 황운의 진으로 급히 가는 모습이 눈에 걸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황위가 다시한번 엄평의 붙는 불에 키질을 하였다.

《황운의 병세가 위급한가 보오이다. 설연이 단기로 나오는것을 보니 설연의 진중도 비였을것은 불보듯 뻔한데 오늘밤에 엄습하면 기필코 이기리라. 승상은 때를 잃지 말으소서.》

엄평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성에서 내려온 엄평은 부하장수들을 모여놓고 오늘밤에 출전하겠으니 준비를 갖추라는 령을 내렸다. 입에 거품을 물고 고아대는 엄평의 태도를 주시하던 황위는 가만히 그 방을 나섰다. 누구도 황위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를 살피는 사람이 없는가를 재삼 확인한 황위는 성우에 은밀히 올라가 홍기를 세우고 처소로 돌아왔다.

성우에 꽂힌 홍기를 본 대내상 황운은 황혼이 될무렵 술법을 행하여 안개를 지어내여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한 다음 선봉장 류우에게 륙천군사를 이끌고 성밑에 매복하게 하고 자기의 삼천군사는 슬그머니 빼돌려 서쪽으로 진군시켰다.

한편 숙록후는 풀을 묶어 만든 초인군사를 사면에 세워놓는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셀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는 군사를 각곳에 나누어 매복시키고 엄평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날밤 엄평이 안개가 자욱한것을 보고 황위에게 근심어린 낯으로 물었다.

《안개가 이처럼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수 없으니 어찌 군사를 출전하리오?》

황위가 흔연히 대척하였다.

《지금은 안개가 짙으나 오늘밤 이경이 지나면 자연히 안개가 걷히고 하늘이 맑으리다.》

엄평이 놀라며 되물었다.

《그대가 어찌 그걸 아느뇨?》

황위가 입가에 연한 웃음을 떠올렸다.

《대장부가 천지음양의 리치를 모르고 어찌 대사를 의논하리오. 금일 황혼무렵에 안개가 내림은 황운의 군사가 많이 상할 징조요, 이경후에 안개가 걷힘은 엄승상이 승첩할 때인줄 아오이다.》

엄평이 머리를 기웃거리고는 더 묻지 않았다.

이날밤 이경이 되니 황운이 다시 술법을 행하여 안개를 걷히게 한다음 자기의 삼천군사가 전진한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경쯤에 안개가 걷히는것을 본 엄평이 황위의 말과 신통히 같은지라 크게 기뻐하며 그더러 성을 지키라 하고 자기는 정병 칠천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설연의 진으로 향하였다.

설연의 본진을 바라고 군사를 다급히 몰아간 엄평은 설연의 본진앞에 이르러 아연실색하여 입을 항 벌렸다. 칠천군사를 끌고 기를 쓰고 달려왔는데 이 무슨 일인가. 사면에 벌려선것은 다 초인이요 진짜 군사는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엄평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주밋거리는데 산골짜기에서 한방의 포소리 울리더니 천지를 진감하는 우뢰같은 함성소리 들려오고 수만의 정예군사가 사방에서 물밀듯이 쳐들어오는것이였다.

(아차, 내가 또 속았는가?!)

엄평이 혀를 깨물며 황급히 퇴군령을 내리는데 한 장수가 길을 막아서며 큰소리로 고함쳤다.

《네 오늘도 피할소냐.》

창황중에 바라보니 발해군 장수 우시춘이라 엄평이 거센 소리로 대꾸하며 맞받아나갔다.

서로 어울려 십여합을 싸우는데 또 한 장수가 큰 칼을 빼들고 비호같이 달려들어 엄평의 곁에서 맴도는 두 부장을 단숨에 베버리고 곧장 엄평에게로 육박해오거늘 이는 다름아닌 숙록후였다. 엄평이 계교에 빠진줄 알아채고 죽을 힘을 다해 성문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고 죽자하고 달아났다. 숙록후와 아군장수들이 그뒤를 추격하였다.

이때 황위는 성안에 있다가 선봉장 류우를 맞아들이니 성안이 일대 수라장으로 화해버렸다.

전왕이 사태가 급변함을 보고 호위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성밖으로 줄달음쳤다.

설연을 피해 성안으로 돌아오던 엄평이 전왕일행을 만나 사연을 듣고 일이 글러졌음을 깨닫고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 길밖에 더는 살길이 없었다. 엄평이 앞장에 서서 달리고 전왕이 그뒤를 따랐다. 포위진을 뚫고나가는데 장달이 류성퇴를 날려 전왕이 탄 말다리를 명중했다. 말이 다리를 꺾으며 넘어지니 전왕이 그 서슬에 땅바닥에 나떨어졌다. 그뒤를 따르던 호위군사들이 전왕을 급히 구하여 딴 말에 태우는데 이번엔 왕연과 홍윤 두 장수가 창과 칼을 비껴들고 앞을 막아나섰다. 전왕을 따르던 호위군사 대여섯이 순식간에 목이 달아났다. 그 기세로 두 장수가 전왕을 겨누고 칼을 뽑아들었다.

아차하면 전왕의 목이 나떨어질 판이였다. 전왕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시각 간신히 살아남은 호위군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성상이 위급한데 엄승상은 어데 가서 구원치 않나이까!》

앞에서 길을 여느라고 싸움에 여념이 없던 엄평이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 달려왔다. 달려오던 속도로 창을 휘둘러 왕연과 홍윤의 창과 칼을 내치고 말에 앉아있는 전왕을 와락 덮쳐 제 옆구리에 끼였다.

그리고 엄평은 최후의 기력을 다 짜내여 창을 휘두르며 겹겹이 에워싼 포위를 간신히 헤쳐나갔다. 살아남은 호위군사들이 그뒤를 따랐다.

죽을둥살둥 모르며 포위를 뚫고 이십리쯤 달아나던 엄평의 멀지 않은 앞에 서강이 나타났다.

이때 강녘에서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며 무수한 철기군들이 짓쳐나왔다. 엄평이 놀라마지 않으며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황운이 참룡검을 번뜩이며 달려오고있었다.

앞에는 시퍼런 강이요 좌우와 뒤에는 추격군사라 엄평은 더 생각할새없이 전왕을 등에 업고 도술을 부려 구름우로 몸을 솟구쳐 한참 가다가 강우에 이르러 첨벙 내리뛰였다.

물에 뛰여든 엄평이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도 나루배가 풀숲에 놓여있는것이 눈에 걸렸다. 죽을수가 있으면 살수가 있는 법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치면서 엄평은 그 배에 훌쩍 뛰여올랐다. 그를 따르던 호위군사들이 전신의 힘을 모아 노를 저었다. 추격병이 강변에 당도했을 때엔 배가 벌써 건너편 대안에 당도할무렵이였다.

급히 강을 건너간 엄평은 현주로 줄행랑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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