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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회


조명걸은 황성을 회복하고
엄진은 현주로 달아나다


청룡산에서 백여리길을 단숨에 내달아 조명걸이 호주에 당도한것은 정오무렵이였다.

명걸이 상괄과 함께 성문으로 향하는데 수비군졸이 앞을 막아나서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부마의 뒤를 따르던 상괄이 고리눈을 흘기며 파수군졸에게 소리치려는것을 조명걸이 자제시켰다.

《난 계루왕의 부마다. 너희네 자사를 만나러 왔다!》

부마라는 소리에 군졸의 목이 달팽이마냥 쑥 들어가는데 그의 등뒤에 서있던 수문장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일체 타인은 들여놓지 말라는 자사어른의 분부오이다. 지금 반란적들의 준동이 우심하기때문에 일체 외인의 통행을 금지하라는 령이 내렸소이다.》

상괄이 수문장을 향해 꽥 고함을 쳤다.

《반란이라구?! 누가 감히 그런 망발을 해! 부마어른도 들여놓지 말라는 령을 누가 내렸다구?!

이 륙실할것들! 아직도 뭘 멍청히 서있어? 당장 길을 비키지 못할가!》

온 성이 통채로 떠나갈듯 한 벽력소리에 수문장이 영거주춤거리는데 상괄이 고리눈을 찔 흘기더니 조명걸을 안내하며 앞으로 말을 몰아갔다. 그들의 뒤를 수문장과 군졸들이 눈이 한사발이나 되여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조명걸이 곧바로 자사가 일보는 관아로 들어가니 삼문앞에서 또 파수군졸이 막아서는것이였다. 이번엔 상괄이 말에서 훌 뛰여내려 다짜고짜로 군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야, 너회네 놈들은 눈깔이 멀었어? 눈을 펀히 뜨고도 누군지 몰라?》

상괄의 말은 지나친것이 아니였다. 조명걸은 부마인지라 붉은색의 1품관복을 입고있으니 척 보기에도 범상한 관리가 아니라 황실가문임을 쉬이 가려볼수 있었던것이다. 상괄의 체통이 우람차고 눈은 고리눈이며 코는 주먹만 한데다가 목소리까지 큼직하니 파수군졸은 단박에 주눅이 들었다.

삼문을 지나 동헌으로 들어가니 호주자사 조열이 한창 술판을 벌리고있었다.

한발 먼저 들어선 상괄이 좌중에 대고 꾸벅 허리를 굽힌 다음 큰소리로 웨쳤다.

《부마어른께서 호주자사나리를 만나러 오셨나이다.》

나라가 재난에 든 이때에 계집들을 끼고 술판을 벌려놓은 조열의 소행에서 조명걸은 그의 됨됨을 가늠하였지만 짐짓 례의를 차리며 들어섰다.

기름쥐처럼 밴지르르한 조열이 부마라는 소리에 얼른 일어나 좌우에 대고 귀한 어르신을 맞아들이라고 소리쳤다. 조명걸이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내가 호주고을 나리들의 흥을 깨뜨린것 같은데 선자리에서 몇마디 하겠소.》

조명걸은 품에서 대내상 황운이 보낸 격문을 꺼내여 자사에게 내밀었다. 자사가 눈을 까박거리며 격문을 받아 읽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일별하며 조명걸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황대내상이 역적간신들을 멸하고 황실을 회복하려고 군사를 일으키면서 보낸 격문이요.

지금 충의롭고 용맹스러운 사람들이 그 격문을 받아보고 너도나도 떨쳐났으니 조만간에 역적들을 멸하고 황실이 회복될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요. 내가 여기에 온것은 호주의 군사를 빌려쓸가 해서요. 그대가 만약 호주의 군사를 내주면 내 대내상을 따라 천하를 평정한 후 그대의 공을 평가하리다.》

주먹만 한 조열의 인상이 대뜸 새파래졌다.

《조부마는 어찌 이런 말을 꺼내나이까.

내 지금 성상의 은혜를 입어 호주자사로 그냥 부임하고있으면서 망극한 황은의 백분의 일도 아직 갚지 못하였거늘 어찌 조부마의 불의를 도와 역적의 루명을 스스로 쓰리까.》

《그럼 거절이란 말이요?》

《예, 죽어도 안되옵니다. 격문에는 태자가 살아있다고 했는데 태자가 죽은지 십년이 넘었소이다. 헌데 죽은 태자가 살아있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말이오이까. 이는 분명 황운이 권좌를 노리고 거짓태자를 내세우고 민심을 모으려는 흉심이 분명하거늘 어찌하여 조부마는 이런 간신배들과 한짝이 되여 소신을 핍박하오이까.》

명걸이 다시한번 청했으나 조열은 여전히 한본새로 절벽강산이였다. 나중에는 제편에서 성을 내며 역신을 도와준다고 조명걸을 나무람하는것이였다. 그새 전왕과 엄평의 사타구니에 붙어 기생하며 부귀영화를 누려온 소인배가 분명하였다.

명걸이 상괄을 돌아보며 눈짓하니 옆에 서있던 상괄이 획 몸을 날렸다. 그의 손에 들린 철퇴가 번뜩하더니 조열의 골통이 박살나고 자사는 그자리에서 즉사하였다. 눈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였다.

《악!》

술상에 마주앉았던 호주의 관속들과 기생들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허나 앞에 선 당사자는 당당한 계루왕의 부마요, 그옆에 선 거인은 단매에 자사를 쳐죽인 장사인지라 누구 하나 감히 나서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보다는 대내상 황운과 숙록후에 대한 지난 시기의 공경심과 좋은 감정이 좌중의 누구에게나 은연중에 되살아나고 전왕과 엄평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게 배회하였다고 보아야 옳을것이다.

조명걸이 좌중을 둘러보며 저력있게 물었다.

《여기에 호주병사가 누구냐?》

중간쯤에 앉아있던 몸이 다부진 호주병사 서익배가 일어섰다.

《소신이 호주병사 서익배옵니다.》

《네가 병사냐? 이제 당장 나가 군사를 대령시키고 차후 지시를 기다리라! 조금이라도 딴마음을 먹었다간 너의 머리도 섶에 붙었다 간에 붙었다 하는 쓸개빠진 자사처럼 묵사발이 되고말것이니라. 저 신세가 되고싶지 않거든 두말없이 내 시키는대로 해라.

그리고 여기 모인 당신들은 소동을 일으키지 말고 얼른 물러가 성안의 백성들을 몽땅 련무장에 모이게 하라!》

잠시후 서익배가 군사들을 대령시키고 호주성 백성들이 련무장에 모여들었다.

조명걸이 발해국을 상징하는 황룡기를 장대에 세우게 한 다음 군사들과 백성들앞에 나섰다.

《나는 계루왕의 부마 조명걸이다.

지금 선임금의 유지를 받들어 대내상 황운과 숙록후 설봉선 두 장군이 태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발해국을 회복코저 군사를 일으켜 황성으로 진격하고있다.

태자는 죽은것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계신다. 태자대신 죽은것은 심원공주의 아들, 다름아닌 나의 아들 미영이다. 공주가 어린 아들을 옥에 밀어넣고 태자와 바꿔 빼온줄 모르고 저 흉악무도한 역신들이 후환을 없애려고 죽여버렸도다. 허나 대내상 황운과 공주의 보호속에서 태자는 어엿이 성장하셔 지금은 다시 발해임금으로 등극하셨거늘 내 오늘 호주의 백성들과 군사들에게 호소하노라.

그대들은 선임금과 대내상, 숙록후의 은혜를 그 누구보다도 많이 입은 사람들로서 대내상과 숙록후를 따라 역적들을 멸하고 발해국을 회복하는 싸움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라!

신의도 모르고 제 일신의 부귀영화만을 탐내던 호주자사 조열은 내가 이미 처단하였다.

그러니 당신들중에 발해국의 회복을 위해, 대내상과 숙록후를 위해 나설자 있거든 여기 기아래 모여서라!》

설시중과 숙록후가 호주출신인것을 늘 자랑으로 여겼고 또 숙록후의 명성으로 딴 고을에 비하여 나라에서 조세를 적게 받아간것을 비롯하여 은혜를 많이 입은 곳이라 뉘 감히 따라나서지 않으리오. 더구나 전왕의 황위찬탈을 사람마다 절치부심하고있었고 또 계루왕의 부마인 조명걸의 풍신과 기개가 름름하고 언사가 격앙되니 사람들이 기꺼이 기발아래 모여들었다.

조명걸은 상괄을 선봉장으로, 호주병사 서익배를 후군장으로 삼고 호주군사 삼만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행군하여 황성에 이르렀다.

한편 황운을 막으려고 서쪽으로 향하던 엄평은 십만군사를 거느리고 현주성에 진을 쳤다.

본래 현주성은 전왕의 봉읍지인 현덕부의 도성으로서 그의 지반이 그만하면 든든하였고 지금의 현덕부 절도사는 엄평의 부친인 엄승이다. 군사를 일으킨 황운이 료양에서 황성으로 오려면 현주성을 거쳐야만 하기에 엄평은 이곳에서 군사를 막기로 타산하였다. 엄평은 현주성으로 떠나면서 전왕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소신이 현주에서 황운의 군사를 멸하고 그를 잡을테니 페하는 소신이 돌아올 때까지 성문을 굳게 닫고 응전하지 마소이다.》

황성으로 진격해오는 황운과 숙록후를 막을 생각만 하고있던 이들은 조명걸이 청룡산에서 내려와 황성의 코밑에 있는 호주에서 군사를 모으고 황성으로 쳐들어올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는 사전에 황운이 조명걸과 약속한것이였다. 엄평과 손시오가 장수들과 정예군사를 끌고 황운과 설연을 막으러 가다나니 황성안에 륙만의 수비군사가 있다 하지만 그 군사라는게 성안의 백성들을 부랴부랴 모아놓은 실속없는 군사들이였다.

호주의 삼만군사를 거느리고 조명걸이 풍우마냥 황성에 당도하자 전왕은 당황망조하여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아무리 황운과 설연이 난다 긴다 해도 이렇게 빨리 황성에 당도할리 없건만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난데없이 조명걸이 삼만군사로 성밑에 당도하니 전왕은 너무도 바빠맞아 다급히 장수들을 불러 성문을 굳게 닫고 응전하지 말라는 령을 내렸다.

급작스러운 변을 당한 황성의 백성들이였지만 황운과 숙록후에 대한 평소의 공경심과 정이 깊었던지라 약속이나 한듯이 성문밖을 뛰쳐나가기 시작하였다. 괜히 성안에 있어야 방패막이로 끌려가든가 아니면 란리통에 애매한 목숨을 잃을수 있었던것이다. 성밖으로 밀려나가는 백성들로 하여 순식간에 황성장안은 장마철 개구리떼 울듯 소란해졌다.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제아무리 막아서도 사생결단하고 파도처럼 밀려나오는 인파의 행렬을 멈춰세울수 없었다. 더구나 그 백성들이 다름아닌 자기들의 부모형제이고 처자인데야 군사들이 무슨 힘으로 막으랴.

황성에 이르러 성밖으로 물밀듯이 밀려나오는 인파의 행렬을 일별하고난 조명걸은 백성들이 다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북문과 동문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백성들때문에 성문을 열어놓았던 황성의 수비군사들은 성문을 미처 닫지 못하고 조명걸의 군사와 접전하였으나 어른과 갓난아이의 싸움처럼 승산없는 싸움이였다.

조명걸의 군사가 막 성안으로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은 전왕이 사색이 되여 황황히 호위군사를 내몰았으나 기울어진 형세를 돌려세올수 없었다. 싸움의 승패는 이미 명백해졌다.

북문으로는 선봉장 상괄이 맨 앞장에서 말을 몰아가며 좌충우돌하고 그뒤로 장수들과 군사들이 성난 파도와 같이 쳐들어갔다. 동문으로는 서익배가 군사를 이끌고 짓쳐들어갔다. 그 파죽지세의 공격앞에 성안의 장수들과 군사들이 미처 대적할 생각도 못하고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데만 급급하였다.

미처 의관도 정제하지 못한 전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서문으로 도망하여 현주의 엄평에게로 가버렸다. 성안에 남아있던 군사들은 얼마 저항하지 못하고 무기를 놓고 항복하였다.

황성을 점거한 조명걸은 엄평이 연금한 황태후와 대내상의 딸 순애를 구원한 다음 문적원에 갇혀있는 계루왕부부를 찾도록 하였다. 태후와 계루왕이 명걸을 부둥켜안고 통곡하여마지 않고 이제는 어엿한 랑자로 자란 순애는 아릿다운 얼굴에 눈물을 가득 머금었다.

이어 명걸은 성밖으로 피신한 백성들이 도로 성안에 들어와 살림을 정돈하고 마음놓고 살게 하라는 령을 내렸다. 남부녀대하고 피신했던 백성들이 성안으로 다시 들어와 제집으로 찾아가니 며칠새에 성안의 질서가 잡히게 되였다.

다음날 조명걸은 종묘에 들어가 통곡하며 제사를 지낸 후 엄평의 처자권속을 다 잡아 옥에 가두고 소와 양, 돼지를 잡아 장수들과 군사들을 호궤하고 창고를 털어 쌀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군사들과 백성들이 기뻐하며 이제야 진짜 발해국이 섰노라고 칭송하는 소리가 온 성안을 진동하였다.

이무렵 북해에서 군사를 일으킨 숙록후는 동강에서 막아나선 손시오의 대군을 풍지박산내고 북방의 이십여개 고을을 다 회복하였다.

숙록후가 그 기세를 늦추지 않고 대군을 휘몰아 안변부를 평정하고 황성에 이르니 한발앞서 황성을 점거한 부마 조명걸이 성우에 발해국을 상징하는 황룡기를 세워놓고 대군을 기다리고있었다. 성우의 기치를 바라보는 숙록후의 눈에 기쁨과 안도의 기색이 흘렀다. 숙록후는 전령장을 불러 명걸에게 서신을 전하라고 하였다.

서신을 받아본 조명걸이 숙록후가 당도했음을 알고 기뻐하며 즉시 장수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문밖에 나와 의식을 갖추어 성대히 영접하였다.

준마에서 내린 숙록후가 명걸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부마의 대의와 공주의 충성으로 발해국을 회복하였나이다. 세상에 다시 없는 충렬의 혼백이 하늘에 비껴 오늘이 있건만 비통한 그 심정 무엇이라 하리까.》

조명걸이 눈물속에 말을 받았다.

《이는 다 대내상과 숙록후의 충성이 하늘에 사무쳐 성공한것이지 어찌 소장의 공이라 하리까.》

조명걸의 안내를 받으며 숙록후는 황태후와 계루왕부부를 찾아뵈왔다. 태후와 계루왕부부가 눈물을 흘리며 숙록후의 손을 놓을줄 몰랐다. 태후가 사람을 시켜 순애를 데려오라 하고는 숙록후의 앞에 내세웠다.

《어머니!》

순애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더니 그만에야 폴싹 주저앉았다. 네살때 헤여진 어머니와 딸의 상봉이였다. 서른날이면 돌아온다던 어머니를 장장 십여년만에야 만나는 순애였다.

숙록후가 딸의 손을 잡아 일으켜세워주고 한참이나 그 얼굴을 쓰다듬다가 와락 품에 안았다. 숙록후가 태후앞에 무릎을 꿇고 어린 딸애의 목숨을 건져주고 이날이때까지 키워준 그 은혜를 사례하니 태후가 도리여 손을 내저으며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하였다.

《내가 물론 순애를 빼내왔다지만 사실 말해서 늙은 이몸이 흉악한 역적들의 소굴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오늘같은 날을 보게 된것은 내곁에 이 순애가 있어 마음에 의지가 되였기때문이라오. 과시 대내상과 숙록후의 녀아답소.》

제 어머니를 닮아 곱게 번진 순애의 고운 얼굴이 타는듯이 붉어졌다. 그 숫저운 태도가 더 사람들의 마음을 후더이 해주었다.

태후는 당분간 숙록후더러 황성의 대사를 주관하라고 하였다.

우시춘과 홍윤 등 장수들이 전왕의 비와 엄평의 처자를 다 국법에 따라 처형하자며 윽윽거렸다. 그들을 둘러보는 숙록후의 눈가에 엷은 구름이 비꼈다. 나직하나 또박또박 그루를 박으며 숙록후가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전왕비는 바로 선임금의 제수되는 녀인이고 엄평의 처자는 다름아닌 공주가문이라 어찌 그렇게 망탕 처리할수 있겠나이까. 그렇게 처형하면 후세에 오점을 남기고 만사람들의 신망을 잃을뿐이니 옥에서 풀어주어 제집으로 보내게 함이 옳은 처사인듯 하나이다.》

태후와 계루왕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 말이 옳다고 지지하였다. 장수들이 숙록후의 일처리에 감심하며 두번다시 그런 의견을 꺼내지 못하였다.

옥에서 풀려나온 전왕의 비와 엄평의 안해인 황해공주는 집으로 돌아와 수치와 부끄러움을 참을수 없어 깁으로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숙록후가 진심으로 비통해하며 태후에게 건의하여 두 녀인을 왕비의 례로 장사지내게 하니 성안의 남녀로소 할것없이 숙록후의 어진 마음과 대바르고 너그러운 처사에 감복하여마지 않았다.

한편 황운에게 하주성을 빼앗긴 엄진은 남은 군사를 끌고 자기 동생이 자사로 있는 현덕부의 탕주로 줄행랑을 놓았다. 도살장에서 도망쳐나온 돼지마냥 머리칼이 다 뽑아지고 초췌하기 이를데 없는 몰골로 자기를 찾아온 엄진을 맞아들인 탕주자사 엄술은 너무도 억이 막혀 한동안 할말을 찾지 못하였다.

《아니, 이 어찌된 일이시우?》

엄술의 물음에 엄진은 중언부언하며 황운에게 혼쭐난 이야기를 두서없이 풀어놓았다.

《그러니 황운이 군사를 끌고 지금 이곳으로 온다는 소리가 아니우? 헌데 우리 성안의 군사는 많지 못하고 신통한 장수도 없는데 그러다간 우리 탕주성도 황운에게 통채로 먹히우고말겠수다.》

엄술이 우거지상을 하고 아부재기를 쳤다. 엄진이 땅이 꺼지는듯한 한숨을 내쉬였다.

《형(엄평)한테 원병을 보내라는 격서를 보내는수밖에 딴 방도가 없구나.》

엄술은 엄진의 말을 쫓아 그날중으로 원병을 요청하는 서신을 현주의 엄평에게 보내였다.

십여년전에 전왕과 엄평이 반란을 일으키고 옥좌를 찬탈할 때 무참히 살해당한 협객 곽종에게는 곽만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형이 죽은 후 일가식솔이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 도륙당하자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탕주의 산속으로 피신하였었다. 황성을 탈출하여 종적을 감춘 곽만은 그후 십여년간 깊은 산중에서 동료들과 무술을 련마하며 때를 기다리고있었다.

대내상 황운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곽만은 형의 원쑤를 갚으려고 동료들과 함께 산을 내려 자진하여 탕주성을 지키는 군사가 되였다. 무술이 뛰여난 곽만은 인차 수문군교가 되였다.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있던 곽만은 대내상 황운이 대군을 이끌고 탕주성밑에 이르자 속으로 원쑤를 갚으리라 벼르었다.

그날 삼경중에 곽만은 동료들과 약속하고 은밀히 엄술의 처소에 슴새들어갔다. 엄진은 어디에 숨었는지 알수 없었다. 다만 기생을 끼고 자빠져있던 엄술이 곽만의 비수에 머리가 잘리워나갔다. 곽만은 엄술의 머리를 베여 자루에 넣어가지고 그길로 동료들과 함께 성벽을 날쌔게 넘어와 대내상에게 바쳤다. 대내상 황운이 기뻐하며 곽만과 그의 동료들을 각 진의 부장으로 삼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황운은 엄술의 머리를 기대에 매달고 엄진을 불러내여 큰소리로 꾸짖었다.

《네 구차한 목숨을 살리겠거든 바삐 나와 항복하여 너의 동생 엄술처럼 목없는 귀신이 되지 말라!》

밤새 황운이한테 쫓기는 악몽에 시달려 한잠도 자지 못하고있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풋잠에 들었던 엄진이였다. 부하들이 흔들어서야 깨여나 황황히 성우에 올라온 엄진이 두눈을 비비고 내려다보니 기대에 호박마냥 대롱대롱 매달린것은 분명 동생 엄술의 머리이라 원통함과 분기를 참지 못하고 군사를 휘몰아 성문을 열고 나와 아군진앞에 이르러 피대를 돋구었다.

《내 오늘 동생의 원한을 갚지 못한다면 살아돌아가지 않을테다!》

제법 호기를 부리며 악청을 돋구는 엄진의 꼴을 바라보던 대내상 황운은 어이가 없어 랭소하다가 군중에 다음과 같은 령을 내렸다.

《하찮은 도적에 불과한 엄진이 허세를 부리는데 저까짓 놈 하나를 잡자고 아군의 군사를 상하게 하랴. 그러니 엄진을 협박하여 제스스로 달아나게 하라.》

강수천과 마맹달 등 장수들이 대내상의 령을 받고 사면에서 징과 북을 울리면서 적진중을 압박하며 고함을 쳤다.

《보잘것 없는 엄진을 잡으려면 무죄한 인명들만 많이 상할수 있으니 군사들은 목숨을 구하겠거든 미리감치 나와 항복하라.》

엄진의 군사란 하주성에서 한번 되게 혼쭐이 난 패잔병들과 탕주성에 있는 군사들인데 대내상의 명성에 지레 겁을 먹은데다가 황운의 대의명분에 공감하고있던지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한순간에 군심이 일변한것을 알아차린 엄진이 제가 방금전에 호언하던 말은 헌신짝마냥 집어던지고 자개바람이 일도록 창을 끌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이때라고 생각한 적군사들이 와- 하고 다 흩어져버렸다.

황운이 선봉장 류우로 하여금 엄진의 뒤를 따르라 명령하니 류우가 쏜살같이 엄진을 추격하였다. 류우는 몸집은 그닥 크지 않으나 령리하고 민첩하였으며 무술에 능하였다. 성안으로 달아빼던 엄진은 미처 성문을 열어주지 않아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 뒤를 따르던 군사를 끌고 홍주성으로 뼁소니쳤다. 대장이 없는 적군사들이라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대내상 황운이 항복한 적군사들을 생업에 종사하라고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니 모두가 땅바닥에 코가 닿도록 허리를 구부리며 감지덕지해하였다.

성안을 한바퀴 돌아보고난 황운은 란리통에 가슴을 조이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있던 백성들을 안착시키고 군사들을 시켜 성안을 정돈하게 하니 백성들이 다 마음이 편안해하였다.

황운을 막으려고 현주성에 틀고앉았다가 탕주자사 엄술이 보낸 서신을 받아본 엄평은 덴겁하여 급기야 탕주로 군사를 짓쳐몰았다. 숨이 턱에 닿도록 군사를 몰고오던 엄평은 홍주성문앞에서 도망쳐오던 엄진일행과 마주쳤다.

엄평이 물에 빠진 쥐를 건져놓은듯 꾀죄죄하기 그지없는 제 동생의 몰골을 띄여보고는 눈살이 끗꼿해졌다.

《하주성을 빼앗겼으면 다시 되찾을 생각을 해야지 홍주성엔 왜 왔느냐?》

엄진이 엄동설한에 물벼락 뒤집어쓴 놈처럼 온몸을 와들와들 떨며 하주와 탕주에서 황운에게 패한 일을 장황히 주어섬기였다.

《황운의 군사가 너무 정예로와 대적키 조련치 않소이다.》

엄평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황운이 비록 용력이 있으나 제 어찌 나의 용병술을 당하리오.》

이때 한 부하장수가 들어와 보고하였다.

《황운의 추격병이 벌써 이십리밖에 왔나이다.》

엄평이 사실인가 확인하러 장대에 올라 바라보니 이십리밖 멀리서 새뽀얀 먼지를 일쿠며 황운의 군사가 오는것이 빤히 보였다. 십만대오가 한사람이 움직이듯 정연하기 그지없고 그 기세가 여간 어마어마하지 않아 부지불식간에 엄평은 으시시 몸을 떨었다.

《저 대진을 누가 총독하느냐?》

엄진이 대답하였다.

《전렬은 황운이 거느렸고 후진은 반안왕 류도가 태자를 모시고있다 하오이다.》

《태자라니?! 그건 무슨 홍두깨냐?》

《자세한것은 알수 없으나 태자가 살아있다 하오이다.》

《허튼소리, 십년전에 죽은 태자가 어찌 살아있단 말이냐? 그건 사람들을 유혹하려는 간특한 황운의 속임수야!》

《글쎄요. 하여튼 항간에 떠도는 말이 태자가 살아있고 태자대신 죽은것은 심원공주와 조명걸의 아들이라고 하던데…》

종시 의문을 털어버리지 못한채 장대에서 내린 엄평은 부하장수들에게 긴급령을 내리고 이십만대군을 거느리고 성밖에 오행진을 친 다음 한껏 흰목을 뽑는 격문을 황운에게 보내였다.

《간특하기 그지없는 황운이 보아라!

태자가 십년전에 이미 별궁에서 죽었다는건 천하가 다 알고있거늘 네 지금 감히 찬역을 도모코저 천하를 속이고 죽은 태자가 살았다고 요설을 퍼뜨리느냐.

천륜을 거역한 네 죄는 천지신명이 죽일 대죄이거늘 내 천하역적 네놈을 용서치 않으리라.

어서 빨리 나와 내 칼을 받으라!》

성의 남쪽 십리밖에 진을 치고 형세를 관망하고있던 대내상 황운에게 전령장이 엄평의 격문을 내밀었다.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오히려 제편에서 천륜이요, 대죄요 하고 걸고드는 오만방자하고 파렴치한 엄평의 격문을 읽고난 대내상 황운의 두눈에 홰불이 황황 일었다. 단숨에 적진을 료정낼 그 불길이 장수들의 가슴을 달구었는가 장수들이 검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대내상 황운이 그 즉시 붓을 움켜쥐고 엄평을 단죄하는 격문을 일필휘지로 냅다 써갈겼다. 그 붓끝에 종이가 구멍나고 찢어질것만 같았다.

《불구대천의 흉적 엄평은 두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보아라!

너는 본래 안변땅에서 그래도 사람이라고 배꼽에서 떨어졌도다.

한갖 소인배에 불과한 너에게 하늘이 그만 잘못 기회를 주어 푼수넘치게도 전왕의 부마가 되였노라. 그때 선임금께선 네가 비록 소인간신배임을 내다보셨지만 하늘같은 은혜를 베풀어 나로 하여금 부마의식을 실행하게 하였고 손수 채색비단까지 하사하셨도다.

그랬으면 충의를 다하여 사직을 보존하고 나라위해 분투함은 코흘리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마땅한 도리건만 발끝에서 대갈통까지 악과 불의로 가득찬 네놈은 외세를 끌어들이고 오랑캐를 꼬드겨 반란을 일으켰으며 어리석고 속통이 좁은 전왕을 부추겨 옥좌를 찬탈하고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도다.

설사 입이 백개라도 변명할수 없는 이 대역부도죄를 네 알겠느냐!

내 이제 너의 열가지 대죄를 쭉 내리꼽을테니 여우상통의 뱁새눈으로 한글자도 놓치지 말고 보라!

성상의 은혜에 보답할 대신 도리여 전왕을 사촉하여 옥좌를 찬탈함이 첫째 죄요, 황태후와 태자를 별궁에 가둠이 둘째 죄요, 침략자를 징벌하던 나를 거짓조서를 꾸미고 사약을 내려 죽이려 함이 셋째 죄요, 전왕을 부추겨 〈태자〉를 열다섯살전에 살해한것이 넷째 죄요, 황태후를 내쫓고 공신을 모함함이 다섯째 죄요, 계루왕이 충심으로 간하였으나 그를 문적원에 내침이 여섯째 죄요, 의리를 지킨 곽종을 활로 쏘아죽이고 그 시신마저 찢어없앤것이 일곱째 죄요, 선임금께서 표창하여 세우신 효자비를 감히 파헤쳐 내친것이 여덟번째 죄요, 나의 가장집물을 적몰하고 가속들을 정배보낸것이 아홉째 죄요, 동리화는 선임금께서 보내준 궁녀인데 네가 첩으로 삼으려 함이 열번째 죄라, 네 이런 열가지 대죄를 저지르고도 하늘을 속이고 여지껏 죽지 않은것이 참 이상하지 않느냐.

내 이제 하늘의 뜻을 받아 천하의 대역적 너를 죽이고저 하거늘 이제라도 네가 대죄를 조금이라도 씻겠거든 스스로 목숨을 바침이 때는 늦었지만 옳은 처사인줄 아노라!》

격문을 받아쥐고 읽는 엄평의 손이 후들후들 떨리고 얼굴이 험악하게 이그러졌다.

《이 황가놈을 없애지 못한다면 내 결단코 엄씨성을 갈고말테다!》

저희들 수괴의 기분을 살피던 부하장수들이 팔뚝을 걷어올리며 나섰다.

《소장들이 나아가 황운역적놈을 징벌하여 어르신의 한을 풀어드리겠나이다.》

엄평은 윽윽대는 부하장수들을 제지시켰다.

《아니, 내 직접 저 황운에게 본때를 보일테니 너희들은 때를 보아 공격하라.》

이발을 부드득 갈며 말을 타고 아군의 진앞까지 뛰여나온 엄평이 창으로 삿대질하며 왜가리청을 돋구었다.

《이 흉악한 황운아! 죽은 태자가 살았다고 거짓말을 꾸미고 반란을 일으켜 천하를 소란케 하는 네놈은 천벌을 면치 못할거다! 당장 나와 내 창을 받으라!》

제법 황운더러 반란적이라고 흑백을 전도하는 엄평의 수작질에 황운과 장수들이 어처구니가 없어 쓴웃음을 짓다가 증오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실한 목대에 지렁이같은 피줄을 돋구며 얼굴이 새빨개서 눈살을 꼿꼿이 세우는 엄평의 모습은 흡사 성이 난 잰내비상이였다.

황운은 먼저 엄평의 용력을 시험코저 선봉장 류우더러 나가라고 령을 내렸다. 류우가 응하고 삼지창을 꼬나들고 말을 짓쳐나갔다.

거쿨진 체구의 엄평이 맞받아나왔다.

챙 챙 - 윽 윽 -

두 장수가 상대의 목숨을 노리고 치렬한 격전을 벌렸다. 서로 어울려 십여합쯤 지나니 류우의 창법이 점차 둔해지고 아차하면 엄평의 창에 목숨이 위태로울 형편이다. 황운은 그가 엄평을 당할수 없음을 포착하고 징을 울려 그를 불러들였다.

류우가 돌아서서 아군의 진으로 달려오는데 엄평이 그뒤를 미친듯이 쫓아온다. 류우가 진에 당도하자마자 황운이 진문을 굳게 닫고 방패를 빙 둘러 사면으로 방비하니 엄평이 감히 뚫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리고 가려 하였다. 그 순간 대내상 황운이 천리적토마에 올라 그뒤를 따라가며 벽력같이 소리쳤다.

《역적은 머리를 드리우지 않고 어데로 달아나는가!》

엄평이 머리를 돌려보니 황운이다. 엄평의 눈에 야수의 광기가 흐르더니 괴상한 소래기를 지르며 말을 돌려 단숨에 목벨듯이 굶주린 승냥이마냥 달려들었다. 황운이 미친듯이 달려드는 엄평의 첫 타격을 여유작작하게 슬쩍 피하면서 철퇴를 들어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엄평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가면서도 창을 들어 그 철퇴를 용케 막아냈다. 웬간한 사람이라면 단박에 골통이 박살나는 타격을 엄평이 피하는걸 보고 황운은 그의 창법과 기마술이 보통이 아님을 대번에 짐작하였다.

흡사 범과 사자가 으르렁거리며 사생결단을 가르는 치렬하고도 무시무시한 접전이였다. 량켠의 장수들과 군사들이 긴장한 눈길로 싸움을 지켜보고있었다.

서로 맞붙어 이십여합이 되도록 승부를 결정치 못한 두 적수가 다시 백여합을 겨루었다. 왼손에 참룡검을 들고 오른손에 철퇴를 잡은 황운이 달려가던 기세로 철퇴로 엄평의 머리를 치면서 왼손의 참룡검으로 그의 가슴을 찔렀다. 엄평이 창을 세워잡아 창웃끝으로 철퇴를 막으면서 동시에 아래끝으로 검을 비껴치웠다. 두 장수가 탄 말이 이번에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냥 어기쳤다.

그쯤하면 엄평의 용력과 창법을 파악했다고 여긴 황운은 거짓 패한척 하며 말머리를 진으로 돌렸다. 엄평이 황운의 뒤를 따르다가 (황운이 더 지탱할수 있겠는데 갑자기 왜 물러서는가. 혹시?) 하는 의심이 버럭 들어 말을 멈춰세우고 한참이나 황운의 뒤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결국 첫날 싸움은 량켠 수장들의 선보기로 막을 내렸다.

그날밤 한가지 계교를 생각해낸 황운은 장수들을 장막으로 불러들여 분부하였다.

《엄평의 재주 알만하니 내 마땅히 계교로써 잡으리라.

그러니 그대들은 내 령을 오늘밤 초경(밤 8~10시)중으로 무조건 집행하라.》

령을 받고 물러난 장수들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초경이 될 때까지 진앞에 깊고도 넓은 구뎅이를 파놓고 대내상에게 보고하였다. 대내상 황운이 직접 나가 확인해보고는 십보에 한군데씩 군사 열명에 장수 하나씩 두어 진을 치게 하였다.

《이곳에 몸을 숨기고 매복해있다가 엄평이 여기에 이르거든 여차여차하여라.》

이날밤 삼경 대내상 황운은 철기 오백을 거느리고 엄평의 진으로 향하였다.

자기 진중에 돌아온 엄평에게 부하장수들이 비나리를 치며 수선을 떨었다.

《이자 보니 황운의 무예가 어르신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오이다. 조금만 있으면 황운을 잡을수 있었는데… 그만 그자가 꼬리가 빳빳해서 도망치는통에 아쉽게도 기회를 놓쳤소이다. 과시 어르신의 무예는 천하에 당할자가 없나이다.》

《정말 어르신의 창법은 고금에 보기 드문 제일가는 무술이오이다.》

시뚝해진 엄평이 기고만장해서 실한 목을 한바퀴 돌렸다. 우지직- 뼈마디가 엇갈리는 요란한 소리에 부하장수들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내 이미 말했지. 황운의 검술이 소문만 요란했지 나보다 능하지 못하다구 말이야.

허나 너무 아쉬워말라. 내 래일 도술을 한번 부려 황운의 정신을 산란케 하고 한번 싸워 일합이 못되여 그를 잡으리라.》

그날밤 이경(밤 10~12시)의 마감무렵 수비장이 엄평의 장막으로 뛰여들어왔다.

《한밤중에 웬일이냐?》

《적진앞에 등촉이 명랑하니 무슨 계교가 있는듯 하오이다.》

엄평이 장막을 나서 바라보니 과연 황운의 진앞이 대낮처럼 밝았다. 엄평이 급히 들어와 부하장수들을 모아들이게 하였다.

《황운이 나와 한번 겨루어보고 안될것 같으니 분명 계교를 부려 야습해올수 있으니 매복해있다가 그자가 군사를 끌고오면 재빨리 에워싸고 들이치라! 병서에도 적을 알고 싸우면 이기는 법이라 했거늘 내가 황운의 계교를 아는 이상 이번 싸움에서 황운을 기어이 사로잡으리라!》

부하장수들이 엄평의 호언장담에 맞장구를 치며 사기가 나서 돌아갔다.

철기군을 거느리고 엄평의 진앞에 이른 대내상 황운은 말을 멈추고 적진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진중은 쥐죽은듯 고요하고 원문은 방비도 없이 열려져있었다.

(엄평이 내가 야습해올줄 알고 미리 방비책을 세워 매복했구나.)

코웃음을 치며 황운은 철기군에 여차여차하라 지시를 주고 속는척 하고 필마단창으로 원문으로 짓쳐들어갔다. 황운이 원문을 통과하자 문득 한방의 포소리 울리더니 원문에 매복했던 적군사들이 사면으로 왁 달려들었다. 황운이 거짓 놀란척 하며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말을 몰아가다가 원문을 헤치고 돌아나오니 엄평이 그뒤를 다급히 뒤따랐다. 원문밖에서 기다리던 발해군사들이 미리 황운이 준 지시대로 일시에 아군진을 향해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황운의 계책을 알리 없는 엄평은 승이 나서 말배때기에 박차를 가하며 그뒤를 따랐다. 적장수들과 군사들이 사나운 기세로 정신없이 따라섰다.

《내 오늘밤에 기어이 황운을 잡으리라. 놓치지 말고 바싹 따르라!》

아군진지를 향하여 질주하던 황운과 철기군이 구뎅이앞에 이르러 말고삐를 당겨 허공으로 높이 날아 건너뛰였다.

황운을 사로잡을 생각에 정신없이 뒤따르던 엄평은 그냥 한본새로 달음쳐오다가 통채로 말과 함께 구뎅이에 빠지고말았다. 엄평의 뒤를 따르던 적군사들도 순서대로 깊고 넓은 구뎅이에 고스란히 빠져 나딩굴었다.

때를 놓칠세라 좌우의 매복하고있던 발해군사들이 일시에 구뎅이를 에워싸고 화살을 날렸다. 벽에 붙으려던 적군사들은 아군의 창과 칼에 찔리여 구뎅이안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엄평과 적군사는 말그대로 독안에 든 쥐요, 조롱안에 든 새라 비발처럼 날아오는 화살과 사정없는 칼, 창의 세례를 고스란히 받을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십보에 하나씩 묻어두었던 장수들이 자기 군사를 끌고나와 구뎅이안에서 버둥거리는 적군을 사정없이 치고 찔렀다.

순식간에 구뎅이안에는 적의 주검이 두겹, 세겹으로 쌓이고 살려달라고 고아대는 적들의 단말마적인 울부짖음소리가 어둠의 장막을 찢어놓았다.

구뎅이의 복판에 떨어져 나딩굴던 엄평은 그제서야 자기가 황운의 계교에 걸렸다는것을 깨닫고 혀를 깨물었으나 후회는 이미 늦은것이였다. 아비규환의 지옥가마에서 울부짖는 저의 군사들을 둘러보는 엄평의 뱁새눈에 쓰디쓴 고뇌와 패배감이 비꼈다. 당장은 저부터 살아야 황운을 복수할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쳤다.

엄평은 검산에서 십년간 무술을 배울 때 신장부리는 도술을 배웠던터라 별안간 몸을 한번 휘뜩 변하여 공중으로 솟구쳐 바람을 타고 구뎅이에서 벗어나 황황히 본진으로 돌아갔다.

싸움은 아군의 대승리로 끝나가고있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적의 수만군사를 구뎅이안에서 몰살시킨 대내상 황운에 대한 찬사와 공경의 마음을 가슴가득 지닌 군사들이 와- 와- 함성을 올렸다.

《대장군, 대첩(큰 승리)이오이다!》

류우가 대내상의 팔을 잡아흔들며 목메여 소리쳤다.

《엄평은 어데 갔소?》

《아무리 찾아봐야 엄평은 보이지 않소이다.》

강수천이 다가오며 하는 말이였다.

《그럼 그놈이?!》

황운은 엄평이 분명 은신법을 써서 도망쳤다고 생각하였다. 십년씩이나 검산에 들어가 도술을 배운 놈이니 얼마든지 변신술을 부릴수 있다고 여기며 황운은 군사를 거두고 전장을 정돈하라는 령을 내렸다.

대내상 황운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가 간신히 변신술을 부려 도망친 엄평은 날밝기 전에 군사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하루종일 엄평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다만 성문을 굳게 닫고 일체 싸움을 하지 말며 성방비를 강화하라는 령만 내렸다.

조명걸에게 황성을 빼앗기고 엄평을 찾아 현주성으로 도망갔다가 그가 홍주성에 있다는것을 알고 다시 홍주로 찾아온 전왕은 황운이한테 되게 얻어맞고 풀이 죽은 엄평을 보고 깜짝 놀랐다. 늘 봐야 만사람을 눈아래로 굽어보며 기고만장해하던 어제날의 모습대신 서리맞은 호박잎마냥 어깨가 축 처져있는 엄평이였다.

《아니, 경은 왜 이런 꼴이 되였는가?》

《그 간특한 황운이한테 깜박 속아 첫 싸움에서 크게 패했소이다.》

단마디로 대답하고 딴말은 더 하지 않던 엄평이 전왕을 의문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헌데 페하께선 황성은 어떻게 하구 이리루 오셨나이까?》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전왕은 쿨쩍거리며 난데없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 조명걸에 의해 황성을 빼앗긴 전후수말을 다 털어놓았다.

《아니, 조명걸이 그놈이 어데서 그렇게 많은 군사를 데리고왔다고 하오이까?》

《짐인들 그걸 어찌 알랴. 갑자기 청청하늘에서 떨어지듯 숱한 정예군사가 쳐들어오는데 일이 안될세라 백성들이 성밖으로 다 들구뛰니 성문이 활짝 열려졌지 그리구 황성군사라는게 변변히 싸울줄도 모르는 오합지졸이라 눈깜빡할사이에 조명걸이 성을 타고앉을수밖에…》

《그럼, 황후와 공주는?》

《언제 내전을 살필새가 있더라구, 짐도 간신히 빠져나왔도다.

아마 황성을 점거한 조명걸이 처자를 다 죽였으리라.》

말을 마친 전왕이 목을 놓아 통곡하는데 그 넉두리가 언제 끝날지 알수 없었다. 황운이한테 대참패를 당하고 앙앙불락해있던 엄평은 가까스레 자기를 다잡고 그 즉시 가족의 행처를 탐문할 간자들을 황성으로 파하고 전왕을 위로하였다.

《페하는 그만 고정하소이다. 그렇게 곡한다고 하여 갇혀있는 가족들을 빼내올수야 없지 않소이까. 당장은 전심전력하여 황운과 설연을 깨뜨릴 방도를 찾아 발등에 떨어진 불꾸레미부터 꺼야 할줄 아옵니다.

신이 첫 싸움을 해보니 듣던바 그대로 황운이 지모와 용맹을 겸비하였으니 졸연히 잡기는 힘들것 같소이다. 허나 신이 어떤 수를 써서라도 황운을 죽이고 페하의 대위를 꼭 회복하리다.…

헌데 만일 설연이 북방을 깨뜨리고 쳐들어오면 각곳의 병마를 미처 모으지 못할가 그게 제일 걱정되오이다.》

그 말에 전왕이 곡성을 멈추고 엄평을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의 말이 옳도다. 헌데 설연을 막으러 갔던 손시오는 어찌되였다더냐?》

《군사들은 패하고 손시오는 설연이한테 목숨을 잃었다고 하오이다.》

이때 설연이 대군을 거느리고 성의 북문밖에 당도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엄평이 긴장해하며 전왕에게 물었다.

《설연의 재주가 황운에 비하면 어떠하오이까?》

전왕의 낯색이 굴뚝속같이 컴컴해졌다.

《진권의 란을 평정할 때 설연이 도원수가 되였으니 분명 황운보다 높으리라.》

엄평이 아연해하더니 한참후에 입을 열었다.

《황운과 설연이 협공하면 깨뜨리기 어려우니 오늘밤에 설연을 파하겠소이다.》

전왕이 머리를 기웃거렸다.

《설연의 용맹은 산같고 군사가 정예롭거늘 밤을 타서 치다가 만일 실수하면 어찌하리오.》

엄평이 자신만만해서 대척하였다.

《듣자니 설연의 군사는 말갈군과 동평부에서 모아온 북방군사들이니 분명 오합지졸의 무리일것이고 또 수천리를 왔으니 다 곤핍할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황운은 남문밖 십리에 물러나있으니 아직 설연의 군사가 당도한줄 모르고있소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되오이다.

십중팔구 설연의 군사가 해이되였을것이니 밤중에 은밀히 기동하여 엄습하면 설연을 능히 사로잡을수 있소이다.》

엄평이 뱁새눈에 독기를 머금더니 이어 자기 수하의 장수 하나를 불렀다.

《너의 군사중에 령리하고 말주변이 좋으면서도 날랜 군사 하나를 물색해서 나에게 급히 보내라!》

이윽고 광대뼈가 불거지고 키가 작달막한 군사 하나가 엄평의 앞에 나타났다.

《네 이름이 뭐냐?》

《석팔이라 하오이다.》

석팔의 아래우를 한참이나 훑어보던 엄평이 미리 준비했던 허드레옷을 그에게 던져주며 어서 입으라고 하였다. 석팔이 개구리눈처럼 툭 불거져나온 눈을 데룩거리더니 순순히 그 옷을 받아입었다. 엄평이 그에게 뭐라고 수군거리자 석팔이 앙바틈한 목을 뽑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승상어르신의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그길로 석팔은 어물짐을 잔뜩 지고 은밀히 성문을 나섰다. 홍주성 북문앞에서 조금 떨어진 초막에 틀고앉은 석팔은 어물장사군의 시늉을 내면서 아군의 형세를 탐지하기 시작하였다.

조명걸에게 황성을 맡겨놓고 전왕과 엄평이 둥지를 틀고있는 홍주성을 치려고 성의 북문 십리밖에 진을 친 숙록후는 성안의 형편을 탐지하게 하는 한편 싸움을 앞둔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있었다.

한창 숙록후가 장수들과 싸움방안을 의논하고있는데 수비군교가 들어와 보고하는것이였다.

《어떤 장사군이 어물을 사라고 진영주변을 싸다니는데 그 행색이 수상하오이다.》

숙록후가 의아해서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이 복새통에 어물장사군이 군영주변을 맴돈다는게 어딘가 이상하기 그지없소이다. 혹시 그 장사군이 적의 렴탐군이 아닌지…》

홍윤이 제꺽 반응하였다. 다른 장수들도 수상한 놈이 분명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 어물장사군이 올데갈데없는 적의 렴탐군이라고 대뜸 짐작한 숙록후는 그놈을 역리용할 묘책을 머리속에 굴렸다.

《차라리 잘되였도다. 그 렴탐군놈을 리용해서 엄평을 진중에 끌어들여 즉살탕을 먹이리라.》

숙록후는 그자리에서 부장 장달을 불러 이리저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달은 그 용모부터가 얼굴생김이 우둥퉁하고 행동가짐이 수더분해보였으나 림기웅변술이 여간 아니였다. 북해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장달은 그런것으로 하여 숙록후의 비밀령을 받고 적의 비밀을 뽑아내는 일에 많이 참여하였었다. 절대로 실수를 모르고 매사에 심중한 장달이였다.

숙록후의 령을 받은 장달은 그날 정오무렵 자기와 늘 동행하던 한 군졸을 데리고 군문밖 풀밭에 퍼더버리고앉아 술방구리를 기울이며 어물장사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가 해가 중천에서 약간 벗어날무렵 작달막한 키에 어물을 등에 진 석팔이 어슬렁어슬렁 그들곁으로 지나갔다.

장달이 그를 보고 술주정기가 다분한 목소리로 불렀다.

《넌 뭘하는 사람인데 이곳에 왔느뇨?》

석팔이 능청스럽게 대답하였다.

《염물고기를 팔러 다니는 장사군이오이다.》

장달이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한마디 더하였다.

《네 장사군이라면 성안에 들어가기 쉬울것이니 성안에 들어가 술을 좀 사오라. 내 이래뵈두 술을 지구는 못가도 마시고는 가는 사내란 말이야.》

함께 술을 마시던 군졸이 기겁하며 만류하였다.

《이젠 술을 그만 마시소이다. 이렇게 취하셨는데 나린 술을 더 사다가 무엇하리까?》

장달이 딸꾹질을 연신 해댔다.

《우리 대장군께서 분부하기를 〈적군사가 다 성안에 들어가고 없으니 각 진의 장졸들은 편히 쉬라〉고 하셨단 말이야. 부장이라는 내가 부하들을 놔두고 혼자 술을 마실수야 없지. 그러니 술을 많이 가져다 부하들이 실컷 마시게 하잔 말이야.

맨날 싸움만 하는데 이럴 때에 한번 취하도록 술을 마셔보지 언제 마셔보겠나.

전장이라는게 오늘은 이렇게 살아서 술을 마시다가도 래일이면 덜커덕- 하고 목이 잘리우는 판이라 그렇게 되면 이 먹고싶은 술도 더는 못 마신단 말이야.

알겠어, 염통이 콩알만 한 자식!》

그 말에 군졸이 다른 말을 더 내지 못하였다.

석팔이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기뻐하며 술을 사오기를 자청하였다. 장달이 금전을 쥐여주니 석팔이 받아가지고 성안에 들어가 그길로 엄평을 찾아가 미주알고주알 토 하나 빼치지 않고 다 일러바쳤다.

엄평이 크게 기뻐하며 석팔에게 상을 후히 주고 방구리에 담은 술을 한수레 보내주며 부하장수들에게 만단의 준비를 갖추라는 령을 내렸다.

엄평이한테서 상을 후하게 받고 사기가 난 석팔이 수레에 술을 가득 싣고 성안에서 나와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서 장달에게 넘겨주었다. 퉁방울눈을 재빨리 굴리며 술방구리를 받아안고 입을 다물줄 모르며 좋아하는 장달의 모습을 바라보던 석팔은 그가 수고했다며 더 주는 은전까지 받아쥐고 헤식은 웃음을 지으며 그자리에서 꼬리를 사렸다.

제법 어깨를 들썩거리며 성안으로 사라지는 석팔의 뒤모습을 코웃음치며 바라보던 장달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즉시 진중으로 돌아와 숙록후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숙록후는 장달이 임무를 멋지게 수행한데 대해 치하하고 장수들을 장막에 불러들였다.

《엄평이 우리의 계책에 걸려들었으니 오늘 싸움의 승패는 그대들의 행동여하에 달려있도다. 순간도 탕개를 늦추지 말고 각자 자기앞에 분담된 임무를 빈틈없이 실행할것이다.》

장수들이 목숨으로 군령을 지킬 다짐을 하고 돌아가 군사들을 나누어 사면에 든든한 매복을 쳤다.

준비를 다 갖추었다는 보고를 받은 숙록후는 본진안에는 다만 기치만 세우고 곳곳에 등을 매달아 주위를 밝혀놓았다.

자정이 될무렵 엄평은 성우에 올라 설연의 진중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등을 매달아 진중은 대낮같이 밝았으나 고요한 적막감이 깃들고 인적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설연의 군사들이 술에 취하여 곯아떨어졌구나!)

엄평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즉시 미리 대기하고있던 정예군사 오만을 끌고 조용히 북문을 열고 설연의 진중으로 향했다. 엄평의 령에 따라 군마의 발굽에도 군사들의 발에도 소리가 나지 않게 솜으로 감쌌다. 설연의 진중을 오백보쯤 앞에 두고 엄평의 령에 따라 적군사가 불의에 속도를 높여 설연의 진중을 엄습하였다.

헌데 이 웬일인가? 진중에 이른 엄평은 눈알이 뒤집혀졌다.

지금쯤은 만취되여 쓰러져있어야 할 진중에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군막들은 텅텅 비여있는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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