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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회


반안왕 류도는 군사를 연습하고
설중매는 개심사의 녀승이 되다


하늘도 감심했는지 이날 남쪽에서 한줄기 무지개가 일어나 구름이 되여 종일토록 해를 가리웠다.

자기 방에서 밖을 내다보던 엄평이 무지개가 비끼고 종일토록 구름이 해를 가리우는것을 보고 이상스레 생각되여 전왕을 찾아갔다.

《웬일인지 이 엄동설한에 청청하늘에서 무지개가 서더니 얼마후 구름이 되여 하루종일 해를 가리웠나이다. 무슨 조짐인지 태사(천문을 맡은 관리)를 불러 알아보았으면 하오이다.》

그 말에 전왕이 놀라며 하늘을 바라보니 과연 이상하게도 사면에 다른 구름이 없는데 유독 연기같은 채색구름만이 령롱하여 해빛을 가리우고있었다.

전왕이 즉시 태사를 불렀다.

《저건 무슨 조짐이냐?》

태사가 조심스레 대답하였다.

《나라가 흥할 징조로소이다.》

전왕과 엄평이 듣고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응당 기뻐해야 할 소리이건만 이마살을 찌프리는걸 보니 그 대답이 그닥 신통치 않다는 기색이였다.

별궁에서 제 아들 미영과 바꾸어 어린 임금을 무사히 구원하고 청룡산으로 돌아온 심원공주가 울먹이며 대내상 황운에게 물었다.

《어린 성상을 데려왔으니 대내상은 어찌할 생각이오이까?》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승냥이굴에 남겨두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돌아온 공주였다. 교자안에서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어있는 심원공주를 황운은 차마 마주볼수가 없었다. 그저 진정의 마음을 담아 머리를 수그렸을뿐이였다.

《공주랑랑의 사직을 위한 그 충정앞에 소신은 감복을 금할수 없소이다.

모자의 정을 제손으로 끊어버린 공주랑랑의 그 충정은 백세천세에 가서도 길이 빛날것이오이다. 이젠 선임금의 유지를 지켜 후일에 황실을 회복하고 사직을 안보할수 있게 되였으니 이는 전수이 공주랑랑의 공이로소이다.…

그러나 하늘의 운수가 아직 미치지 못하였으니 지금은 조용히 몸을 보존하면서 성상이 어른이 되기를, 성상의 나이 열다섯살이 되기를 기다림이 상책인줄 아오이다. 그때까지는 성상을 무사히 보호하면서 장차 나라를 회복할 군사를 길러야 할줄 아오이다.》

이때 조명걸을 쫓아 청룡산에 은거하였던 선임금때의 신하들이 어린 임금의 소식을 듣고 환성을 지르며 대내상을 찾아 모여들었다. 그들속에는 염성태와 홍윤, 서하수, 마맹달도 있었다.

그들과 반갑게 상봉한 대내상 황운이 숙록후의 소식을 물었으나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실망과 근심으로 낯색이 어두운 대내상을 위로하며 염성태가 나섰다.

《소장에게 천리준마가 있으니 천지를 다 뒤져서라도 숙록후를 찾아 소식을 알리겠소이다.》

그에 뒤질세라 홍윤과 서하수, 마맹달이 팔을 걷고 나섰다. 염성태가 대내상이 자기를 제쳐놓고 딴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길가봐 안절부절못하였다.

대내상 황운은 그 마음에 감동을 금치 못해하며 염성태를 불러 그앞에 지도를 펼쳐놓았다.

《내 이제 반안왕 류도를 찾아 안원부의 료양으로 들어갈테요. 료양으로 들어간 후 그곳과 통하는 삼백리길에 볼을 질러 왕래길을 끊어놓겠으니 그대는 이 지도를 보아 찾아오도록 하라.》

이어 대내상이 안원부지도를 주니 염성태가 지도를 품안에 간수하고 서너명의 군사를 달고 숙록후를 찾아 그길로 떠났다.

염성태가 떠난 다음 대내상은 조명걸, 마맹달 등과 마주앉았다.

《난 어린 페하를 모시고 안원부로 들어갈테니 그대들은 청룡산에 그냥 남아있어야 할가보오.》

조명걸과 마맹달 등이 대내상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앞으로 발해국을 다시 회복하려면 각곳에서 군사를 일으켜야 한다는 대내상의 의도를 파악한 그들이였다.

의견이 합치되자 대내상 황운은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어린 임금을 모시고 안원부로 들어갔다.

반안왕 류도는 임금의 고모사촌형이라 어린 임금과 대내상을 보고 놀라마지 않았다. 전후사연을 다 듣고난 류도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즉시 군사를 일으키겠다며 윽윽거렸다.

황운이 류도를 만류하고 차후의 지시를 주었다.

《아직 기회가 도래하지 않았소이다. 그러니 당장은 안원부로 통하는 모든 길들을 불사르고 군사와 군마를 모으고 군사를 훈련주어야 하겠소이다.》

류도가 분기를 누르며 대내상 황운의 령대로 할것을 약속하였다. 대내상 황운은 류도와 함께 료양에서 낮과 밤이 없이 군사를 조련하며 천재일우의 기회가 오기만을 일일천추로 기다렸다. 안원부에 들어온 심원공주는 나어린 임금을 제 아들 미영을 키우듯 성심성의로 돌보았다.

이무렵 엄평은 대내상 황운이 안원부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전왕에게 아뢰였다.

《황운과 설씨가 군사를 일으키면 선임금때의 신하들과 백성들이 다 그들에게 가붙을것이니 태자를 빨리 없애야 하오이다. 그래야 황운의 거사를 막을수 있소이다.》

전왕이 앉은자리에서 몸을 흠칫거렸다.

《그건 무슨 소리냐?》

엄평의 뱁새눈에서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태자도 없는데 황운이 군사를 일으키면 그에게 반란을 꾀하였다는 죄명을 씌울수 있소이다. 그러면 황운에게 쏠리는 민심이 다 흩어지게 될것이고 그야말로 황운은 끈 떨어진 뒤웅박신세나 같사오이다.

그렇게만 되면 그를 잡기가 식은죽 먹기오이다.》

전왕이 주걱턱을 끄덕거렸다.

《경의 말이 물론 옳다만 나라법에 열다섯전에는 죽이는 형벌이 없으니 어찌 하리오.》

엄평이 답답하다는듯 얼굴을 찌프렸다.

《페하! 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공신들이 다 태자를 위하여 피신할것이고 또 황운이 군사를 일으켜 싸움에서 승천하면 천하의 민심이 그에게로 쏠리게 되오이다.

대업을 이룩해야 할 페하가 어찌 사사로이 나라법을 두고 주저하오이까. 나라법이라는것도 세상이 바뀌였으니 다시 새로 만들어내면 될게 아니오이까.

간절히 바라건대 페하는 신의 말을 따르소서.》

그래도 전왕은 과단성이 없이 유예미결한다.

《경의 말이 비록 옳다만 그러다가 후세에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을가?!》

《죽은 다음에 오명을 쓰면 어떻구 호명을 쓰면 어쨌단 말이오이까. 살아 생전에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면 그만이 아니옵니까. 그리고 이기면 영웅이요, 패하면 역적이란 말이야 어제오늘에 생겨난 말도 아니고 예로부터 전해오지 않았소이까.》

그 말에 전왕이 마음이 좀 동하는듯싶었으나 여전히 우유부단하였다.

엄평이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뗐다. 그의 뱁새눈에 짙은 고뇌가 력력하다.

《페하, 태자 하나 죽이기를 이렇듯 주저하시니 장차 천하는 어찌 평정하리까.

결단성이 없이 기회를 놓치면 여지껏 품들여 성사시킨 대사가 하루아침에 모래성이 되고마오이다. 빨리 결심하소이다.》

그 말에 전왕이 더 어쩌지 못하고 머리를 끄덕거리더니 엄평을 별궁으로 보내면서 태자는 없애치우고 황태후는 풀어주되 별궁에서 그냥 살게 하라고 하였다. 엄평의 뱁새눈에 광채가 번뜩이더니 그달음으로 별궁으로 줄달음쳐갔다.

아, 슬프고 불쌍하도다! 인륜을 거역한 역적란신들의 더러운 손에 어린 미영이 꽃망울을 피워보지도 못한채 임금을 대신하여 한줌 흙이 되는구나!

별궁으로 질풍같이 달려간 엄평은 엄진에게 이리저리하라는 지시를 주었다.

엄진이 황태후와 임금이 들어있는 방으로 찾아들어갔다.

이무렵 나어린 임금(미영)은 심원공주를 찾으면서 울며불며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있었다. 엄진은 황태후에게 엄승상이 태자때문에 근심하면서 어의에게 태자의 병을 치료시키겠다고 해서 데리러 왔노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엄평의 흉계를 짐작하고있던 황태후가 못 데려내간다고 두팔을 벌리고 막아나섰으나 굶주린 이리떼들에게 어린 《태자》를 종내 빼앗기고말았다.

심원공주와 조명걸의 아들 미영은 이리하여 너무도 어린 나이에 임금을 대신하여 엄평도당에게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하늘의 뜻이런가 미영이 신통히도 임금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세상에 고고성을 터치고 인간으로 태여났은즉 만일 그가 죽지 않고 성장했더라면 나라와 사직을 위해 큰일을 했으련만 아쉽고 불행하게도 엄평과 같은 역적간신배들의 손에 꽃망울을 펴보지도 못한채 너무도 일찌기 목숨을 잃었구나!

오, 불쌍하고 애달파라, 가엾고 원통하여라!

허나 동서고금에 충신이 많다 한들 어찌 미영과 공주의 그 충정에 비길수 있다더냐!

병을 보이러 데리고나갔던 《태자》가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황태후는 일체 음식을 전페하고 당장 《태자》를 돌려보내라고 야단을 쳤다. 엄평이 일체 모르쇠하고 전왕에게조차 보고하지 않았으나 그 소식은 전왕에게 인츰 전달되였다.

전왕은 대노하여 엄평을 다불러세웠다.

《내 그만큼 당부했는데 황태후를 그렇게 대하다니?! 당장 황태후를 풀어주어 대우를 최상으로 해주라!》

그랬어도 황태후가 여전히 단식을 하자 전왕이 직접 별궁으로 행차하였다. 그래도 선임금의 황후이고 그한테는 형수가 되는 황태후였다.

황태후앞에 머리를 수그리며 전왕이 용서를 빌었다.

《태자가 그만 몹쓸병에 걸려 잘못되였소이다. 그러니 태후께선 마음을 그만 진정하시고 몸을 돌보옵소서.》

그 소리에 황태후가 목을 놓아 꺼이꺼이 통곡하였다.

한참후에 간신히 마음을 진정한 황태후가 전왕이 붙여준 궁녀들을 다 뿌리치고 대내상 황운의 딸 순애와 같이 있겠다면서 당장 내앞에 데려다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럼 그렇게 하리다.》

단식을 하며 음식을 페했던 태후가 그만큼이라도 진정된것이 다행이라고 여긴 전왕은 엄평에게 명령하여 현주성 관비로 처넣은 황운의 딸 황순애를 즉시 데려다가 황태후와 함께 별궁에 있게 하라고 하였다. 이는 심원공주의 아들 미영을 지켜내지 못했지만 대내상의 딸 순애 하나만이라도 어떻게 하나 지켜내려고 속다짐한 황태후의 꾀였다.

이리하여 황태후는 현주성의 관비로 박혀있던 황운의 딸 황순애를 별궁에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우면서 심원공주가 빼내간 어린 임금이 제발 무사하고 대내상과 숙록후가 하루빨리 사직을 회복하기만을 일구월심 기원하였다.…

북해땅에는 선임금때의 신하였던 왕연이라는 사람이 진권의 란이 평정되자 고향인 북해로 도로 내려와 살고있었다. 도원수 설연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싸웠던 왕연은 숙록후에 대해 손금보듯 알고있었다. 그 왕연이 북해로 피신해온 숙록후의 신상을 보고 그가 인츰 해산하리라는것을 예감하고 숙록후를 은동의 집에서 자기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고 부인을 시켜 한시도 곁을 뜨지 말고 돌보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야밤중에 숙록후가 복통이 심하더니 삼경에 끼끗한 사내애를 낳았다. 설연은 아들애의 이름을 《위》라고 지었다.

왕연부부의 지성으로 숙록후는 한달후 몸이 완쾌되게 되였다. 왕연은 자기 안해를 시켜 유모를 수소문하게 하고 마음씨고운 녀인을 유모로 데려와 갓낳은 아기를 맡아키우도록 하였다.

몸이 완쾌되자 다시 남복차림을 한 숙록후는 우시춘이 북해에 정배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행적을 탐문하기 시작하였다. 왕연이 숙록후를 도와 솔선 나서서 우시춘의 행방을 찾으려 온 북해땅을 샅샅이 뒤졌다.

보름가량 지난 후 왕연이 우시춘이 정배살이를 하고있는 곳을 알아가지고 숙록후에게 전해주었다. 숙록후는 너무 기뻐 왕연을 보내여 시춘과 후일을 기약하기로 약속하였다.

한편 엄평이 대내상과 숙록후의 집을 페허로 만들고 그 집안식솔들을 관가의 노비로 처박았는데 대내상 황운의 소실인 설중매는 현덕부의 홍주관가의 관비가 되였다.

홍주관가의 관비가 된 설중매는 수치와 분노를 참을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하였으나 끝내 시행할수 없었으니 그 까닭은 그의 몸에 이미 황씨가문의 후대가 자라고있었기때문이였다. 잉태한지 여러달이 되여오는 설중매는 생각끝에 몸을 순조롭게 푼 후에 대내상의 후대를 딴 사람에게 부탁하고 목숨을 끊기로 작정하였다.

이때 홍주자사는 엄평의 도당이라 설중매의 자색이 뛰여남을 보고 흉측한 마음을 품고 매일과 같이 그에게 성화를 먹이고있었다. 때로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때로는 위협도 해보았으나 설중매의 빙옥같은 마음을 돌려세울수 없자 자사는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날도 자사가 옥에 찾아와 설중매의 마음을 돌려세워보려고 갖은 수단을 다 피웠으나 허사였다. 그러자 성이 독같이 오른 자사는 얼굴이 시뻘개서 고함쳤다.

《네가 정 그렇게 옹고집을 부리면 배속의 아이에게도 후환이 있을줄 알라. 래일 하루동안만 말미를 줄테니 닭다리처럼 그냥 뻗대지 말구 내말에 고분고분해라!》

그 말을 내뱉고 자사는 찬바람을 일쿠며 옥문을 걷어차고 나갔다.

맨살에 송충이가 기여오르는듯 흉물스럽고 징그럽기 짝이 없는 자사는 돌아갔지만 그가 내뱉은 말은 설중매의 귀전에서 그냥 웅웅거렸다.

설중매는 두손을 가슴에 얹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래일이라?! 내 만일 죽는다면 상공의 혈육마저 죽을것이니 장차 누가 상공의 원쑤를 갚을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눈에 달이 뜬 수개같은 자사를 눅잦히고 옥에서 벗어나 후일을 기약함이 옳지 않을가.)

다음날 설중매는 자기의 속내를 감추고 자사에게 청하였다.

《첩이 오래동안 옥살이를 하다나니 신병이 재발하여 몸이 편치 않소이다. 그러니 어른께서 관대히 놓아주시면 아이를 무사히 낳고 몸이 회복된 후 어른의 분부를 따르리다.》

자사의 입이 메사구입이 되였다. 자사는 너무 기뻐 허둥거리며 설중매에게 별도로 좋은 집을 내주고 그가 아이를 낳기만을 목마르게 기다렸다.

그 집에 돌아온 설중매는 어떻게 하면 이 소굴에서 벗어날것인가 곰곰히 생각해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해산날은 하루하루 박두해오는데 딴 방도는 없지 하여 설중매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였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기에 설중매가 나가보니 시주를 청하는 한 녀승이 문밖에 서있었다.

《죽을 시각만 기다리는 이몸이 무엇을 시주하리까.》

녀승이 두손을 모아 합장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부인은 어찌 박절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부인의 신색을 보니 해산을 박두한듯 하온대 시주를 하시면 부인의 아이에게 장차 복이 많으리다.》

순간 설중매는 머리에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어 주위를 살피며 나직이 물었다.

《스님은 어느 곳에 계시오며 언제 돌아가려 하시나이까?》

《소승은 룡원부의 칠보산에서 왔사온데 새로 짓는 개심사에 비문을 세우려고 시주를 구하는중이옵니다. 시주를 구하면 인차 돌아가려 하나이다.》

《이곳에서 그 절이 얼마나 되오이까?》

《륙로로 칠백리가 넘소이다. 산천이 험준하나 상서로운 기운이 항시 떠돌고있는 곳이지요.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그곳을 선경이라 일러주나이다. 만일에 사람이 부정하거나 마음이 착하지 못하면 출입하지 못하오이다.》

설중매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곳이야말로 내가 거처할 곳이로다!)

설중매는 곧 녀승을 집안으로 청하였다.

녀승에게 제몸에 가지고있던 금은패물을 다 꺼내놓은 설중매는 심중의 사연을 눈물속에 터놓으며 청하였다.

《스님에게 한가지 청이 있사온대 소녀를 그곳까지 좀 데려다주사이다. 형세가 급하여 소녀가 피할 곳은 그곳밖에 없는줄 아오이다. 부탁컨대 이 소녀를 도와주어 그곳까지 동행하게 해주사이다.》

그의 말을 눈물속에 들으며 옷깃을 적시던 녀승이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더니 설중매가 하도 절절히 청하고 그가 값나가는 금은패물을 시주하자 종내 허락하고말았다.

그날밤 설중매는 약간의 의복을 준비하고 녀승을 따라 몰래 집을 나섰다.

열흘후 칠보산에 당도한 설중매는 개심사의 맨 막바지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에 거처하게 되였다.

칠보산에 당도한지 한달후 설중매가 거처한 암자우에 찬연한 오색구름이 하루종일 낮추 떠돌더니 그다음날 날이 밝을무렵 설중매는 옥동자를 낳았다.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여물고 큰지 온 절간이 떠나갈듯 하였다.

이러구러 설중매가 개심사에 들어온지 서너달이 되였다.

어느날 여러 녀승들이 그를 찾아와 주밋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씨가 아기를 데리고 이 절에 그냥 있으면 자연히 종적이 탄로될수 있나이다. 만일에 홍주자사가 알면 큰 재앙이 이 절에 미치리니 아씨는 삭발하여 행적을 감춤이 어떠하오이까?》

설중매가 그 말에 눈물을 좔좔 쏟았다.

《내 어찌 살겠다고 삭발하고 녀승이 되며 강보에 싸인 아기는 어찌하나이까.》

《소승들의 말이 박절하다 생각할줄 아오이다. 허나 만번중의 한번이라도 이 일이 루설되면 아씨는 물론 아기도 살릴수 없소이다. 또 우리에게도 그 화가 미칠것이 불보듯 뻔하지 않소이까. 그러니 아씨는 달리 생각 마시고 깊이 생각해보소서.》

《그러면 어찌하면 좋소이까?》

설중매와 함께 온 녀승이 그의 팔을 다정히 끄당기며 대답하였다.

《이 산의 동구밖에 황처사라는 어진 사람이 있사옵니다. 나이 사십이 되도록 무자식이더니 요행 딸 하나를 낳았다는게 그만 석달만에 죽어 내외가 지금 인사불성이옵니다.

그러니 아씨의 아기를 황처사 부인에게 부탁하면 잘 기를것이고 또 아씨도 편안하리다.》

설중매는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내 지금의 처지가 난처하기 이를데 없고 또 처사의 성이 황씨라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것이니 그에게 맡겼다가 후날을 기약함이 옳도다.)

설랑자는 머리를 끄덕이며 응수하였다.

《그렇게 하는수밖에 없군요.》

녀승들이 즉시 황처사 부인을 찾아가 사연을 말하니 그 부인이 기꺼이 응하였다. 낳은지 석달도 못되는 아기를 남에게 맡기는 설중매의 눈에 눈물이 비오듯 흐르고 그 모습을 보는 녀승들도 누구라 할것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기를 황처사 부인에게 맡긴 설중매는 머리를 깎고 녀승이 되였다.

설중매가 하루밤새 없어지자 홍주자사는 산지사방으로 군사들을 내보내여 찾게 하였으나 수백리밖 칠보산 개심사에 숨어 삭발하고 중이 된 그를 어찌 찾을수 있으랴.

이젠 다 먹어놓은 떡이라고 생각했던 당대의 미인을 놓쳐버린 아쉬움과 한갖 계집에게 속히웠다는 수치감이 머리끝까지 치민 자사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좌우에 서있는 애매한 사람들을 련이어 칼로 찔러죽이니 고을의 민심이 원통해하였다.

한편 북해에 당도한 염성태는 귀양간 우시춘을 만나면 숙록후의 소식을 알수 있다고 판단하고 우시춘부터 찾아갔다.

염성태를 만난 우시춘은 대내상 황운의 소식을 듣더니 너무 기뻐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그래, 어떻게 되여 불쑥 여기에 나타났소?》

《대내상어른이 숙록후의 행처를 알아오라 해서 왔소이다.

듣자하니 철망을 마스고 북해로 피신했다고 하기에 혹시 대감을 만나면 숙록후소식을 알가 해서 먼저 이곳부터 왔소이다.》

《참 잘 왔소. 설장군이 여기 멀지 않은 곳에 계시오.》

우시춘이 숙록후가 북해에서 왕연을 만나 그들부부의 도움으로 생남한 소식이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말하자 염성태가 대뜸 찾아가자고 팔을 걷어올렸다.

우시춘을 따라 숙록후의 거처지에 이른 염성태가 숙록후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었다.

《설장군께서 이런 험한 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나이까.》

반색하는 숙록후의 고운 얼굴에 가랑가랑 눈물이 맺혔다.

《어서 일어나세요. 날 찾아 그 먼길을 다 오다니…》

염성태가 황성에서 벌어진 일을 자상히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전왕과 엄평이 무도하게 찬탈한 일이며 대내상 황운과 심원공주가 어린 임금을 위기에서 구원한 일이며 공주의 아들 미영이 임금을 대신하여 목숨을 잃은 일이며 대내상의 가속들이 적몰당한 일을 일일이 말하자 숙록후가 목놓아 통곡하였다.

《공주랑랑의 나라위한 장거와 대내상의 충의지심은 천하에 다시 찾아볼수 없어요. 이는 능히 나라를 회복하고 천하를 평정할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허나 우리 집안을 다 적몰하였다니 어린 우리 딸 순애가 불쌍하기 그지없군요. 지금 살아나 있는지…》

슬피 우는 숙록후를 바라보는 우시춘과 염성태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하였다. 황태후가 순애를 현주관가에서 빼내여 별궁에서 함께 살고있는줄 그들은 전혀 모르고있었다.

이윽고 염성태가 한시바삐 돌아가 대내상에게 소식을 알려주어야 한다며 떠날 차비를 하였다. 그 말에 숙록후가 몸가짐을 수습하고 급히 편지 하나를 써서 염성태에게 주었다.

《여기에 차후의 일들을 다 적었으니 어김없이 전달하세요.》

숙록후와 헤여진 염성태가 돌아오던중에 현주성을 지나게 되였다.

어느 한 객점에 앉아 염성태가 다리쉼을 잠간 하고있는데 문득 옆방에서 처량하고 구슬픈 곡성이 들려왔다.

염성태가 옆에 앉아있는 중년의 녀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디서 나는 곡성인데 이다지 남의 심사를 슬프게 하느뇨?》

그 녀인이 울먹이며 대답하였다.

《저 곡성은 우리 아씨의 울음소리오이다.》

《우리 아씨라니?!》

《사실 우리 아씨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 대내상의 시녀인 동리화라 하옵니다. 지금 전왕과 엄승상이 대내상의 가속들을 모두 관비로 박았는데 우리 아씨를 여기 현주관비로 넣었소이다.

헌데 그 엄승상이 우리 아씨의 미모에 혹해서 첩으로 삼으려고 백가지, 만가지로 회유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오늘 군졸들을 파하여 강제로 끌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렇게 슬피 우는거랍니다.》

그 말을 듣는 염성태는 분격을 금할수 없었으나 혼자몸이고 또 대내상에게 빨리 가닿아야 하겠기에 어쩌는수가 없었다. 그 녀인에게 몸에 지니고있던 은전을 다 털어주며 신신당부하였다.

《내 갈길이 바빠 가야 하는데 내몸에 이것밖에 없구만. 그러니 아무쪼록 아주머니는 아씨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우. 후날에 다시 만날 때가 꼭 있을거요.》

그길로 염성태가 준마를 다급히 몰아 안원부에 이르러 대내상에게 숙록후를 만난 소식을 이르고 편지를 전했다. 대내상 황운이 기뻐하며 편지를 뜯었다.

《상공의 소식을 오래동안 몰라 밤낮으로 탄식하던 첩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듣고 이 글월을 올리나이다.

상공께서 선임금의 유지를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란신역적무리들을 멸하려 한다니 첩은 감동을 금할수 없소이다. 상공께서 군사를 일으키면 첩도 있는 힘껏 분투하려니 상공께서 거사하는 날 격문을 전해주옵소서.

첩은 북해에 표박하다가 우시춘의 도움과 왕연의 방조를 입어 순산하고 아들애의 이름을 상공과 의논없이 〈위〉라고 지었소이다. 몸 또한 이전과 다름없으니 첩은 근심마시고 대업에 전념하시기를 바라오이다.》

편지를 받아보는 황운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여 저도모르게 눈물이 솟는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자리에서 때가 되면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는 회답편지를 써서 염성태에게 주어 숙록후에게로 떠나보냈다.

가던 길에 염성태는 황운이 보낸 군사들과 함께 현주에 들려 동리화를 구원하고 북해로 동행하니 숙록후가 반가와 어쩔줄 몰라하였다.

이후로 동리화는 숙록후가 낳은 황위를 전적으로 맡아키웠다.

숙록후와 약속한대로 대내상 황운은 기회가 마련될 때까지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과 군마를 준비하며 병장기를 마련할데 대한 내용을 담은 서신을 청룡산에 있는 조명걸과 마맹달, 서하수 등에게 보내였다.

대내상 황운의 결심을 잘 알고있는 반안왕 류도는 더욱 격동되여 군사를 키우고 병장기를 준비해나갔다.

어느덧 세월은 류수같이 흘러 전왕이 옥좌를 찬탈한지 팔년이 되였다.

엄평이 황운과 설씨를 잡지 못함을 근심하더니 하루는 전왕에게 간하였다.

《신이 천기를 보니 장성이 남쪽에 명랑하여 살기를 띠고있고 또 반안왕 류도가 황운과 결탁하여 조공을 오래동안 페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킬 념려가 많사옵니다.

바라건대 페하는 남쪽지경방비를 강화해야 할줄 아옵니다.》

전왕이 수긍하며 지시하였다.

《그렇지, 황운이 필경 반안왕과 작당하여 군사를 일으킬수 있으니 경은 안원부로 드나드는 장령부의 하주에 군사를 더 보내여 방비를 강화하게 하라.》

엄평이 곧 엄진에게 명령하여 안원부와 이웃하고있는 장령부의 하주의 경비를 강화하라고 하니 엄진이 오천군사를 거느리고 하주성에 틀고앉아 부장 손개를 시켜 밤낮으로 단속하게 하였다.

이러구러 임금의 나이는 열다섯살에 이르게 되였다.

옥좌에 틀고앉은 전왕과 엄평도당들의 악행으로 나라는 도탄에 들고 각처에서 민심이 끓었다.

선임금때의 충의로운 신하들은 자취를 감추고 권력에 아부하는 간신소인배들이 엄평의 무리에 가담하여 저지르는 악행에 신물이 난 백성들의 원한이 온 나라에 차넘쳤다. 대내상 황운과 숙록후 설봉선이 살아있다는것을 알고있는 민심은 하루속히 두 장수가 나서서 나라앞에 드리운 어두운 구름장을 가셔낼것을 목마르게 바라고있었다.

대세를 관망하며 때를 기다리던 대내상 황운은 반안왕 류도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기로 작정하고 염성태를 숙록후에게 보내여 격문을 전달하게 하였다.

대내상 황운의 격문을 받아본 숙록후의 새별눈이 적의로 끓어번졌다.

《대내상에게 전하세요. 대내상과 약속한 날자에 우장군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고 황성으로 진격하겠다고 말이예요.》

북해의 숙록후에게 격문을 전달하고 안원부로 돌아오던 염성태는 하주성을 지나다가 공교롭게도 수비군사를 거느린 손개와 부딪치게 되였다.

성문에 나와 안원부로 왕래하는 사람들을 단속하고있던 손개가 준마를 타고 지나는 염성태를 멈춰세웠다.

《어데로 가는 길손인가?》

염성태가 태연스레 대척하였다.

《난 동쪽으로 왕래하며 장사하는 안원부사람인데 물자를 무역하다가 지금 돌아가는중이요.》

《그렇다면 공문을 좀 보자!》

공문이 있을리 만무한 염성태였다. 눈섭 한번 깜박이지 않고 둘러쳤다.

《급히 오기로 미처 공문을 내지 못했소.》

손개가 대뜸 의심을 가지고 다그어댔다.

《공문이 없다는게 무슨 말이냐? 엄승상의 령으로 공문이 없는 사람은 일체 이곳으로 통행할수 없다는걸 모르느냐!

이자 보니 네가 장사다니는 사람이라는데 그 행색이 어디 장사하는 사람 같으냐!》

《왜 믿지 못하시우? 내 너무 급하다나니 공문을 내지 못했다는데 왜 이리 야단이요?》

《뭐?! 야단? 이놈이 점점 하는 수작질이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야! 당장 이놈을 잡아 옥에 처넣으라!》

손개가 제 무리들을 돌아보며 호통치자 수비군사 서넛이 염성태에게로 다가왔다. 군사들과의 거리는 댓마장쯤 되였다.

자칫하면 잡히울수 있다는 생각이 든 염성태는 가만히 짐속에 감추었던 철퇴를 꺼내들었다. 미처 손쓸 사이 없이 자기에게로 돌아서는 손개의 머리에 철퇴를 휘둘렀다.

《윽!》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손개가 머리통이 빠개지면서 피를 뿌리며 그자리에 즉사하였다.

다가서던 수비군사들이 미처 정신을 차릴새없이 염성태가 철퇴를 휘두르며 맞받아나가니 군사들이 기겁해서 뺑소니를 쳤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염성태는 말머리를 잡아돌려 쏜살같이 성문을 빠져나갔다.

한참 달리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제서야 뺑소니치던 수비군사들이 성문밖에 모여들어 고아대는데 따라올 심산은 아닌것 같았다.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말을 쳐몰아 료양에 이른 염성태가 소식을 전하니 대내상 황운이 기뻐하며 그를 치하하였다.

대내상 황운은 이어 숙록후와 약속한대로 칠월 초사흗날 군사를 일으켰다.

이앞서 대내상 황운은 어린 임금을 모셔 발해국 황제라 하고 년호를 정한 다음 황운자신은 스스로 대장군이 되였다.

반안왕 류도를 운량관으로 삼아 군량과 군수물자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부하장수 류우를 선봉장으로 삼고 십만대군을 휘몰아 풍우같이 황성으로 진격하였다.

때는 가을 칠월(음력)이라 료양성의 백성들이 임금의 어가를 보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여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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