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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회


조명걸은 충의를 지켜 산에 들어가고
미영은 태자를 대신하여 목숨을 잃다


황성에 돌아온 우시춘은 눈앞의 현실에 너무도 억이 막혀 가슴을 쳤다.

반란적에 의해 나어린 임금과 황태후는 연금되고 전왕이 옥좌에 올랐다는것을 알고 기가 막혀 한동안 혼빠진 사람처럼 멍청해있던 우시춘은 대내상의 집이 빈터가 된것을 보고는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이 어찌된 일이냐. 나라의 제일가는 충신이 역적으로 몰리우고 가속들이 관비로 박히다니?!

아- 하늘도 무심토다, 권력에 환장이 된 역적들이 나라를 망하게 했구나!》

반나절동안이나 머리를 풀어헤치고 페허로 된 대내상의 집터에서 추위도 아랑곳없이 넋없이 앉아 슬피 통곡하는 그를 부하장수들이 와서 겨우 그의 집으로 데리고갔다.

대내상의 빈 집터에서 우시춘이 대성통곡하며 현 조정을 비난했다는 소식이 그날로 전왕의 대궐로 날아들어갔다. 그 보고를 받은 전왕은 푸르락거리며 고아댔다.

《뭐, 뭐? 우시춘이 그놈이? 당장 그놈을 잡아다 목을 베라!》

길길이 날뛰는 전왕을 만류하며 엄평이 나섰다.

《그러시면 안되오이다. 페하!

만일 황운을 위해 통곡했다고 해서 우시춘을 죽여버리면 많은 공신들이 원한을 품고 페하에게 등을 돌려댈것이며 나아가서는 황운과 설씨에게 가붙을수 있소이다.

더구나 황운과 설씨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 쓸만 한 놈들이 다 달아나 그들에게 가붙으면 범에게 날개가 달리는 격이 되지 않겠소이까. 그러니 페하는 잠시 큰일을 위해 한때의 분기를 누르시고 차라리 시춘의 벼슬을 더해주어 그를 위로하소서.

만일 그 소식이 공신들에게 전해지면 오히려 화가 복이 될수 있지 않겠소이까.》

전왕이 듣고보니 그럴듯 한지라 이번에는 더는 쇠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 의견을 쫓아 우시춘을 좌승상으로 임명하고 조정에 나오기를 재촉하였다.

허나 우시춘은 벼슬을 올려주는 임명장을 땅바닥에 팽개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종묘문전에 엎드려 자기를 죄인으로 치부하면서 선임금과 어린 임금을 부르며 머리를 조아렸다. 일체 조정사에는 머리조차 내밀지 않았다.

온 황성바닥에 우시춘이 선임금과 어린 임금을 부르며 죄를 청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엄평이 파한 군사들이 아무리 저지시켜도 우시춘은 한본새였다.

그 소문이 또 전왕의 귀에 들어갔다. 화가 굴뚝같이 치민 전왕은 엄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시춘의 벼슬을 삭탈하고 그를 북해로 귀양보내라는 령을 내렸다.

하여 우시춘은 황성에 올라온지 엿새만에 북해로 귀양가게 되였다.

황성을 지키다가 끝내 반란적에게 사로잡혀 성을 빼앗기고 어린 임금과 황태후를 지켜내지 못한 계루왕의 부마 조명걸은 며칠만에 풀려나왔다. 허나 그는 다음날 자기를 우승상으로 임명하는 전왕의 명소패를 집어던지고 식솔을 끌고 청룡산으로 들어갔다.

청룡산으로 들어가면서 조명걸은 다음과 같은 글을 동문에 써붙였다.

《세상천하가 횡포무도한 역적패당의 나라로 변했으나 내 홀로 발해국의 사람이 되리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거늘 내 어찌 역적괴수를 임금이라 섬기며 역적의 하늘을 발해국의 하늘이라고 바라보랴.

충신들의 본을 따서 내 마땅히 청룡산으로 들어가 선임금과 어린 임금을 위로하며 충신렬사의 넋을 이어가리라.》

말갈과의 싸움에 나갔다가 황성으로 돌아온 홍윤과 서하수도 나라형세가 변한것을 보고 가슴치며 통탄하다가 대내상과 숙록후가 이미 피신하고 우시춘이 북해로 귀양갔으며 조명걸이 청룡산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자 관복을 벗어 동문에 걸어놓고 조명걸의 뒤를 따라 청룡산으로 들어갔다.

동문에 써붙인 조명걸의 글을 본 전왕이 미친듯이 올리뛰며 당장 조명걸을 잡아들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고아댔다.

《내 그놈을 붙잡았을 때 목을 베야 하는건데 네놈이 감히 날 업수이 여기고 이런 망발을 해? 당장 그놈을 잡아들이라!》

이번에도 엄평이 나서며 만류하였다.

《명걸은 계루왕의 부마이고 또 스스로 벼슬을 사양하였으니 구태여 죽일 죄는 아니옵니다.

그러니 페하는 마땅히 계루왕을 풀어주어 작위를 도로 주신 다음 명걸을 부르시면 명걸이 계루왕을 쫓아 반드시 조정에 나올것입니다.

만일 조명걸이 조정에 나오면 선임금의 공신들이 거의 대다수가 페하를 받들어 조정사에 참여할수 있다고 보나이다.》

전왕이 그 말대로 계루왕을 풀어주고 계루왕이 봉읍받았던 룡원부를 다시 봉하니 계루왕이 받지 않을뿐아니라 문적원을 한발자국도 떠나지 않겠다고 떡 버티는것이였다.

계루왕의 그 강개한 립장에 전왕과 엄평은 어찌할바를 몰라 당황망조하였다.

《부마의 말과는 달리 왜 신하들이 이 짐을 받들지 않고 등을 돌려대는고?》

《황운과 설연이 아직 살아있으니 행여나 미련을 가지고 그러는것 같소이다.》

이때 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전왕이 의아한 눈길로 엄평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건 무슨 노래인고?》

엄평이 잠시 쭈밋거렸다.

이무렵 황성장안에서 어른, 아이 할것없이 누구나 부르고있는 동요인지라 모를리 없는 엄평이건만 아닌보살하며 딴전을 피웠다.

《글쎄요?!》


동산에서 솟던 아침해가

망녕들어 현산에 뜨누나

언제면 하늘에서 단비내려

불쌍한 백성을 구할시고


《가만, 저건 우릴 조롱하는 노래가 아닌가?》

《그렇기야 하겠소이까. 그저 아이들이 장난삼아 지어 부르는 노래겠지요.…》

황성장안이 다 알고있는 노래를 유독 전왕만이 모르고있다고 생각하니 엄평은 불쑥 온몸에 닭살이 돋는듯 한 느낌이 들면서 저도 알수 없는 그 어떤 불안감이 슬그머니 엄습해왔다.

한편 호위군사 십여명을 끌고 태명산으로 향하던 대내상 황운은 도중에서 호위군사들을 멈춰세우고 임무를 분담하며 당부하였다.

《너희들이 지금껏 날 따라다니느라 고생들이 많았다. 형세가 막 부득이하여 이곳까지 왔으니 이제부터 너희들은 각기 뿔뿔이 흩어져있다가 때를 기다리라. 만사는 다 때가 있는 법이거늘 장차 기회는 있을것이다. 그러니 내가 다시 기별할 때까지 각기 사람들을 모집하고 병쟁기와 군마를 장만하며 준비를 갖추고있으라.》

군사들에게 차후 임무를 주고 떠나보낸 황운은 단신으로 태명산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알았는지 산의 초입새에서 청의동자가 나와 황운을 맞아주었다.

《우리 스승께서 대내상어른을 기다리신지 오래 되였소이다. 어서 바삐 가시오이다.》

동자를 따라가던 황운이 낯익은 그 초가앞에 이르니 도사가 벌써 나와있었다.

《사부님!》

황운이 엎어질듯 달려가 도사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 인간세상의 부귀영화가 어떠하며 소원을 다 이루었느뇨?》

황운이 잠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갑자르니 도사가 시허연 장미를 꿈틀거리며 그를 찬찬히 주시해보았다. 그 눈빛에 십여년전 산을 내리던 자기를 바라보던 따스함이 그대로 잔잔히 비껴흐르고있었다.

황운은 그 눈빛앞에 왈칵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그간의 사연을 어찌 한두말로 다 아뢰리까. 스승의 극진한 당부와 보살핌을 받으며 재주를 익힌 이 소자가 진권의 반란적을 소멸하고 나라위해 적으나마 공을 이루었건만…》

도사의 바래움을 받으며 태명산을 떠나 황금대의 무술시합에서 으뜸으로 평가되여 부원수로 임명되여 설연과 함께 진권의 반란을 평정하던 일과 그후 임금이 세상을 떠나 나어린 태자를 등극시키고 섭정대신으로 조정사를 펴나가던 일이며를 황운은 눈물속에 아뢰였다.

《소자가 세상에 나가 소원을 이루고 부귀영화가 극진하였사오나 액운이 미진하여 시국이 변하고 나라가 분렬되고 사직이 풍전등화의 지경에 놓였소이다.

형세가 막부득이하여 전날에 스승이 소자에게 하신 말씀 생각나 찾아왔사오니 바라건대 스승은 소자에게 나라를 구할 방도를 밝게 가르쳐주소서.》

도사의 얼굴에 이름 못할 감회와 추연한 빛이 흘렀다. 한동안 태명산의 주봉인 삿갓봉을 응시하던 도사가 황운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대의 말을 듣고보니 나의 스승이 하던 말이 생각나네. 나의 스승은 저 태백산(백두산)의 월성도사였네. 천하를 휘여잡고 세상을 뒤엎을 경륜을 지니고계셨지만 스승은 한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숱한 제자들을 키우시는것으로 락을 찾으셨지.

언제인가 고금의 사서를 강론하시던 스승은 한 나라의 비사를 이야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네.

〈권력에 야심을 가진자들이 하나같이 가지고있는 공통점은 량심과 의리를 찾아볼수 없는거로다. 왜냐면 권력 그 자체에 뜻을 두고 실행하자면 걸리는것이 아예 없어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걸리는것은 량심과 의리이다. 그러니 그런자들은 불편하기 그지없는 그 량심과 의리를 헌신짝처럼 집어던지는게 례상사로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는지 아나?

그대가 비록 나라위해 공을 세웠다지만 이런 야심가들, 소인배들을 제때에 가려보지 못했으니 이런 엄청난 재난이 들이닥친게 아닌가.

그대가 엄평이 그런 놈이라는걸 짐작했다는데 왜 미리 방책을 세우지 못했나?!

임금은 물론이고 나라도 지켜내지 못했구 또 목숨까지 허무하게 잃을번 하지 않았나. 필부가 어리석으면 한가정이 망하지만 국가의 중신이라는 그대같은 사람들이 밝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롭구 또 그렇게 되면 이런 란리통에 녹아날것은 량순한 백성들뿐이네.

백성이 있고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도 있는건데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이 란리통에 떼죽음을 당하고 가산이 파괴되고 살길을 찾아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닐텐데 이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황운은 새삼스레 도사를 바라보았다. 이젠 나이도 팔십이 썩 지난 스승이였다. 별스럽게 스승의 허리가 굽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십년전에는 무예와 재주를 배우느라 심상히 여겼던 도사의 매 말마디들이 지금 이 시각에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가슴에 쪼아박히는것은 무엇때문일가.

도사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발해의 운수가 볼길하여 외세와 야만인들이 음모군들과 야합하여 발해국을 침노하고 정권야욕에 미쳐 천륜을 상실한 엄평이 전왕을 부추겨 이런 재변을 일으켰으니 아, 이 또한 하늘의 조화인가.

허, 기가 막힌 일이로다!

허나 그대의 부부가 살아있으니 아직은 일이 다 글러진것은 아니지.

필경 그대의 부부를 잡지 못한 엄평과 전왕이 후환을 없애려고 어린 임금을 죽이려고 할것인즉 만일 잠시라도 지체하면 대세는 영영 바로잡지 못할지로다.》

깜짝 놀란 황운이 한걸음 나서며 큰소리로 되물었다.

《그건 무슨 끔찍한 말씀이오이까?》

도사가 한손을 가볍게 들어 황운을 제지시켰다.

《너무 흥분하지 말게. 난 아직 말을 다하지 못했네.

지체말고 손을 써서 임금을 구원하는 일이 가장 급한 일일세. 임금이 무사해야 선임금의 유지도 받들수 있고 종묘사직을 보존할수 있는게지. 헌데 임금의 나이가 너무 어리니 기다려야 하네.

만약 임자가 이제 당장 어린 임금을 다시 내세우려고 하면 세상사람 그 누구도 믿지를 않네.

그러니 임금이 어른이 될 때까지, 적어도 임금의 나이 열다섯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네. 그때가 되여야 임금의 운수가 열리고 나라도 태평할지로다.》

도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황운은 석연치 않아 머리를 기웃거렸다.

《스승의 말씀대로 일을 실행하자고 하여도 소자로서는 어찌해야 할지 방도가 묘연하오이다. 스승은 명백히 가르쳐주소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을 피울수 있고 충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나니 어찌 임금을 구할 사람이 없으랴.》

어떻게 나어린 성상을 구원한단 말인가. 전왕과 엄평이 삼엄하게 그물을 두른 경계진을 뚫고들어가서 구원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다른 방도가 또 있는가. 이런 때에 봉선이 옆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황운은 그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혹시 스승은 그가 어데 가있는지 알수 있지 않을가.

황운은 다급히 물었다.

《숙록후밖에 의논할 사람이 없으니 그가 있는 곳을 알고싶소이다.》

도사가 엄정한 눈길로 황운을 돌아보았다.

《천기를 루설할수 없나니 그대는 차차 알게 되리라. 그러니 지체 말고 어서 떠나라. 이렇게 우물거리다간 대사를 망칠수 있노라.》

연신 떠나라고 독촉하는 도사의 불같은 호령에 황운은 더는 묻지 못하고 절문밖을 나섰다. 절문을 나선 황운은 만사불구하고 어린 임금의 생존여부부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황운은 백발로인으로 위장하고 도사의 복장을 하고 말을 타고 직방 나어린 임금이 감금되여있는 황성의 별궁으로 질풍같이 내달렸다.

별궁은 황성의 서쪽에 있었는데 임금과 황실가문이 한여름날에 와있군 하던 피서지였다.

이튿날 별궁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성밖의 산에 올라 형세를 살펴보니 황태후와 어린 임금을 깊숙이 가둔 별궁주위에는 갑병 일천여명이 지키고있었다. 얼마나 경계가 빈틈없는지 나는 새도 들어가지 못할 어마어마한 경비진이였다.

황운은 할수없이 말을 성밖의 산전막에 맡겨놓고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성안으로 들어갔다.

사방 어디나 전왕과 엄평의 패당들이 때를 만난듯 살판치며 돌아치고있었다. 면식있는 조정의 신하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곡성소리만 산천에 사무쳤다.

날이 저물어 황운은 주점을 찾아가 하루밤 묵기를 청하고 거처를 잡았으나 밤새 잠들수 없었다.

다음날 이른새벽 산책삼아 주점을 나선 황운이 스적스적 거리를 거닐다가 어느 한 골목에 이르렀는데 어데선가 피리소리에 맞추어 청아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황운이 그 소리를 따라가보니 눈같이 새하얀 털옷을 입은 한 소년이 골목길옆에 서있는 커다란 비슬나무에 등을 기대고앉아 피리를 볼며 노래를 부르고있었는데 그 피리소리와 노래소리는 마치 구슬이 굴러가듯 맑고 또랑또랑하였다. 저도모르게 울적하던 가슴이 상쾌해지고 머리가 거뜬해졌다.

황운은 그 소년앞에 다가가 눈인사를 보내고 다정히 물었다.

《그대의 피리소리와 노래소리 들으니 흉금이 상쾌해지거늘 여간 솜씨가 아니로다. 청컨대 그대의 거주성명을 알고싶노라.》

소년이 씩 웃으며 대척하였다.

《그대는 뛰여난 도술을 지녔고 충신의 위국충정을 겸하였으며 록림호걸의 무예를 품고도 천연스레 거리로 다니는데 세상사람들이 모두 그대의 행적을 모를가 하느뇨?》

황운이 그 말에 짐짓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늙은 이몸이 일신이 고달프고 심사가 울적하였는데 다행히도 동자의 청아한 노래소리를 들으니 심신이 상쾌해져 물어보았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그런 괴이한 말로 나를 조롱하느뇨?》

소년이 주위를 일별해보더니 머리를 가로 저으며 피씩 웃었다.

《그대의 말이 정녕 사실인가? 노래소리 들으려거든 청루에 명창이 무수한데 어찌 그런 곳에서 듣지 아니하고 나같이 옹졸한 사람의 하찮은 노래를 들으려 하시오?

그대 졸연히 몸을 변신하여 로인이 되여 세상을 속이려 하니 현인군자같지 않고 임금의 안위때문에 민심을 탐지하려고 거리를 방랑하니 충신같지 않으며 깊이 감금된 임금을 빼내려 하니 록림호걸같지 않도다.》

그 말에 황운은 크게 놀라며 그가 기인임을 깨닫고 허리굽혀 사죄하였다.

《소신이 기인을 몰라보았으니 그 죄는 이를데 없사오나 천지의 해와 달이 이미 심중을 비치시니 어찌 하늘의 뜻을 거역하리까.

엎드려 빌건대 선사는 책망치 마시고 옳은 방도를 가르치셔 소원을 이루게 해주소서. 그러면 소신은 선사의 제자되여 그 은혜의 백분의 일이라도 갚을가 하나이다.》

소년이 빙그레 웃음을 짓는데 량볼의 보조개가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대의 충의지심은 실로 황천이 감동하는바라 심원공주의 도움이 없으면 대사를 이루지 못하리다. 앞으로 성심으로 도모하되 만일 강적을 만나거든 금수산에 있는 나를 찾아오라.》

말을 마친 소년이 흰 구름을 향하여 손에 쥐였던 흰깃부채를 던지니 그 부채가 공중높이 올라갔다가 백학이 되여 내려오거늘 소년이 그 백학을 타고 표연히 사라져버렸다.

황운은 비로소 금수산선인인줄 알고 공중을 향하여 사례하고 주점에 다시 돌아왔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황운이 주점의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에게 한가지 물을게 있소.》

쉰댓살가량 나보이는 구레나룻의 주인이 황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뭣인지 물어보시우다.》

《계루왕의 부마에 대해서 뭘 좀 아는게 없소?》

주점의 주인이 눈을 쪼프리더니 머리를 끄덕거렸다.

《사람들이 쉬쉬거리는 소리가 저 동문에 무슨 글을 써붙이고는 공주랑 함께 청룡산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그리구 부마를 따라 선임금때의 대신들 여럿이 청룡산으로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수다.》

황운은 주점주인에게 사례하고 그길로 성밖을 나와 청룡산으로 말을 몰아갔다.

청룡산 깊은 골에서 황운은 심원공주와 함께 은거해있던 조명걸을 만날수 있었다.

조명걸과 황운은 서로 어깨를 와락 부둥켜안고 한참이나 놓을줄 몰랐다. 그 모습이 심원공주의 눈굽을 젖게 한다. 서로의 해후가 지난뒤 황운이 심원공주에게 태명산도사의 말을 전하고 금수산선인이 이르던 사연을 말하고나서 후- 하고 길게 한숨을 쉬였다.

《헌데 성상을 구원할 방도를 찾을수 없으니 어쩌면 좋겠소. 금수산선인은 공주랑랑의 도움이 없으면 성상을 구원할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말뜻이 무엇인지…》

조명걸도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데 옆에서 말없이 듣고있던 심원공주가 나직이 말을 떼였다.

《이는 대내상의 변심없는 충의지심에 하늘이 감동하시고 선임금의 령혼이 도우심이오이다. 첩의 생각엔…》

《무슨 방책이 있소이까?!》

황운과 조명걸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말이였다.

《방책은 딴게 아니구 어린 성상과 우리 아들 미영이를 바꾸는 길뿐이옵니다. 아시다싶이 우리 아들 미영은 성상과 같은 해의 한날한시에 태여났을뿐아니라 선임금의 꿈에 황룡이 떨어지고 청의동자가 뒤따라왔다고 했소이다. 아마 그앤 날 때부터 이미 그런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는지…

첩은 그래서 미영을 데리고 별궁에 들어갔다가 그애대신 성상을 데리고 나오려고 하오이다.

지금은 추운 겨울이니 털솜옷을 미영에게 푹 뒤집어씌우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엔 그 솜옷을 성상에게 입히면 아마 수비군사들도 속지 않을수 없나이다.

이 모든것은 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것이고 선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아니겠소이까.》

행여나 했던 황운은 심원공주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몸을 뒤로 제치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너무도 뜻밖의 말이라 어안이 벙벙해서 한동안 조명걸과 공주의 얼굴만 번갈아보며 황운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조명걸도 공주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닫고 말없이 그저 두눈만 슴벅거렸다.

그러는 그 두사람을 일별하는 공주의 두눈에 눈물이 가랑가랑 맺혀있었다.

《어찌겠소이까. 그 방법외에는 성상을 구원할 다른 방도가 없지 않소이까. 그러니 대내상과 가군은 너무 상심마시고 첩의 결심을 지지해주사이다.》

황운은 공주의 결심에 탄복을 금치 못하며 그자리에 덥석 꿇어앉으며 머리를 숙였다.

《공주랑랑의 그 충의지심은 동서고금에 있어보지 못한 일이오이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그러지 마소이다. 이 역시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되오이다.》

황운은 공주의 일이 순조롭게 되기만을 속으로 빌었을뿐 다른 위안의 말을 찾지 못하였다.

다음날 공주는 미영에게 곰털가죽솜옷에 토끼털모자를 씌우고 교자에 올라 별궁으로 떠났다.

교자가 별궁에 이르니 말로 듣던것보다 경계가 더 삼엄하고 어마어마하였다. 억대우같은 갑병들이 창과 칼을 들고 두겹세겹으로 빙 에워싼 별궁으로 곧바로 다가간 공주는 문을 열라고 분부하였다.

수비군교가 공주임을 알아보고 갑병 하나에게 뭐라고 수군거리자 그 갑병이 부리나케 뛰여가더니 인차 별궁을 총괄하고있는 엄진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술을 퍼마시다가 나왔는지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페하의 조서가 없으면 문을 열수 없고 또 그 누구라고 해도 다른 사람은 출입할수 없나이다.》

공주가 대뜸 성을 내며 꾸짖었다.

《네가 이곳을 지킴은 외인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서다. 난 계루왕의 공주이니 선임금의 조카이자 지금 〈성상〉의 조카나 같은데 그 무슨 황당한 소리냐!

내 로령의 황태후때문에 왔거늘 잠간 뵈옵고 가려 하는데 네 굳이 막으려 하니 이제 〈성상〉께 상소하면 네 목숨이 무사할것 같으냐!》

공주의 추궁에 엄진의 낯색이 단박에 질렸다.

《공주랑랑의 청이 그리도 간절하시니 할수 없소만 공주랑랑께서 딴 사람은 물리고 혼자만 들어가소서.》

《황태후가 우리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셨는데 아이를 돌보는 궁녀 하나는 데리고 들어가야겠다.》

엄진이 두눈만 껌벅거리며 아무 말을 못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공주가 돌아서서 궁녀들에게 교자에 그냥 머물러있으라고 분부하고는 미영의 손을 잡은 궁녀 하나를 달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태후가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황태후가 추운 겨울날에 어린 임금을 데리고 지옥같은 방에 짚자리를 펴고 적막하게 누워있다가 공주를 보고는 대성통곡하여마지 않았다.

공주가 절을 하며 문안하고 서로 손을 마주잡고 함께 눈물을 흘리다가 곁에 가만히 앉으며 귀속말로 미영을 데리고 들어온 사연을 아뢰였다.

황태후가 두눈을 슴벅이며 감동을 금치 못해한다.

《대내상과 공주의 충의지심은 실로 하늘에 사무치도다. 제 자식을 사지판에 넣고 성상을 빼내려 하다니…

세상에 이런 충정이 언제 있었던고! 선임금의 령혼이 어찌 감동치 않으리오.》

공주가 다급히 속삭였다.

《경황이 없으니 장황한 말씀을 할새 없나이다.》

공주가 데리고 들어온 궁녀에게서 준비해가지고온 음식을 황태후에게 드리고 술에 꿀을 많이 타서 미영을 먹이니 미영이 그 꿀물을 받아마시고 인차 취해 새근거리며 잠들었다.

미영을 황태후곁에 눕히고 임금의 옷을 벗겨 미영을 입히고 미영의 옷을 벗겨 임금에게 입혀 서로 바꾸는데 황태후가 얼른 선임금의 유서를 금낭(비단주머니)에 넣어 어린 임금의 옷섶에 넣어주고 제발 일이 무사하기를 속으로 빌며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천지신명은 어여삐 여기고 후일에 우리 모자 상봉할 때에 이 금낭을 표적으로 삼게 해주소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목놓아 통곡하는 태후를 만류하며 공주가 목메인 소리로 말하였다.

《태후마마는 천운이 다시 돌아오면 모자가 서로 만날 날이 있겠지만 자식을 사지에 두고 떠나가는 신첩의 마음은 찢어지나이다. 헌데 이렇게 목놓아 우시면 이 일이 루설되고 대사가 그릇될것이니 태후마마는 애써 자제하시고 후일을 기약하여 부디 옥체만강하소서.》

태후가 그 말에 눈물을 거두고 공주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내 주책없이 처신하여 도리여 공주의 마음을 아프게 했도다. 아무쪼록 별고가 없도록 하라.》

이때 엄진이 방문을 열고 공주일행에게 빨리 돌아갈것을 독촉하였다.

공주가 하직인사를 하는데 숙질간의 리별은 그런다쳐도 사지판에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가는 어미된 심정을 무엇이라 하리오. 공주의 뺨으로 비오듯 눈물이 좔좔 흘러내렸다.

오, 천지가 아득하고 해와 달은 빛을 잃었도다!

공주가 이윽고 마음을 도사려먹고 어린 임금에게 곰털가죽솜옷올 입히고 토끼털모자를 깊숙이 씌워주었다. 그리고는 바람이 새지 않도록 꽁꽁 여민 다음 궁녀를 불러 함께 옥문밖으로 나섰다.

미영이가 입었던 까만 곰털가죽솜옷을 입고 토끼털모자를 푹 내리쓰고 눈만 내놓은채 궁녀의 손을 잡고 나오는 어린 임금을 수비군사들이 어찌 가려볼수 있으리오.

교자앞에 이르러 임금을 얼른 태운 공주가 준비해온 술과 고기안주를 수비하는 갑병들에게 듬뿍 안겨주고나서 엄진을 돌아보며 엄하게 당부하였다.

《황태후와 〈태자〉가 계신 곳의 수비를 강화하고 궁핍하지 않도록 하며 불의의 변고가 없도록 하라.》

공주의 엄한 분부에 엄진이 예- 예- 하며 머리를 갑삭거렸다.

공주가 어린 임금을 교자에 태우고 돌아간 다음 엄진이 옥으로 들어와 황태후의 방문을 열어보니 황태후와 《태자》가 이전과 다름없이 벼짚자리에 있는지라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마음을 푹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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