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12 회


황운은 태명산스승을 찾아가고
설봉선은 북해에 피신하다


이때 황성안에는 곽종이라는 사내가 있었는데 그는 벼슬에는 뜻이 없고 격술과 검술, 활쏘기와 말타기 등에 취미를 붙이고 하루종일 무술훈련으로 날을 보내는 사람이였다. 나라안에서 무술이 뛰여난 사람이라면 그가 어디에 있건 도시락을 싸들고 찾아가 겨루어보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곽종은 언제인가 황운을 찾아와 무술을 겨룬적이 있었는데 황운의 뛰여난 무술에 탄복하여 대뜸 무릎을 꿇고 일생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말하였다. 불쌍한 사람들은 도와주고 무뢰배들은 징벌하는 그를 가리켜 황성사람들은 《곽협객》이라고 정을 담아 불렀다.

이 곽종이 황성에 일어난 재변을 보고 분기를 참지 못하여 삼척검을 들고 단신으로 전왕의 진중에 뛰여들었다. 앞에 막아나선 전왕의 호위군사 대여섯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곽종이 검으로 전왕을 겨누며 꾸짖었다.

《무도하기 그지없는 전왕은 듣거라!

네 선임금의 동생으로 지금 성상이 어리니 마땅히 충성다해 받듦이 옳거늘 어이하여 선임금의 성덕과 대내상의 은혜를 배반하고 대역부도죄를 행하여 황위를 찬탈하려 하느뇨!

내 네 머리를 베여 천하 사람들을 징계하리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곽종이 칼을 빼들고 전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말을 탄 전왕과의 거리가 두마장길이다. 전왕이 당황하여 뒤걸음쳤다. 아쉽게도 곽종의 칼이 전왕의 몸에 미치지 못하고 그 말을 내찔러 말이 그자리에 거꾸러지고 전왕은 땅바닥에 나딩굴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엄평이 달려오며 철현궁에 살을 메워 곽종을 향해 쏘았다. 오직 전왕을 목표로 돌진하던 곽종이라 날아오는 엄평의 화살을 미처 피하지 못하였다. 땅에 나딩구는 전왕에게로 몸을 날리려던 곽종이 그만에야 그 화살에 정통으로 배를 꿰질렀다.

《윽-》

곽종은 화살이 박힌 배를 그러안았다. 엄평이 다시 날린 화살이 이번에는 곽종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련이어 화살을 날린 엄평이 말을 몰아가면서 비칠거리는 곽종의 가슴팍에 칼을 휘둘렀다.

황성의 백성들이 사랑하던 의협남아 곽종은 끝내 그자리에 피흘리며 쓰러지고말았다.

엄평이 얼른 내려와 몽당에 나딩구는 전왕을 부축하여 다른 말에 태웠다.

이어 엄평은 군사를 휘동하여 대궐로 쳐들어갔다. 수백명의 수비군사밖에 없었던 황성이였다. 수비군사들은 성문을 지키다가 이미 다 죽었고 몇명밖에 안되는 대궐호위군사들과 신하들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말그대로 무인지경을 지나듯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대궐에 곧추 당도하였다. 비록 조명걸이 시간을 얻었다고 하지만 너무도 창졸간에 적에게 제압당하다나니 계루왕은 미처 태후와 나어린 임금을 피신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대궐로 쳐들어간 엄평은 황태후와 나어린 임금, 계루왕을 잡아 바닥에 앉혀놓고 옥새를 거두어 전왕의 몸에 채우고 태극전에 나아가 옥좌에 앉혀놓았다. 그리고 엄평은 부하들을 시켜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계루왕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분격에 차서 부르짖었다.

《이 무슨 짓인고? 선임금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성상을 충심으로 받들어야 할 신하들이 청청 푸른 하늘이 내려다보는 속에서 감히 이런 무도한짓을 할수 있느냐?!

하늘이 내려다본다! 천벌이 내릴거다!》

계루왕이 울면서 꾸짖었으나 엄평은 들은척도 안하고 태후와 어린 임금을 별궁에 가두고 계루왕은 문적원에 가두게 한 다음 황운의 가족은 모조리 잡아 옥에 가두고 선임금이 그의 집앞에 세워주었던 효자비를 뽑아버렸다.

전왕은 자기의 왕비를 황후로 봉하고 패당들의 축하를 받으며 년호를 고치고 새로 정하였다.

황위에 오른 전왕은 발해의 벼슬을 뜯어고쳐 엄평에게 승상이라는 직첩을 내리고 그에게 명령하여 곽종의 시신을 수레에 찢어 대역죄인이라 몰아붙여 황성장안을 돌게 하였다. 그 수레가 지나가니 성안의 백성들이 전왕의 무도함과 엄평의 악행에 누구라 할것없이 치를 떨었고 선임금과 어린 임금을 생각하며 그리고 황대내상과 숙록후를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한편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한 대내상 황운이 고려후국의 도성인 국내성에 당도하자 고려후국의 왕이 직접 성밖에 나와 맞아주었다.

고려후국의 왕과 장수들을 통해 형세를 상세히 파악한 황운은 우시춘 등 장수들과 함께 적들이 진을 친 바다가로 나아갔다. 적진앞에 대오를 싸움대형으로 벌려세운 황운은 싸우기에 앞서 적진에 격서를 먼저 보내였다.

《강포하고 흉악한 거란추장은 들으라!

우리 발해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천자의 나라이고 고려후국으로 말하면 고구려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서 우리 대발해의 신성한 령토이거늘 고려후국을 침범한건 다름아닌 우리 발해를 친것이나 다름없도다!

하늘의 뜻을 거슬리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우리의 강토를 감히 침노한 너의 죄는 하늘에 사무치는 대죄이고 천추에 용서 못할 악행이거늘 단군천제와 동명성왕의 자손들인 우리 발해의 정예군은 너희 침략자들을 가차없이 징벌하리라!》

간담을 서늘케 하는 격서를 받아본 거란추장의 털부숭이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오래전부터 발해국의 대내상 황운이 지모와 용맹이 신비롭다는것을 들어온 거란추장인지라 그 순간 괜히 욕심사납게 발해국지경을 침범했다는 후회가 들었으나 이미 엎지른 물사발이였다.

《대내상 황운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왔으니 우린 이젠 다 망했구나.》

거란추장이 부하장수들을 돌아보며 한탄하는데 벌써 황운이 대군을 휘동하여 풍우마냥 짓쳐오고있는것이 아닌가. 비록 거란추장에게 십만군사가 있다지만 어찌 대내상 황운의 지모와 용맹을 당하며 정의를 위해 목숨도 불사한 의로운 발해군사를 막으리오.

량켠의 선봉장들이 뛰쳐나갔다. 우시춘의 칼에 적선봉장의 목이 나떨어졌다.

그 기세로 발해군사들이 산에서 바위가 굴러내리듯 무섭게 엄습하니 거란군의 진중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적군사들이 우리에서 뛰쳐나온 도야지마냥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바다가로 내빼기 시작하였다. 그뒤로 발해군사들이 황운의 지휘에 따라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적들을 삼대베듯 사정없이 족쳤다. 바다가에는 침략자들의 주검으로 한벌 쭉 뒤덮였다. 살아남은 적군이 배에 올라 황황히 바다로 내빼는 모습이 그야말로 꼴불견이였다.

배에 올라 꼬리를 사리는 적들을 쏘아보며 장수들과 군사들이 격분과 아쉬움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당장 배를 타고 저놈들을 쫓아가 료정내소이다!》

저저마다 팔뚝을 걷어올리며 부르짖는 장수들과 군사들을 둘러보며 황운은 령을 내렸다.

《하루동안에 싸움배 오백척을 준비하라!》

첫 싸움에서 패한 거란침략군이 그냥 물러가지 않을것은 불보듯 뻔하였다. 미리 싸움배를 준비했다가 다음 싸움시에 적들을 바다에 내몬 다음 싸움배로 적을 소탕할 계책이였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침략의 괴수인 거란추장의 항복을 받아 다시는 발해지경을 엿보지 못하게 할 결심이였다.

다음날 황운이 장수들을 거느리고 싸움배준비정형을 돌아보며 지시를 주고있는데 문득 황성에서 사자가 당도하여 황태후밀서를 전하는것이였다.

황운이 놀라 급히 떼여보니 《황성에 큰 재변이 났으니 급히 돌아와 구원하라.》는 내용이였다.

(이는 엄평이 황성에 군사가 없는 틈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것이 틀림없도다.)

밀서에는 누구에 의해 재변이 일어났으며 상황이 어떻게 번져졌는가는 밝히지 않았으나 황운의 뇌리에는 순간적으로 엄평의 모습이 떠올랐다. 후회가 들물처럼 엄습하였다. 현덕부경내를 지날 때 별스레 요란하게 환대해주던 전왕의 둥글둥글한 얼굴과 황해공주의 혼례식때 뱁새눈을 굴리던 엄평의 오만방자한 얼굴이 교차되여 눈앞에 얼른거렸다. 마음속으로 우려하던 그 엄평이 분명 전왕을 추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판단한 황운은 우시춘을 불러 의논하였다.

《아무래도 내가 이길로 황성으로 올라가야 할것 같소. 그러니 그대는 래일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군을 소멸하고 바다로 도망치는 거란추장을 무조건 사로잡아야 하겠소. 거란추장을 잡아야 우리 지경을 침범한 내막을 까밝힐수 있소. 나는 이제 곧바로 황성으로 가리다.》

기어이 임무를 수행할 맹약을 하며 우시춘이 필마단신으로 황성으로 떠나려는 황운에게 십여명의 호위군사를 붙여주었다.

십여명의 군사들과 함께 황성으로 줄달음쳐오던 황운이 닷새째되는 날에 룡원부의 목주고을에 들어서는데 황성에서 파했다는 사자가 면식이 있는 목주자사를 앞세우고 그의 앞을 막아나섰다.

《무슨 일이냐?》

《대내상어른에게 내리는 황태후의 조서를 가지고 사자가 당도했소이다.》

목주자사가 자라목이 되여 나서며 하는 말이였다. 그뒤로 하관이 빠른 사자가 나서며 황태후의 조서와 사약을 내밀었다. 무슨 감투끈인지 도저히 알길 없어 의아함을 금치 못하며 대내상 황운은 조서를 뜯어보았다.

헌데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조서의 글은 하늘이 무너졌다는것과 같은 어망처망한 소리였다.

《대내상 황운은 이 조서를 받아보라!

숙록후 설봉선이 말갈군에게 패하여 사로잡혀 투항하였도다. 대내상은 다름아닌 설씨의 가부(남편)인지라 어찌 국법이 용서하리오.

다만 공로가 많고 선임금의 유언을 받들어 섭정대신이 되였던 까닭에 몸을 들어내지 못하고 사약을 내리니 즉시 조서를 시행할지로다.》

고양이대가리에 뿔이 났다고 해도 이처럼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일이 어디 있으랴. 허나 조서에는 황태후의 인장과 임금의 옥새날인이 엄연히 남아있었다. 황운의 호위군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황운의 귀에 들려왔다.

대내상 황운은 약을 앞에 놓고 북쪽을 향해 네번 절을 한 다음 망연자실하여 생각해보았다.

(봉선이가 싸움에서 패했다는게 이상하기 그지없거니와 어찌 그가 살기를 탐하여 말갈에게 투항한단 말인가. 내 이제 죽지 않으면 어명을 거역하는것이요, 설사 죽으면 선임금의 유언을 저버림이니 어린 황상을 뉘가 능히 보호하며 종묘사직을 어찌 보존하리오.)

이때 불쑥 난데없이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운이 머리를 쳐들어보니 청조 한마리가 날아와 짹짹거리며 머리우를 감돌면서 세번 나래를 치고 가버리는것이였다.

그 순간 황운의 뇌리에 섬광이 번뜻 일었다.

(가만, 혹시 이것이 무슨 예언이 아닐가?

옛날에 어느 성인은 옥에 갇혀있을 때 청조가 전각을 세번 치는것을 보고 불현듯 진실과 허위를 가려보았다더니 오늘 저 청조가 그처럼 나에게 뭣인가 예언하는것이 아닐가.)

얼핏 앞에 서있는 사자의 낯색을 살펴보았다. 눈앞에 다 잡아놓은 참새를 노리는 고양이의 미묘한 웃음이 움푹 패인 두눈에 번뜩거리고있었다.

(이 모든것이 만약 엄평의 간계라면?)

머리칼이 쭈삣하고 등골이 선뜩해졌다. 진실로 엄평의 간계라면 황성은 이미 반란적의 수중에 장악되여있다는것을 말해준다. 나어린 임금의 애처로운 모습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황운은 더 생각할새없이 호위군사들에게 눈짓하며 앞에 놓인 사약그릇을 손으로 탁 쳐갈기고 벼락같이 참룡검을 뽑아들었다. 때를 같이하여 호위군사들이 사자일행을 옴짝 못하도록 제압하였다.

《너 이놈! 내 이미 역적 엄평의 죄행을 다 알고있으니 사실대로 토설하면 목숨을 살려주겠지만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할 때엔 가차없이 용서치 않을테다!》

도적질하고 나오다가 주인에게 들킨 놈처럼 그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사자가 올빼미눈을 허둥거리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더니 무릎꿇고 살려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기 시작하였다.

《그래, 사실대로 말할테냐?》

《사실대로 다 아뢰이겠나이다. 사실은 전왕이 군사를 일으켜 황성을 점거하고 임금이 되고 엄평은 승상이 되였소이다. 황태후와 임금은 다 감금되고 엄승상이 황태후의 거짓조서를 꾸며 이 사약을 내려보냈소이다. 소인은 그저 하라는대로만 했을뿐이오이다.》

사자의 입에서 튀여나온 그 소식에 대내상 황운은 경악함과 분노를 금할수 없었다.

끝내 황성이 반란적의 손에 장악되고 반적의 괴수가 언감생심 옥좌를 차지했다니 내 이제 무슨 낯으로 선임금을 뵈우랴. 참룡검을 틀어쥔 황운의 손이 세차게 떨렸다.

《넌 대체 뭘하던 놈이냐? 그리고 어떻게 되여 엄평이 란을 일으켰느냐?》

《소인은 엄평의 부친인 안변부절도사 엄승의 부장 장복이라 하옵니다. 선임금이 돌아가신 후 황대내상이 섭정대신이 된 일을 두고 가슴앓이하던 전왕과 엄평이 대내상과 어린 임금을 밀어내고 옥좌를 차지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나이다.

엄평은 만일 전왕이 임금이 되면 거란과 흑수말갈에 남쪽과 북방의 고을 각각 열개를 떼주마 하고 약조하고 그들더러 발해국을 침범하라고 부추겼다 하오이다. 그건 거란과 말갈이 침범하면 두 장군이 출전할것이며 또 두 장군이 다 출전하면 황성은 텅 비게 될것이고 그러면 그 기회에 손쉽게 황성을 타고앉아 옥좌를 빼앗을거라고 타산했기때문입니다.

이 모든 계책은 엄평이 꾸몄다고 하옵니다.》

황운은 당장에 중언부언하는 장복의 목을 베고싶었으나 그까짓놈 하나를 없애치운다고 해서 황성의 재변을 가셔낼수 없고 또 그가 솔직히 털어놓은 이상 인명을 해치우고싶지 않았다. 제 가고픈대로 가라고 내치니 장복이 믿어지지 않는듯 올빼미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어서 네 갈데로 가라.》

장복이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사례하였다.

허둥거리며 저멀리 사라져가는 장복일행을 바라보는 황운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당장이라도 황성으로 올라가 전왕과 엄평을 죽여버리고 어린 임금을 구원하고싶었다. 허나 수하에 있는 호위군사 열명을 가지고 수만군사를 무슨 수로 당할수 있으랴.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그대로 진퇴량난이였다. 진권이 일으켰던 반란의 여파가 채 가라앉기 전에 또다시 이런 참혹한 반란이 일어났으니 장차 나라의 운명은 어찌된단 말인가. 권력과 치부에 환장이 되여 신하의 도리도 인간의 의리와 량심마저 헌신짝마냥 줴버리고 외세와 야합한 역적도당들에 대한 증오와 울분이 동시에 가슴속에 치밀었다.

《에익!》

황운은 분노와 울분을 참을수 없어 참룡검으로 옆에 선 아름드리나무를 세차게 내리찍었다. 해묵은 고목이 우수수 떨었다.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남방에서 거란군과 싸우고있는 자기 부대를 찾아가는수밖에 없었다.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던 황운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멈춰섰다.

만약 자기가 남방의 군사를 끌고 황성으로 진격한다면 그 기회에 거란군이 고려후국을 타고앉을수 있다는 생각에, 외세에게 나라가 먹히울수 있다는 위구심에 황운은 심장이 얼어드는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남방의 군사를 찾아가는것은 도리여 도적에게 문을 열어놓는것과 같이 어리석은짓이고 외세에게 신성한 령토를 내맡기는것과 같은 우둔한짓이라는 생각이 온몸을 엄습하였다.

지금쯤이면 우시춘이 모름지기 달아나는 거란군을 쫓아 바다에서 싸우고있는지도 모른다. 황운은 우시춘을 자신처럼 믿고있었다. 만약 그가 바다에서 싸운다면 이제 찾아간다 해도 만날수 없을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필경 엄평이 자기의 소식을 들으면 온 나라에 수배령을 내릴것은 불보듯 뻔하였다.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그림자처럼 자기의 뒤를 따를것이라는것을 황운은 의심치 않았다.

황운의 입에서 저도모르게 꺼지는듯 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귀전을 때렸다.

《십년후에 시운이 변할것이니 다시 돌아오라.》

누구의 말이던가. 그렇다. 그 말은 황성으로 떠날 때 태명산 도사가 그에게 한 말이였다.

그러니 스승은 벌써 그때에 오늘을 내다보셨구나. 아, 스승의 선견지명이여!

대내상 황운은 따라온 호위군사들과 함께 말머리를 태명산으로 돌리고 질풍같이 말을 몰아갔다.

《준마야, 어서 스승을 찾아가 방책을 물어보자. 그 길만이 어린 성상과 나라를 구원하는 길이거늘 어서 빨리 달려주렴.》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천리준마가 네굽을 안고 비호같이 달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대군을 거느리고 안변부 동강에 이른 숙록후 설봉선은 진을 치고 척후대를 파하여 적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척후대가 돌아와 하는 말이 말갈의 군사가 기세등등한데 병력수는 오만가량 된다고 하는것이였다.

《이 말갈이 아직도 이리의 야수성을 버리지 않고 감히 반란을 일으켜 발해를 침노하다니?!》

대부분 군사들은 뒤에 진을 치게 하고난 숙록후는 철기 일만만 거느리고 적진중을 향해 나아갔다.

륙화진을 치고 대장기를 세운 다음 징, 북을 울리며 숙록후가 싸움을 독촉하니 눈이 치째진 말갈추장이 호언장담하며 맞받아나왔다.

숙록후가 새별눈으로 추장을 쏘아보며 되알지게 소리쳤다.

《네 아무리 흉악한 야만인이라고 한들 한갖 강포함만 믿고 감히 반란을 일으키고 우리 발해를 침노하였거늘 어찌 내 손에서 도망할소냐.

내 이제 한번의 북소리에 네 머리를 벨것이니 살고싶거든 무고한 군사를 죽이지 말고 빨리 나와 항복하라!》

말갈추장이 대노하여 창을 들고나오려는데 추장의 등뒤에서 일원 대장이 창을 비껴들고 말을 내몰며 큰소리로 고함쳤다.

《나는 말갈군의 대장 번달이다. 나와 맞설자 어서 나오라!》

아군의 진중에서 한 장수가 고리눈을 부릅뜨고 달려나오니 그는 다름아닌 홍윤이라 서로 싸워 수십합을 어울렸으나 승부가 결판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말갈진중에서 한 장수 달려나와 번달을 돕거늘 홍윤이 좌충우돌하며 용맹을 더욱 과시한다. 아군진중에서 서하수가 어깨를 들썩이며 쏜살같이 달려나왔다. 홍윤의 검이 하늘에서 춤추며 섬광을 일으키더니 번달의 목이 말발굽밑에 나딩굴고 이어 서하수의 창에 적의 다른 장수가 말에서 떨어지며 골통에서 검붉은 피를 쏟았다.

아군진중에서 와- 와- 함성소리 터져나오고 말갈진중이 움씰움씰 동요한다.

이때를 타서 숙록후가 룡린검을 높이 쳐들자 둥둥 북소리 높아지고 아군의 장병들이 물밀듯이 쳐들어갔다. 순식간에 말갈군사가 썩은 삭정이 꺾어지듯 목이 떨어져나가고 죽는자가 이루 다 말할수 없었다. 검은 피가 강이 되여 흘렀다.

말갈추장이 대참패를 당하고 물러나 부하장수들을 둘러보며 개탄하였다.

《설연의 군사가 용맹하기 이를데 없으니 차라리 회군함만 못하도다!》

그 말에 말갈군의 장수들이 팔뚝을 걷어올리며 윽윽거렸다.

《우리가 전왕과 엄평의 말을 믿고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렇게 패하고 돌아간다면 어찌 분통하지 않겠소이까. 이왕지사 군사를 일으켰을바엔 끝장을 보소이다. 발해를 무너뜨리고 우리가 주인이 되자는것은 말갈족의 오랜 숙망이 아니오이까.

군사를 세개로 나누어주면 설연을 기습하여 사로잡아 설분을 풀겠소이다.》

말갈추장이 그 말을 쫓아 군사를 세개로 나누어 부하장수들에게 주며 설연을 사로잡을 계책을 꾸미였다.

첫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온 홍윤과 서하수를 치하한 숙록후는 그 기세로 말갈군의 기를 완전히 꺾어버리리라 속다짐하였다.

이튿날 말갈군의 세 부대가 나뉘여 짓쳐나오는것을 본 홍윤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싸우러나갈제 숙록후가 만류하더니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오른손에 철퇴를 들고 룡린검은 허리에 찌르고 말갈추장을 향해 맨 앞장에서 뛰쳐나갔다. 그뒤로 홍윤과 서하수 등 장수들이 뒤따라나섰다.

숙록후가 앞에 막아나서는 적장들을 단칼에 베이고 곧바로 추장을 향해 달려나가니 당황한 속에 추장이 창을 들고 맞받아나왔다. 두 적수가 맞붙어 팔십여합을 싸웠으나 승부가 없더니 차츰 추장이 피동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숙록후가 오른손의 철퇴를 들어 추장의 투구를 치니 추장이 놀라서 몸을 피한다. 숙록후가 다시 철퇴를 들어 추장이 탄 말의 다리를 치니 말이 다리를 꺾으며 주저앉았다. 그 서슬에 추장이 말에서 떨어져 땅에서 딩굴었다.

뒤따르던 홍윤이 추장을 사로잡으려는것을 숙록후가 제지시키며 소리쳤다.

《자신이 있으면 다시 준비해가지고와서 붙어보자!》

말갈추장이 자기 진으로 돌아가서 다시 싸울 준비를 해가지고 맞받아나왔다. 서른합만에 다시 땅에 나떨어졌다. 숙록후가 다시 기회를 주어 돌려보내니 말갈추장이 또다시 준비해가지고 나왔다. 허나 이번에도 서른합만에 말과 함께 땅에 떨어졌다.

그렇게 무려 아흡번 싸웠으나 다 사로잡힐 처지에 놓이니 말갈추장이 비로소 숙록후를 당해내지 못함을 알고 항복서를 올리며 죄를 청하였다.

《장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이로소이다. 사실은 우리 흑수말갈은 대발해국의 한부분이고 오래전부터 발해국을 섬겨왔지만 감히 침범할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소이다.

헌데 전왕이 부마 엄평을 보내여 반란을 일으키면 열개의 고을을 떼주겠다고 해서 말갈이 발해국을 침범하는 죄를 지었나이다. 엄평은 우리 말갈뿐아니라 거란과도 무슨 약조를 했소이다. 만일에 남쪽에서 거란이 침범하고 북쪽에서 우리 말갈이 반란을 일으키면 대내상과 장군께서 출전할것이니 그 기회를 타서 황성을 가로타고 옥좌를 차지할 심산이였던것 같소이다. 우리 말갈이 그만 전왕과 엄평의 간계에 넘어가 이런 대역죄를 지었으나 사실은 억하심정으로 발해국을 반대하여 란을 일으키고 침노한것은 아니오니 제발 용서해주사이다.》

항복서를 받아든 숙록후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는 흉계였다.

《너의 그 말이 진정이라 믿기에 놓아보내니 돌아가면 뜻을 고쳐 발해를 지성으로 섬기며 조공을 페하지 말라.》

말갈추장이 숙록후의 도량에 감지덕지해하며 연신 칭송하고 남은 군사를 끌고 흑수부로 돌아갔다.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는 말갈추장을 바라보는 숙록후의 눈가에 침통한 빛이 어렸다.

가슴이 떨리고 분노가 치솟았다. 언감생심 옥좌를 노리고 암암리에 벌어진 무서운 흉계의 연막이 서서히 벗겨지면서 그 실체가 눈앞에 방불히 안겨왔다. 한시바삐 군사를 이끌고 전왕이 도사리고있는 현덕부의 현주성으로 쳐들어가 가증스러운 역적들을 소탕하고 나라와 사직을 구할 일념으로 가슴을 들먹였다.

다음날 전군에 회군령을 내리고 출발하려는데 불쑥 조정에서 사자가 당도하였다는 기별이 왔다.

숙록후가 웬일인가 해서 긴장한 낯색을 짓고 장막밖으로 나가니 어느새 황태후의 조서를 가진 사자일행이 다급히 들어서는것이였다. 감때사납게 생긴 사자의 뒤에는 커다란 철망을 실은 수레가 잇닿고 스물남짓한 금부라졸들이 무슨 일을 칠듯이 푸르딩딩해서 따라왔다.

사자가 말에서 내려와 숙록후앞에 이르러 황태후의 조서를 내밀었다.

금부라졸들이 어느새 숙록후의 주위를 빙 에워쌌다. 홍윤과 장수들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금부라졸들의 뒤에 바싹 붙어섰다.

조서를 펼쳐보는 숙록후의 낯색이 하얗게 질렸다.

《대내상 황운이 거란군에 잡혀 투항하고 거란을 섬기고있노라. 막중하기 이를데 없는 가부의 죄를 나라법으로 다스리지 않을수 없거늘 설봉선은 빨리 올라와 형을 받을지로다.》

홍윤이 사색이 되여 다가서는데 금부라졸들이 막아섰다. 홍윤의 낯색이 시퍼래지더니 그의 손이 칼집에 가닿았다. 당장이라도 무슨 변이 날 판이였다. 그 소요를 낌새챈 숙록후가 눈짓으로 홍윤을 만류하였다.

이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는 숙록후의 비통한 목소리가 진중을 흔들었다.

《대내상이 어찌 선임금의 유지를 배반하고 외세에게 투항할수 있단 말인가.》

부하장수들이 너무도 엄청난 그 소리에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흑수말갈을 격멸한 승전의 기쁨으로 들먹이던 진중에 삽시에 무거운 침묵이 유령마냥 배회하였다. 사자가 그 침묵이 어떻게 번져질지 가늠할수 없어 숙록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서 빨리 조서를 실행함이 옳은 처사인듯 하오이다.》

숙록후는 백정질을 밥먹듯 했을 사자의 감때사나운 얼굴에서 내비치는 심사를 제꺽 알아차렸다. 분명 무슨 쪼간이 있는것이 틀림없었다.

(이는 엄평이 흉계를 꾸며 우리 부부를 죽이고저 함이로다. 내가 현덕부로 곧장 회군하여 엄평을 잡아 태후께 고하고 옥과 돌을 가리자 했는데 이미 황태후의 조서를 받았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만일에 현덕부로 군사를 끌고가면 조서를 거역한 역적루명을 면치 못하니 지금은 철망에 들어갔다가 황성에 올라가 형세를 보아 장차 도모하리라.)

숙록후는 사자의 우로 치째진 눈을 조소어린 눈길로 일별하며 철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원쑤를 징벌하고 승전을 가져온 저들의 장수가 철망에 갇히우는 모습을 눈을 펀히 뜨고 구경만 하는 홍윤과 서하수 등 장수들과 군사들이 슬픔과 절통감에 몸부림치며 눈물을 뿌렸다.

숙록후가 들어간 철망에 큼직한 자물쇠를 철컥- 채운 금부의 라졸들이 철망을 실은 수레를 어마어마하게 빙 둘러싸고 황성으로 향하였다. 홍윤과 장수들이 그뒤를 따라서다가 그만에야 주저앉아 호랑이의 울음을 터뜨렸다.

철망에 갇힌 숙록후를 호송하던 사자일행은 나흘째 되는 날 밤 동평부의 몽주에서 하루밤을 묵었다.

사자일행의 대개가 객주집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혀꼬부라진 소리를 지르다가 개잠이 들었는지 즘즘하고 몇몇의 라졸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철망을 지키고있었다.

철망에 든 숙록후는 온밤 황운에 대한 생각으로 잠들수가 없어 망연자실하여 앉아있는데 추워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곁에서 술을 마시던 라졸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설장군을 황성에 붙잡아가서 어쩐다는건가?》

목소리가 석쉼한것을 보아 나이가 좀 든 라졸인듯싶었다. 그 말에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것두 모르우? 새로 임금이 된 전왕이 엄승상과 작당해서 없애자는거유. 황장군과 저 설장군만 없애면 천하는 저들것이라고 흰소리를 치지 않았수. 듣자니 황장군한테는 황태후의 조서라면서 사약을 내렸대유. 헌데 황장군이 미리 알아차리구 사자일행을 혼찌검 내주고는 몸을 피했다나요. 황장군한테 갔던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엄승상이 그자리에서 목을 쳤대유.》

《임잔 어떻게 그런걸 자상히 아나?》

《그 사자와 같이 갔던 군졸중에 내 친구가 하나 있수다. 그가 말하는데 황장군이 과시 큰 사람이랍데다. 사자일행을 하나도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보냈대유. 그런데 그 사자라는 장복이 본래 엄승상 부친의 부하였는데 일이 글러졌지만 혹시나 해서 제발로 황성으로 찾아가 사실대로 보고했다는지. 그 사람이 어려서부터 엄승상의 부친을 모셨으니 그 아들인 엄평에 대해 손금보듯 알고있는데 황성으로 돌아가면서두 엄승상이 아마 우릴 용서하지 않을거라구 념불외우듯 중얼거리드래유. 그러면서 내 친구랑 보고는 멀리 달아나라고 했다나. 그랬으니 내 친구랑 군졸들은 살아났지만 장복이라는 부장은 끝내 엄승상한테 목숨을 잃었수다.

참, 미련하기 그지없지. 제 죽을줄 모르구 제발로 찾아갔으니

《그런데 황태후와 어린 임금은 어떻게 되였나?》

《감금했다는가 보우.》

그 말을 들은 숙록후는 깜짝 놀라 그자리에 굳어졌다.

그러니 어린 임금과 황태후는 물론 자기네 집안도 반란적들의 수중에 잡혔다는 소리가 아닌가. 얼마후 수작질이 즘즘해졌다.

숙록후는 가만히 머리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먹물을 뿌린듯 사위는 어둑컴컴하고 삼라만상은 하늘에서 애처롭게 떨고있었으며 모닥불곁에는 술에 잔뜩 취한 라졸들이 털솜옷에 머리를 틀어박고있었다.

숙록후는 문득 자기가 이렇게 철망에 갇혀 황성으로 잡혀가는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짓인가를 몸서리치게 느꼈다. 필경 자기를 해치우려는 흉계가 분명하였다.

(여기서 순간도 어물거리지 말고 빠져나가야 한다.

엄평무리가 반란을 일으키고 황태후와 나어린 성상을 감금하고 황성을 타고앉은 이상 이대로 그냥 가면 영낙없이 나를 죽일것이다. 가군은 이미 반적들의 기미를 알아채고 몸을 피했다니 나도 저들이 잠든새에 탈출해야 한다.)

드디여 결심을 내린 숙록후는 기합술로 철망을 뜯고 나와 조심스레 수레에서 내려섰다. 여전히 철망을 지키던 금부라졸들은 나무에 기대거나 땅바닥에 쓰러져 정신없이 코를 골고있었다.

소리없이 그곳을 빠져나온 숙록후는 어디로 갈것인가 생각해보았다.

오던 길을 되돌아서 회군길에 있는 부대를 찾아갈가 생각하다가 머리를 저었다. 자기가 없어진것을 알면 엄평과 전왕이 가만있지 않을것이고 또 지금 자기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고있었다. 더우기는 전왕이 임금으로 둔갑하고 나라를 장악하고있는 형편에서 자기가 부대를 찾아간다면 무고한 장수들과 군사들이 피해를 볼수 있었다. 더구나 그의 몸에서는 새 생명이 태동하고있었다. 임신한 몸으로 부대를 찾아가야 오히려 짐이 될수 있었다. 당장은 어딘가에 피신하여 순산하는것이 난문제였다.

(아버님이 가계시던 북해로 가는것이 어떨가? 여기서 북해까지는 하루길이면 갈수 있지 않는가.)

숙록후는 지체없이 북해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은 거기로 피신했다가 후일을 도모함이 옳은 방책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몸에서는 새 생명이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발버둥질을 치고있었다.

숙록후가 가까스로 북해에 당도한것은 이틀이 지난 푸름푸름 날이 밝을무렵이였다. 어둠을 밀어내며 해가 둥근 공마냥 튀여올라왔다.

고을입구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맞다들린 초가집의 대문을 두드린 숙록후를 마흔댓쯤 나보이는 주인이 맞아주었다.

《뉘신지요?》

《소생은 저 호주에서 이곳에 유람하러온 사람입니다. 혹시 설시중을 아시는지요?》

《설시중이라니? 이곳에 정배오셨던 그 설어른을 두고 하시는 말이웨까.》

《예, 그 설시중이 소생의 숙부옵니다.》

《아, 그렇소이까. 그럼 설시중의 조카되시는분이라는 소리가 아니웨까.》

예상외로 주인이 반가와하며 숙록후를 방으로 안내하였다.

집안에 들어서니 서른살미만인 새파랗게 젊은 녀인이 동자질을 하다가 반색하였다. 두칸짜리 방안에는 일여덟살짜리 총각애가 이불안에서 딩굴다가 낯선 사내가 방안에 들어서자 발딱 일어서더니 머루알같은 두눈을 깜박거리며 숙록후를 올리훑고 내리훑는다. 주인이 방으로 따라들어서며 아이에게 한마디 하였다.

《이녀석,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인사는 안하고 빤히 쳐다만 보느냐.》

그 말에 아이가 허리를 굽석거리며 인사를 하고는 씽 하고 밖으로 뛰여나가는데 그 행동이 얼마나 신통하고 귀여운지 저절로 웃음이 나갔다.

《어서 앉으시오이다.》

젊은 안해가 얼른 들어와 이부자리를 거두며 하는 말이였다. 주인과 안해의 나이차이가 한 십오년은 될것 같았다. 숙록후의 속내를 알아챘는지 주인이 두서없이 이야기꾸레미를 풀기 시작하였다.

주인의 말을 통해 숙록후는 주인의 안해가 어느해인가 들이닥친 해일로 다섯살때에 부모를 다 잃은 천애고아이며 부모없는 처녀애를 주인의 부모들이 데려다 키웠다는것, 별스럽게 주인은 장가를 가자고 하면 일이 꼬여 서른살이 지나도록 로총각신세를 벗지 못했다는것, 데려다 키운 처녀애가 스무살이 되자 동네방네에서 선보자는 청이 들어왔는데 처녀가 딴 사람은 싫고 오직 자기와만 살겠다고 해서 나이 서른일곱에 그 처녀와 혼례를 치르었다는것, 둘사이에 생긴 애가 여덟살난 아들 은동이라는것 등을 알게 되였다.

어찌보면 눈물나면서도 인정미가 샘처럼 흐르는 감동적인 가정사였다.

며칠 안있어 주인내외는 숙록후가 남복을 한 녀인이고 임신부임을 알고는 따로 방 하나를 내여주고 자기 아들 은동이를 붙여주어 잔심부름을 들어주게 하였다.

설시중의 은혜로 삼년동안 부역을 면제당한 북해의 백성들이 아직도 설시중을 잊지 못해 사당을 짓고 그의 복을 빌고있었던지라 숙록후가 저희네 고을에 온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극진히 대해주었다.

안변부의 북쪽 맨 막바지에 위치하고있는 북해는 과연 궁벽한 고장이였다. 숙록후는 이후로 은동이를 데리고 류숙하면서 장차 어떻게 조처할것인가를 생각하였다. 북해백성들의 도움으로 먹고 입고 쓰는 걱정은 없었으나 황성소식을 알지 못하고 또 대내상의 거처도 모르니 자연히 그의 얼굴은 반쪽이 되였다. 더구나 오래지 않아 숙록후가 몸을 풀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숙록후는 여러가지 근심으로 밤잠을 들지 못하고있었으나 무정한 세월은 야속하게 흘러가고있었다.

숙록후를 잡으러 갔던 사자들이 빈손으로 돌아와 도망친 사유를 고하니 성이 독같이 오른 엄평은 대내상 황운을 잡으러 갔다가 실패한 장복을 목베듯이 다짜고짜로 사자의 목을 쳤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방을 곳곳에 내걸었다.

《조서를 거역하고 도망간 역적 황운과 설씨를 잡아바치면 만호후를 봉하리라.》

이어 전왕에게 자기 의견을 내비쳤다.

《황운과 설씨가 우리 계책을 눈치채고 도망하였으니 차후로 황태후와 태자를 엄하게 지키고 황가의 족속들은 관비로 처박고 그 재산을 적몰하소이다.》

전왕이 그 의견을 쫓아 엄평의 동생 엄진에게 친위병을 주어 보내면서 황태후와 태자가 갇혀있는 별궁주변을 철통같이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숙록후의 딸인 황순애는 현주성의 관비로 박아넣으라고 지시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황성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전왕은 이어 엄평을 승상으로부터 대승상으로 품계를 올려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각각 벼슬을 올려주고나서 요란한 태평연을 차렸다.

웃음소리, 노래소리 드높은 좌석에서 간의대부 왕영이 불쑥 아뢸것이 있다면서 나섰다.

《페하! 이 잔치를 태평연이라 하는데 신의 소견에는 태평연이 아니라 불평연이라 함이 옳을것 같소이다.》

좌중에 가벼운 소요가 일어났다. 그 소요를 누르며 대노한 전왕의 고함소리 울렸다.

《뭐, 어쩌구 어째?! 그런 불길한 말을 감히 뉘앞이라고 함부로 내뱉느냐!

네놈의 죄 죽어도 씻지 못할터이니 나라법을 적용하여 저 불측한 놈을 당장 참하고 그 목을 남문에 매달라!》

엄평이 노기가 충천한 전왕을 만류하며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왕영이 취중에 실언한가 본데 이제 페하가 새로 즉위하자마자 그 한마디 말때문에 사람을 죽이시면 페하께로 향하던 민심이 사라지고 원망이 많을것이니 부디 용서하여 두고 쓰소이다.》

허나 전왕은 요지부동이였다. 엄평이 알아듣게 여러번 간청해서야 고집이 소힘줄 같던 전왕은 할수 없는지 왕영을 파직시켜 정배를 보내였다.

왕영의 일이 있은 후 전왕이 조서를 내려 이전의 신하들을 불렀으나 시운이 변했음을 개탄하며 그 누구도 몸을 사리면서 벼슬을 거절하였다.

황성안에서 이런 일이 터진줄을 모르고 대내상 황운과 함께 남방으로 출전했던 대장군 우시춘은 대내상의 분부대로 고려후국에서 거란군을 사정없이 족쳐대고있었다.

황운이 황성으로 올라간 다음날싸움에서도 거란군에게 대참패를 안긴 우시춘이였다.

발해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받고 군사의 반수를 잃은 거란추장은 할수없이 싸움을 포기하고 부랴부랴 배를 타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오백척의 병선마다에 기계활을 싣고 군사를 나누어 학익진을 친 우시춘이 패주하는 침략군을 치려고 출전하는데 어느새 엄평이 그 사실을 내탐하고 전왕에게 보고하였다.

《황운의 부하장수인 우시춘이 지금 싸움배를 타고 거란군을 뒤쫓으려고 한다고 하오이다.

거란군사가 비록 싸움에서 황운에게 패했지만 대사를 성사시키는데서 큰 역할을 놀았으니 페하께선 바삐 거란을 도와 우시춘이 싸움을 못하게 해야 할줄로 아옵니다.》

엄평의 말대로 북방의 말갈과 서남쪽의 거란이 발해국지경을 침범하지 않았더라면 황성을 타고앉을수도 옥좌를 차지할수도 없었다는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자명한 사실이라 전왕은 엄평의 의견을 쫓기로 하였다. 그자리에서 저들의 심복인 대장군 손시오로 하여금 우시춘을 대신하여 서남원정군을 총팔하게 하고 우시춘을 지부경으로 임명하는 황태후의 거짓조서를 내려보내였다.

바다로 출전하려던 우시춘은 전혀 내막을 모르니 황태후의 거짓조서를 진짜로 믿고 손시오와 교대하고 황성으로 올라오게 되였다. 손시오는 패주하는 거란군을 쫓지 않고 다만 거란군이 다시 쳐들어올가 방비만 강화할뿐이였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