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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회


황, 설 두 장군이 길을 나누어 출전하니
전왕, 엄평 두 란적이 빈 궁궐을 침범하다


도원수 설연이 녀자인줄 모르고 그를 황해공주의 부마로 선정했던 전왕은 황운과 설소저가 혼례를 치른 후 다시 부마간택을 하였는데 그 부마로 선정된 사람은 안변부절도사 엄승의 아들 엄평이였다.

엄평은 검산에 들어가 십년동안 검술을 닦아 능히 도술을 부릴수 있었고 그 무예가 뛰여나 세상에 상대할 적수가 없다고 소문짜한 사내였다. 전왕이 그런 엄평을 부마로 선정한것은 진권의 반란때 진형한테 사로잡혀 치욕을 당한것이 속에 내려가지 않아 항상 무예와 용맹이 뛰여난 사람을 곁에 두고싶었기때문이였다. 엄평의 소문을 듣고 일부러 엄승부자를 불러 만나본 전왕이였다.

엄평을 황해공주의 부마로 선정한 전왕이 그에 대해 임금에게 상주하니 임금이 대내상 황운에게 부마삼는 일을 맡아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대내상 황운은 즉시 현주로 내려가 전왕의 부마간택을 주관하였다.

혼례날이 박두하여 전왕이 례를 갖추어 부마를 맞아들이는데 팔척장신의 거쿨진 엄평이 위엄스레 의복을 차려입고 들어와 황해공주와 더불어 륙례를 치른 후 자리에 앉았다.

전왕과 뭇신하들이 엄평의 체통이 우람하고 기상이 장대함을 보고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부마의 관상을 보니 과시 영웅호걸의 기상이로다!》

《장차 우리 발해를 크게 떨칠 사람은 저 부마로다!》

찬사와 경탄의 목소리가 혼례식장 여기저기에서 중구난방으로 터져나왔으나 오직 대내상 황운의 얼굴에만 엷은 구름이 비껴있었다.

얼핏 보기에 엄평의 용모와 풍채는 영웅남아다운 기상이였다. 허나 황운은 그의 일거일동에서 풍기는 거짓과 위선, 교만방자함과 오만성을 어렵지 않게 간파하였던것이다. 바다물이 짜다는것은 그 물을 다 맛봐야 안다던가. 황운은 엄평의 일거일동을 자세히 눈여겨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을 눈아래로 굽어보며 거쿨진 몸통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들어서는 불손한 태도, 조금도 꺼리는것이 없이 조개턱을 하늘높이 뻣뻣이 추켜든 그 오만방자함, 혼례장에 들어서서 대내상의 동정을 가늠하려는듯 체통에 어울리지 않게 뱁새눈을 뱅뱅 굴리는 간교성, 미간에 력력한 요괴로운 살기 등은 그가 세상에 짝이 없는 소인배라는 인식을 황운에게 강하게 주었다.

마치도 미투리로 구정물을 퍼마신듯 황운은 불안하고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엄평으로 하여 나라안에 장차 불미스러운 일이 꼭 일어날것만 같은 예감이 바지가랭이에 도꼬마리가 달라붙듯 대내상 황운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엄평의 모습을 묵묵히 주시하던 대내상 황운은 임금이 보낸 채색비단을 내주며 나직하나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성상께서 부마를 위하여 내리신 중한 상이니 부마는 오늘의 망극한 이 은혜를 잊지 말고 충정을 다하여 차후 불미스럽고 그릇된 일이 없도록 하라.》

엄평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후일을 경계하여 한 말이였다.

여러날동안 머무르며 황해공주의 혼례식을 마무리한 황운이 황성에 돌아와 대궐에 이르니 임금이 물었다.

《경은 사람을 들여다보는 거울 한가지라 그래, 전왕의 부마를 보니 그 됨됨이 어떠하더뇨?》

황운은 잠시 망설이였다.

《뭘 주저하며 대답을 못하뇨? 경이 본 소감을 덜지도 보태지도 말고 그대로 말하라.》

황운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왕전하가 부마를 간택함이 어찌 범상하리까.

그러나 소신이 보기엔 엄평의 거동에선 진실감이 덜 느껴지는게 어쩐지 공주랑랑이 취할바 못되는 사내인줄 아오이다.》

임금이 놀라와하며 반문하였다.

《그러니 전왕이 부마를 잘 얻지 못했다는 소리렸다?!》

《용서하소이다. 소신이 그만 실언을 한것 같소이다.》

《아니, 아니! 짐은 경의 지인지감을 믿노라.》

《황송하오이다.》

황운은 혼례식장에서 엄평의 거동을 보면서 느꼈던 불안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임금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소리가 슴새나왔다.

《혼인은 인륜대사라 한번 거행한것을 어찌 물릴수 있다더냐.

전왕은 이미 부마를 얻었으니 할수 없는게구, 이제 남은건 계루왕의 심원공주인데…

심원공주는 재주와 덕을 겸비하여 짐이 특별히 사랑했으나 아직 부마를 선정하지 못했도다. 그러니 경은 훌륭한 신랑감을 천거해서 짐의 근심을 덜게 하라.》

뜻밖의 령에 황운이 머밋거리다가 조심스레 의견을 내비쳤다.

《페하의 교지가 이러하시니 소신이 숨김없이 아뢰옵니다. 심원공주랑랑에게 합당한 사람이 하나 있사온대 일찌기 상처하고 아직 재취는 하지 않았소이다.

소신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싸운 용장으로서 충의롭고 지모와 용맹을 겸전하였소이다. 다만 흠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것처럼 상처한 사람이라는것이옵니다.》

예상외로 임금의 반응은 호의적이였다.

《사람이 마땅하면야 어찌 후처됨을 혐의하리오. 경은 주저말고 천거하라.》

《소신이 말한 사람은 다름아닌 정당성 좌사정 조명걸이옵니다.

충효를 겸전하였고 명망이 조야에 제일인줄 아옵니다. 일찌기 상처하였지만 청루(기생방)에 드나든다든가 녀색을 가까이 한다는 말은 들은적이 없고 아직도 재취는 하지 않았소이다.》

이미 조명걸에 대해 잘 알고있던 임금인지라 대내상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그자리에 계루왕을 불러들였다. 조명걸에 대해 파악이 있던 계루왕이 딴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이어 임금은 황운에게 혼례를 맡아 주관하라는 분부를 내리고 전왕에게는 황해공주와 부마 엄평을 데리고 심원공주의 혼례에 참례하라 일렀다.

조서를 받은 황운이 조명걸과 심원공주의 혼례를 실행하였는데 조명걸의 름름한 풍채와 진중한 거동은 계루왕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었고 당사자인 심원공주도 몹시 기뻐하였다.

대례를 마친 다음날 임금이 엄평과 조명걸을 대궐에 불러 함께 앉히고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엄평의 기상이 간교하기 그지없었다. 대신 조명걸은 믿음이 푹 가는것이였다.

다시한번 대내상의 지인지감에 감탄하고 그후론 국사를 그에게 의탁하는 률이 더 잦았다. 더구나 조명걸이 대내상 황운과 함께 충의를 다하여 정사를 해나가고 백성들을 다스리니 임금이 여간 중해하지 않았다.

어느덧 한해가 흘렀다.

임금이 즉위한지 이십일년이고 안해를 맞은지는 근 삼십여년이 되여오는 이무렵 무자식이던 황후가 임신하여 열달이 되여왔다. 온 대궐이 황후의 해산을 앞두고 근심과 기대가 엇갈려 분분한 속에 임금의 안색에도 장마철 구름장이 사라질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이날도 임금이 늙마에 자식을 보는 황후의 몸을 두고 근심하며 뒤척이는데 기연가미연가 갑자기 채색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더니 그 구름속을 뚫고 시누런 황룡이 불쑥 튀여나와 곧바로 대궐안에 내려왔다. 이 무슨 일인가 해서 임금이 놀라와하는데 뒤이어 잘 익은 팥알같이 또릿또릿하게 생긴 청의동자 하나가 채색구름을 헤치고 내려와 심원궁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뒤이어 황금두꺼비가 내려와 설궁으로 들어가는것이였다.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와 임금이 깨나보니 한가닥 꿈이였다.

임금의 눈앞에 지밀나인이 서있었다.

《페하, 내전마마께서 태자를 낳으셨소이다.》

임금이 너무 기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서 꿈에 황룡이 대궐로 내려왔는가, 그럼 심원궁과 설궁에서도? 하는 생각이 언뜻 갈마들어 임금이 지밀나인에게 분부하였다.

《이제 궁녀 두 사람을 심원궁과 설궁에 각기 보내여 무슨 소식이 없나 알아보라.》

얼마후에 두 궁녀가 달려와 심원공주는 아들을 낳고 숙록후는 딸을 낳았다고 아뢰였다.

임금이 꿈내용이 너무도 신통하여 그 즉시 황운과 조명걸을 대궐로 불러들여 꿈이야기를 한 다음 신신당부하였다.

《경의 자녀들이 태자와 한날한시에 태여났은즉 이는 분명 하늘의 뜻이로다. 그들이 필경 앞으로 태자를 도와 이름을 떨칠 운수이니 귀히 길러 나라의 보필이 되도록 하라!》

황운이 물러나와 봉선에게 대궐에서 성상과 오고간 말을 이르니 봉선이 나직한 소리로 《첩도 신기한 꿈을 얻었나이다.》 하는것이였다.

황운이 호기심이 동해서 《무슨 꿈이요?》 하고 물으니 봉선이 그저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되리다.》 하고는 꿈내용은 말해주지 않았다. 황운이 속으로 의아함을 금치 못하나 더 묻지 않았다. 봉선이 꿈내용을 말하지 않은것은 그로부터 십오년이 되여 증험되였으니 아직은 그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한 일이였다.

하늘의 뜻인가 아니면 우연한 일치인가 어쨌든 약속이나 한듯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이 세상에 고고성을 터친 세 생명 다시말하여 지엄한 황실의 태자와 심원공주의 아들 미영, 숙록후 설봉선의 딸 순애의 앞날에 파연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있는지 아직은 그 누구도 알수 없었고 예언할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삼년이 지난 후 근 이십사년간 나라를 다스리던 임금이 불치의 병으로 눕게 되였다.

대궐의 어의는 물론 나라안의 제노라는 명의들이 다 모여들어 저들의 의술을 재간껏 발휘하였으나 임금의 병세는 점점 기울어져 더는 어쩔수 없는 경각에 놓이게 되였다.

운명직전에 임금은 조정의 대신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한사람한사람 측근신하들을 둘러보던 임금의 눈길이 대내상 황운에게 가 멎었다.

《짐이 천박한 재덕으로 경들의 충의심을 입어 이십사년간이나 영복을 누렸으니 여한이 없건만 단지 태자의 나이 이제 겨우 네살이라 그게 마음이 걸리도다.

만일 섭정이 없으면 어찌 천하를 총찰하며 종묘사직을 보존하리오.

반안왕과 전왕, 계루왕은 비록 짐의 동기이나 만민을 돌보기에는 그 재능과 덕이 대내상에 미치지 못할것이요, 소인배들이 날뛰면 현명하게 조처함은 대내상만 한 적임자가 없거늘 그래서 짐은 태자를 보좌하는 섭정대신의 직분을 대내상 황운에게 맡기노라.

경은 짐의 유언을 생각하여 태자섬김을 짐같이 하고 종묘사직을 안보하라.》

대신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옥체만강하소이다, 페하!》

임금이 황운을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더니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다. 짐의 목숨은 하늘의 뜻이라 더는 어쩔수 없다.

짐은 경의 충정을 알고있도다. 태자를 대내상에게 의탁하나니 경은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정사를 바로 펴나가 백여년을 이어온 우리 발해의 사직을 꿋꿋이 잇고 나라강산을 빛내도록 하라.》

비오듯 눈물을 흘리던 황운은 황송해하며 거듭 사양하였다.

《불초한 이몸이 성상의 하해같은 은총을 입고 낮이나 밤이나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코저 했건만 오히려 이렇게 조서를 내리시니 송구스럽기 그지없나이다.

섭정대사는 황실의 종친들이 응당 맡아야 할 대사이라 신의 용렬함으로 어찌 감당하리까. 전왕과 계루왕전하가 있사오니 그들에게 섭정대사를 맡김이 마땅한 도리인줄 아옵니다.》

임금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경은 사양치 말라.》

이어 임금은 태자를 불러들여 황운의 커다란 손에 그의 고사리같은 손을 꼭 쥐여주고는 띠염띠염 말을 이었다. 네살밖에 안되는 태자였다.

《너는 나의 박복함을 본받지 말고 부디 어진 정사를 시행하며 섭정대신인 대내상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선대 임금들의 업적을 정성으로 빛내고 종묘사직을 안보하여라.》

나어린 태자가 눈물이 글썽해서 머리를 까닥거렸다.

《알아들었사이다. 아바마마!》

임금이 다시 대내상 황운에게로 눈길을 돌리고 무슨 말인가 더 할듯 하더니 그만에야 숨이 지거늘 당시 나이는 마흔다섯살이고 재위한지 이십사년이였다.

《페하!-》

황운이 땅에 머리를 박으며 목메여 부르짖었다. 그를 따라 문무백관들이 일시에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합창하였다.

《페하!-》

나어린 태자를 품에 안은 황운은 절통한 심정을 누를수 없었다. 네살때 어머니를 잃은 자기였다. 임금의 시신에 어푸러져 통곡하는 태자의 모습은 철없던 그 시절에 어머니를 잃고 몸부림치던 자기 모습을 다시 보는것 같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선임금의 유지를 받들어 태자를 잘 보좌하리라 굳게 마음다지며 황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임금이 세상을 떠난 후 대내상 황운은 조정사를 틀어쥐고 빈틈없이 해나갔다.

칠삭만에 임금을 순릉에 안장하고 황후를 황태후로 추존하였으며 태자를 즉위시켜 년호를 정하고 자기는 섭정대신이 되여 나라일을 바르게 해나갔다.

우선 대사령을 실시하여 나라안의 옥에 갇혀있던 죄수들을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석방하였다. 이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상을 당한 기회를 타서 외세가 변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군사를 강화하였으며 제후들과의 선린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였고 각지에 어사들을 파견하여 시골에 묻혀있던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였으며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편리하도록 불합리한 제도적장치들을 간소화하거나 페지하였다.

선임금이 세상을 떠난 그다음해 정월 안원부의 료양에 있던 반안왕이 죽고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기에 섭정대신 황운은 황후에게 주달하고 반란적을 멸하는데서 공로를 세운 류도를 반안왕으로 봉하도록 하였다.

류도는 선임금의 누이인 연희공주의 아들이였다.

선임금에게는 네명의 동기들이 있었는데 그 동기들이란 다름아닌 반안왕, 전왕, 계루왕 등 세 동생들과 이미전에 세상을 떠난 류도의 어머니 연희공주였다. 선임금은 거란, 고려후국과 린접하고있고 바다를 끼고있는 안원부를 자기가 제일 믿는 반안왕의 봉읍지로 정해주고 반안왕을 파했던것인데 불행히도 반안왕에게는 그뒤를 이을 후사가 없었던것이다. 류도는 진권의 반란때에 비록 황실의 가문이였지만 설연과 황운을 따라 전장에 나가 많은 공을 세웠었다.

반안왕으로 봉해진 류도가 봉읍지인 안원부의 료양으로 떠나는 날 섭정대신 황운은 그를 대궐로 불러들여 황태후의 접견을 받도록 하였다.

류도를 만난 황태후가 훈계하였다.

《그대는 료양으로 가서 안원부 도독을 도와 정사를 바로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라.》

섭정대신 황운은 전장을 함께 누비던 류도를 믿음의 눈길로 바라보며 당부하였다.

《거란과 린접하고있는 안원부는 나라의 방위를 굳건히 하는데서 서남쪽의 관문이라 할수 있소이다. 무릇 나라정사나 고을정사나 백성들을 다스리는 리치는 피차일반이니 매사건건 상벌을 공정하고 분명히 하고 또 덕을 힘써 시행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며 군사를 강화해서 외세가 감히 발해국을 넘보지 못하게 하소이다.》

발해를 위해 충성다할것을 맹약하고 안원부로 떠나가는 류도를 황운이 직접 배웅하였다.

그후 황운은 터럭만 한 사심도 없이 나라를 위해 충정과 재능을 다 발휘하고 황후와 어린 임금을 성의껏 받들어 정사를 바로 펴나갔다. 인재들의 앞길을 열어주고 간신소인배들과 탐관오리들이 발붙일 틈을 주지 않으니 천하는 자연히 태평스럽고 국력은 강해져 발해는 해동성국의 위상을 잃지 않았으며 이웃나라들은 천자의 나라인 발해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고 제후들은 더 공경하게 되였다.

선임금의 장례를 치르고 현덕부의 현주로 돌아간 전왕의 심사는 편안치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고 부아통이 터져 미칠것만 같았다.

일이 순리대로 되려면 섭정대사는 황실가문이 주관해야 하고 그것도 선임금의 동생인 전왕-자기가 해야 옳은것이 아닌가.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가 나이가 어려 조정사를 맡아볼수 없는 경우에 임금의 동생 다시말하여 태자의 맏숙부가 그가 성장할 때까지 섭정하는것은 조상전래로 내려오는 관습이고 전통이였다. 반안왕이 죽었으니 이제는 전왕-자기가 맏숙부나 같지 않은가. 헌데 선임금은 제 동생인 이 전왕이 아니라 대내상 황운에게 섭정을 맡겼으니 이게 어디 륜리에 맞는 처사인가. 륜리는 물론 관습에도 전통에도 맞지 않았다. 나라사람들이 이 전왕을 두고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황실가문에만 주는 반안왕이요, 계루왕이요 하는 칭호대신 전왕으로 불리우는 자기였다. 게다가 진권의 반란때에 반란적에게 사로잡혀 치욕을 당한것으로 하여 나라사람들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은 전왕이였다. 이번 기회에 섭정이 되면 체면을 세우고 솜씨를 보이자던 노릇이 그만에야 논판에 세워놓은 허수아비신세가 되고말았다. 칼로 저미는듯 심장이 쿡쿡 아파나고 입맛이 없었다. 음흉한 엄평이 전왕의 속내를 모를리 없었건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며칠밤을 모대기던 전왕은 부마 엄평을 불렀다.

혼자서 암만 모주 먹은 돼지 벼르듯 해야 기분만 더 언짢고 부아통이 치밀어 도무지 진정할수 없었다. 부마 엄평에게라도 속을 털어놓아야 시원할것 같았다.

탑전앞에 이른 엄평이 락태한 고양이상을 한 전왕의 안색을 살피며 문안인사를 하였다.

《상사를 당한 전하의 기분이 어이 좋을리 있겠소만 슬픔으로 너무 침통해하시니 옥체가 상할가 념려되오이다.》

아닌보살하고 왕청같은 말로 전왕의 부아를 돋구는 엄평의 침발린 소리였다.

엄평이 짐작한바 그대로 그 말이 전왕의 부아통을 더 건드려놓았다. 탑상을 쾅-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전왕이 이를 사려물고 부르짖었다.

《세상에 이런 수치를 어찌 참을수 있는가! 자고로 섭정대사는 황족이 아니면 가당치 않았도다.

헌데 선임금이 우리 형제를 쓰지 않고 황운에게 그처럼 중한 대사를 맡겼으니 발해의 천하가 다 황운만 알고 과인은 모르고있거늘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고?

황운이가 대체 뭐길래 황족을 무시하고 섭정대사를 주관할수 있는가!

듣자니 반안왕으로 류도를 봉했다는데 사실이야 그 류도로 말하면 황실가문이고 내 조카인즉 마땅히 과인과 또 계루왕과 의논함이 옳지 않겠는가. 헌데 황운이 섭정대신이라 하면서 선임금의 동기들인 과인과 계루왕을 무시하고 자의로 결정했으니 세상사람들이 황실가문을 가리켜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건 다 황운이 제 이름을 내고싶어 황태후를 끼고 한짓이 아니고 뭐인가.

그러다간 이 발해라는 대국이 몽땅 황가의 천하로 될판인데 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으면서 어찌 이런 수치를 당할수 있으랴! 어떻게 해야 저 황운이를 제거하고 과인의 설분과 수치를 풀수 있단 말인가!》

계루왕을 꺼들어 분을 터뜨렸지만 실은 전왕-자기를 무시했다는 소리라는것을 모를리 없는 엄평이 뱁새눈을 굴리며 전왕의 잔등을 긁기 시작하였다. 미간을 쪼프린 엄평의 뱁새눈에서 무서운 독기가 풍겨나오고있었다.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지금 황운이 섭정대신이라 자처하며 전횡을 일삼으니 제후들이 모두 우려하는바입니다.

신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황운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근심하지 마소이다.》

전왕이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황운은 당세의 영웅이고 또 그곁엔 천하장군이라는 사내들도 무색케 하는 숙록후 설씨가 있도다. 더우기 선임금이 림종시 유탁하신바이고 황태후가 나라의 온갖 정사를 황운에게 의지하고있어 그 권세를 당할자 없고 또 생사권한이 황운의 손에 쥐여져있는데 부마는 무슨 수로 그를 처치한단 말인고?》

《황운이 아무리 우주를 들고 천하를 뒤집는 용맹을 가졌다 해도 기묘한 계교와 신기한 묘술을 어찌 다 알리까. 신이 일찌기 신선을 만났으니 그는 다름아닌 검산도인이라 도술이 무궁하여 세상에 짝이 없었소이다. 신이 십여년이나 검산도인에게서 도술을 배웠거늘 어찌 황운과 설씨를 두려워하리까.》

전왕이 믿지 못하겠다는듯 머리를 기우뚱거렸다.

《경이 아무리 용맹한들 황운과 설씨의 재주를 어찌 당하리오.》

엄평의 뱁새눈에서 새파란 불길이 뿜어나왔다.

《전하는 지나친 우려를 마소이다. 신에게 한가지 계교가 있소.》

《?!》

《황운과 설씨가 황성에 없으면 대사는 손바닥뒤집기나 같소이다.

옛글에 〈천하는 한사람의 천하가 아니다〉 했거늘 전하는 당당한 고황제의 후손이요, 선임금의 친동기라 발해의 임금이 되지 못한다는 법이 어디 있소이까.

그러니 전하는 신을 푹 믿고 후일을 기약하심이 어떠하오이까.》

《그래, 무슨 계교가 있느뇨?》

《신이 죽기를 결심하고 전하로 하여금 발해국의 옥좌에 오르게 하리니 너무 마음을 쓰지 마소이다. 단지 부탁은 전하께서 신의 계교가 성사될 때까지는 신이 언제 어디로 가고 들어오는지 그 종적을 묻지 마소서.》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과인은 부마의 요구를 다 들어줄테다.》

전왕이 크게 기뻐하여 황금을 내주며 이후로는 엄평이 언제 어디로 무엇때문에 오고가며 또 언제 돌아오는지 그 행적을 전혀 묻지 않았다.

전왕에게서 신성불가침이나 다름없는 절대권한과 특혜를 받아낸 엄평은 며칠밤을 모대기며 어떻게 하면 황운과 숙록후를 황성에서 끌어낼가 그 생각에만 옴해있었다.

(황운과 설씨를 황성에서 끌어내자면 그들만이 대응할수 있는 무슨 묘한 수를 써야 한다. 그러자면 거란과 흑수말갈을 부추겨 지경을 침범하게 함이 어떨가?

매양 발해를 넘보면서도 기회가 없어 어쩌지 못하고있는 거란이고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발해에 복속하지 않으려고 하는 말갈이 아닌가. 만일에 서남쪽의 거란과 북쪽의 말갈이 지경을 침범하면 어차피 황운과 설씨가 출정할것이다. 그 기회를 타서 황성으로 쳐들어가면 대사는 누운 소 타기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엄평이 며칠동안 골통을 부여잡고 짜낸것이란 바로 외세인 거란과 발해의 북쪽지역에 사는 말갈을 부추길 몸서리치는 흉계였다. 이미전부터 발해를 호시탐탐 노리고있던 거란과 발해의 통제에서 벗어나 저희네 나라를 세우려고 안깐힘을 쓰고있는 말갈이 자기가 전왕의 밀지를 받고 찾아왔다고 하면 얼싸 좋다 하구 응해나설것이라고 엄평은 믿었다.

엄평은 먼저 은밀히 료하를 건너 거란으로 찾아갔다.

거란은 발해의 서쪽변강인 부여부와 서남쪽변강인 안원부와 잇닿아있었다. 비록 당나라에 복속되여있다지만 이무렵 당나라도 길들이지 않은 들소처럼 뿔을 세우고 받개질을 밥먹듯 하는 거란을 어루만지며 회유책을 쓰고있었다. 더구나 당나라조정내에서 옥좌를 놓고 치렬한 권력싸움이 잦아 근간에만도 임금이 세번씩이나 갈리우다나니 언제 거란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거란은 이런 기회를 타서 살때를 만났다 생각하고 령토를 넓히려고 갖은 전횡을 일삼고있었다.

료하를 건너 찾아온 엄평을 거란추장이 제 할애비나 온듯이 반겨맞아주었다.

거란추장에게 엄평이 황금을 내놓으며 전왕의 서신을 내밀었다. 움푹한 눈을 번뜩이며 거란추장이 전왕의 서신을 펴들었다.

《…거란이 이제 당장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방을 공격함이 어떠하리오. 선임금이 죽고 네살짜리 태자가 황위에 올랐지만 장차 발해의 천하는 과인이 차지하게 될것은 제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것이나 같은즉 만약 과인이 발해의 천자가 되면 거란에 남방의 열개 고을을 떼줄것을 약조하노라.》

거란추장의 입이 벙글써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료하너머 비옥한 발해땅을 넘보며 엉치를 들썩거리면서도 발해의 군사가 정예롭고 또 이렇다할 구실이 없어 쳐들어가지 못하던 거란추장이였다.

그런데 이게 웬 떡인가. 행운이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온다더니 움안에서 떡을 받듯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발해국의 전왕이 많은 금덩어리를 보내면서 자기더러 발해를 치라고 하다니?!

횡재를 해도 여간 횡재가 아니였다. 더구나 지금의 발해의 임금은 네살밖에 안되는 코흘리개인즉 발해의 실제 권력자는 전왕이 아닌가. 그런데 그 전왕이 자기더러 발해지경을 침범하면 제가 룡상을 차지한 다음 발해의 비옥한 열개 고을을 떼주겠다니 이야말로 밑천을 얼마 들이지 않고도 일확천금할수 있는 횡재였다. 분명 저들의 힘을 빌려 룡상을 차지하자는 심산인듯싶었다.

당장은 발해의 변경을 들이쳐 열개 고을을 차지한다지만 장차 발해의 드넓은 대지를 몽땅 손아귀에 쥘수 있다는 쾌감이, 설사 그렇지 못한다쳐도 발해와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다는 기쁨으로 짜릿한 전률이 일었다.

박달나무에도 쉬가 쓸 때가 있다더니 백여년사직을 자랑하는 발해라는 강국이 저들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청할줄을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정녕 믿을래야 쉬이 믿어지지 않는, 자다가도 까무라칠 일이였다.

거란추장은 부레마냥 흥이 떠올랐으나 애써 내심을 감추고 다시금 엄평의 흥정을 확인한 다음 두말없이 응낙하였다.

거란추장과 흉측한 야합을 성사시킨 엄평은 이번에는 미타호를 지나 우쑤리강을 건너 북쪽의 흑수말갈의 도읍지로 찾아가 말갈추장을 만났다.

《말갈에서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북방을 침노하소서. 장차 전왕전하가 발해의 임금이 되면 북방 십여개 고을을 떼주리다.》

온전한 정착지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의 집단인 흑수말갈은 발해에 종속되여있었으나 진권의 반란이 있은 후부터 발해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호시탐탐 발해를 침범할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새앙쥐 반찬을 넘보듯 비옥하고 드넓은 흑룡강이남의 발해의 본토를 엿보면서도 그 강대성과 국력에 기가 질려 침만 흘리고있던 말갈추장이 엄평의 흥정에 믿어지지 않는지 제 귀박죽을 잡아뜯었다.

《그 약속을 뭘로 담보할테요?》

엄평이 품안에서 전왕의 옥새가 새겨진 종이장을 꺼내들었다. 만일의 경우를 타산해서 떠나오면서 전왕의 옥새와 수결(수표)이 있는 문서를 만들어가지고온 엄평이였다.

《이건 우리 전왕전하의 옥새가 새겨있는 문서오이다. 전왕전하는 말갈추장이 믿지 않을수 있다며 이 문서에 옥새를 찍고 이렇게 수결까지 하셨소이다.

추장은 이래도 믿지 못하겠나이까?》

말갈추장이 듣기에도 소름끼치는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렇다면 여(추장이라는 뜻)는 믿겠소.》

오래전부터 벼리고벼려오던 숙망을 풀게 되였다는 희망과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떠나가는 엄평을 말갈추장이 십리밖까지 따라서며 바래주었다.

엄평과 약속한대로 말갈추장은 첫눈이 푸실푸실 내리는 날 저들에게 속해있는 흑수부와 군리부, 사모부와 굴설, 막예개의 군사 수만을 긁어모아 북쪽의 안변부지경을 불의에 침입하였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거란추장은 자기가 직접 십만대군을 몰아 발해의 남쪽변방인 안원부지경을 에돌아 바다길로 고려후국을 침공하였다. 고려후국은 고구려가 망한 후 그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서 발해에 복속되여있었다.

북쪽과 남쪽에서 재변을 알리는 봉화가 련이어 일어나고 파발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황성에 급보를 전하였다.

황성안이 뒤숭숭해지고 조야가 끓었다.

급변사태에 대처하여 황태후와 황운은 문무대신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대신들을 둘러보는 태후의 낯색이 밝지 못하였다.

《료하너머 거란놈들이 우리 발해를 먹어보려고 추장이 직접 군사를 끌고 고려후국을 침공하고 북쪽의 흑수말갈이 여러 부족들을 긁어모아 망녕되게 안변부를 침범하였으니 뉘 능히 이 강포한 외적들과 오랑캐무리들을 멸하리오?》

대신들이 약속이나 한듯 대내상 황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내상 황운만이 이 변란을 막아낼수 있으리라는 신뢰와 기대가 어린 무언의 눈길이였다. 대신들의 그러한 마음을 들여다보듯 태후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라앞에 닥쳐온 재변을 가셔낼 사람은 섭정대신 대내상과 숙록후뿐이거늘 그들 아니면 어찌 도적들을 파할손가.》

대신들을 다 물러가게 한 다음 태후는 황운과 따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암만 생각해도 거란과 말갈의 침공을 막으려면 섭정대신과 숙록후가 출전해야 할가보오.》

황운이 무릎을 꿇으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신이 황은을 입사와 어찌 죽기를 사양하리까.》

《그럼 믿겠소. 부디 외세와 오랑캐를 멸하고 무사히 돌아오길 일일천추로 기다리겠소.》

《너무 근심마소이다. 신이 숙록후와 의논하고 침략자들을 격멸하고 사직을 보존하겠나이다.》

대궐에서 돌아온 황운은 숙록후와 의논하는데 숙록후가 근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의 옆에 네살잡이 딸 순애가 쌔근거리며 자고있었다.

《상공과 소첩이 다 출전하면 황성이 비겠는데 누가 황실을 호위하며 어린 성상을 보호하리까?》

황운이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내 생각엔 룡원부에 있는 계루왕을 불러옴이 어떻겠소? 계루왕이 충의롭고 또 그곁에 군사를 잘 아는 조명걸을 붙여놓으면 황성을 지키고 나어린 성상을 무사히 보호할수 있다고 생각되오.》

황운의 의견에 숙록후도 딴 의견없이 찬동하였다. 황운이 태후에게 계루왕을 불러들일것을 건의하니 태후가 그 즉시 계루왕에게 조서를 내려 룡원부의 동경에 있는 그를 황성으로 부르고 조명걸과 함께 황성을 지키게 하였다.

이어 군사와 군마를 동원하여 남북방원정군을 무은 대내상 황운은 자기는 십만대군을 거느리고 우시춘 등과 함께 남방으로 진출하고 숙록후는 오만군사를 거느리고 홍윤 등과 함께 북방으로 출정하기로 작정하였다.

출정을 앞두고 황운은 숙록후를 정찬 눈길로 바라보며 심중의 마음을 담아 당부하였다.

《만일 적의 형세 강하여 쉬이 제어하기 어렵거든 사자를 띄워 소식을 보내주오. 그리고 나라에 위기가 닥친 때라 다시 아녀자의 몸으로 영웅의 행색을 해야 하지만 선임금의 유언을 생각해서라도 몸을 가벼이 버리지 말며 항상 이몸이 그대를 기다린다는것을 잊지 마오.》

애써 웃음을 짓는 숙록후의 고운 눈에 물기가 핑 돌았다.

《첩이 아녀자의 몸으로서 망극한 국은을 입었사오니 어찌 죽기를 사양하리까. 북방의 오랑캐들이 비록 사납고 포악하나 두렵지 않소이다. 다만 첩이 임신한지 석달이라 싸움이 오래 되여 쉬이 돌아오지 못하면 전장에서 몸을 풀가봐 근심될뿐입니다. 아무쪼록 상공이 승전하고 성한 몸으로 돌아오기 믿나이다.》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전장으로 떠나가는 두사람의 심중에 세찬 격랑이 고패치고있었다. 숙록후가 동리화의 손을 잡고있는 순애에게로 다가갔다. 동리화가 순애를 어머니앞으로 떠밀었다.

《순애야, 아빠, 엄마가 오랑캐들을 쳐없애고 돌아올 때까지 앓지 말고 잘있거라.》

《몇밤 자면 오나?》

머리를 곱게 땋아올린 네살난 순애가 머루알같은 눈을 초롱거리며 물었다.

숙록후가 말없이 순애를 바라보다가 자기의 두손가락을 쫙 펴고 세번 흔들었다.

《이렇게 서른날이 지나면 돌아온단다.》

《그렇게 오래 있다가 오나?》

황운이 모녀간의 이야기판에 끼여들며 순애를 버쩍 들어올렸다.

《그래, 엄마, 아빠가 우리 순애가 보고싶어서라도 인차 돌아오마. 순애랑 살고있는 이 나라를 먹어보려는 저 간악한 도적놈들을 몽땅 쓸어버리고 곧 돌아온단다.》

《그럼 나 아빠랑, 엄마랑 돌아올 날을 손꼽으며 기다릴래.》

숙록후가 다가와 황운의 품에 안겨있는 순애의 해말쑥한 손을 꼭 잡았다. 세사람이 한덩어리로 합쳐졌다.

장군의 리별을 바라보는 온 군중에 격정의 파도가 설레였다.

황운과 숙록후는 대궐에 이르러 태후와 어린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각기 군사를 이끌고 호호탕탕 전장으로 떠나갔다.

군사를 거느리고 남방으로 진군하던 황운은 현덕부의 경내가 가까와오자 불현듯 뇌리에 뱁새눈을 굴리며 뭇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던 엄평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음물을 뒤집어쓴듯 온몸이 오싹해지며 잔등이 서늘해오고 불길한 예감이 온몸에 전률하였다.

(혹시 나와 숙록후가 전장으로 떠나갔다는것을 알면 엄평이 무슨 흉계를 꾸미지 않을가. 어째서 갑자기 거란과 흑수말갈이 동시에 침범하였을가.

거란과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조공한다더니 이미전에 우리 발해를 치기로 서로 약속한것이 아닐가?)

황성에 있을 때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문들이 현덕부지경에 들어서니 비온뒤에 버섯 돋듯이 뇌리에 키돋움하며 갈마들었다. 정말 모를 일이였다. 당나라가 간혹 발해지경을 넘보면서 자그마한 불집을 일으킨적이 있었지만 아직 똑똑한 제 나라도 없는 거란이 대군으로 지경을 침범하기는 흔치 않았었다. 그만큼 거란은 힘이 약했고 발해를 무서워하고있었으며 당나라는 발해와 될수록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고 했다. 더구나 흑수말갈은 저들이 사는 곳에 비록 발해의 군현통치가 미치지 않았다쳐도 력대로 발해의 눈치를 보면서 해마다 조공을 보내왔으며 어찌 보면 발해를 두려워하고있었다. 선임금의 상사를 치르고 태자가 황위에 오른 뒤 반년동안은 나라가 그만하면 평온하였었다. 헌데 왜 불현듯 거란과 흑수말갈이 지경을 침범했을가. 저들에게 어떤 불꾸레미가 떨어지리라는걸 모르고 지경으로 쳐들어왔을가. 아직은 수수께끼였다. 이번 걸음에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르고 날뛰는 거란추장을 사로잡아 그 흉심을 빠개고 버릇을 가르쳐 다시는 발해를 넘보지 못하게 하리라. 밖에 있는 도적을 징벌하자면 집안이 평온해야 한다. 그러자면 엄평의 수족을 얽어매서 그가 흉계를 꾸미지 못하게 해야 한다.

생각끝에 대내상 황운은 현주성밖에 대오를 멈춰세우고 서신을 써서 사자를 전왕에게 보내여 엄평으로 선봉삼기를 칭하였다.

서신을 받아든 전왕이 크게 놀라며 엄평을 불렀다. 서신을 펴본 엄평이 아연실색하였다.

《황운이 분명 신을 의심하여 전장에 데려가자는 심산이옵니다. 만일에 신이 없으면 전하께선 어찌 대사를 도모하리까.》

엄평의 아부재기에 전왕의 낯색이 질렸다.

《그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신에게 한 계교가 있소이다.

이제 전하가 관속들을 거느리고 황운을 찾아가 그에게 이만군사를 주면서 〈엄평이 갑자기 병에 걸려 출전하지 못하니 병조리를 하여 차도가 있거든 후에 보내주마〉고 말해서 황운의 의심을 풀게 하소서.

만일 황운이 전하를 뵈옵기를 빙자하며 성안에 들어와 신의 허실을 탐지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신에게 몰래 통지해주소이다.》

전왕이 옳게 여기여 성밖으로 나가 대내상 황운을 륭숭하게 맞이하면서 군사 이만을 주고 엄평이 갑자기 병이 중하여 출전할수 없노라고 일렀다. 대내상 황운은 전왕이 지성으로 대접하고 군사 이만까지 내주니 딴 의심을 품지 않고 방심하여 대군을 이끌고 그냥 남방으로 떠나갔다.…

전왕과 엄평은 황운부부가 남방과 북방으로 출전하여 황성이 빈 기회를 타서 현덕부에서 군사 오만을 총독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엄평이 선봉이 되고 전왕이 후군이 되여 밤낮없이 행군하여 황성의 남문에 이르렀다.

황성의 수문장이 갑자기 대군이 밀려드는것을 보고 황급히 계루왕과 조명걸에게 보고하니 성문을 굳게 닫고 응전하지 말라는 령이 내렸다.

조명걸이 계루왕에게 너무도 억이 막혀 하소연하였다.

《아니, 전왕과 엄평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이럴수가 있소이까!》

계루왕이 눈을 꾹 감고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왕이 비록 과인의 형이라지만 본래부터 야심이 목구멍까지 차있었소. 그래서 선임금께서도 우리 형제들에게 늘 전왕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군 하셨지. 게다가 전왕의 부마인 엄평이란 작자가 간교하고 사납기 그지없으니 결국은 승냥이와 이리가 서로 짝짝꿍한게 분명하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대내상과 숙록후는 출정하고 성안에 있는 군사라는게 도제 수백명밖에 안되니 저 미친 이리무리들을 무슨 힘으로 막으리까.》

계루왕이 침통한 낯색으로 돌아서며 조명걸을 바라보았다.

《대내상에게 알리자고 해도 때는 이미 늦었소. 그러니 과인이 태후와 성상을 모시고 피신하겠으니 부마가 군사를 끌고 적을 막아 시간을 얻어야겠소.》

《그럼 소장이 군사를 거느리고 성문을 당분간이라도 지켜 여유를 얻겠으니 전하는 태후마마와 어린 성상을 얼른 피신시키소서.》

조명걸이 갑옷투구를 떨쳐입고 나가는데 엄평이 벌써 대군을 내몰아 성문을 깨뜨리고 북과 징을 울리며 물밀듯 쳐들어오고있었다.

조명걸이 말에 올라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적군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뒤로 오백명의 수비군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용맹하게 나아갔다. 조명걸이 휘두르는 칼에 맨 앞장에서 달려오던 엄평의 선봉장의 목이 떨어져나갔다.

오만군사와 오백군사, 실로 중과부적의 대결이였다.

엄평이 성난 사자마냥 무섭게 싸우는 조명걸을 손으로 가리키며 부하장수들에게 호령하였다.

《저 부마는 절대로 죽이지 말고 산채로 사로잡으라!》

엄평의 지시를 받은 적장수들이 조명걸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용맹과 무예가 뛰여난 조명걸이지만 대여섯의 적장들과 접전하자니 어지간히 기운이 진한지라 차츰 밀리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적장 하나가 던진 바줄이 날아와 조명걸의 목에 걸렸다. 그만에야 조명걸은 바줄에 목이 걸려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느새 적장수들이 왁- 달라붙어 조명걸을 제압하였다. 조명걸이 사로잡히자 가뜩이나 인원이 적은 황성수비군사들은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지고말았다.

불의의 재변을 당한 성안 백성들은 어쩔줄을 몰라 부모처자를 거두지 못하고 갈팡질팡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하루새에 성안은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화하고말았다.

반란군이 온 성안을 무인지경 드나들듯 돌아치니 차후 일을 어찌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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