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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회


전 편
집없는 나그네


제 4 장


6


고즈넉한 잠상학부의 긴 복도를 따라 총총히 걸어가던 응상은 불쑥 자기 방에서 나오는 다나까교수와 마주쳤다.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는데 교수가 그를 멈춰세웠다.

《응상군, 나한테 잠간 들리게.》

응상은 말없이 교수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앉게.》

옆구리에 끼고온 원고뭉테기를 책상우에 내려놓고 선채로 만년필을 꺼내여 원고의 여백에 무엇인가를 재빨리 휘갈려 써놓고난 교수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내가 며칠후 만주에 출장을 가네.》

다나까교수는 응상을 의미있게 건너다보며 말을 꺼냈다. 얼마전 자기가 준 권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느냐고 묻는것이였다.

《저의 장래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돌려주시는데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감사를 드렸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사치레말은 그만두게.》

다나까교수는 응상의 말을 가로채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만주농사시험장에 우리 본토의 잠업시험장보다 더 큰 잠업시험장을 설치하려고 계획하고있다네. 위도상으로 볼 때 북만에 설치하는 이번 시험장은 한대에 속하는 첫 시험장으로 될걸세. 듣자니 거기엔 희귀한 산누에품종들이 헤아릴수없이 많다고 하더군. 대체적으로 계산해본데 의하더라도 가둑누에를 칠수 있는 죄리나무숲만도 수백만정보에 달한다고 하네. 마침 신경에 설치한 군용비행장에 내 막역한 지기의 자제가 대장질을 하는데 그한테 부탁하면 비행기를 타고 광활한 누에의 자연사육지대도 돌아볼수 있을걸세. 나하구 동행해보지 않겠나?》

다나까교수는 망망대해와 같은 만주밀림을 비행기로 탐사하는 장쾌한 정경을 그려보는듯 가느스름한 두눈에는 생기가 넘치였다. 명망있는 과학자들은 례외없이 미지의 대륙을 탐사하는 과정에 위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였다. 세계일주를 하여 수많은 희귀한 화석이며 동식물들을 수집한 챨스 다윈이 바로 그러했고 린네도 그랬다. 다나까교수도 그들처럼 아직 과학자들에 의하여 탐사되지 않은 만주를 답사하고 실험유전을 위한 새로운 자료들을 얻어내려고 하는것이다.

응상은 다나까교수가 흥분하여 출발을 서두르는 이번 려행이 순수한 과학적목적을 추구하고있다는것을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중국인학생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할것인가. 전날 밤에도 그들은 갓 입수한 남경정부의 격문을 돌려 읽으며 저마다 격분을 터뜨리였다.

《〈일본군에 저항하지 말라. 인내성을 견지하라.〉 일본군은 동북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먹어들어가고있는데도 이같이 부르짖는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게 대륙인의 웅심깊은 〈자제력〉이라는거지.》

단편적으로 들려오는 소식들만 들어보아도 동북의 형편은 일본이 조선을 야금야금 먹어들어오던 금세기초의 형세와 너무도 방불했다. 그때에도 일제놈들은 조선에 건너와있던 일본거류민들의 생명보호요, 경인철도리권보호요 하는 그럴듯한 구실을 대고 군대를 끌어들이고 병영을 건설했다. 그때와 꼭 같은 방법으로 일본인들은 《만주개발》의 리권을 지킨다는 귀맛좋은 소리를 하면서 군대를 대대적으로 들이밀고있다.

그런데 그 군대들의 신속한 활동을 보장하는 군용비행기를 타고 만주밀림에 대한 탐사를 하겠다는것이다. 분명 다나까교수는 일본신문들에 소개되고있는 만주개발과 진흥이라는 말뜻을 그대로 믿고있거나 만주의 처처에서 울리고있는 총포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있는것이 아닌가.

어쨌든 그의 어조에는 일본제국이 광활한 만주를 자기의 수중에 틀어쥔 덕분으로 그 땅을 자유로이 답사할수 있게 된 긍지가 력력히 풍기고있었다.

응상이 왜땅에 건너온지 10여년 되였어도 여전히 조선사람이듯이 다니까교수 역시 일본의 리해관계에 조금도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였다. 그런즉 교수가 여적 그의 재능을 아끼고 소중히 여겨준것은 그를 장차 일본을 위해 복무하도록 만들고싶은 욕망으로부터 출발했던것이란 말인가.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믿어마지 않는 다나까교수는 어떤 사람인가.

(아,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던가.)

계응상은 온몸에 전률이 일어나는것을 지그시 누르며 다나까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는 한대지방시험장에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계절에 구애됨이 없이 연구사업을 진행할수 있는 남쪽지대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그런데가 어데 있나?》

《남중국의 광동.》

《광동? 그곳은 중국본토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곳은 중국양잠업의 중심지이지요.》

《음.》 교수의 얼굴에는 숨길수 없는 실망의 빛이 진하게 드리워있었다.

물론 그는 응상이 자기의 뜻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리라고만 생각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계응상을 놓아준다는것은 일본에게 있어서 큰 손실이라는것을 깨달았다기보다 온몸으로 느끼였다.

그래서 어제는 만주농사시험장에 장거리전화를 걸어 조선인농학사 계응상의 채용문제를 의논했다. 다나까교수가 그처럼 신임하는 사람이라면 마다할 리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만주에서의 사업조건은 특수하다. 당장은 연구사업도 사업이지만… 어쨌든 한번 데리고 오라. 만주의 밀림이야말로 다나까교수가 항상 천부금탕의 유혹적인 답사지로 여기고있는 곳이 아닌가. 때마침 다나까 요시마로교수는 계획했던 잠학에 대한 새책의 집필도 끝냈다. 그러나 혼자 떠나기는 적적했다. 계응상과 같이 예민한 관찰력을 지닌 제자와 동행한다면 그야말로 더할나위없는 말상대로 될뿐아니라 탐사소득도 더욱 확고하게 담보되리라.

다나까교수는 지나가는 말처럼 응상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지만 그에 대한 기대는 오래전부터 컸던것이다. 그는 안타까운 심정을 금치 못하며 힘주어 말했다.

《내 군의 번거로운 심정을 모르는바 아니네. 하지만 군이 우리와 함께 연구사업을 계속하여 과학의 거장이 되면 일본사람이 될것 같애. 그러나 천만에, 나는 그런 협애한 관념에 대해선 침을 뱉은지 오래네. 지금 세계의 지성인들이 무엇때문에 프랑스 빠리요, 도이췰란드의 베를린이요, 영국의 런던 같은 곳으로 몰려가나. 전인류적인것을 이룩하려면 세속적인 울타리를 벗어나야 하네. 우리와 함께 있으면 군은 미국의 모르간연구소나 영국의 유전연구소 같은데도 학술교류차로 드나들수 있고 그 나라 재단의 연구사업보조금을 받도록 도와줄수도 있네.

한데 군이 광동으로 가면 누구와 승벽을 다투며 누구한테서 새로운것을 섭취할수 있겠나? 자기를 망치지 않으려거든 부디 이 백발로인의 말을 귀담아듣게. 그렇게 하지?》

응상은 한순간 동요했다. 다나까 요시마로의 절절한 당부는 응상의 마지막지탱점마저 여지없이 뒤흔들어놓는듯 하였다. 세계의 최첨단기술을 일상적으로 섭취할수 있는 곳에 몸을 붙이면 과학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는데도 결정적으로 유리한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하지만 다나까 요시마로의 조언을 따른다면 우선 일본의 리익을 위해 《만주개발》에 종사해야 한다. 여기에 그 무슨 전인류적인것이 있으며 명실공히 참다운 과학적인것이 있을수 있단 말인가.

《아닙니다.》

응상은 오연히 머리를 들고 단호히 언명했다.

《저는 새 고장에 가서 난관을 이겨내며 과학을 통하여 자신의 자립적인 탐구능력을 검열해보렵니다.》

다나까 요시마로는 자기의 제자에게 과학지식은 가르쳐줄수 있었으나 사는법을 가르쳐줄수는 없다는것을 통탄해마지 않았다. 십년세월 공들여온 일이 이렇게 허사가 된다고 생각하니 억이 막혔는지 아래턱을 가늘게 떨며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러나 얼마후 그는 계응상과 자기사이에 뛰여넘을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있다는것을 감득하고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다나까교수 역시 자기 조국인 일본과 특히는 자기 리익과 명예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였던것이다.

《그럼 선생님.》 계응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금후의 과학연구사업에서 새로운 성과가 있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잘 가게. 난 자네가 독자적인 과학연구사업에서 특출한 업적을 이룩하리란걸 믿어의심치 않네.》

《고맙습니다.》 응상은 다시한번 스승의 손을 뜨겁게 잡아흔들고는 그의 방을 나섰다. 이렇게 헤여진 다나까 요시마로와 계응상은 두번다시 만날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한달이 지난 1930년 5월초 어느날 시모노세끼항에서 떠난 선체가 거무칙칙한 중국화물선 《광명》호 선미에는 색날은 양복우에 회색봄가을외투를 입은 한 중년의 남자가 배전에 기대서서 백파 출렁이는 창망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뿌연 해무에 잠겨 몽롱해진 수평선 저쪽을 눈아프게 바라보는 그 사나이의 눈매에는 헤아릴수없이 착잡한 빛이 얼른거리고있었다.

《큰 불행을 당한 사람이군.》

둥그런 선실창문을 안고서서 저 아래 배전에 굳어진듯 서있는 사나이를 내려다보며 늙은 갑판장은 단정하듯이 중얼거리였다. 어깨가 쩍 버그러진 늙은 배사람과 나란히 서있는 량반걸은 역시 그쪽에 시선을 준채 너부죽한 얼굴에 깊은 련민의 정을 띠우고있었다. 그는 늙은 배사람에게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당신은 타향살이의 애달픔이 어떤건지 누구보다도 잘 알겠지요?》

《그렇다고 할수 있지요.》

《저 사람은 계응상이라고 하는 조선에서 첫손에 꼽히는 잠학과학자라오. 8년동안이나 일본에서 이국살이를 하다가 작별인사차로 고향집에 한주일동안 다녀온 후 이제는 또 제 나라에서 수륙만리 떨어진 우리 나라로 건너간다오.》

《그렇댔군요.》

늙은 선원은 큰 눈을 슴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5월의 따뜻한 해빛은 가없는 바다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있었다. 어머니의 애무에 몸을 맡긴 아기런듯 바다는 세상근심을 모르고 태평스레 누워 조용히 흥떡이고있었다.

그러나 태양이 검은 구름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사위는 갑자기 을씨년스러워졌다. 언제 상냥한 미소를 지었더냐싶게 바다는 심술궂게 뒤설레이였다.

검푸른 파도는 흰 이발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살뜰한 녀인의 손길과도 같던 바람결에는 가시가 돋히였다. 갑판우에는 썰렁한 랭기가 배회하고있었다.

배전에 서있던 계응상은 옷깃을 세우고 그속에 중절모를 쓴 갸르스름한 얼굴을 묻었다. 물머리를 일으켜세우는 거친 바람은 그의 옷자락과 옷소매를 마구 잡아흔들어놓고있었다.

《손님을 선실로 모셔들일가요?》

갑판장은 량반걸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놔두시오. 작별인사를 하게 합시다. 여기가 이 배길에서 그의 조국이 제일 가까운 곳인가 보오.》

조용히 뇌이는 량반걸의 목소리는 갈려나왔다.

그는 흐려오는 눈길을 슬며시 돌리며 자신에게 묻고있었다.

《과연 내가 계응상을 우리 나라로 초빙해가는것이 잘한 일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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