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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회
설소저는 본색이 비로소 탄로되고
황공자는 성례하고 원앙부부 이루다


설소저의 상주문은 그날로 탑전에 올라갔다.

그 상주문을 읽어본 임금이 너무도 희한한 사실에 크게 놀라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도원수 설연이 사내가 아니라 아녀자라니 웬 말인가! 금세에 이런 기특한 일이 어데 또 있으리오.

설연이 섬약한 규수의 몸으로 호걸이라 자처하는 사내대장부들도 범접할수 없는 당당한 영웅의 일을 실행하여 나라에는 큰 공을 세우고 부모에게는 그 원쑤를 갚았도다.

규수의 몸으로서 충정과 용맹을 지니고 의리와 효도를 다 갖추었으니 세상에 설씨같은이는 다시 없으리다. 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연신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소식은 날개가 달린듯 삽시에 대궐안에 퍼졌다. 황실의 종실들과 조정의 대신들, 문무백관들이 도원수 설연이 규수임을 비로소 알고는 크게 놀라며 세상에 다시 없을 희한한 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상주문을 올린 그날부터 설소저는 남복을 아예 완전히 벗고 규수의 행실을 하며 문밖출입을 삼가하고 낮이나 밤이나 오로지 북해에 정배간 아버지 설시중이 돌아올 날만을 손꼽으며 기다릴뿐이였다.

도원수 설연이 사내가 아니라 랑자라는 소문은 황운의 귀에 제일먼저 날아들어갔다.

설소저를 눈앞에 뻔히 놓고도 알아보지 못한 황운이였다. 너무도 놀라운 소식에 억이 막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쾅쾅 쳤다.

(그럼 도원수가 설시중의 딸인 봉선이였단 말인가?! 아-)

그달음으로 설연의 창순궁으로 질풍같이 쳐들어갔다. 대문을 열어제끼고 직방 설소저가 거처하는 침소로 달려가는 황운의 기상은 당장 무슨 일을 칠듯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의 손에는 설시중이 귀양가며 남긴 금팔찌가 들려있었다.

동리화가 다급히 설소저에게로 뛰여가 황공자가 왔노라고 기별하는데 벌써 황운이 방안에 들어섰다.

서안에 의지해 책을 읽고있던 설소저가 당장 무슨 일을 칠듯 무서운 기상으로 방안에 들어서는 황운을 일별하고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동리화가 열에 뜬 사람마냥 사나운 기상으로 들어서는 황운을 긴장해서 일별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다.

한걸음한걸음 설소저앞으로 다가서는 황운의 시퍼런 기상앞에 설소저는 자기 몸이 한줌으로 졸아드는것 같았다. 황운의 입에서 내뿜는 열기가 순식간에 설소저를 태울듯싶었다.

《어쩌면 이리도 매정할수가 있소! 어쩌면 이럴수 있는가. 어서 말해보라!

그래, 내가 봉선이를, 그대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르는가!

미련한 이놈은 제 련인을 매일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대야 날 알아보지 않았소?

그래, 이 황운이 가슴이 터져 죽는걸 보자고 일부러 찾아와서 물어본 나에게 아닌보살했소? 그리도 내가, 이 황운이가 죽기를 바라는가!》

황운의 억실억실한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목소리는 격정으로 떨렸다.

설소저는 진분홍빛으로 물든 아릿다운 얼굴을 조용히 들었다. 깊이를 가늠할수 없는 그윽하고 검은 두눈에 금시라도 쏟아질듯 맑은 진주가 찰랑거리다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방울방울 굴러내렸다.

정찬 눈길로 황운을 응시하며 설소저는 나부시 무릎을 꿇었다.

《불미한 이 소녀를 너그러이 용서하소…이다.

날마다 공자님을 눈앞에 그려보았고 또 전장을 달리는 공자님의 신상에 무슨 변이 날가봐 마음조이며 잠못 들던 이 소녀이옵니다. 공자님을 앞에 두고서도 혀를 깨물며 억지로 내색하지 말아야만 했던 이 소녀입니다. 그러자니 소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아시나이까, 공자님-

공자님을 속인 이 봉선이를 용서해주사이다.

심중의 온갖 사연 다 담아 드리는 소녀의 이 절을 너그러이 받아주…사이다!》

절을 하고난 설소저가 바닥에 주저앉아 세찬 오열에 온몸을 떨었다. 여지껏 참아오던 처녀의 순정의 눈물이였다. 꿈속에서도 남이 들을가 입술을 깨물며 참고참았던 소중한 눈물이였다.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는 가장 순결하고 가장 뜨겁고 가장 열렬한 정의 눈물이였다!

소리치며 몸부림치는 설소저를 굽어보던 황운이 무릎을 꿇고 소저의 어깨를 다정히 껴안았다.

《전장을 누비며 원쑤를 전률케 하던 장군이 울다니…

내 그만 실언했소. 내 어찌 송죽같은…봉선이의 그 마음을 …모르리오.》

황운이 그 억센 품에 와락 설소저를 그러안았다.

《소저!》

《공자님!》

쓰러지듯 설소저가 황운의 품에 통채로 안겼다. 뜨겁게 달아오른 두 청춘이 하나로 굳어졌다. 황운의 넓은 품에 안겨 소저는 소리내며 마음껏 울었다, 마음껏 웃었다. 곡절많은 만단심회가 그 울음, 그 웃음속에 사라져버리는가 사나이의 넓고도 억센 품이 그리도 따스한줄 소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 이런 사내가 있어 내 사선을 넘나들며 원쑤를 멸하지 않았던가. 이런 사내의 믿음과 정이 있어 내 고독하지 않았고 외롭지 않았다. 이런 사내와 앞날을 약속했기에 내 무서움을 몰랐고 용감했노라!

한동안 시간이 흘러 두 청춘남녀는 울고웃으며 지나간 세월의 년륜을 따라 걸어온 인생경로를 돌이켜보았다. 그들의 앞에 놓인 서안우에서 한쌍의 금팔찌와 옥비녀가 류달리 밝은 빛을 뿌리고있었다.

동리화가 조용히 들어섰다. 그의 손에 차종지 두잔이 들려있었다.

《리화가 오히려 우리 일로 소녀보다 더 마음을 썼소이다.》

황운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동리화를 바라보았다.

《네 마음이 참 갸륵하구나. 헌데 칭찬보다 내가 너에게 죄를 주어야 할가부다.》

동리화가 고운 눈을 반쯤 들어올렸다.

《애매한 소녀에게 왜 죄를 주자 하나이까?》

황운이 얼굴에 짐짓 성난 기색을 띠우나 눈에는 실웃음이 어려있다.

《네 죄를 정녕 모른단 말이지. 네 이미 아씨의 본색을 알고있었는데 왜 나에게 한마디도 알리지 않았느냐. 그러니 상전을 속인 죄로 벌을 줌이 마땅하도다.》

동리화가 황운이 절 놀린다는것을 깨닫고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그거야 아씨의 당부이신데 소녀의 주인은 아씨이지 도련님이 아니지 않소이까. 제 주인과의 약속을 배반함은 더 큰 죄인줄로 아오이다. 그러니 도련님은 소녀를 책망하실 권리가 없는줄 아옵니다.》

그 말에 황운이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자 보니 네 말주변이 보통이 아니구나. 내 그 말에 꼼짝 못하겠구나. 내 손을 들었어.》

동리화의 얼굴이 노을마냥 붉어졌다.

동리화가 고개를 숙여 례를 차리고는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인물도 곱고 마음도 고운 애오이다. 얼마나 령리하고 착한지 소녀의 마음에 꼭 드오이다.》

설소저가 동리화가 사라진 문쪽을 바라보며 감탄조로 하는 말이였다. …

장장 십칠년세월 궁벽한 삼수에서 정배살이를 하는 황현의 나이는 어느덧 예순고개를 넘어섰다.

엄혹한 정배살이속에서도 그의 생을 버티고있은것은 아들 황운이 어엿이 자라 나라의 대들보가 되리라는 희망이였다. 외진 정배지에서 애오라지 그 한가닥 희망이 있었기에 황현은 간신무리들이 물러나고 나라가 평정되여 백성들이 평온해질 날이 꼭 오리라고 믿고있었다. 그 믿음은 아들 황운에 대한 애착과 사랑 그리고 아들을 양육하는 친구 설공에 대한 기대, 나라와 임금에 대한 변심없는 충의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그런 황현이였지만 척박하고 외진 곳에서 정배살이를 하다나니 황성의 소식엔 전혀 깜깜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황현이 밭에서 김을 매고있는데 문득 조정에서 사신이 찾아와 부른다는것이였다.

(갑자기 사신이란 웬 말이며 어째서 부른다는거뇨?)

이런 의문을 안은채 황현이 호미를 들고 허둥지둥 찌그러져가는 자기 초가집으로 달려가니 한적한 촌시골에 어울리지 않는 으리으리한 사인교가 행길에 서있고 숱한 사람들이 모여 쉬쉬거리다가 자기를 보고는 흠칫 놀라는것이였다.

뜨락에 들어서는 그를 사모관대를 정바르게 두른 사신일행이 생각외로 살갑게 맞아주었다. 중년의 사신이 위엄있게 입을 열었다.

《황현은 어명을 받들지로다!》

황현은 걷어올린 옷섶을 내리고 두무릎을 꿇고 정중히 조서를 받은 후 북쪽을 향해 네번 절하며 은혜에 사례하였다. 조서를 읽어가던 밭고랑같은 주름이 건너간 황현의 볼편이 움씰거렸다. 조서의 내용이 그를 깜짝 놀래웠던것이다.

그 내용인즉은 자기 아들 황운이 반란을 일으킨 역적들을 소멸하고 대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아비의 죄를 벗기고 성상이 자기에게 선조성의 좌상벼슬을 하사하고 황성으로 부른다는것이였다.

황현은 먼지가 풀썩이는 맨 땅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흑흑 흐느꼈다. 반백의 귀얄수염이 세차게 요동치고 그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더니 꺽꺽 숨마저 막히는듯 한 곡성이 입에서 터져나왔다. 둘러섰던 사람들이 눈굽을 찍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그만 고정하시고 황성으로 가시오이다. 성상께서 빨리 데려오라고 하셨소이다.》

사신이 독촉하는 말이였다. 황현은 흐리멍텅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꿈이요, 생시요?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소?》

놀랍기 그지없는 꿈같은 일이였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한두해도 아니고 장장 십칠년을 외진 이곳에서 정배살이를 하던 지겹던 지난날들이 이젠 한갖 과거의 일이란 말인가.

눈굽을 훔치며 사신이 이끄는대로 사인교로 발길을 옮기던 황현은 걸음을 뚝 멈추고 울타리마냥 빙 둘러선 인총을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새 늙은 이몸을 위해 마음쓰며 진정으로 돌봐주어 고맙습니다. 내 여러분들의 그 마음과 진정을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지 않겠습니다.》

오랜 세월 변심없이 대역부도죄로 귀양온 그를 조금도 꺼리지 않고 진심으로 위해주고 돌봐준 근면하고 소박한 백성들이였다. 서발막대 휘둘러도 온전한 헝겊 하나 걸리지 않는, 손에 쥔것이 하나도 없는 째지게 가난한 살림속에서도 우국충정을 품고 정배살이하는 황사정을 성의껏 위해주고 돌봐준 평범하고 량순한 이 나라 백성들에게 황현은 진정을 담아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삼수를 떠나 황성길에 오른 황현은 아직도 이 모든것이 믿어지지 않고 거짓말같아 수레우에서 사신일행에게 묻고 또 물었다. 사신일행이 웃으며 부원수 황운이 반란군을 소멸하는데서 거둔 공로에 대해 아는껏 자상히 이야기해주었건만 그래도 황현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이럭저럭 일행은 황성을 향해 가던 도중 홍주에 이르게 되였다.

삼수를 떠나 황성으로 오던중 홍주에서 황현은 미리 와서 기다리던 아들과 상봉하게 되였다.

먼발치에서부터 아버지가 탄 사인교를 알아본 황운이 정신없이 달려왔다. 몇년만에 만나는 아버지인가. 네살때 헤여진 아버지였다.

《아버님!-》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황운은 황현의 앞에 어푸러졌다.

반백의 귀얄을 날리며 황현이 땅에 엎드린 아들의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이 누구냐? 네 정녕 내 아들 운이란 말이냐?》

《아버님-》

아버지품에 덥석 안긴 황운은 목놓아 통곡하였다. 장장 스무해, 어머니를 잃고 꿈속에서도 찾고찾던 아버지였다.

《어디 보자, 아들아!》

황운을 으스러지게 그러안은 황현의 얼굴에 비오듯 눈물이 흘렀다.

한참이나 아버지품에 안겨 몸부림치던 황운이 얼굴에서 눈물을 거두고 정숙한 자세로 다시 무릎을 꿇어 깊숙이 절을 하였다.

《그 험한 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나이까. 불효자 이 운이의 절을 받아주사이다.》

《네 나라위해 큰 공을 세웠다니 이 아비의 마음 기쁘기 그지없구나. 헌데 네 어민 어디에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뇨?》

다시 아들을 그러안은 황현의 주름깊은 얼굴로 흐르는 눈물이 황운의 얼굴에 뚝뚝 떨어졌다. 마중나온 사람들과 황사정을 데리고오던 사신일행들도 눈물없이 볼수 없는 부자간의 상봉에 얼굴을 돌렸다.

이윽고 황운이 황사정과 함께 황성으로 돌아가는데 임금이 내린 조서에 따라 지나가는 고을마다에서 관장들과 관속들, 백성들이 저저마다 떨쳐나와 그들 부자를 맞이하는데 그 요란한 영접의식에 황사정은 눈이 퀭해졌다.

한편 북해에서 사신의 조서를 받은 설시중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더럭 의심이 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내 본래 아들이 없는데 설연이 도원수가 되여 대공을 세웠다니 이 무슨 괴이한 일인고?)

사신을 따라 황성으로 올라오면서도 그 의혹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황성으로 오던 설시중은 중로에서 임금이 직접 파한 신하들의 마중을 받게 되였다. 그들을 통해 설시중은 소저가 보낸 서신 을 받았다.

서신을 읽고서야 시중은 딸이 남자로 변색하고 반란적을 멸하고 큰 공을 세웠음을 알고는 일변 기쁘고 일변 슬펐다. 딸의 장거가 대견하고 기뻤으나 에미를 잃고 오죽하면 남자로 변장을 했을가 생각하니 딸이 겪은 인생행로가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문밖출입을 하지 않고있던 설소저는 설시중이 북해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마중하러 나갈것을 청하는 상주문을 올리니 임금이 쉬이 허락하며 삼백궁녀로 소저를 호위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어 임금은 조정의 대신들을 내보내여 황운과 설소저의 두 집안사람들을 맞아오라고 하였다.

금덩에 올라 삼백궁녀의 호위를 받으며 록의홍상을 입고 성밖 이십리까지 나온 설소저는 설시중의 앞에 이르러 인사도 못한채 슬피 울기 시작하였다.

《아…버…님…》

폴싹 땅에 주저앉은 설소저가 오열을 애써 누르며 나부시 절을 하다가 그만에야 땅에 엎드려 대성통곡하였다.

《네 정녕 내딸 봉선이 옳으냐?! 어서…》

설시중이 허리를 구부려 소저를 일으켜세우고 소저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제 에미를 꼭 빼물은 딸이였다. 딸이 걸어온 운명에 가슴이 미여지고 아녀자의 몸으로 영웅의 대업을 성사시킨 그 소행이 너무도 대견하여 소저를 꼭 품에 안았다. 먼저 떠나간 안해의 체취가 딸애의 몸에서 풍기는듯 하여 엄혹한 정배지에서도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던 억센 설시중이 아이마냥 소리내며 울었다. 삼백궁녀들도 쿨쩍거리고 명을 받고 마중나온 대신들도 눈을 슴벅거렸다.

정배지에서 풀려나오는 부친들을 맞이하고 황성으로 돌아온 설, 황 두 장군은 임금의 지시로 직방 대궐에 안내되였다.

설시중과 황사정이 엎드려 성상의 은혜에 사례하니 임금이 몹시 기뻐하며 반겨맞아주었다.

두사람에게 친히 어주를 부어주고난 임금이 감개무량한듯 절절한 목소리로 말을 뗐다.

《짐이 눈이 어두워 충신들을 모해하는 간신역적들의 죄악을 분간하지 못하고 경들을 멀리 정배보냈으니 정말 후회막급이로다.

허나 경들의 자녀들은 지극한 충정과 뛰여난 재능으로 흉악한 역적들을 멸하고 나라와 사직을 안보하였으며 또 사경에 처하였던 짐의 목숨을 건져주었도다. 이는 다 경들이 훌륭한 자녀를 두었기때문이로다.

경들의 자녀들인 설연과 황운은 비록 나이는 어리나 나라앞에 대공을 이루고 종묘사직의 억년기틀의 밑거름을 마련하였도다. 대끝에서 대가 자란다는 말이 과시 틀린데 없도다.

정말 경들의 자녀들은 세상에 없는 충신이고 영웅들이며 발해의 대들보로다. 더구나 설연이 녀자의 몸으로 영웅의 일을 실행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설, 황 두 장군의 공적은 죽백에 길이 드리울 대공이로다.》

설시중과 황사정이 임금의 치사에 너무 황송하여 연신 사례하였다.

《신들이 불충하여 성상께 근심만 끼쳤으니 그 죄는 만사무석(죄가 매우 커서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이옵니다. 성상께서 이렇듯 은혜를 베푸시니 황공하여 몸둘바를 모르겠소이다. 더구나 불미한 자식들에게 그토록 은총을 베푸시고 오늘은 또 신들에게 나라의 중한 벼슬을 내리셨으니 엎드려 빌건대 그 관직을 물리시여 신들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케 하옵소서.》

임금이 시종일관 만족한 기색을 지으며 그들의 청을 승낙하지 않고 재삼 위로하였다.

황사정과 설시중이 탑전에서 물러나 임금이 특별히 황운과 설소저에게 내여준 궁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자식들을 만나 그간의 회포를 나누니 그 심정을 어디에 비기리오.

다음날 임금이 황, 설 두 장군이 부친과 상봉함을 축하하고 또 장수들의 공로를 평가할겸 큰 잔치를 베풀었다. 전왕과 계루왕이 또 많은 례단을 보내왔다. 출전한 장수들이 다 참례하였으나 오직 설소저만이 규수의 례의를 지켜 오지 않으니 임금이 경차관을 보내여 데려오라고 지시하였다.

《짐이 오늘 출전장수들의 공로를 평가하려 하거늘 어찌 녀자의 몸이라고 하여 참례치 않느뇨?

오늘의 잔치는 다른것과 류별한것이니 빨리 들어와 짐의 근심을 덜지로다.

만일 경이 참례치 않는다면 짐이 모든 장수들을 거느리고 경의 집에 가서 공로를 표창하는 의식을 거행할것이니 경은 그리 알고 처신하라.》

설소저는 사양치 못하고 즉시 복색을 고쳐입었다.

머리에 류화정건을 쓰고 몸에 먹라자금전포를 입고 허리에 순금혁띠를 띠고 백마에 앉아 표연히 나아가니 규중에서 아미를 단장하고 분성적으로 치레하던 미인이 변하여 용모가 뛰여나고 기상이 표연한 재상이 되였다. 보는 사람마다 모두 입을 모아 감탄하였다.

설소저가 경차관을 따라 대궐아래에 이르러 부복하니 임금이 희색이 만면하여 즉시 불러 상좌에 앉으라고 지시하였다. 소저가 네번 절을 하며 사례하니 임금이 더욱 기특히 여기며 재삼 권하였다.

《경이 비록 녀자의 몸이나 또한 도원수인지라 어찌 상하간의 례의를 어기며 그 공로를 의론치 아니하리오.》

설소저가 할수없이 상좌에 자리를 정하고 아뢰였다.

《신첩에게 비록 크지 않은 자그마한 공로가 있다지만 성은이 너무 망극하시니 어찌 감당하리까.》

임금이 여러 장수들을 둘러보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설장군이 한번 출정하여 짐의 위급함을 구하고 종묘사직을 보존하였으니 그 공이 으뜸이로다.》

소저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였다.

《아니옵니다. 부원수 황운이 백번 싸워 페하의 위급함을 구하고 종묘사직을 안보하였은즉 사실 공로를 따지면 황장군의 공이 으뜸이지 어찌 신첩의 공이겠나이까.》

임금이 다시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전장이란 사냥하는것과 같아 지휘하는 사람이 첫째요, 쫓아 잡는 사람은 그 지휘를 따름이라 도원수 설연이 비록 싸움은 얼마 하지 않았으나 매번 신묘한 계략을 내여 승패를 결단했은즉 이는 사냥에서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것과 같도다.

부원수 황운이 짐을 구하였으나 이는 도원수 설연의 가르침이 아니면 어찌 도적을 멸하였을고? 안그런가?》

황운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정말 지당한 말씀이오이다.》

이윽고 임금이 설소저를 봉하여 숙록후 복야를 제수하고 황운은 충렬후 대내상으로, 조명걸은 정당성 좌사정으로, 우시춘은 정당성 우사정으로, 서하수는 지부경으로, 염성태는 신부경으로 봉하고 나머지 장수들에게도 각각 봉작을 돋구어주니 문무백관들이 목청껏 만세를 부르며 그 덕을 칭송하였다.

황운과 설소저가 봉작이 너무 중하니 놀라와하며 섬돌아래에 내려가 부복하고 아뢰였다.

《신들이 비록 자그마한 공을 세운것은 사실이오나 어찌 이런 중임을 받을수 있겠소이까. 삼가 아뢰건대 페하께옵선 신들의 관작을 도로 거두시옵소서.

대신 청할것이 있사온대 다름아니라 신들의 부친들이 삼수와 북해의 백성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보존하였으니 두 지방 백성들의 조세를 감해주시고 또 신들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가 늙으신 부친들을 봉양케 하여주사이다.》

임금이 절레절레 머리를 저으며 승낙하지 않았다.

《짐이 경들의 공을 입어 사직을 지켜냈으니 그 공을 생각하면 천하를 반분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할수 있거늘 어찌 이런 조그마한 관직을 도로 거두리오.

허나 경들이 청하는 말을 쫓아 삼수와 북해 두 고을은 일체 잡역을 삼년동안 면제하노라. 그러니 다시는 관직을 도로 거두라는 말을 꺼내지 말지어다.》

이어 임금은 황족들에게만 주는 제후의 칭호를 부친들에게 제수하였다. 황운의 부친 황현은 허왕으로, 설소저의 부친 설영은 서왕으로 봉하고나서 의부경(례부상서)에게 분부하였다.

《황운과 설연이 어려서 서로 언약하였다고 하니 이제는 다 성장하였을뿐아니라 나라의 중임을 맡은 대신들이라 늦었지만 이제라도 혼례를 크게 차리라. 짐이 마땅히 혼례일식을 마련할것이니 의부에서 맡아 실수없이 실행하도록 하라.》

의부경이 이어 길일을 택하니 열흘이라는 시일이 앞에 남아있었다.

혼인날이 다달아 황운이 1품례복으로 위엄있게 관복을 차려입고 창순궁에 나가 설소저를 맞아 돈화궁에 돌아오는데 설소저도 1품례복으로 삼백궁녀를 거느리고 행하니 그 위엄과 아름다움 여지없이 엄숙하고 찬란하여 제왕후에 가이 비길수 있었다.

설소저가 돈화궁에 이르러 황공자와 함께 혼인례식을 실행하는데 꽃같은 그 자태엔 장대에 올라 백만대군을 호령하던 이전날의 위풍은 티끌만큼도 없고 단지 연연하고 아릿다운 용모만 엿보여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교배지례를 마치고 신방에 들어선 두 영웅이 동방화촉아래 마주앉았으니 어찌 례사로운 신랑신부와 같으리오.

허나 설소저는 본시 처녀의 몸이라 그 아릿다운 자태에 부끄러워 하는 빛이 완연히 내비친다. 황운이 황황 불타는 련정을 애써 누르며 웃음 띠우고 롱말을 붙였다.

《그대가 전날에 전장에 있을 때에는 기상이 엄정하고 말이 위엄있더니 오늘은 아녀자의 부끄러워하는 태도를 보이니 새삼스레 다시 보게 되는구려.》

아미를 숙이고 얼굴이 익은 홍시마냥 빨개졌던 소저가 그 말에 눈을 들어 황운을 살뜰히 바라보며 앵도입술을 열었다.

《첩이 비록 지금은 그러하오나 어명을 받들어 도원수부월을 잡고 장대에 앉았을 때에는 상공도 휘하장수라 위엄이 없지 않았소이다. 금일에 첩이 상공을 맞아 백년가약을 맺고 인륜을 정하는데 어찌 감히 녀자의 행실을 버리겠나이까.

상공이 첩을 이렇듯 놀리시니 만일 타일에 또 국사를 당하여 첩이 다시 도원수가 되면 그땐 상공이 부복하고 령을 받아야 할줄 아옵니다.》

황운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화촉을 물리고 비단이부자리로 함께 나아가니 말그대로 푸른 호수에 노니는 한쌍의 원앙인들 이보다 더 정다우랴.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였던 님을 위한 정으로 기나긴 밤이 어느새 지났는지 몰랐다. 소쩍새도 부러워 소리를 죽이는 꿀같이 달고단 밤이였다.

이튿날 대내상 황운이 부인 숙록후와 함께 전왕과 계루왕에게 문안하고 대궐에 나아가 사례하니 임금이 여간 기뻐하지 않았고 황후가 또 설부인을 내전으로 불러들이고 금은패물을 많이 하사하였다.

대내상 황운은 돈화궁을 각각 나누어 처소를 정하는데 효양각은 부친 허왕이 거처하게 하고 내궁은 숙록후의 처소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앞의 충의당은 설중매의 처소로 정하고 송목정은 대내상 자기가 백관들과 함께 정사를 의론하는 처소로 정하였다.

또 설부인의 창순궁은 동리화에게 맡겨 비복들을 거느리고 빙부(장인) 서왕을 모시고 봉양하도록 하니 설부인이 대내상의 세심한 조처에 감복한다.

창순궁 문루에는 임금이 직접 써서 하사한 《발해국 충렬아문》이라는 현판을 걸어놓았으며 효자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대내상이 상주하여 룡주와 호주에 돌아가 묘소에 분향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룡주와 호주를 뚝 떼서 황씨가문과 설씨가문의 봉지로 삼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내상이 숙록후와 더불어 허왕, 서왕을 모시고 룡주에 이르러 양부인묘소에 제를 지내고 옛집을 찾아가니 집터는 불탄 자리만 남아있어 비장함을 금치 못하여 눈물을 머금었다.

숙록후가 또한 호주의 조부인묘소에 제를 지내고 애통함을 금치 못하다가 옛집에 돌아와보니 비복들은 그새 다 죽고 운랑과 젊은 사람 몇이 조부인사당을 세우고 돌보고있었다.

설부인이 감동하여 조부인사당에 제를 지내고 재물을 친척들과 옛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유모 계섬을 위하여 《충비문》을 세우고 잔치를 베풀어 동리사람들을 모두 불러 함께 즐기도록 하였다.

이후 청룡산에 들어가 선돌앞에서 제를 지내고 시비 운랑 등을 거느리고 량켠 부친들을 모시고 황성으로 올라오니 그 행렬을 보는 사람모두가 황사정과 설시중이 끌끌한 자식들을 두었다고 부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삼수와 북해의 백성들은 그들대로 삼년동안 조세를 면하도록 해준 황사정과 설시중을 위해 사당을 짓고 봄과 가을에 분향하며 그들의 복을 기원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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