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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회


황, 설 두 장군이 개가를 울리며 돌아오고
전왕과 계루왕이 잔치를 베풀어 사례하다


다음날 임금은 역적들을 엄벌에 처형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반란을 일으켜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언감생심 옥좌를 넘보던 역적들을 티끌만 한 사정을 두지 말고 엄벌에 처할지로다.

반란의 괴수인 진권, 진걸형제와 그에 추종하던 양철, 양달부자를 황성장안의 네거리에 끌고가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섯필의 수레에 사지를 매여 온 나라를 한바퀴 돌게 하라.

그리고 진권의 도당들과 일가친척은 삼대멸족시켜 온 나라에 다시는 역적무리들이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훈계할지로다!》

역적괴수들을 실은 수레가 지나가는 고을과 길마다에서 백성들이 다투어 뛰쳐나와 네 흉적의 살을 저며내고 그 뼈를 산산이 부서뜨리며 침을 뱉았다.

역적괴수들을 처형한 후 임금은 다시 조서를 내려 온 나라에 대사령을 내리고 이번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군사들의 집안을 잘 돌봐주라는 지시를 각 고을에 떨구었다.

이어 임금은 대궐안에 도원수, 부원수 두 장군과 출전장수들을 위한 태평연을 성대하게 차리고 조정의 대신들을 모두 참례시켰다.

외전에는 장수들과 조정의 대신들이, 내전에는 그들의 부모와 부인들이 모여 마음껏 먹고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기게 하였다. 임금이 직접 출전장수들에게 어주를 내려 모두가 크게 취해 웃고 떠드는 소리, 노래소리가 대궐에 가득 찼다.

태평연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지만 오직 설연과 황운 두사람만은 부모와 다른 친척이 없으니 홀로 고독하게 앉아 그 모습을 서글프게 바라만 볼뿐이였다. 슬픔과 비애를 억제 못하는 설연과 황운의 눈에서 자연히 눈물이 흘러나와 옷깃을 적셨다.

그 모습을 띄여본 임금이 의아하여 물었다.

《오늘의 태평연은 두 장군을 위해 차렸다고 해도 틀리지 않도다.

반란적을 멸했다지만 아직 천하는 분분하여 평정하지 못한 일이 많아 출전장수들의 공로도 평가하지 못하고있노라.

허나 이 태평연에서 누구나가 다 즐거워하는데 오직 두 장군만 슬퍼하니 무슨 까닭이 있느뇨?

경들은 숨기지 말고 품은 생각을 사실대로 터놓으라.》

일신상의 슬픔에 잠겨 임금이 모처럼 마련한 연회의 흥그러운 분위기를 깨뜨렸다는 송구스러움에 설연과 황운이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신들은 초야에 묻혀있던 촌백성으로 외람되게 중임을 맡았고 또 여러 장수들의 도움을 받아 반란적을 소멸하고 개가를 울리며 돌아왔을뿐이오니 무슨 큰 공로가 있겠소이까.

성상께서 신들에게 과분한 은총을 베푸시여 이런 좌석을 마련해주셨는데 신들이 그만 일신상의 슬픔에 잠겨 성상께 근심을 끼쳤으니 죄송하기 그지없나이다. …

사실은 신들에게 말 못할 사연이 있어 슬퍼하던중이옵니다.》

《슬픔이라니? 그게 뭔지 어서 터놓으라.》

《딴 장수들은 부모처자를 데리고 잔치에 참례하였지만 유독 부모없이 홀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것은 신들뿐이옵니다. 그래서 슬픔을 금치 못해하던중이옵니다.》

임금이 놀라며 되물었다.

《경들은 부모가 다 없느뇨?》

설연이 먼저 아뢰였다.

《지엄한 성상께 어찌 속이리까.

신의 부친은 무거운 중죄혐의로 외진 곳에 정배갔사오이다. 자식으로서 부친이 지금 살아계시는지 그 생사여부를 모르고있으니 스스로 마음이 슬펐나이다.》

황운이 일어서서 머리를 수그렸다.

《신의 처지도 도원수와 같소이다.》

임금이 두 장군의 그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 경들의 부친은 무슨 죄를 범하였고 언제 귀양갔느뇨?》

설연이 아뢰였다.

《신의 아비는 전 선조성 시중 설영인데 모년 모일에 역적 진권의 모함을 입어 북해에 정배갔사온데 금년이 일곱해가 되옵니다.》

황운이 아뢰였다.

《신의 아비는 전 정당성 좌사정 황현이온데 모년 모일에 진권의 모해를 받고 삼수에 귀양간지 지금 십칠년이옵니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는 더욱 놀라와하였다.

《경들의 부친이 설시중과 황사정인줄 짐은 알지 못했노라.

흉측한 역적의 참소에 넘어가 충신을 사지판에 정배보내고 또 경들의 부자로 하여금 평생의 한을 품게 하였으니 짐이 과시 눈이 멀었도다. 경들을 보기가 실로 부끄럽도다.

그러나 두 장군이 반란적을 멸하여 원쑤를 갚았으니 천도가 어찌 무심하리오.

짐은 늦게나마 경들을 위할수 있게 되니 마음이 다행스럽도다. 그런 슬픔이 있을진대 어찌 이제야 짐이 깨닫게 하느뇨?》

장군이 무릎을 꿇으며 그 은혜에 사례하였다.

《신의 아비들이 죄가 있사온즉 신들도 다 죄인이 아니옵니까. 그래서 사정을 감히 아뢰지 못하였으니 황공무지로소이다.》

임금이 연신 한탄하고 그자리에서 좌중을 향해 조서를 내렸다.

《짐이 눈이 어두워 충신을 정배보냈으니 이제라도 바로잡으련다. 당장 사자를 파하여 정배간 도원수 설연과 부원수 황운의 부친들을 불러올것이니라. 그러되 전 정당성 좌사정 황현은 선조성 좌상으로, 전 선조성 시중 설영은 중대성 우상의 벼슬을 제수하노라.

사자는 이제 당장 그들의 벼슬직첩과 인수를 가지고 삼수와 북해로 떠나 그 두사람의 죄명을 벗기고 빨리 데려오도록 하라.》

대신들이 어지를 받고 그자리에서 삼수와 북해로 사자를 파하였다.

장군이 눈물을 좔좔 흘리며 네번 절하고 아뢰였다.

《페하께서 신들의 사정을 헤아리셔 부친들의 죄를 벗겨주고 이렇게 벼슬을 하사하여 부르시니 망극한 그 은혜 백골난망이로소이다.》

《아니, 짐이 늦게나마 경들을 위해 한가지라도 해준것이 오히려 다행이로다. 부친들의 충의지심은 짐이 이미전부터 알고있었노라. 그러니 이젠 그만 슬퍼하고 이 기쁜 좌석에서 마음껏 즐기도록 하라. 그래야 짐의 마음도 가벼울게 아니냐.》

장군이 목이 메여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러는 두 장군을 바라보는 출전장수들과 대신들이 제 일처럼 기뻐하니 연회의 분위기는 일층 고조되였다. 설연과 황운은 임금과 자리를 같이한 연회에서 여러 장수들과 종일토록 구김살없이 웃고 떠들며 즐기였다.

연회가 끝나 밤이 이슥해서야 대궐에서 돈화궁의 자기 처소로 돌아온 황운의 심중에 당혹감이 떠날줄 몰랐다.

(설대인은 본래 아들이 없고 다만 딸 하나만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도원수 설연이 그 아들이라 하니 괴이하기 짝이 없도다. 내 한번 물어보아 의심을 풀리라.)

이튿날 아침 황운이 도원수가 거처하는 창순궁으로 찾아갔다.

설연의 시비인 동리화가 얼굴에 웃음을 함뿍 짓고 맞아주는데 어찌나 살뜰하고 친절한지 황운이 옹색할 정도였다. 동리화의 안내를 받으며 방으로 들어가니 설연이 얼굴에 밝은 인상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반기였다.

인사를 마친 후 황운은 조정사를 두고 이것저것 두서없이 이야기하다가 불쑥 물었다.

《장군에게 한가지 물을게 있는데 일없소이까?》

갑작스레 들이대는 황운의 물음에 태연스레 응대하는듯 하지만 설연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무슨 일인데 주저하나이까. 꺼리지 말고 물어보소이다.》

도원수 설연의 옥을 다듬은듯 해말쑥한 얼굴을 바라보는 부원수 황운의 눈에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 불길은 당장이라도 설연의 온몸을 깡그리 태울것만 같았다.

《소장이 알고있는 설시중에겐 본래 아들이 없고 다만 봉선이라 부르는 딸 한명이 있었소이다. 아마 어디엔가 살아있으면 소장과 동년이오이다. …

어제 성상앞에서 장군은 자기가 설시중의 자제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이 사실이오이까?

그렇다면… 소장은 의혹을 금할수 없나이다. 정녕 장군은 설시중의 자제가 틀림없나이까?》

설연은 숯불이 이글거리는 황운의 눈길을 가까스레 피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내 이 자리에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자기를 찾아 황운이 방에 들어설 때부터 설연이 가슴을 조이며 우려하던 일이 끝내 터진것이였다.

눈앞에 가슴 애달프게 그리던 그리고 한시도 잊을수 없던 부원수가 아니 황공자가 앉아있었다. 그 황공자가 자기더러 봉선이가 아닌가를 묻고있었다. 소녀가 봉선이라고, 백년가약을 맺은 설씨댁 외동딸이라고 고백하고싶고 한달음에 그 품에 안기고싶었다. 그 품에 안겨 마음속에 서리서리 엉킨 만단사연을 터놓고 마음놓고 울고싶었다. 끝없는 무아경에 잠겨 속삭이고싶었다.

허나 아직은 터놓을수 없었다. 설연의 심중에서 고패치던 무수한 말들이 키돋움하다가 가라앉았다.

(내 이름을 고쳐 남자로 행세함은 나라를 위함이요, 또 역적들을 멸하고 원쑤를 갚고 공을 세워 아버지의 한을 풀자함이 아니던가.

황공자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달려왔건만 공자는 아직도 날 알아보지 못했어. 내 여지껏 행색을 숨기고 상하간의 례의로만 그를 대해왔건만 오늘 공자가 날 의심하여 물으니 만일에 내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그의 자존심과 체면이 손상될것이니라.

그러니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말하지 말고 준절히 책망하여 다시 묻지 못하게 하리라.)

가슴이 아팠지만 설연은 얼굴에 랭랭한 기색을 띠웠다.

《나라위해 나와 함께 만리전장을 달려온 장군과의 정과 의리는 비록 친동기같으나 우리 사이엔 상하간의 례의범절이 엄연히 있거늘 장군이 감히 남의 집안 부자간의 유무를 물으시니 이 어찌 외람치 않겠나이까.

그러니 차후론 이런 말을 다시하지 마소이다.》

황운은 갑자기 도원수의 태도가 랭랭해지고 말소리마저 엄정해지자 당황하고 또 무료하여 서둘러 죄를 청하며 머리를 수그렸다.

《소장이 감히 장군의 가정사를 물어 상하간의 례법에 어긋나는 죄를 지었는가 보오이다. 허나 상하간의 례의를 그릇되게 하느라고 물은것이 아니오니 용서하소이다.…

소장과 설시중의 집안은 뗄래야 뗄수 없는 혈연의 관계이옵니다.

소장의 물음이 장군의 노여움을 샀기에 구태여 뭘 숨기겠나이까.

소장은 그 설시중의 녀아와 정혼한 사이옵니다. 생사를 판가리하는 전장에서도 소장은 봉선이라는 랑자를 늘 이 가슴에 품고 싸웠소이다. 그래서 행여나 해서 물어본것인데 본의아니게 장군의 노여움을 샀으니… 진심으로 사죄하나이다.

그럼 소장은 그만 가보겠나이다.》

불을 뿜듯 열변을 토하고난 황운이 말을 끝맺자마자 획 돌아서서 다급히 문으로 향했다. 설연은 저도모르게 따라 일어섰다. 그의 입에서 《저-》 하는 말이 튀여나오는데 어느새 황운은 문을 닫고 사라졌다. 황운의 모습은 더는 설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차종지를 들고 들어서던 동리화가 뿔난 황소마냥 푸르딩딩해서 성급하게 문을 나서는 황운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사색이 된 설연을 일별해보더니 차종지를 놓고 재빨리 황운을 따라나섰다.

황운을 바래우고 방안으로 들어선 동리화가 살며시 다가와 설연의 팔을 흔들었다.

《황공자가 가셨소이다. 헌데 어이하여 그냥 보내셨나이까?》

망연자실해 서있던 설연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다가 조용히 동리화를 껴안았다.

《모르겠어. 나도 왜 그렇게 했는지.…》

이미전에 동리화는 설연이 사내가 아니라 저와 같은 처녀임을 알고있었다.

임금이 궁녀들중에서 도원수의 시중을 들라고 특별히 뽑아서 창순궁에 보낸 동리화는 용모도 아름답고 마음도 고왔을뿐아니라 령리한 처녀였다. 도원수 설연이 역적들을 소멸하고 승전고를 울리며 황성으로 돌아온 날 동리화는 임금의 령을 받고 창순궁에서 도원수를 기다렸다.

정작 집에 들어선 도원수를 보는 순간 동리화는 첫눈에 그가 사내가 아닌 랑자임을 대뜸 알아맞혔다. 딴 사람의 눈은 속일수 있어도 같은 녀성, 그것도 같은또래의 처녀들의 눈은 속일수 없는 법이였다.

동리화는 자기앞에서 사내행색을 하고있는 설연을 매일 대하기가 참으로 따분하였고 괴롭기 그지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 생각끝에 동리화는 설연의 방을 찾아들어가 그앞에 꿇어앉았다. 갑자기 동리화가 찾아들어와 무릎을 꿇자 설연은 당황해하였다.

동리화는 서슴지 않고 제 생각을 털어놓았다.

《소녀는 죽기를 각오하고 아뢰오이다.

소녀는 이미전부터 역적들을 멸하고 나라앞에 큰 공을 세우신 도원수나리의 명성을 들으며 은연중에 사모하는 마음이 강렬하였소이다. 그래서 성상께 청하여 자원하여 여기로 왔나이다.

헌데 이 며칠동안 지내면서 소녀는 마음이 너무 괴로와 더 견딜수 없나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왜 그러느냐? 숨기지 말고 어서 말해라.》

《가슴이 아파 더이상 보지 못하겠나이다.

소녀는 도원수나리가 사내가 아닌 랑자임을 첫눈에 알아보았소이다. 처음엔 경악했으나 차츰 그 사연이 짐작되면서 가슴이 찢어지는듯 아팠소이다.

이제 무엇을 더 숨기겠나이까. 우리 궁녀들도 시샘이 나는 그런 천하절색의 용모를 지니고도 사내행색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정상을 소녀는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하겠소이다.

제발 빌건대 소녀앞에선 더는 사내행색을 하지 마소이다.

전장에서 랑자의 몸으로 사내행색을 하느라고 마음 쓸 일이 오죽 많았겠소이까. 소녀의 앞에서까지 사내행색을 하자니 그 마음인들 얼마나 괴롭겠나이까!

이제라도 마음을 놓으시고 소녀의 앞에서 본색대로 행동하소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녀는 가슴이 터져 죽나이다!》

열변을 토하는 동리화의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흐르고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동리화의 그 진정앞에 설연은 가슴이 뭉클하여 저도모르게 주저앉으며 동리화를 와락 껴안았다.

《리화야! 네 이미 다 알고있었구나.…

이자 보니 넌 정말 마음이 비단결보다 더 곱고 령리하기 이를데 없는 애로구나!

고맙다. 정말 고마와! 그래, 이제부터 내 네 말대로 하마. 그리고 앞으로 우리 서로 친언니, 동생처럼 지내자.》

동리화가 설연의 품에서 미끄러지듯 몸을 뽑으며 나부시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이다. 아씨!》

이날밤 설소저가 걸어온 파란많은 인생행로를 전해듣는 동리화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새 없었다.

《부원수나리가 그 황공자인줄 알면서도 그냥 속수무책으로 있나이까. 그래, 눈앞에 랑군님을 두고도 말 못한단 말이오이까. 그러자니 아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장차 이 일을 어찌하시려고 하나이까?》

동리화의 물음에 설연은 눈물을 머금고 나직이 말하였다.

《때가 되면 진실을 밝힐수밖에 딴 방도가 없지 않느냐?》

《소녀가 황공자를 찾아가 사실대로 다 말해주겠나이다.》

《아니야. 그러면 일을 더 그르칠수 있어. 귀양가신 아버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날 설연은 동리화에게 이 일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것을 철석같이 약속하였으며 이후로 설연의 방으로는 오직 동리화만이 드나들게 하였다.

이제는 량켠의 부친들이 정배살이에서 벗어나 돌아오게 되였다.

동리화는 설연으로부터 어제밤 그 소식을 전해듣고 온밤 서로 자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오늘 첫아침에 동리화는 설연을 찾아온 황운을 보고 이제야 아씨와 황공자가 진심을 터놓게 되였다고 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일은 동리화의 예측과는 빗나가고말았다. 황운이 성이 나 씽 하고 가버리고 설소저는 이렇게 사색이 되였으니 물어보지 않아도 사태의 진상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동리화는 말없이 설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설연의 고운 눈에 핑 눈물이 돌더니 옥을 다듬은것 같은 뺨을 타고 주르륵 굴러내렸다.

(공자님! 소녀가 그대가 찾는 그 봉선이옵니다.

왜 그리도 소녀를 알아보지 못하시나이까. 공자님을 한시도 마음속에 잊은적 없는 소녀옵니다. 전장을 누비면서도 공자님의 신상에 무슨 일이 날가봐 속으로 바재이며 잠못 들던 그날들을 어찌 다 말하리까. 공자님-)

두 처녀는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놓을줄 몰랐다.

도원수의 창순궁에서 돌아온 황운은 온밤 잠을 이룰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조부인의 시신에 쓰러져 슬피 울던 설소저의 모습만 눈앞에 얼른거렸다. 어렸을 땐 무랍없이 한뜰안에서 뜀박질하며 장난질을 하며 놀았지만 이후로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엄격한 륜리로 하여 한지붕아래서 살면서도 언제한번 똑바로 소저를 대면하지 못한 황운이였다. 다만 그의 옥굴리는듯 한 목소리와 향긋한 체취, 날씬한 자태만 뇌리에 박혀있었고 조부인상가를 치를 때 태를 치며 통곡하던 뒤모습만 삼삼할뿐이였다.

분명 까닭이 있는 도원수 설연이였다. 이제 설대인이 정배지에서 돌아오면 모든 사실이 판명되리라. 설대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허나 황운은 이날밤 그 도원수 설연이 눈물속에 온밤을 지새웠다는것을 알리 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 전왕과 계루왕이 역적도당을 멸하고 천하가 평정된것을 축하하여 설, 황 두 장군과 출전장수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겠다고 상주하니 임금이 그 처사를 아름다이 여기여 허락하였다.

전왕과 계루왕이 문적원에서 큰 잔치를 차렸는데 임금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잔치에 참석하였다.

두 왕이 설, 황장군의 손을 잡고 옥잔에 술을 부어 권하며 그 공로를 입이 닳도록 칭찬하였다.

도원수 설연과 부원수 황운이 송구해하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오늘 두 전하께서 소장들과 함께 즐김은 성상의 복이고 또 출전한 모든 장수들의 노력으로 마련된것이지 어찌 신들의 공로때문이겠소이까.》

두사람이 저들앞에 차례진 금은재물을 모두 장수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니 임금이 더욱 기특히 여기고 백관들이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다음날 임금이 조서를 내렸다.

《두 장군이 나라를 위하여 전장에서 살다나니 아직도 결혼례식을 이루지 못하였거늘 종실대신의 현숙한 숙녀를 간택하여 장가들도록 하라.》

조서가 내리자 전왕이 제일 선참으로 나섰다.

《신에게 불초한 녀아가 있사오니 설장군을 부마로 삼고자 하오이다.》

계루왕이 뒤따라 나섰다.

《신도 두 장군의 은혜를 하해같이 입었사옵고 또 녀아 하나가 있사오니 황장군을 부마로 삼고자 하옵니다.》

임금이 여간 기뻐하여마지 않았다.

《경의 녀아들은 곧 짐의 조카라 두 장군을 부마로 삼으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전왕의 딸인 황해공주는 나이 열일곱이니 도원수 설연의 부인으로, 계루왕의 딸인 심원공주는 나이 열여섯이니 부원수 황운의 부인으로 정하고 각각 혼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두 장군이 동시에 대궐로 들어가 탑전앞에 꿇어앉았다.

《성상의 어명을 받으니 그 은혜 너무 황공하여 몸둘바를 모르겠사오나 혼인은 인륜대사라 어찌 부모의 승낙도 없이 스스로 결심하리까.》

설장군의 말에 뒤이어 황장군이 나섰다.

《사실 신에게는 부친이 이미 정혼한 곳이 있사오니 어찌 그 언약을 배반하리까.》

임금이 두 장군의 말이 옳다고 여기여 《경들의 효성은 가히 충효가 겸전되였다 하리다. 그러니 부친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의논해도 늦지는 않도다.》 하고는 령을 일단 거두고 잔치를 뒤로 미루라고 지시하였다.

대궐에서 물러나 처소로 돌아온 설소저는 한자리에 앉아 못박힌듯 꼼짝 않고있었다.

밖에서는 때아닌 비발이 기승을 부리며 몰아치고있다. 갈래많은 복잡다단한 인간세상과는 달리 계절의 바뀜은 예나 지금이나 한본새로 변함이 없었다. 세월과 무관하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이였다.

자연의 리치와는 달리 왜 인간세상은 그리도 갈래가 많고 사람의 의사와는 달리 흐르는것일가.

두손으로 턱을 고이고 창턱에 마주앉은 설소저는 비발이 휘몰아치는 밖을 내다보며 이름할길 없는 심연의 비바다를 헤치고있었다.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듯 마음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어찌 보면 황공자에게 죄를 짓는것 같았고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짓을 한것 같았다. 더이상 자기가 녀자라는것을 숨길수 없었다. 생각만 해봐도 심장이 쿵- 쿵 방망이질을 해대고 머리칼이 쭈삣하였다. 어명은 한번 내리면 거두지 못한다. 다행히도 부친들이 오기를 기다린다며 어명을 일단 거두었지만 더이상 본색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어느새 소식을 들었는지 동리화가 방안으로 소리없이 들어왔다.

《이젠 어찌하시려나이까, 아씨!》

설연은 얼굴을 돌려 동리화를 바라보았다. 당사자인 설연보다 더 왼심을 쓰는 동리화의 비단결같은 마음씨에 눈굽이 젖어들었다.

《리화야, 네 생각엔 어쨌으면 좋겠냐?》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듯 동리화가 단마디로 대답한다.

《더 생각해볼거나 있나이까. 성상께 아씨의 본색을 밝히는 상주문을 올려 일을 바로잡는수밖에.》

《상주문을?!》

《그렇소이다. 아마 성상께서 아셔도 탓하진 않으실거라고 생각하나이다.》

생각끝에 설소저는 장문의 상주문을 올리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황운을 위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였고 자기를 위해서도 내려야 할 용단이였다.

소저는 커다란 채경앞에 마주섰다. 채경에 아릿답고 단아한 절세가인이 눈을 또렷이 뜨고 자기를 마주보고있었다. 새하얀 두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쓰다듬고난 소저는 빗을 들어 칠칠검은 머리를 빗기 시작하였다.

머리를 곱게 다듬고난 설소저는 품안에서 소중히 간수하고있던 옥비녀와 금팔찌를 꺼내들었다.

림종시에 어머니가 남긴 옥비녀와 금팔찌였다. 다름아닌 황공자와 일생을 약조한 두 집안 부모님들이 남긴 유일한 신표였다. 생사를 판가리하는 처절한 전장에서 잠시잠간이라도 아니 그 어느 순간도 자기 몸에서 떼놓은적이 없는 옥비녀와 금팔찌였다. 그 신표를 서안우에 정히 놓고 설연은 조용히 붓을 들었다.

동리화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가더니 딴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앞에 지켜섰다.

만단심연의 실꾸레미가 하얀 종이장우에서 풀려나오기 시작하였다. 또박또박 글줄을 써가는 설소저의 뺨으로는 저도모르게 구슬같이 맑고 뜨거운 눈물이 쉼없이 흐르고있었다.

《신첩 설봉선(소녀의 이름은 연이 아니라 봉선이옵니다.)은 머리를 조아리고 백번 절을 하며 이 글월을 성상탑전에 삼가 올리나이다.

신첩의 부친은 이전 정당성 좌사정 황현과 함께 한스승의 밑에서 배우고 동시에 벼슬길에 나선 막역친구로서 두 집안사이에는 교제가 친밀하였고 그 정은 극진하였나이다.

일찌기 두 집의 부모들은 신첩과 황운으로 정혼하여 언약이 금석 같았으나 황운의 부친 현은 진권의 모함으로, 신첩의 부친은 양철의 모함으로 삼수와 북해에 각각 정배를 갔나이다. 간악한 무리들의 마수가 신첩에게 미쳐 부득이 몸을 피하여 험산 깊은 골짜기에 종적을 감추고 부친의 원쑤를 갚기 위해 녀자의 행실을 피하고 장부의 행색을 배우며 때를 기다렸소이다.

역적무리들이 반역을 하오매 신첩은 성상의 조서를 받고 나라의 원쑤를 갚고 또 부친의 원쑤도 함께 갚기로 결심하고 나라에서 장수를 초모하는 방에 응하였나이다. 황운도 그런 결심으로 초모에 응하여 신첩과 한가지로 군사의 중임을 맡았소이다. 마땅히 그때 신첩이 본색을 아뢰임이 옳으나 나라가 위급함을 당하였기로 역적들을 쓸어버리고 사직을 보존한 후에 본색을 밝히고 성상을 기만한 죄를 칭하려 하였나이다.

다행히도 성상의 복으로 흉악한 역적도당들을 소멸하고 은혜를 입사와 부친들의 억울함을 씻고 황성으로 돌아오라는 특혜를 받아 부녀상봉의 날이 눈앞에 다가와 신첩의 평생소원을 이루게 되였소이다. 망극한 성상의 그 은혜는 천백번 다시 산다 해도 다 갚지 못할줄 신첩이 어찌 모르겠나이까.

신첩이 오늘 이렇게 본색을 아뢰였으니 이후론 녀자의 몸에 나라의 군사중임을 맡는 직분은 외람되오니 도원수 인수와 부월을 나라에 바치고 엎드려 죄를 기다리겠나이다.

성상을 속인 이 죄를 다스리시여 사람들을 경계하심이 옳을가 하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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