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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15 회


전 편
집없는 나그네


제 4 장


1


꿈틀거리는 망망한 바다는 자오록한 해무 에 묻혀있었다.

《아욱 아욱-》

어슴푸레하게 드러나는 돛대우에서는 갈매기들이 분주히 날아예며 불안하게 울어댔다. 부산부두에서 일본 시모노세끼로 건너가는 배표를 받아쥔 응상은 곧장 해안거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서울역을 떠날 때 배웅을 나왔던 한 친구가 해안동 X번지에 자기네 삼촌집이 있으니 제 안부도 전해줄겸 배기다리는 시간에 들려서 더운밥이라도 한그릇 지어먹고 떠나라고 당부하던 말이 생각났던것이다.

《제 나라에서 돈 떨어지면 벌어라도 먹겠지만 타국에 건너가서 주머니가 비면 어쩌겠나. 내 말대루 우리 삼촌네 집에 들려 밥 한술 얻어먹고 푼전이라도 아꼈다가 요긴한데 쓰게.》

이역만리를 떠나는 그에게 돈 한푼 쥐여주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며 이렇게 말하던 친우의 부탁이 잊혀지지 않았던것이다. 은사의 일생과도 바꾸었는지 모를 돈을 단 한푼이라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서는 렴치불구하고 그렇게 하는것이 가당하리라.

홑깃으로 된 무명양복만을 깡뚱하게 입은 응상은 몸을 옹송그리고 두손을 량겨드랑이에 바싹 끼였다. 잰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등에 가로진 자그마한 보퉁이가 가볍게 흔들리였다. 간밤에 내내 기차에서 시달리고 아침 한나절 한지에서 떤 그는 새파랗게 얼었다. 그는 추위에 옥죄이는 꽛꽛한 몸을 얼마간이라도 녹여볼양으로 반달음을 놓았다.

그때로부터 반시간이 지났다. 응상은 파리한 얼굴을 옷깃속에 움츠리고 선창을 향해 쫓기듯이 걸어가고있었다. 그의 고요한 눈매에는 눈물이 그렁하니 고여있었다.

입을 옹다문 응상의 얼굴에는 말 못할 수치와 모멸을 당한 예리한 아픔이 진하게 새겨져있었다. 친우의 인사말을 전달하려고 찾아간것은 간것이고 설사 낯선 사람이라 해도 바다를 건너가는 나그네가 제집에 들린 이상에는 밥 한술 지어서 먹여보내는것이 인정이련만 개밥그릇에 흰쌀밥알이 버려질만큼 속이 트진 그 집에서는 그런 사정을 털끝만치도 몰랐다. 제 배부르니 남도 그런가부다 하는지.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껄껄 밤새 술추렴한 트림을 하면서 아래방에 대고 《여보, 나그네 들렸는데 밥이나 한술 짓지.》하고 중얼거린다.

《곰새 가시물 비우고 들어앉았는데 끼때없이 내 원.》

안사람이 종알거리며 푸념을 하자 《허허, 하긴 배시간전에 밥잦힐새도 널널치 못하구만.》하고 은시계줄을 안주머니에서 끄당겨 회중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유들유들한 몸뚱이를 벽에 기대고 량다리를 쭉 뻗었다.

《요샌 일본으로 건너가다가 뉘많다고 퇴놓은 쌀이 터져 쌀장수도 시세 없네.》

어색한 분위기를 메꾸려는듯 꺼낸다는 말인즉 길 떠날 사람 앉혀놓고 한유한 소리뿐이였다. 속빈 창자를 비틀어쥘지언정 이런자에게 궁색한 소리는 하고싶지 않았다. 응상은 초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집을 나섰다. 허턱 돌부리에 채워 비칠거리며 발길을 재촉했다. 이제는 음식점에 들려 빈속을 달래일 겨를도 없었다.

아마 그 집에서는 얼핏 찾아왔던 한 젊은이가 밖으로 나가자 그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렸을것이다. 그러나 응상은 고국과 하직을 하고 이역으로 떠나는 사람에게 찬밥 한술 내놓지 않은 배부르고 만족에 겨워 사는 랭정한 그 집 사람들을 영원히 저주했다.

타향살이를 하며 배고픔이 어떤것인지를 짭짤히 맛본 사람들이 아니고는 이런 때의 애잡짤한 서글픔이 어떤것인지를 어녕 알지 못하리라. 그들에게는 인사치레로 대접하는 더운밥이 요구되는것이 아니라 찬밥일망정 진정이 담긴 음식이 요구되였던것이다.

흐능청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더듬더듬 련락선에 오른 응상은 후리후리한 속을 가까스로 달래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배응해주는이가 아무도 없는 그는 한쪽 배전에 외따로 쓸쓸히 서있었다.

《쿵쿵쿵…》 배가 진동하기 시작하고 닻을 감아올리는 쇠사슬마찰소리가 거칠게 울리였다. 《붕-》 구슬픈 여운을 던지며 배고동소리가 길게 울려퍼지였다. 《오-마-니-》

배전너머로 미끄러떨어질듯이 상반신을 내민 외태머리처녀의 애절한 웨침소리가 선객들의 가슴을 아프게 허비여놓았다. 느릿느릿 물러걸음하는 부두에 몰켜선 사람들속에서 흐느낌소리가 터져나왔다.

눈정기를 모아 몸부림치며 발을 동동 구르며 손흔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응상의 눈빛은 점점 더 흐려지였다.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조국땅을 무참히 짓밟은 나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을 어여내는것 같은 애달픔을 참아낼수 없었다. 과연 이런 수치와 모욕을 언제까지 감수해야 하는가. 그는 도무지 마음이 순편치 못했다.

서서히 드놀던 배는 난바다로 나서자 부르르 선체를 떨며 기울거리였다. 응상은 어질어질하여 더듬더듬 뒤갑판의 3등실로 내려갔다. 그는 멀미가 나기 전에 자리에 누우려고 한쪽구석으로 비집고 들어가 때묻은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육중한 배는 점점 더 선체를 재게 뒤채였다. 배가 파도마루에 올라설 때마다 욕지기가 나고 눈앞에서 비누거품같은 동그라미가 수없이 돌아갔다.

《젊은이, 속이 편치 않은가.》

지하족 신고 행전친 로동자차림의 나이지긋한이가 낯이 해쓱한 응상을 보고 물었다.

두눈을 지그시 감고 맥없이 늘어진 응상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모아붙인 무릎을 두손으로 그러안고 그 무엇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던 그 남자는 불안한 눈길로 흘끔흘끔 옆에 누운 젊은이를 돌아보았다. 응상의 얼굴은 점점 더 해쓱해지였다.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는 진땀이 빠질빠질 내돋히고있었다.

《이거 야단났구만!》

중년의 남자는 응상의 싸늘한 손을 만져보고는 누구에게라없이 소리쳤다.

《여기 누구 병 볼줄 아는이 없는가요?》

보통키에 볼편이 얄팍한 늙은이가 허리를 반쯤 굽히고 휘청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눈가와 량미간에 잔주름이 촘촘히 얽힌 늙은이는 두눈을 까딱하지 않고 누워있는 응상의 손맥을 짚어보았다.

《허어-》

어느새 그의 입에서는 탄식하는 말소리가 새여나왔다.

《이거 야단났소다. 속이 허해서 초기를 만났구만요. 》 그는 혀를 끌끌 찼다.

배가 기슭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기절하여 쓰러진 응상을 조심스레 지켜보던 사람들은 저마다 보꿍재기를 풀고 요기할것을 내놓았다. 볼이 얄팍한 늙은이가 미시가루를 물에 타서 응상의 입에 떠넣어주었다.

밥알 하나가 귀신 천명을 물린다는 옛 속담 그르지 않았다. 낟알 기운이 몸에 퍼지자 비로소 응상은 스르시 눈을 떴다.

《정신이 좀 드나?》 걱정스레 묻는 말에 응상은 그렇다는듯 눈을 감았다떴다. 그 모양을 눈물이 그렁해서 내려다보던 젊은 녀인이 사과를 깎아서 내밀었다.

《어서 좀 드세요.》

《이것두 좀 들어보소.》

수수엿판대기를 내놓는 늙은이도 있었다. 그들은 그 누구도 이 젊은이가 어엿한 과학자가 되여 이 나라를 세계에 빛내일 큰 포부를 안고 해외로 떠난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타국으로 떠나는 배에 오르면서도 더운밥 한그릇 배불리 먹지 못하여 초기를 만난 젊은이의 일이 남의 일같지 않았던것이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앞을 다투어 도와나서는 인정깊고 소박한 이런 사람들이 아니였다면 응상의 일이 어떻게 되였겠는가.

그때 응상의 품속에는 리덕구가 보내준 300원의 돈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응상은 그 돈을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인이 물자루를 건사하듯이 꽁꽁 싸서 품속에 소중히 간수하고있었다.

그에게는 단돈 1푼도 귀중했다. 일생에 두번다시 얻기 어려운 그 귀한 돈으로 그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10년동안 이국살이를 할 타산을 세웠던것이다.

계응상은 생후 스물네해째의 봄을 이렇게 이역땅으로 건너가는 거치른 파도우에서 쓰라린 고통을 씹어삼키며 맞이하고있었다.

일본땅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당시 서유럽의 선진과학기술을 습득하려고 하는 청년들이면 의례히 거쳐야 한다는 도꾜의 1년제 정치영어학교에 다니였다.

응상이 집을 떠나 타향살이를 한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였건만 도꾜에서의 고학생활은 그에게 참기 어려운 쓰디쓴 고뇌를 맛보게 하였다.

서유럽의 문명을 받아들이는데서 선구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학교의 사명과 달리 교내학생들속에서는 조선인학생들을 《센징》, 《한또징》이라고 비하하여 부르면서 미개인 대하듯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모멸은 오히려 응상으로 하여금 치솟는 적개심을 품고 결사적으로 학업에 매진하도록 했다.

그는 단연 1석의 뛰여난 성적으로 정치영어학교를 마침으로써 감히 《한또징》이라고 지껄이던자들의 입에 자갈을 물려놓았다.

이듬해 봄 응상은 조선독립을 피타게 부르짖은 우리 인민의 3.1인민봉기를 끓어넘치는 의분을 안고 맞이하였다. 그가 자기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나는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당시 조선독립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도꾜 히비야경찰서에 10일간 구금되였다가 정주일본헌병대에 이송되여 그곳에서 또다시 30여일간 구류생활을 한 연후에 석방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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