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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14 회


전 편
집없는 나그네


제 3 장


3


계응상이 고향으로 내려간 뒤 오성중학교 리덕구선생은 헤여날길 없는 곤경에 빠졌다. 자연분과에서 지리를 가르치는 맹문익교원이 덕구를 경찰에 고발했다. 키꼴이나 하고 덩지가 큰 의젓한 교원이 그런 비렬한 행동을 하리라고야 어찌 상상이나 할수 있었으랴. 맹문익은 제딴에는 서울장안에서 자기만 한 지리교원이 더는 없을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였고 직원실에서는 내놓고 일본인들의 추행을 떠들어대기도 한 사람이였다. 미끈한 체구에 구레나릇이 거밋거밋하게 돋아나고 숱진 머리를 멋지게 벗어넘긴것이 어느모로 보나 사내답고 서글서글하였다. 그러나 고등계형사가 학교에 나타나서 몇번 문초를 하자 묽은 떡반죽처럼 주물리우고말았다.

그의 듬직한 체구는 한푼의 가치도 없는 고기덩어리에 불과했다는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가 허세를 부리며 탕탕 줴친 소리가 모두 형사의 귀에 들어갔다는것을 알게 되자 맹문익은 자기의 동료를 고자바치는것으로 속죄를 해보려고 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야심만만하고 철딱서니없는 젊은 고등계형사놈에게 리덕구가 집에서 남몰래 금지된 서적을 탐독하며 믿을만 하다고 여기는 학생들에게 불온서적을 읽히우고있다고 고자바쳤다. 또한 덕구가 강의시간에 우리 조상들이 입던 화려한 옷인 록의홍상이 나오게 된 유래를 이야기하면서 3국시절에는 세나라의 염색술이 전성기를 이루어 일본에서는 씨실을 가지고 청색과 홍색을 물들여 옷감을 짜는 정도였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12가지 색으로 신비한 비단천을 짜냈다는 얘기를 하면서 배일사상을 불어넣었다는것이였다.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온 리덕구는 안해가 수라장이 된 방안에 쪼그리고앉아 울고있는것을 발견했다. 주인도 없는 집안에 왜놈순경들이 뛰여들어 방안을 발칵 뒤집었다.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한 순사들은 군도로 마루장을 뜯어내고 벽장우에 쌓아둔 고문서까지 버려놓았다.

리덕구는 호출장을 받고 수창동파출소에 불리워갔다.

그는 문초를 당하면서 학생들에게 불온사상을 퍼뜨렸는가, 그리고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우월하다는 선전을 했는가 하는 질문을 당했다. 그는 단연코 이를 거부했다. 제자들이 자기를 팔아먹지 않으리라고 믿었던것이다.

그렇게 되면 증거란 맹문익이 비렬하게도 문가에 붙어서서 엿들은 소리만이 남게 되는것이다. 맹문익은 거만한데다가 야심까지 겹친 인간이였다. 교내학생들이 리덕구의 생물실험실에 쏠리고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기운이 높아지자 억심이 동하여 어떻게 하나 덕구를 제거해버리려고 비렬한 행동을 했던것이다. 겁에 질려 혼비백산한 안해는 보따리를 싸가지고 본가로 달아나고 텅 빈집에서 덕구 혼자 홀아비생활을 하며 학교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안해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결별한 자기의 생활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안온하고 얌전한 그의 안해는 뜻밖의 회오리바람에 질겁하여 다시는 서울로 올라올념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자기를 잊어달라는 안해의 편지를 받은 리덕구는 눈앞이 캄캄했다. 맑은 하늘조차 뿌옇게 흐려지는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래도 참고 이겨낼수 있는 고통이였다. 그만한 생활의 파도조차 이겨낼수 없는 녀자를 일생의 반려로 삼았던것은 가슴아픈 실책이였지만 그래도 그것은 시정할수도 있는것이 아닌가고 너누룩이 생각했다. 그는 결코 오래동안 사사로운 감정에 잠겨있기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그러나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을 터놓을수 없는것처럼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은 없었다. 학생들의 심장에 불꽃을 지펴줄수 없는 교사를 어찌 스승이라고 하랴, 앵무새처럼 《총독부》학무국에서 내려보내는 교과서나 외우고있을바에는 퇴직서를 내고 물러앉는것이 떳떳할것이다.

명망있는 량반이요 청렴결백하기로 이름높은 교장도 학무국의 일본관리가 한번 학교를 시찰하고 돌아가면 교원들을 모여놓고 더는 일본사람들에게 거슬리는 강의를 하지 말아달라고 념불처럼 외우는것이였다.

《절대루 제기되지 않게 하시오.》

교육의 진정한 사명보다도 눈치보기를 우선으로 돌리는 한심한 분위기속에서 교원들은 누구도 속을 터놓고 살려고 하지 않았다. 리덕구는 이런 숨막히는 분위기속에서는 호흡하기조차 괴로왔다.

자신의 신변문제때문에 심신이 날카로와질대로 날카로와진 이런 때에도 리덕구는 고향으로 내려간 사랑하는 제자 계응상의 운명에 대해서 잊을수가 없었다.

그는 얼마전에 유전학자 도야마가 쓴 책 《누에의 유전》을 구입하였다.

누에야말로 그의 제자 응상이 그리도 실험재료로 삼고싶어하던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응상은 무엇을 하고있는가. 자기를 앞질러 누에를 가지고 유전학을 개척해나가는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고나 있는지, 그런데 어찌하여 응상이한테서는 일점의 소식도 없는지…

불안했다. 만약 그가 다문 얼마간의 돈이라도 마련했다면 잠시도 지체함이 없이 서울로 달아올라왔을것이다. 반년만에 응상이한테서 고대하던 편지가 왔다.

《…선생님! 저도 그것이 성사되리라고 기대한것은 아니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도 곧은목이 아닌 이상 한 인간의 절박한 심정을 알게 되면 모르쇠할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을따름이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이란 제가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너무도 무정하더군요. 망두석은 침묵이라도 지키고있지만 그자는 사람의 가슴에 칼을 박는 악한이였습니다. 천원짜리 호피를 깔고앉아 인간의 소박한 소원을 여지없이 짓밟던 그자를 보셨더라면… 저는 온몸을 불사르는듯 한 수치와 모욕으로 사지가 떨리였습니다. 그런 비렬한자들과 맞서기에는 저의 감정이 너무도 예민한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야 저는 선생님이 저의 하숙방에 찾아와 진정을 기울여 권고해주시던 말들이 새삼스레 돌이켜졌습니다. 뒤늦게라도 선생님의 권고를 따르도록 해주실수 없겠는지요. …》

편지의 구절구절을 음미하듯 천천히 읽는 리덕구의 얼굴에 추연한 빛이 어리였다. 그는 두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부르짖었다.

《아니, 그럴수 없다. 절대로 그럴수 없어.》

리덕구는 자신이 수치를 당한것 이상으로 괴로와하였다.

더는 헛된 일에 시간을 랑비하지 말고 곧바른 길을 내달아가려던 그가 오죽했으면 이런 편지를 보냈겠는가.

며칠후 그는 학교학무부에 말하여 2~3일의 말미를 얻어 기차를 타고 정주로 향했다. 리덕구교사가 물곬에 당도한것은 오후가 돼서였다.

《우리 응상일 찾아오셨다구요?》

부엌에서 보리방아를 찧던 윤씨는 보리까락을 하얗게 들쓴채 밖으로 나왔다.

《예, 서울서 왔습니다.》

덕구는 중절모를 벗어들고 공손히 대꾸했다.

《에구, 이거 방안이 어지러워서 어떻게 하나. 어서 들어오십시오. 이게 우리 둘째의 방입니다.》

윤씨는 덕구를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괜찮습니다. 응상군은 어델 갔습니까?》

《그앤 매골 화중밭에 김매러 갔지요. 이제 곧 데려오겠습네다.》

《일없습니다. 어딘지만 대주십시오. 제가 산구경도 할겸 찾아가보겠습니다.》

덕구가 굳이 밭머리까지 가보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윤씨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고 예닐곱에 난 맏손자를 딸리워 보냈다.

덕구는 어린 소년을 따라 골짜기로 한참 더 들어가다가 내를 건느고 산자락을 에돌아 좁은 산협에 들어섰다. 거먹돌이 깔린 우툴두툴한 오솔길 좌우켠에는 볼꼴없는 잡관목이 어수선하게 차있었다. 나지막한 재등에 올라선 덕구는 걸음을 멈추고 경사지밭을 내려다보았다.

골짜기방향으로 고랑을 짼 화중밭에서 한 젊은이가 허리를 굽히고 호미질을 하고있는것이 빤히 내려다보이였다.

《작은아버지!》 소년이 소리치며 달음박질해내려간다. 젊은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먼지를 일쿠며 호미질을 하고있었다.

밭고랑에 엎디여 호미를 재게 놀리는 응상을 내려다보는 리덕구의 가슴속에 의분의 피가 끓어올랐다. 길바닥에 보석이 떨어져있다면 저마다 집어 간수할터이지. 헌데 보배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보배인 인간의 지능을 저렇게 짓밟아버리다니, 아무리 국권을 잃은 민족일지언정 이 땅은 인간의 선의마저 깡그리 말라버린 황무지로 변해버렸단 말인가!

리덕구는 비감에 잠겨 밭고랑에서 흙먼지를 풀썩풀썩 일쿠는 계응상을 하염없이 굽어보았다. 조카애의 쨍쨍한 목소리를 여겨들은 응상은 고개를 돌렸다. 밭머리에 서있는 낯선 신사를 얼없이 바라보던 그는 호미를 떨구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선생님!》

덕구의 가슴에 와락 안긴 응상의 어깨는 세차게 들먹이였다. 제자의 어깨를 으스러지게 그러안은 리덕구의 눈에는 짙은 안개가 서리였다.

《이사람아, 이러고있으면 어쩔 작정인가, 응?》

응상을 잡아흔드는 덕구의 볼편이 푸들푸들 떨리였다. 거칠어지고 꽛꽛해진 손이며 볕발에 새까맣게 타서 눈만 반짝이는 응상의 얼굴을 보고 또 보는 덕구는 기가 막혀 눈물을 머금었다.

응상을 이렇게 만든것이 자기의 잘못인듯싶어 머리를 푹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들은 새풀이 무성한 채뚝에 나란히 앉았다.

찔레덤불에서는 메새들이 다투어 우짖고 참나무 무성한 골안에서는 꾀꼬리들이 때를 만난듯 목청을 돋구었다. 자연은 너무도 태고연하고 매정스러웠다.

《댁에서는 편안합니까?》

《…》

《사모님도 건강하시겠지요?》

잊었던 일을 상기시키는 바람에 덕구의 마음은 산란해졌다. 그러나 알알한 가슴을 말없이 달래이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러지 않아도 마음고생이 많은 제자에게 공연한 일로 속쓰게 하고싶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기미를 느낀 응상은 고개를 돌려 스승의 옆모습을 지그시 건너다보며 물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은게 아닙니까?》

덕구는 고개를 들어 맞은켠 산정수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누를래야 누를수 없는 비감이 울컥하고 솟구치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이제껏 참고참아오던 분노가 쓰라린 슬픔과 엇섞여 심신을 뒤흔들며 터져나오려 했다. 리덕구는 어금이를 꾹 깨물고있었다. 다만 바르르 떠는 두눈에 구슬같은 눈물이 맺히여 눈섭을 적시며 까슬한 볼우로 주르르 흘러내릴뿐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흉중에서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을 잠재우려는듯이 산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날이 어슬핏해져서야 집으로 내려왔다. 응상이 살고있는 사랑방에 들어선 리덕구는 등잔불밑에 무둑히 쌓아놓은 책들에 눈길을 주었다. 벽에는 종이장에 그려놓은 달력이 붙어있었는데 거기에는 날자별로 쪼아박은 학습계획이 있었다. 그날 과제를 수행한 날은 날자우에 금을 그어놓았다. 정해놓은 학습계획을 수행하지 않은 날자에는 금을 긋지 않기로 한 모양이였다.

오로지 스스로 자기를 통제하고 채찍질하기 위해 만들어놓은것이였다. 한쪽구석에는 산에서 채집한 나비들이며 골무고치들이 수북이 쌓여있는데 그우에는 낡은 확대경이 얹혀있었다. 관찰력을 예민하게 벼리기 위해 확대경으로 범나비를 들여다보고 그려놓은 나비해부도들도 놀랍거니와 내려올 때 가지고온 영어원서를 들여다보고는 혀를 차지 않을수 없었다. 그동안 수백페지를 헤아리는 원서를 모조리 번역해놓은것이였다.

종일 농사일에 시달린 몸으로 이렇게 엄청난 일을 수행했다는것은 그가 얻은 지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지식으로 자기를 준비하기 위하여 얼마나 피나게 몸부림쳤는가를 그대로 말해주고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게.》

리덕구는 자기만이 알고있는 그 어떤 의미심장한 뜻을 담아 몇번이고 이렇게 되뇌이였다.

이튿날 아침 그는 급히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로부터 한달이 지난 어느날 응상에게는 뜻밖에도 리덕구선생한테서 돈 300원을 부친 송금쪽지와 함께 짤막한 내용이 적힌 편지 한장이 날아왔다.

《…자네한테 편지를 띄운 나는 곧 서울을 떠나네. 공연히 나를 찾느라고 애쓰지 말게. 나는 이미 이 생활과 결별하기로 마음먹은지 오래네. 돈이 어디서 났는가에 대해서는 묻지 말게. 나 역시 한때 자네가 걸으려는 그 길을 몹시도 갈망했던 사람이란것만은 잊지 말아주게.…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것은 그럴만한 용기와 결단성이 모자랐던것일세. 나는 이런 나약한 자신을 용서할수가 없네. 때늦은 후회를 애오라지 자네와 같은 양양한 제자의 래일에서 보상받고싶은 희망을 누를길이 없어 이러는걸세. 보잘것없는것이지만 내 마지막성의이니 흔연히 받아주기 바라네. 난 자네가 성공하여 조국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절대로 만나지 않겠네.…》

응상은 추연한 표정을 짓고 은사의 편지를 몇번이고 곱씹어 읽어보았다. 집에 찾아와서 스승이 한 말들도 새롭게 더듬어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게.》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스승의 생활형편에서 이런 거액의 돈을 마련했다는것은 놀랍기만 했다.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가만히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4


응상이 부랴부랴 길차비를 해가지고 서울에 올라가 은사의 집을 찾았으나 기와를 얹은 아담한 단층집에는 이미 돈많은 어느 장사군의 작은댁네가 들어있었다.

얼굴이 해사하게 생긴 작은댁네라고 하는 그 녀자는 리덕구선생이 가장집물까지 말끔히 팔아치우고 크지 않은 트렁크 하나를 들고 집을 나갔다는것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학교에서도 그의 스승이 갑자기 사직서를 내고 조용히 물러났다는것밖에는 아는이가 없었다. 리선생과 가까왔던 수학선생만이 그의 스승이 학교라고는 전혀 없는 서해의 어느 외진 섬으로 건너간것 같다는것, 그것은 아마도 그가 일제경찰의 가택수색이후 나날이 숨가빠지는 학교의 분위기에서 벗어나보려는 몸부림같다고 귀띔해줄뿐 그 역시 덕구선생이 어디로 갔는가에 대해서는 딱히 몰랐다.

응상은 망연자실하여 날이 저물도록 은사와 함께 거닐던 낯익은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어쩌면 이럴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공부를 더 하는것이 아무리 절박하다 해도 어찌 스승의 피나는 생활의 대가로 그것을 얻을수 있겠습니까.)

응상은 마음속으로 애타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누구를 붙잡고 이런 절절한 심정을 나눌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고결한 심정을 지닌 그의 은사는 자기의 제자가 이런 심경에 휩싸일것을 미리 내다보고 그 누구에게도 거처를 알리지 않고 어디론가 멀리 사라진것이였다. 아, 대가가 없이는 피전 한푼 얻을수 없는 이 세상에서 털끝만 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거금을 희사하는 이런 사람이 두번 다시 있을수 있을가.

불현듯 고개를 들고 사위를 둘러본 응상은 자기가 잠시도 이렇게 방황하고있을 몸이 아니라는것을 느끼였다. 그가 그리도 애타게 바라던 그 길로 재촉해가는것만이 은사의 기대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가슴그득히 차올랐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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