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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회


전 편
집없는 나그네


제 3 장


2


정주에서 구성까지 행길을 따라가자면 나흘길이 넘는다. 그러나 숲을 꿰질러 산고개들을 넘으며 지름길을 타면 옹근 하루면 가댈수 있다. 응상은 나무군들에게 길을 물으며 새풀이 엉킨 오솔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구성고을이 지척에 바라보이자 그의 발걸음은 점점 떠지였다. 그가 지나치게 자기의 욕망에만 사로잡혀 세상만사를 성급히 제말량으로만 료량하려고 하고있다는것을 느끼였던것이다. 리성을 찾고 랭철하게 사고하기 시작하자 이제까지 꼼꼼히 궁리하고 벼르어두었던 말들이 한푼의 가치도 없는 허망한 약속같이 여겨졌다. 그리고 그 사람은 구성고을에서 선참으로 《일진회》에 든 사람이라니 그에게 민족의 넋을 운운하며 마음을 움직여보겠다는것도 담벽에 대고 절을 하는 격이나 다름없는 어리석은짓일것이다. 그러고보면 그 사람에게서 사리에 밝은 인간적인 처사를 바라는것도 괜한짓이 아니겠는가.

십여년전만 해도 투전놀이와 오입질로 이골이 났던 난봉군이 갑자기 벼락부자가 됐을 때는 왜놈들의 턱밑에 붙어돌아가며 벼룩이 간빼먹는 협잡질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렇게 큰돈을 긁어모을수가 없었을것이다. 《토지조사령》을 시행할 때에만 해도 역빠르게 뜯개왜말을 배워가지고 측량수들의 길안내를 하면서 수십정보의 하천부지와 산을 공짜로 옭아냈다지 않는가. 량심같은건 매춘부의 순결성만큼밖에 여기지 않는 그에게서 어찌 선심을 바라랴.

하다면 그런 부라퀴같은자에게 일장춘몽을 붙이고 허위허위 백리길을 찾아가는 이녁은 또 얼마나 황당한 인간인가.

점점 떠지던 그의 발걸음은 아주 멎어버리고말았다. 수치를 당하느니 이제라도 후회없이 돌아섬이 가당한 일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러나 응상은 분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단숨에 구성고을로 찾아들어갔다. 날이 어슬어슬할무렵에는 어느덧 계경삼네 솟을대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타산을 앞세우는 사람에게는 타산적인 조건을 들이대면 될게 아니냐는 배심이 생겼던것이다. 하인이 한근이 넘는 쇠고리를 절렁거리며 대문을 열어주어서야 응상은 먼길에 지친 몸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중문앞에 귀가 삐죽하고 송아지만큼이나 큰 개가 량쪽에 지켜서서 흰이발을 드러내고 당장이라도 덮칠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목에 건 쇠사슬을 보고서야 다소 마음을 놓고 중문을 넘어섰다.

널직한 안뜨락에는 뱀의 형국을 한 누운향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윤기 자르르 흐르는 퇴마루 저쪽 열어제낀 덧문안으로 하얀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이 여라문짝 주르르 달려있었다. 저녁때라 반쯤 열린 부엌에서 터져나오는 지지고 볶는 냄새가 안뜨락을 들었다놓는데 그 모든 냄새중에서도 파고드는듯 은근하면서도 향긋하고 자극적인 참기름냄새며 유혹적이면서도 고소한 소고기 굽는 내며 휘둘러대는듯 떠들썩한 준치굽는 내는 도도하고 안하무인격인 이 집의 풍격을 여실히 드러내고있는것 같았다.

하인이 응상을 처마밑에 세워놓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만에야 비단치마저고리를 휘감고 머리를 광주리만 하게 틀어올린 중전마마같은 계경삼댁네가 퇴마루에 나섰다.

《게 누군가?》

왕후의 분부만큼이나 틀스럽다. 응상은 기가 질려 고개를 숙이고 여쭈었다.

《정주물곬 사는 계시경의 둘째아들 계응상이올시다.》

《엉, 거 우리 령감형네 사춘자제로구만. 어떻게?》

《집에 큰아버님을 한번 만나뵙자구요.》

《그럼 들어가서 얼른 만나뵙지.》

마님은 손님들로 떠들썩한 안방을 가리켰다. 안방에서는 기염을 토하는 웨침소리와 혀꼬부라진 왜말소리가 혼탁이 되여 울려나오고있었다. 응상은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들이 다녀간 다음에 만나보겠습니다.》

《무슨 일로 왔게. 나한테 말하면 안되겠나?》

《아버님이 꼭 큰아버지를 만나뵙구 인사를 전하라구 해서.》

《엉, 그래.》

마님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애 짝쇠야, 이 도령 바깥사랑으루 모셔라.》하고 소리를 쳤다. 자그마한 키에 체구가 똥똥한,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수 없는 남자가 어디선가 달려나오더니 《예잇.》 한다.

바깔사랑이라는것은 하인청이였다. 하인들이 먹고 자는 방에 안내되여 닭삶은 국물에 만 흰쌀밥 한그릇을 얻어먹은 응상은 이제나저제나 안방연회가 끝나길 조마조마해서 기다렸다. 밥날라다주는 똥똥한 하인의 말에 의하면 이날이 계경삼의 생일날이라는것이였다. 하여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구성고을의 유지들을 모조리 청해다가 진탕치듯 놀아대는것이였다.

마당건너 안방에서는 밤이 깊도록 권주가가 울리고 안주에서 청해왔다는 명기의 간드러진 노래소리가 울려나왔다.

응상은 이튿날 해낮이 거의다 되여서야 계경삼의 방으로 찾아가볼수 있었다. 하얀 명주바지저고리에 공단조끼를 입고 화문석우에 호피를 깔고앉은 계경삼은 두눈이 게슴츠레하여 두툼한 베개에 팔굽을 고이고앉아 물었다.

《찾아온 용무가 무엇이냐?》

공순히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의 인사를 전달한 응상은 오성중학졸업증을 내놓았다.

《제가 그간 서울에 올라가 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흠, 그래.》

고슴도치털로 이짬에 배긴 고기를 쑤시던 계경삼은 응상이 내민 졸업증을 흥심없이 내려다보았다.

《너희 집 가세가 어지간히 펴인 모양이구나. 아직두 작권을 받아 농사를 짓겠지?》

《예.》

《그런데 서울공부는 무슨 돈으로 하였느냐?》 그는 두툼한 입술을 놀리였다. 그러는 순간 좌우켠으로 입귀가 축 처지는 그의 상은 심술이 내돋히다못해 미욱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의 지능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돈만 아는 무지한자한테 찾아와 구차한 소리를 하게 됐다고 생각하니 수치감이 왈칵 들었다.

그의 뒤벽에 걸린 족자에는 늙은 호랑이가 만월을 삼키겠다고 아귀같은 입을 벌린 그림이 걸려있었다. 황금덩이에 미친 호랑이를 련상시키는 그 그림은 현금만능주의에 취한 이 집 주인을 그대로 상징하고있는것 같았다.

호랑이의 탐욕스런 아구리에 시선을 박은 응상은 이리로 오면서 머리속에 굴리던 말마디들이 한푼의 가치도 없는것이라는것을 직감했다.

이 사람앞에서는 그 무엇도 통하지 않으리라는것, 돈을 만능으로 아는 사람인만큼 오직 돈으로밖에는 움직일수 없다는것을 육감으로 느꼈다. 그는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돈을 한 천원만 3푼변으로 10년간 꾸어주셨으면 해서 찾아왔습니다.》

《뭐뭐, 천원을?》

《예.》

응상은 정심하여 계경삼을 올려다보았다. 당시 천원돈이면 황소 열마리값이요, 농군에게는 하늘만큼이나 높은 액수의 돈이지만 호부자에게는 깔고 앉은 범의 가죽 한장값이나 되나마나할것이다. 한데도 그는 오히려 응상이보다 더 흠칠 놀라는것이였다.

《제가 일본에 건너가 잠사전문을 마치고 돌아와 종란장 같은걸 운영해서 꼭 리자에 리자를 덧붙여 물어드리겠습니다.》

《흐흐흐.》 계경삼은 허거픈 웃음을 터뜨렸다.

《네 누에알장사가 시세난다는걸 알긴 아는구나.》

그러나 불현듯 칼을 뽑아들고 적수에게 달려드는 사람처럼 눈매가 모지러지더니 어성을 높이였다.

《이녀석, 뉘앞이라구 감히 혀바닥을 놀리느냐. 그래, 기한이 돼서 돈을 물지 못하면 네 모가지라두 내놓겠느냐?》

《예, 약정한 금액을 한푼이라도 어기고 기한내에 물지 못하면 목을 내놓겠다는 계약서에 수표라도 하겠습니다.》

응상의 말은 헛소리가 아니였다. 이렇게 촌구석에서 썩느니 비록 목숨을 내던지는 한이 있어도 한번 품은 생각을 끝까지 실천에 옮겨볼 생각이였다.

그렇게도 그의 결심은 비장했던것이다.

《흥, 제법 큰소리로구나, 숯쟁이자식이 어디에서 그런 배심이 나오느냐?》

그는 볼살을 실룩거리며 야살을 깐다. 모욕적인 언사에 두눈이 번쩍 띄여진 응상은 오연히 머리를 높이 들었다.

《아직 저는 하자고 맘먹은 일을 실행해보지 못한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돈을 꾸어주시면 은혜로 알것이고 그러지 못하면 큰아버님이 큰 손해를 보게 될것입니다.》

《허허허.》 헛창난 소리를 터뜨리던 계경삼은 돌연 입을 꾹 다물며 단호하게 뇌까렸다.

《더는 길게 말할것 없다. 돈을 꾸어주지 못해.》

《어째서 그러십니까?》 응상은 당돌하게 물었다.

《도대체 너희 집 가산이 통털어서 얼마냐?》

《…》

《아마 집이랑 허접쓰레기 농쟁기랑 몰밀어쳐서 300원어치나 될가? 난 담보가 없는 사람한테는 돈을 꾸어준적이 없어.》

응상은 량입귀가 축 처져내린 계경삼의 두툼한 입술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지만 두고보십시오. 10년후에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응상은 힘주어 뇌이였다.

《무엇이 어째? 네놈이 어쨌다고 나한테 와서 10년이구 뭐구 하면서 발칙한 소리를 하느냐? 엉!》

계경삼은 량무릎을 두손으로 거머쥐고 펄펄 뛰였다. 응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금을 박아 말했다.

《돈이란 귀지와 같은것이지요. 쌓아두면 해롭고 쓸수록 리롭지요. 두고보십시오.》

응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닫이문을 좌르륵 열어제끼며 마당으로 나갔다. 계경삼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소래기를 질렀다.

《원, 저런 놈 봤나.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어디선가 허우대가 큰 마당쇠가 허겁지겁 달려나왔지만 응상은 중대문을 지나 솟을대문을 벗어나고있었다.

때는 벌써 한낮이 되여오고있었다. 응상은 개울가로 내려가 흐르는 물을 두손으로 떠올려 꿀꺽꿀꺽 마시고는 오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절반길도 축내지 못했는데 날이 어슬어슬 어두워왔다. 그러나 응상은 두주먹을 부르쥐고 승냥이울음소리가 청승맞게 울리고 범이 하루밤에도 열두번씩 넘나든다는 호암령을 넘어 동틀무렵에야 집에 들어섰다.

제 집문턱을 넘어서서 펑덩하니 주저앉은 다음에야 잔등이 땀에 펑하니 젖고 꽉 다문 입이 한동안 떼여지지 않아 신고를 했다. 오죽이나 강심을 먹고 캄캄한 밤길을 헤쳐왔으면 이발이 부스러지도록 어금이를 깨물었겠는가.

당시의 생활을 회고하며 계응상은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학비관계로 다른 상급학교에 갈수도 없었고 용이하게 취직할 자리도 없어 집에 돌아와서 1년나마 농사에 종사하게 되였다. 배움에 대한 열망을 가슴에 안은채 묵밭에서 괭이질을 하던 비참한 그 나날들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 학교강당에서 울리던 구슬픈 졸업가의 여운은 머리우에 백설이 흩날리는 오늘까지도 나의 가슴속에서 사라질줄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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