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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회


임금은 현주성에서 위기에 처하고
황장군은 꿈에서 태명산도사를 보다


도원수 설연이 미주성아래에 진을 친지 이틀이 지났다.

(이제 며칠 안 있으면 달주의 진형이 대군을 끌고 여기로 올것이다. 미주성은 크지 않은 성이니 우리 군사로 성을 열흘만 에워싸면 필경 적들은 군량이 떨어져 더 버티지 못할것이다.

그러면 적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해나설것이니 쌍방간에 희생자가 많이 날수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군사들이 피를 적게 흘리면서도 성을 함락하고 적을 멸할수 있겠는가?

우선 성안에 우리 사람들을 들여보내 적형세를 알아내야 한다.)

도원수 설연은 미주성지형도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골똘해있었다.

《벌써 자정이 되였소이다. 어서 주무시오이다.》

밖에서 호위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연은 지형도를 접고 자리에 누웠으나 좀처럼 잠을 이룰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장수들앞에서 자기의 결심을 지지해나서던 황운의 모습이 떠올랐다.

(황공자는 지금 뭘하고있을가. 내가 이렇게 저를 생각하고있는줄 알고나 있을가?)

저도모르게 설연의 입가엔 엷은 웃음이 비꼈다.

비몽사몽간에 설연이 솔곳이 잠들었는데 불현듯 눈섭이 싯허연 청룡산 도사가 그앞에 척 나타났다. 너무 기뻐 설연이 일어나 스승에게 다가서는데 도사가 엄한 눈길로 바라보며 책망한다.

《지금 성상이 위급하셔 사직이 조석에 놓여있는데 어찌 구원하지 않고 잠만 자느뇨?》

《그건 무슨 황당한 소리오이까!》

저도모르게 큰소리치며 설연은 앞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후닥닥 깨나보니 꿈이였다.

좀처럼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겨릅초대를 돋구고 꿈내용을 곰곰히 음미해보던 설연은 부원수 황운을 부를가말가 망설였다.

이때 호위장이 문밖에서 아뢰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원수께서 뵙기를 청하오이다.》

(범이 제소리를 하면 온다더니, 황공자가 범이긴 범이로다.)

빙그레 웃음을 입가에 떠올린 설연은 흘러내린 머리태를 수습한 다음 투구를 머리우에 얹었다.

《들여보내라.》

씽- 하고 부원수 황운이 장막에 들어섰다.

부원수 황운의 낯색이 여느때와 달리 어둡고 숨소리마저 높다. 도원수를 향해 군례를 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소장이 좀전에 천문을 보니 자미성이 처소를 떠나 빛갈이 령롱치 못하고 또 객성이 살기 은은하고 자미성을 침범하고있으니 이는 반드시 황성에 재변이 일어난듯 하오이다.

의혹을 금할수 없어 이밤중에 뛰여들었소이다.》

설연은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놀라마지 않았다.

《나도 방금 꿈에서 여차한 일이 있어 장군을 청하여 의론하자 했나이다. 헌데 장군도 나와 꼭같은 생각을 하였으니 그 위국충정이 과시 지극하오이다.》

황운이 거북스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궁한 처지에 몰린 진권이 달주의 진형에게 원병을 요청한게 분명한데 진형은 본래 간특한 놈이라 미주로 원병을 보낸것이 아니라 계교를 내여 황성을 탈취하고 성상을 침범하려고 하는것 같소이다.》

설연이 황운의 판단에 거듭 탄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형은 십중팔구 그런 흉계를 꾸밀수 있소이다.》

《그럼, 장군은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황운이 성급하게 물었다.

설연은 황운의 부리부리한 두눈을 바라보며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부원수가 군사를 총독하여 이곳에서 진권을 막고 내가 신속히 황성에 가서 일을 바로잡고 돌아오는게 좋을듯 한데…》

황운이 도원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도원수를 대할적마다 설소저와 너무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머리에 갈마드는 황운이였다. 허나 도원수는 사내였다. 새삼스레 도원수의 목소리가 랑자의 목소리처럼 맑고 또랑또랑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다급히 머리우에 올려놓은듯 한 투구밑에 새별처럼 빛나는 두눈, 옥으로 다듬은듯 한 새하얀 뺨, 쭉 뽑아진 흰 목, 오늘따라 별로 불룩하게 치솟아보이는 동가슴이 황운의 눈부리를 자극하였다.

황운이 자기를 찬찬히 뜯어보는 느낌이 들어 설연은 저도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설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장막안을 거닐기 시작하였다. 자기의 행색을 황운이 제발 몰랐으면 하고 속으로 빌었다. 장막안을 거니는 설연의 귀에 황운의 열에 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씀이 마땅하오나 장군은 전군을 통솔하는 도원수이니 진중을 떠나선 안되오이다. 더우기 진권의 장수인 진걸이 여간 교활하지 않고 또 장군이 아니 계신줄 알면 아군의 사기가 저락되고 그러면 적들이 그 기회를 타서 흉계를 꾸며 불의에 기습할수 있소이다.

사기가 떨어진 군사를 다시 수습하기도 어렵거니와 그런 군사를 가지고 강포한 적을 막기란 여간 어렵지 않나이다. 소장의 능력으로는 여간 힘들지 않으니 그럴바에는 차라리 장군이 이곳에 머물러 적을 제어하고 소장이 황성으로 가서 형세를 탐문하고 일을 조처하는것이 더 좋을듯 하오이다.》

설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허나 몸은 그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동안을 두었다가 설연은 입을 열었다.

《나라위한 장군의 그 충의심에 산천초목인들 어찌 감동하지 않겠소이까.

그럼 부원수의 말대로 내가 여기에 남고 장군이 황성에 올라가 형세를 봐가며 조처하소이다. 만일 정황이 생기면 위험한 싸움판에 혼자 뛰여들지 말고 급히 기별을 보내소이다. 그러면 내 즉시 군사를 보내겠나이다.》

마음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진정이 담긴 설연의 당부였다. 허나 황운은 흔연한 태도로 령을 받았다.

《실수없이 령대로 하겠으니 장군은 너무 근심마소서.》

말을 마친 황운이 들어올 때처럼 씽- 하고 나가버렸다. 몸을 돌려 황운이 사라진 장막문을 바라보는 설연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고여오르기 시작하였다.

(공자님, 부디 일을 바로잡고 몸성히 돌아오시기를 소녀는 손꼽아 기다리겠나이다.)

도원수의 장막을 벗어난 황운은 그길로 적군의 복장차림을 한 철기 삼천을 이끌고 황성으로 진군하였다. 주야로 행군하여 동각에 이르니 그곳을 지키던 적병이 길을 막아나섰다.

황운이 부장 류우를 시켜 물었다.

《너희들은 무슨 군사이기에 이곳을 지키고있느뇨?》

파수군졸이 시뚝거리며 대답질한다.

《우리는 달주에 계시는 진장군의 명을 받고 이곳을 지키고있노라. 너희들은 대체 누구냐?

만일 발해군사라면 목숨을 보존하여 어서 나와 항복하라. 우리 진장군이 벌써 황성을 탈취하였으니 발해국은 이미 망한거나 같거늘 어찌 항복치 않으리오.》

파수군졸의 그 소리는 황운에게 있어서 청천벽력이였다.

(저놈의 수작질이 정녕 사실이라면 황성은 이미 진형에게 함락되였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성상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잔등으로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자세한 내막을 알려면 동각을 지키는 적장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황운은 자기옆에 바싹 붙은 류우를 돌아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류우가 부원수의 의도를 알아채고 한걸음 나섰다.

《우린 미주성에서 왔노라. 회주에서 새로 등극하신 대왕의 분부를 받고 황성에 있는 진장군을 찾아가는중이다. 그러니 어서 길을 열어라!》

그 소리에 파수군졸의 눈이 소눈깔이 되는데 그뒤에 서있던 목이 앙바틈한 파수군교가 코등을 문지르며 한참이나 황운과 그뒤를 따르는 군사들을 바라보다가 복장이 같으니 저희네 편으로 믿었는지 공손히 응대하였다.

《수비장의 령이 없인 그 누구도 여기로 지날수 없소이다.》

류우가 검을 추켜들고 으름장을 놓았다.

《네 이놈, 뉘앞이라고 감히 엇드레질이냐.》

황운이 류우를 말리는척 하며 나섰다.

《그래, 너희 수비장이 누구냐?》

황운의 거동에 위압되였는지 파수군교가 목을 움츠렸다.

《엄한이라 하옵니다.》

《당장 가서 그 수비장을 데려내오라!》

군교가 군졸에게 뭐라고 이르자 군졸이 뛰여갔다.

이윽고 자다가 깨났는지 푸시시한 몰골을 한 엄한이 거드름을 피우며 팔자걸음으로 나오는것이 황운의 눈에 띄였다.

황운이 류우에게 짤막하게 지시를 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저 수비장놈을 산채로 잡으라.》

류우가 뒤를 돌아보며 검을 뽑아들었다.

《놈들을 쳐라!》

때를 기다리던 아군의 삼천 정예기마군이 불의에 말을 내달아 수비군사들을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파수군졸과 군교가 엉겁결에 창을 들고 맞서려다가 목이 떨어져나갔다. 동각을 지키려고 적들이 쌓아놓은 방어차단물을 바람처럼 날아넘으며 발해군의 기마군사가 번개같이 돌격하였다. 동각수비군사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데 엄한이 그제야 사태의 진상을 알아채고 돌아섰다. 허나 어느새 류우가 말을 몰아가다가 엄한을 훌 들어서 말잔등에 처실었다. 엄한을 사로잡은 황운은 재빨리 부대를 그자리에서 철수시켜 동각의 숲속으로 슴새들어갔다.

사로잡은 엄한을 문초하던 황운은 낯색이 하얗게 질렸다.

황성이 함락되고 임금이 현주로 피신했다는것이 아닌가. 진형이 현주로 피한 임금을 쫓아갔다니 현주성이 진형의 손에 떨어지는것은 시간문제였다. 오늘중인가 아니면 래일이겠는가?

황운은 당장 현주로 군사를 끌고 진격하려다가 인츰 머리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만약 현주성이 이미 진형의 손에 떨어졌다면 그건 괜한짓이다. 성상의 신상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닥쳐오고있는 때에 한시라도 늦추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황운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들었다. 지도를 편 황운은 현주라고 쓴 지명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진형이 달주에서 황성으로 쳐들어왔으니 철리부와 막힐부는 물론 룡천부의 호주도 그들의 손에 장악되였을것이지만 현주 이남은 아직 반란적의 발길이 미치지 못했을것이다. 그러니 성상이 만약 현주성을 벗어난다면 열에 아홉은 남쪽으로 길을 잡을수 있지 않을가.

황운의 눈에 현주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에 청하라는 강이 유표하게 안겨들었다.

성상이 이 청하로 길을 잡는다면? 아니, 아니야. 그러다가 혹시 그 길이 아니라면 만회할수 없는 실책을 범할수 있지 않는가.

과연 성상이 어디로 길을 잡을것인가. 도무지 가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앉아있을수도 없었다. 너무도 속이 답답하여 황운은 장막안을 몇번이나 오락가락한지 모른다.

그날밤이였다.

황운이 임금의 정상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잠간 조는데 기연가미연가 태명산 도사가 그를 굽어보며 절절하게 꾸짖는것이 아닌가.

《발해의 존망이 시각을 다투고있는데 그대는 무사태평히 잠이 오는가. 빨리 그대는 나라위해 충성을 다하여 래일 오시(낮 12시)전에 청하에 나아가 공을 세우라. 만일 오시가 지나면 대세는 그르치거늘 이밤으로 빨리 떠나라!》

황운이 놀라 깨나보니 등골로 땀이 쭉 내리흐르고 머리는 둔중한 쇠몽둥이에 얻어맞은듯 뗑하기만 하였다. 분명 꿈이련만 황운은 속이 후두둑 떨려났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황운은 급히 장수들을 불렀다.

《여기서 청하는 거리가 얼마요?》

밤새 지도를 보며 청하까지의 거리를 모르지 않는 황운이였으나 다시금 물었다.

한 장수가 나서며 대답하였다.

《삼백여리 남짓하오이다.》

황운이 눈을 쪼프리더니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성상이 지금 시각을 다투는 위험에 놓여있다. 한시가 새로운 이때 내 만일 군사를 끌고 삼백여리를 가느라면 늦을수 있다. 그래서 내가 단신으로 떠날터이니 그대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내뒤를 바싹 따라오라.》

령을 받은 장수들이 물러나 군사를 집합시켰다.

천리준마에 오른 황운이 준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비록 짐승이나 이 나라의 물과 풀을 먹고사는 발해의 짐승이거늘 지금 성상이 시각을 다투는 위기에 처했으니 날 도와 어서 빨리 청하까지 질풍같이 달리자꾸나. 그래야 재난을 막을수 있단다. 알겠냐?》

황운의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준마가 두귀를 쫑긋하더니 두발굽을 높이 쳐들었다. 황운이 말배굽을 한번 걷어차자 준마가 호응- 하며 구부리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천리준마가 한번 굴러 십리를 날아가며 만수천산을 순식간에 날아넘었다.…

이때 진형은 사로잡은 계루왕과 전왕을 진중앞에 꿇어앉혀놓고 창피를 주면서 성안에 대고 임금더러 항복하라고 악청을 돋구고있었다. 임금이 성우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분노와 수치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방책은 설연의 원병이 당도하기만을 기다리는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사흘이 지나갔다.

진형은 성안에서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가차없이 부하장수들에게 현주성을 공격하라는 령을 내렸다. 정예부대를 이끈 적장들의 한패가 북문과 동문을 충차와 통나무로 들부시고 다른 한패의 적장들은 사다리와 바줄을 타고 개미떼같이 새까맣게 성벽에 붙었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북문과 동문이 깨져나가고 적군이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성가퀴에 붙어있던 현주성군사들이 이리떼마냥 성안으로 쳐들어오는 적들을 견제하는 사이 성벽을 타고넘어온 적들이 그들의 뒤를 엄습하였다.

현주성은 잠간새에 반란군의 손안에 들어가게 되였다.

성을 점령한 적들이 눈앞에 보이는 군사들과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찌르고 죽이고는 곧바로 임금이 있는 침전으로 돌입하였다.

호위군사들이 창황중에 임금과 곁에 있던 약간의 시신들만 끌고 남문으로 빠졌다. 그러다나니 황후와 전왕의 비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적들에게 사로잡혀 현주옥에 갇히게 되였다.

부하장수들로부터 발해국의 황후와 전왕의 비를 잡았다는 보고를 받은 진형이 직접 옥으로 걸음하였다.

《저런 천하의 숙녀들을 떨구고 저혼자 살겠다고 피한걸 보니 발해국의 주상이 되게 혼쭐이 나긴 난게군.》

진형이 파수장에게 단단히 오금을 박았다.

《잠시도 눈을 떼지 말라. 이제 발해국의 주상까지 마저 잡은 후에 내 천하의 숙녀들과 마음껏 즐겨보리라.》

옥에서 물러나온 진형은 부장 진택으로 현주를 지키라 하고는 제가 직접 삼천철기를 끌고 임금의 뒤를 따라갔다.

성의 남문으로 겨우 빠져나온 임금의 일행이 정처없이 가다가 날밝을무렵에 당도한것은 청하였다. 사시장철 물이 맑아 청하라고 부르는 강이다. 강의 좌우에는 눈같이 새하얀 모래불이 무연하게 펼쳐지고 그 백사장뒤에는 갖가지 나무들과 기암괴석들이 묘하게 솟아있는 청하는 나라안에서 손가락에 꼽는 절승이였다.

이른아침이여서인지 오고가는 사람 하나도 없고 또 이맘때면 나루터에 길손들을 기다리는 배들이 여러척 있으련만 어찌된 일인지 오늘따라 한척의 매생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임금이 무릎까지 치는 모래불로 향방없이 말을 타고 방황하더니 땅이 꺼지는듯 탄식하였다.

《배가 없어 강 건늘 길이 막혔으니 장차 어데로 가리오.》

벌써 뒤를 쫓아오는 군사들이 산굽이를 돌아 먼지를 일쿠며 질풍쳐오는 모습이 나타났다.

《발해국 주상은 빨리 항복하라!》

맨 앞에서 달려오는 진형이 득의해서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였다.

황황망조한 임금이 강에 몸을 던지려는데 옆에 시위하던 신하들과 호위군사들이 만류하였다. 하더니 그들은 임금을 한가운데 모시고 창검을 쥐고 빙 둘러 사람방패를 만들었다. 사람방패의 중심에 백마에 오른 임금이 우뚝 서있었다.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던 진형이 대검을 들어 사정없이 사람방패를 내리쳤다. 그뒤로 진형의 부하장들이 련이어 창을 내찔렀다. 사람방패를 이루었던 호위군사들과 신하들이 가슴을 부둥켜안고 그자리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호위장이 지나가는 적장의 가슴을 노리고 창을 찔렀다. 적장 하나가 그 창에 다리가 찔려 말에서 떨어지는데 뒤따르던 다른 적장이 삼지창을 호위장의 뒤잔등에 쿡 박았다. 마지막지탱점이던 호위장마저 쓰러지자 사람방패는 삽시에 무너지고 한가운데의 임금만이 댕그러니 남아있게 되였다.

진형이 이어 말머리를 돌려 달려오면서 임금이 탄 말을 찌르니 백마가 다리를 꺾으며 자빠지고 임금이 땅에 나떨어졌다.

진형이 창을 들어 임금의 등을 누르며 호통쳤다.

《목숨이 아깝거든 빨리 항복하여 죽기를 면하라.》

임금이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백여년 종묘사직이 오늘날 짐의 대에 망했구나!-》

임금의 통곡소리 청하강반에 메아리되여 울렸다. 하늘도 해를 가리웠는지 삽시에 주위가 컴컴해지고 하도 맑아 강밑의 조약돌까지 보인다는 강물이 먹물뿌린듯 시꺼매졌다.

기고만장한 진형이 다시 재촉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하루밤 자고나면 새날이 시작된다는거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법이거늘 그다지 탄식할게 있느냐. 빨리 항복서를 바치라!》

예로부터 역적간신들이 무수할진대 진형같은 대역적은 고금에 언제 있었다더냐! 오, 발해국에 이런 무지막지한 역적이 숨쉬고 살았으니 어찌 하늘도 무심치 않으랴!

《짐이 발해의 천하에 너같은 역적놈이 있다는것을 어찌하여 가려보지 못했던고!》

분노와 원통함으로 치를 떨던 임금이 별안간 품에서 단검을 쑥 뽑아 목에 가져다대며 소리쳤다.

《이 천하무도한 역적놈아! 감히 뉘라구 항복을 바라느냐. 너같은 간신역적놈들을 가려보지 못한탓에 나라가 망했으니 짐이 살아서 무엇하랴.》

임금을 핍박하던 진형의 눈이 휘딱 뒤집혀졌다.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것을 전혀 예상 못했던 진형이였다.

임금이 단검으로 목을 막 찌르려는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하늘을 무너뜨릴듯 한 벼락같은 호통소리 울리더니 천리준마에 앉은 웬 장수가 검을 뽑아들고 진형의 앞으로 날아들어왔다.

《개같은 역적은 성상을 핍박하지 말라! 발해군 부원수 황운이 여기 왔노라!》

성난 사자마냥 황운은 참룡검을 휘두르며 진형과 그 부하장수들을 칼탕치기 시작하였다. 황운의 기세와 검술앞에 거들대며 저항하던 적장 대여섯이 어느새 목없는 귀신이 되여 모래불에 딩굴었다. 천하용장이라 일컫는 진형도 황운의 출중한 검술과 하늘끝에 닿은 분노의 세례앞에 수세에 몰려 쩔쩔 매다가 그만에야 도저히 당하지 못할줄 깨닫고 창을 끌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뒤로 적군의 장수들과 군졸들이 어지럽게 도망쳤다.

황운이 진형의 뒤를 따르지 않고 혼절하여 강변에 서있는 임금에게로 황급히 다가갔다.

말에서 내려 임금앞에 꿇어앉은 황운이 목메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소신은 부원수 황운이옵니다. 페하께서 이렇게 될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있은 소신의 불충불효의 죄 하늘인들 용서하겠나이까.

엎드려 빌건대 성상께선 소신을 벌하시고 부디 옥체를 보중하소서.》

황운의 눈에서 비오듯 눈물이 좔좔 흘러내리고 가슴을 치며 터뜨리는 울음소리 강반을 애수에 물젖게 한다. 넋을 잃고 망연자실해 서있던 임금의 손에서 단검이 뚝 떨어졌다.

한참이나 황운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정신을 수습하고 그를 붙들고 소리내며 통곡하였다.

땅에 떨어진 검을 부둥켜안고 황운이 눈물을 삼키며 아뢰였다.

《성상의 옥루 한번 떨어지면 한해동안 가물이 든다 하였으니 바라오건대 페하는 옥체를 돌보시여 종묘사직을 지키소서.》

임금이 눈물을 거두고 탄식하여마지 않았다.

《짐이 그만 눈이 어두워 간신을 가려보지 못하여 이런 봉변을 당했도다. 백여년사직이 짐의 대에 와서 결딴날번 했다가 다행히도 경의 충정을 입어 도적을 물리치고 목숨을 구했도다. 비록 짐의 목숨은 다시 살아났다고 해도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 선조들을 뵈오리오.…》

《그만 고정하소이다, 페하!》

황운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임금이 그를 돌아보았다.

《경은 빨리 현주성으로 가라. 반란적이 황후와 전왕, 계루왕을 현주옥에다 가두었는데 목숨이 붙어있는지 모르도다.

그러니 경은 빨리 가서 황후와 두 왕을 구하라.》

황운이 머리를 숙이며 대척하였다.

《신은 원컨대 죽기로써 몸을 버리고 나라의 원한을 씻으리다!-》

황운은 임금을 모시고 청하강변을 떠나 현주성으로 향하였다. 가던 길에 자기뒤를 따라 청하로 질주해오던 류우를 비롯한 장수들과 군사들을 만나 대오를 수습해가지고 현주성으로 풍우같이 진격했다.

청하강변의 참변을 직접 목격한 황운이 현주성공격을 앞두고 증오와 분노, 원한과 복수심으로 치를 떠는 군중에 엄한 령을 내렸다.

《일격에 성을 공격하여 빼앗으라. 눈앞에 얼른거리는 적을 한놈도 용서말라!

이번 싸움에선 적의 항복을 절대로 받지 않을것이며 오직 목없는 적의 주검만이 있을것이다!》

위장한 적군복을 벗어던진 황운을 선두로 한 발해군의 철기 삼천군마가 파죽지세와 같이 성으로 쳐들어갔다.

성을 지키던 진택이 돌사태가 쏟아지듯 무섭게 공격해오는 발해군의 공격앞에 기절초풍하여 어쩔줄을 몰라하다가 군사를 내몰았으나 삭정이로 검을 막기요, 거미줄로 바위를 동여매기였다. 순식간에 성문이 깨져나가고 성난 파도마냥 성안에 진입한 발해군사들이 사정없이 적들을 무찔렀다.

진택이 맨 앞장에서 달려오는 황운을 바라고 달려들었다. 단칼에 진택의 몸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절반으로 쭉 쪼개져나갔다. 그 광경에 겁에 질린 적군사들이 창과 칼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눈에 피발이 선 분노한 발해군사들에 의해 목이 나떨어져 질벅하게 피흐르는 땅바닥에 코를 박았다. 성에 남아있던 반란군사는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성을 장악한 황운이 임금을 별궁으로 인도하고나서 황후와 두 왕, 왕비들이 갇혀있는 옥으로 다급히 뛰여갔다.

《소신 황운이 이제사 왔소이다. 불초한 이몸의 죄를 다스려주사이다.》

황후와 두 왕, 왕비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눈앞에 있는 장수가 틀림없는 부원수 황운이고 눈앞의 현실이 꿈이 아님을 깨닫고 울음을 터뜨리며 그를 일으켜세웠다.

《지금 성상께서 별궁에 계시오니 돌아가소서.》

눈물을 삼키며 황운이 공경스레 입을 열었다.

황후와 왕비, 두 왕과 대신들이 별궁에 들어가 임금을 뵈옵는데 임금이 눈물을 좔좔 흘렸다.

《반란적의 란을 만나 거의 죽게 되였더니 황천과 조종이 도우시고 부원수 황운의 덕을 입어 흉악한 적을 물리치고 목숨을 보존하여 이렇게 그대들을 다시 만나고 백여년 종묘사직을 받들게 되였도다.

부원수 황운의 공을 헤아리면 세상에 다시 없는지라 역적들을 멸한 후에 그 천추의 대공을 은혜갚으리니 그대들은 뇌리에 쪼아박아 명심하거라.》

임금과 황실을 위로하고 안정시킨 다음 황운은 그길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북쪽으로 철기를 몰아 황성으로 진격하였다.

황성에 이른 황운은 다음과 같은 글을 성안에 들여보내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황성의 백성들은 들으라.

그대들은 발해의 백성으로서 오로지 성상을 섬기다가 볼행히도 목숨을 유지하고저 도적무리에게 투항하였으나 그 어찌 본심이라 하리오. 형세가 막부득이함이 아니겠는가.

역적괴수 진형을 물리치고 성상을 모셔왔으니 너희 백성들은 성문을 열고 성상을 맞이하라!》

그 글을 보고 백성들이 너도나도 달려나와 남문을 열어 맞아들였다.

황성에 남아있던 적장 진봉이 돌변한 민심을 보고 북문으로 들구뛰니 적군사들이 저저마다 그뒤를 따라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황운이 준마의 배허벅을 들이차며 단숨에 따라잡고 맨 앞에서 달아빼던 진봉의 머리를 단칼에 썩둑 베버렸다. 부원수의 뒤를 따라 발해군의 장수들과 군사들이 적군사를 사정없이 쓸어눕혔다. 성밖의 오리주변에 적의 시체가 한벌 쭉 덮이고 주인잃은 말들이 소란스레 돌아쳤다.

전장을 수습한 황운은 성으로 들어와 민심을 안정시킨 다음 그 즉시 현주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현주성에 당도한 황운이 임금을 호위하여 다시 황성으로 향하였다. 황운이 임금을 모시고 황성으로 입성하니 성안의 백성들이 땅에 엎드려 울면서 어가를 맞이하였다.

궁궐로 돌아온 임금이 다시 방을 내붙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이어 황운을 불러 도원수 설연에게 보내는 조서를 내리며 황운에게 신신당부하였다.

《황성에는 병마가 없고 반란적은 아직 살아있으니 불의의 변을 또 당할가 념려되도다. 그러니 경은 출전하지 말고 그냥 남아 황성을 지키라!

짐이 이제 조서를 내려 도원수더러 역적괴수를 멸하도록 하겠노라.》

《도원수 설연은 능히 진권을 멸하고 승전소식을 보내올것입니다.》

황운은 진심으로 도원수 설연을 믿었기에 임금의 령을 흔연히 받아들였다.

임금이 종묘에 제를 지내여 선임금의 령혼을 위안하고 방을 내걸라는 조서를 내려 이번 재난때에 죽은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청하강변에서 황운을 만나 혼쭐이 난 진형은 달주로 뺑소니쳤다가 다시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진권을 찾아 미주성으로 향하였다.

생각할수록 등골이 오싹해졌다.

황운의 무예와 맞설 적수가 저희네 장수중에 없다는 이 기정사실앞에 진형은 전률하였다. 보다는 발해국과 임금을 위한 그 충의가 진형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천하에 저를 당할 무예와 지략이 없다고 자처하던 진형이였지만 황운의 출중한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발해조정을 멸망시킬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황운이때문에 놓친것이 너무 분하고 원통하여 미주성으로 가면서도 진형은 이발을 부득부득 갈았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서서 이발빠진 늑대마냥 패잔병의 꼴을 하고 미주성으로 기신기신 찾아가자니 밸이 꼴리고 속이 뒤집혀져 미칠것만 같았다.

(무슨 묘한 수가 없을가? 가만, 설연은 아직 우리의 움직임을 모르고있지 않는가?

만약 거짓조서를 만들어 그의 장막에 들어갈수만 있다면…)

한가지 흉측한 수가 머리에 떠올랐다.

진형은 군사를 휘몰아 행군하던 로상에 있는 주변백성들의 집을 로략질하고는 거짓조서를 만들어 설연의 진을 찾아가기로 꾀하였다. 부하장수를 사자로 둔갑시키고 진형 자기는 사자의 호위군사로 가장하고 날랜 군사 서넛과 함께 동행하였다.

거짓조서에는 이런 글이 씌여있었다.

《지금 발해군사들에게 크게 참패한 패잔병무리들이 주변의 백성부락을 싸다니며 인명을 마구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니 도원수는 그 패잔병무리들을 빨리 소멸하여 짐의 근심을 없애도록 하라.》

한편 미주성으로부터 오리 되는 곳에 진을 친 도원수 설연은 진형의 원병이 당도하면 그놈들마저 미주성에 가두어넣고 일격에 소탕할 계책을 세우고 군사들을 훈련시키고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설연은 매일과 같이 부원수 황운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문득 군사가 보고하되 성상의 조서를 가지고 사자가 진문에 이르렀다고 하는것이였다. 뒤미처 얼굴이 갱핏한 사자가 들어섰다. 복장이 낯설고 왜서인지 당황해하는 사자의 조그마한 얼굴이 불안감을 자아냈다.

황성의 일로 가슴을 조이던 설연이였다. 허나 부원수 황운한테서는 아무러한 소식도 없는데 불쑥 성상의 조서라니 마음속에 의혹이 갈마들었다. 무엇인가 께름직한 예감이 뇌리를 쳤다.

도원수 설연은 내색하지 않고 사자를 바라보았다. 도원수의 옆에는 원문장 염성태가 서있었다.

사자가 내민 조서를 펴보고난 도원수가 염성태에게 눈을 한번 깜박거리며 신호를 하니 염성태가 사자의 앞으로 다가섰다.

《어찌하여 성상께서 이런 조서를 내렸느뇨?》

염성태의 엄한 물음에 사자가 쭈밋거렸다. 그 모양을 쓰겁게 주시하던 염성태가 눈을 부릅뜨며 호령하였다.

《같이 온 놈들을 몽땅 잡아들이라!》

진문밖에 대기하던 진형에게 그 호령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려왔다.

사실은 설연이 사자의 조서를 믿고 일행을 불러들이면 장막에 들어가 단칼에 설연을 베버릴 흉계를 꾸몄던 진형은 일이 글러짐을 눈치채고 황급히 그자리에서 달아났다.

《밖에 있던 일행이 벌써 달아났소이다.》

사자일행을 잡으러 나갔던 수비장이 들어와 하는 보고였다.

설연의 두눈에 불길이 타번졌다. 풍만난 사람마냥 후들후들 다리를 떨고있는 사자를 꿇어앉히고 맵짜게 물었다.

《같이 왔던 놈은 누구냐?》

사자가 턱을 달달 떨었다.

《달주의 진장군이오이다.》

《뭣이? 그럼 진형이란 말이냐? 그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뇨?

어서 숨기지 말고 이실직고해라!》

사자가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청하에서 성상을 핍박하다가 부원수 황운을 만나 도망한 일이며 달주에 들렸다가 남은 군사를 끌고오던 도중에 백성들의 집을 로략한 사실이며 설연을 살해하려고 거짓조서를 꾸민 일이며를 낱낱이 털어놓았다.

도원수 설연은 비로소 부원수 황운이 제때에 변고를 수습하여 성상을 위기에서 구원하였으며 진권이 틀어박힌 미주로 찾아오던 진형이 자기를 해치우려고 거짓조서로 흉계를 꾸몄다는것을 상세히 알게 되였다.

(부원수가 아니였더라면 어떤 참혹한 변고가 빚어질번 했던가! 아, 황공자!)

위험천만한 그 길에 황공자를 떠나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던 설연이였다. 황운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정이 가슴에 그득히 차올랐다. 동시에 엄청난 대역부도죄를 저지른 진권도당들에 대한 참을수 없는 분노로 하여 치가 떨렸다. 간교하고 포학무도한 역적무리들을 무자비하게 소탕하리라!

황운에게서 된매를 맞고 똥줄을 갈긴 진형이라 그가 끌고왔다는 달주의 원병이라는게 보나마나 싸움예기가 떨어졌을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였다. 이제는 달주의 진형까지 좁은 미주성에 끌어들였으니 역적패당들을 송두리채 멸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마련된셈이다.

단호한 결심을 하며 도원수 설연은 전령장을 불렀다.

《모든 군사들은 각각 군마와 병기를 갖추고 미주성을 점거할 만단의 준비태세를 갖추게 하라!》

그의 장막으로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바야흐로 미주성을 함락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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