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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회


화공으로 회주성을 깨뜨리고

무수한 홰불이 동악산에 치솟다


각 부대의 장수들이 명령을 받고 돌아가는데 부원수 황운만은 무슨 할말이 있는듯 머밋거렸다. 황운의 모습을 띄여보는 도원수 설연의 가슴은 저도모르게 울렁거렸다.

황금대에서 무술시합을 치를 때부터 황운이 자기와 언약한 그 황공자임을 대뜸 알아본 설연이였다. 그날 황금대앞 숱한 장사들앞에서 단연 첫자리를 차지하고 임금으로부터 대군을 통솔하는 중임을 함께 받은것이 다름아닌 황공자라는 믿어지지 않는 사실앞에 설연은 기쁨과 눈물속에 온밤 뜬눈으로 지새웠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자기가 봉선이라고 터놓고 그 넓은 품에 안겨 그간의 회포와 정을 다정히 나누고싶었다. 허나 설연은 머리를 저었다. 임금은 물론 장수들과 군사들까지도 자기를 남자로 알고있고 또 역적들을 소멸하지 못한 처지에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낼수가 없었다. 역적들을 소멸하고 승전고 울리며 황성으로 돌아가는 그날엔 솔직히 터놓으리라 결심하였다.

이시각 설연은 황운이 자기를 알아보지 않았을가 하는 위구감에 오한이 난듯 속이 떨려났다. 도원수의 군막엔 지금 황공자와 자기 둘뿐이다.

(혹시 날 알아본것이 아닐가? 아니야, 황공자는 나를 남자로 알고있어. 그렇지만 혹시 황공자가 날 알아보면 어쩌나?)

《부원수는 무슨 할말이 있소이까?》

설연은 웃는 낯으로 태연해지려고 애쓰며 나직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는듯싶었다.

황운이 도원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딴게 아니라 장군의 임무분담이 가늠이 가지 않아 묻고자 하나이다.

소장이 보니 진권의 병세가 자못 강하고 장수 또한 많아 쉽게 깨뜨리지 못할줄로 아오이다. 이럴 때엔 군사를 모아 공격함이 옳을상싶은데 장군은 아군의 장수들을 모두 뿔뿔이 헤쳐놓았소이다.

감히 묻건대 장군은 무슨 계교가 있어 그렇게 했소이까?》

혹시나 하고 촉각을 세우고있던 설연은 그 말에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매시시해졌다. 괜히 왼심을 쓴 자기가 미워나고 저도모르게 서운함과 노여움이 울컥 북받쳤다.

설연의 입에서는 도원수로서의 위풍당당한 추궁이 엄하게 터져나왔다.

《령을 실행치 아니하고 먼저 의심하는것은 군법으로 다스릴 죄라는걸 장군은 모르나이까.

다른 사람도 아닌 부원수가, 앞장에서 령을 실행해야 할 장군이 어쩌면 군령을 두고 후론하는지 정말 섭섭하오이다.

그 죄는 마땅히 벌을 주어야 옳으나 내 인정상 이번만은 용서하겠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소이다!》

조심스레 의견을 꺼내놓았다가 뜻밖에 계집애들처럼 얼굴이 새파래서 성을 내는 도원수 설연의 돌변한 태도에 황운은 당황해졌다. 방금전까지 이름할길 없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자기를 대해주던 도원수가 갑자기 성을 내는것을 보며 황운은 속으로 아차! 하고 혀를 깨물었다.

출정을 앞두고 군사를 총괄하여 훈련을 주는 도원수를 보며 또 첫 싸움에서 우시춘을 구원하고 적을 타승하는 그 용병술을 목격하며 그가 비록 자기와 동갑나이여도 지략이 뛰여남을 깨달은 황운이였다. 또 그 누구보다도 군률의 엄함을 모르는바 아닌 자기였다. 곰곰히 따져보면 도원수가 자기의 처사를 그의 용병술을 믿지 못하는데로부터 온것이라고 오해할수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성을 내는것이 아닌가.

그러나 황운은 도원수의 용병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가슴속에 도원수에 대한 자그마한 의혹이라도 남아있는것을 원치 않았던것이다. 더구나 도원수를 도와 역적무리들을 소멸할 임무가 자기의 어깨에도 지워져있지 않은가. 터놓고 말해서 일이 바로 되려면 도원수가 임무를 주기 전에 부원수인 자기와 작전을 의논하는것이 옳지 않겠는가. 자기와 아무러한 토의도 하지 않고 계책을 세울바에야 무엇때문에 성상이 설연과 자기 두 사람에게 부월을 하사했겠는가.

(내 물음에 저다지도 성을 낼 필요가 있을가? 이럴 때면 영웅남아가 아니라 새뚝거리기 잘하는 계집애 한가지로군.)

이런 생각이 뇌리에 떠올랐으나 황운은 애써 감정을 자제하며 대척하였다.

《소장이 실언했나 봅니다. 그렇게 추궁하니 소장은 더 할 말이 없나이다. 두번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허나 앞으론 장군이 이 황운과 의논하여 군령을 내리는게 옳다고 생각하나이다. 독불장군이라고 앞으로의 싸움이 더 헐치 않겠는데, 그래도 명색이 부원수인 소장과 의논도 없이 장군이 계책을 낼바엔 저의 이 부원수 부월은 무슨 쓸모가 있겠나이까.

이건 그 어떤 사심에서 출발한것이 아니라 장차 장군이 사소한 실수도 없기를 바라는 소장의 진심의 목소리이기도 하오이다.》

설연의 얼굴이 익은 홍시마냥 빨개졌다.

자기의 감정에 사로잡혀 괜히 역정을 낸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설연은 빨개진 얼굴을 숙였다. 역시 황공자는 마음에 티끌만 한 사심도 없는 대바르고 강직한 헌헌대장부였다. 그의 말이 틀린데가 하나도 없음을 자인하며 설연은 숙였던 얼굴을 쳐들며 선선히 응대하였다.

《장군의 그 의견을 내 깊이 명심하겠나이다. 이번 싸움은 내 혼자서 결심한 일이지만 승산있는 싸움이고 또 이번 싸움에서 내가 제일 믿는것은 장군이니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오이다.

딴 말이 없으면 어서 돌아가서 령을 시행하오이다.》

황운은 가볍게 묵례하고 물러나왔다.

회주성의 밤하늘가에 우- 우- 태질하듯 세찬 바람질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광풍에 나무가지들이 꺾어지고 초가이영들이 벗겨져 날려가는 소리가 발해군과 맞설 궁냥으로 골통을 싸쥐고있는 진권과 진걸의 귀에도 들려왔다.

진권의 손바닥만 한 두귀가 푸들푸들 떨고있었다. 첫 싸움에서 전혀 이름도 없던 설연과 황운에게 패했다는것이 원통하기 그지없어 진권은 두귀만이 아니라 온몸을 우들우들 떨었다.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 진권은 자기의 커다란 귀박죽을 잡아뜯어보았다. 아파났다. 싸움에서 졌다는것이 거짓 아닌 엄연한 사실이였다.

진권은 진걸에게 그렇게밖에 싸울수 없느냐고 화를 내였다. 진걸은 다음번 싸움에선 설연에게 진 봉창을 하겠노라고 두세번 곱씹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진권은 밤늦게까지 진걸과 마주앉아 설연을 깨뜨릴 방책을 의논해보았지만 신통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속이 막 뒤집혀졌다.

우선 설연의 군사가 정예롭기 그지없고 또 그의 수하에 있는 장수들도 여간 용장이 아니라는것이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부원수 황운이 설연이 못지 않은 지략과 용맹을 지닌 맹장이라는 사실이 또한 난문제였다. 황성에 박아넣은 간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발해국임금이 설연과 황운을 선발하고 너무 기뻐 직접 기발에 글까지 써넣어주고 부월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어디에서 뭘 하다가 굴러들어온 놈들인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생각나지 않았다. 두놈이 다 룡천부태생이라고 하는데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기승부리며 바람질하는 바깥을 내다보던 진걸이 진권에게로 돌아섰다.

《오늘밤 바람질이 세차지는데 이 기회에 적의 야습이 있을가봐 걱정스럽소이다. 혹 적이 화공으로 성을 공격하면 큰일이 아니오이까. 그러니 방비를 강화하고 성안의 백성들에게 지시하여 불을 금지하게 하는것이 좋겠소이다.》

진권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성수비군을 보강하고 성안의 집집들에 불을 주의하라는 령을 내렸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니 바람질은 더욱 세차졌다.

장대에 올라 밤하늘을 바라보던 도원수 설연은 남풍이 터지자 전령수를 부원수 황운에게 보내여 령을 전달하게 하였다.

《빨리 성밑으로 다가가 불화살을 성안으로 날리라. 성안에 불이 성하면 급히 성을 넘어 진권의 군사로 위장하고 불을 끄는체 하면서 성안을 소란케 하며 그 틈을 타서 진권을 잡아오라!》

적군의 복장을 차려입고 아군을 식별하기 위한 흰 수건을 왼팔에 동여매고 만단의 준비태세를 갖추고있던 황운은 도원수 설연의 령을 받자 그 즉시 군사를 이끌고 성밑으로 은밀히 접근하였다. 성밑에 다가간 황운은 군사들에게 지시하여 일시에 성안으로 불화살을 날리게 하였다.

잠시후 성안에 시꺼먼 연기가 타래쳐오르고 시뻘건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성안의 군사들과 군마들이 갈팡질팡 여기저기 돌아치는 아우성과 비명소리가 온 성안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성안은 일대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성아래 매복하였던 조명걸이 성안에 화광이 치솟는것을 보고 삼천군사를 이끌고 무서운 기세로 북문을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진걸의 의견을 쫓아 수비군사를 보강하고 집집마다 불을 금지하라는 령을 내리고 을씨년스러운 밖을 내다보던 진권은 갑자기 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지자 화들짝 놀라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끝내 설연이 화공으로 성을 기습하는구나!》

자빠져서 그 말을 내뱉는 진권의 낯색이 먹장구름이 낀듯 컴컴해졌다. 진걸이 진권을 부축하여 일으켜주고는 꼬리에 불이 달린 황소마냥 부리나케 뛰여나갔다.

성안이 아비규환의 란장판으로 번져지고 조명걸이 북문공격을 개시하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운이 거느린 륙천명의 발해군사가 바줄과 사다리를 리용해서 신속히 성을 넘어갔다. 불을 끄는 정신에 적진중의 그 누구도 그들에게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다. 성가퀴마다 붙어있던 적을 손쉽게 제압한 황운의 군사는 불을 끄는척 하면서 적진중을 종횡무진하며 휘저어놓기 시작하였다. 복장이 똑같으니 바투 다가설 때까지 그들이 제편군사인줄로만 여겼던 적장들과 군사들이 불의적인 기습에 변변한 저항을 못해보고 꺼꾸러졌다.

황운은 지체없이 진권이 있는 궁궐로 군사를 맹호같이 몰아갔다. 선두에서 달리는 황운의 앞에 불쑥 진걸의 부장 곽진이 한무리를 끌고 막아나섰다.

《네놈들은 웬 놈들인데 감히 여기로 쳐들어오느냐?》

쌍지창을 꼬나든 곽진이 황운을 향해 돌입해왔으나 단칼에 그 머리가 둘로 쪼개지니 곽진의 뒤를 따르던 적군사들이 기겁하여 뺑소니를 쳤다. 황운이 그 기세로 앞으로 짓쳐나가려는데 이번에는 얼굴이 시뻘겋고 눈이 우로 치째진 진권의 호위장 달고가 철퇴를 추켜들고 달려들며 꾸짖는다.

《무명소장이 감히 우리 장수를 해치는가!》

달고가 아이머리통만 한 철퇴를 휘두르며 황운에게 무섭게 달려들었다. 황운이 날쌔게 엎드려 철퇴를 피하고 말이 어긋칠 때 참룡검을 그 허리에 먹이니 달고의 허리가 두동강이 나고 머리가 달린 상체가 땅에 나딩굴었다.

성안에 불길이 일어나자 뛰쳐나와 부하장수들을 독촉하며 군사들을 수습하던 진걸은 장대우에서 황운이 성안을 들부시는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처음엔 (저 자식들은 왜 제편끼리 싸우노?) 하고 머리를 기웃했다. 한참후에야 다름아닌 저들의 복장차림을 한 발해군사들이 기습해온줄 알고 진걸은 황급히 되돌아섰다.

진걸이 헤덤비며 방으로 뛰여들어오자 진권은 눈이 퀭해서 바라보았다.

《적군이 성안에 들어왔소이다. 지금 막 대궐로 쳐들어오고있으니 빨리 피하소이다.》

사색이 되여 어쩔바를 몰라하는 진권을 앞세운 진걸이 대궐을 벗어나자 말을 다그어 몰아갔다.

곳곳에 불길이 세차게 치솟아 성안은 대낮같이 밝아 행적을 숨길데가 어디에도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아났는지 알수 없을 숱한 발해군사들이 칼과 창을 휘두르고 화살을 날리며 사방으로 일시에 짓쳐들어오고있었다. 이리로 가도 발해군사요, 저리로 가도 발해군사라 어디로 빠져나간단 말인가.

진권은 어망결에 북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뒤를 진걸과 부하장수들이 뒤쫓았다.

진권의 뒤를 따르던 진걸이 언뜻 돌아보니 맨 앞장에서 내달아오는 발해군장수는 다름아닌 황운이였다. 대번에 등골이 선뜩하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말배굽을 세차게 걷어찼건만 어찌된지 말의 속도가 굽뜨게만 느껴졌다. 자기가 황운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첫번 싸움에서 몸서리치게 느낀 진걸이였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북문으로 말을 달려갔다.

이때 북문에서 요란스러운 함성이 울렸다. 북문을 깨뜨린 조명걸이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오는 소리였다. 선두에는 조명걸이 장창을 추켜들고 좌충우돌하며 공격해나오고 그뒤로 발해군사들이 터진 동뚝물마냥 돌격해오고있었다.

북문을 바라고 달아나던 진권이 혼비백산해서 진걸을 돌아보았다.

《아이쿠, 북문에도 발해군이로구나!》

진걸이 얼른 진권을 따라서며 소리쳤다.

《동문으로 빠지사이다!》

이미 형세가 기울어졌음을 깨달으며 진권은 제먼저 동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부하장수들과 호위군사들이 그 뒤꽁무니를 바싹 따랐다. 동문을 가까이 하였는데 어데선가 한방의 포소리 울리더니 팔자수염에 몸이 우람찬 장수가 군사를 휘동하여 짓쳐나왔다. 그는 다름아닌 도원수 설연의 령을 받고 동문밖에 매복해있던 발해군 성문장 마맹달이였다.

마맹달이 칠십근도채를 추켜들고 버럭 고함을 쳤다.

《이 역적놈아! 어찌 살기를 바라느냐.》

달려나오던 기세로 마맹달이 도채로 등롱을 깨뜨렸다. 사위가 먹물뿌린듯 어둑시근하여 한치앞도 분간할수 없으니 무슨 수로 대적하리오. 뒤에는 천하명장 황운이 따라오고 앞에는 마맹달이 달려드니 진권은 너무 놀라 정신이 아뜩해 비틀거렸다. 진걸이 진권의 말고삐를 나꾸어채고 말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죽기내기로 남문으로 줄달음쳤다. 다행히도 남문에는 발해군사가 없었다. 미친개도 달아날 구멍을 열어주고 쫓으라는 말처럼 도원수 설연이 적들이 남문으로 도망치도록 길을 열어놓으라고 미리 지시한것이다. 더 크고 무서운 함정이 앞에 놓여있는것을 알리 없는 진권은 다행으로 여기고 진걸의 도움을 받으며 간신히 성밖으로 벗어났다.

혼맹이가 빠져 남쪽으로 달아나던 진권일행이 당도한 곳은 동악산이였다.

발해군이 추격해오는 소리가 멀어져 진권이 말고삐를 늦추고 겨우 한숨을 돌릴가 하는데 불현듯 정면에서 홰불이 솟구치면서 와- 군사들이 마주나왔다.

이 무슨 일인고? 하고 좌우를 둘러보니 이번에는 오른쪽 동악산기슭에서 홰불뭉치가 별처럼 일어나더니 수천의 발해군사가 와- 함성을 지르며 산에서 달려내려왔다. 왼쪽은 시퍼런 물결이 넘실거리는 큰 강이다. 뒤로 돌아서자니 천하맹장 황운이 따라오니 오도가도 못할 처지였다.

진권이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하였다.

《사면팔방에 포위망이 그물처럼 빼곡하니 어데로 가리오.》

도저히 살아남을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발해국을 뒤집고 천하를 차지하려 한것이 주책없는 아낙네의 한갖 부질없는짓이고 무지개를 잡으려는 아이들의 어리석은 꿈이란 말인가. 어이하여 얼음판에 박밀듯이 쭉쭉 잘 펴나가던 일이 삼복철 수수잎이 꼬이듯 밸밸 비틀리고 종당에는 이런 막다른 골목에 빠져들었단 말인가.

시루에서 자라는 콩나물마냥 심지가 얄팍하기 그지없는 진권의 뇌리속에 이런 자포자기가 갈마들었다. 진권의 벌쭉귀가 축 늘어지고 우멍한 두눈에 실패와 좌절의 고뇌가 잔뜩 비꼈다. 진권은 마치도 깊이를 알수 없는 진펄에 자기가 빠져드는듯 한 환각에 사로잡히면서 허리춤의 칼을 쑥 뽑았다. 망연자실한 허탈상태에 빠진 진권이 제 목에 칼을 갖다대려는데 진걸이 띄여보고 다급히 소리쳤다.

《대왕, 그러지 말고 잠간만 기다리사이다!》

어느새 진걸의 부장인 진성과 진보가 이끈 기마군이 황황히 진권을 에워싸더니 한 무리는 앞으로 달려가 막고 다른 무리는 오른쪽으로 내달아 방비하기 시작하였다.

그 기회를 타서 진걸이 진권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칼집에 꽂아넣고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고나갔다. 천신만고하여 추격에서 벗어나 목숨을 건진 진권이 진걸의 호위를 받으며 정신없이 남쪽으로 달리느라니 쫓아오는 기미가 점점 희미해진듯싶었다. 그제야 진걸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진권을 앞뒤에서 호위하며 미주를 향해 말을 몰아갔다.

이무렵 회주성을 장악한 조명걸은 군사들을 발동하여 성안의 불부터 끈 다음 성우에 발해국을 상징하는 교룡기를 세우고 성안을 수습하여 백성들을 진정시켰다.

어느덧 어둠이 가셔지고 동이 트려는지 동쪽하늘이 들리우기 시작하였다.

온밤 한잠도 못 자고 추격을 피해 남으로 달아나는 반란군사들의 행색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악전고투하며 화염속을 뚫고나온 군사들이라 굴뚝속을 기여나온것처럼 얼굴은 새까맣고 몸에 걸친 군복들은 불에 그슬리고 찢기여 터실터실 실밥이 날렸다. 게다가 허기증으로 헛거미가 들어 걸음새마저 비틀거렸다.

뚝비를 맞은 강아지마냥 생기가 전혀 없는 군사들의 꼴을 바라보는 진권의 하늘소귀가 축 늘어지고 우멍한 눈에서는 절통의 눈물이 슴배나왔다.

진권이 하늘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여마지 않는데 선두부대에서 《앞에 큰 강이 있고 물우에 배다리가 있나이다.》하는 보고가 들어왔다.

(만일 설연과 황운이 근방에 복병을 묻었으면 건느기 어렵겠는데… 혹시?) 하고 생각하며 진권은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피다가 대오를 그냥 배다리가 있는 곳으로 내몰았다.

대오가 강에 다 이르렀을무렵 문득 한방의 포소리가 울리더니 한무리의 철기군이 함성을 울리며 사면에서 달려나왔다. 이는 도원수 설연이 미리 매복시킨 발해군 장수 홍윤이라 창을 들고 맨 앞에서 질풍같이 달려나오며 뢰성벽력을 지른다.

《역적 진권은 어데로 가려 하는고? 내 우리 도원수의 령을 받고 여기서 네놈을 기다린지 오래다!》

진권이 눈알이 뒤집혀져 어찌할바를 몰라하는데 진걸이 달려들어 진권을 옆구리에 끼고 채찍을 휘둘러 배다리를 향해 다급하게 말을 몰아갔다. 적군사가 그 뒤를 어지럽게 뒤따랐다. 아군의 군사들이 무너진 불개미둥지에서 쓸어나온 개미떼처럼 배다리를 바라고 뛰여가는 적군사를 향해 화살을 날리고 창과 칼을 휘두르며 백병전을 벌리니 적군사가 태반나마 죽어버린다. 먼저 건느겠다고 저들끼리 밀치고 닥치다가 물에 빠지거나 발해군의 드센 공격을 피해 살구멍을 찾아 물에 뛰여들었다가 거세찬 물살에 떠밀려가며 아우성치는 적군사들의 곡성이 산천을 진동하였다.

가까스로 배다리를 건너 강대안에 이른 진권은 빨리 추격에서 멀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부대를 다불러 남으로 향하였다.

강을 건너 십리쯤 왔을 때 그제서야 위기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진권은 진걸더러 대오를 수습하라는 지시를 주고 뒤에 붙어있는 진성에게 물었다.

《이곳이 어드메뇨?》

진성이 《회주성의 남쪽으로 사십리 떨어진 백운동이로소이다.》하고 대답한다.

진권이 또 물었다.

《예서 미주성이 거리가 얼마나 되느뇨?》

진권의 옆에 있던 다른 장수가 《칠십리입니다. 물이 깊고 길이 험하며 군사들이 지쳤으니 잠간 쉬였다가 행군함이 어떠하오이까.》 한다.

진권이 사위를 둘러보니 쥐죽은듯 고요하고 앞에는 울울창창한 수림이다.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며 말을 세웠다.

《만일 지체하다가 발해군사가 기습하면 어찌할손가.》

이어 진성과 진보에게 앞에 나가 길을 열라 명령하고 진걸을 데리고 후렬을 돌아보는데 전렬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앞에 초목이 무성하여 갈길이 없나이다.》

진권의 늘어졌던 하늘소귀가 세차게 한번 푸들거리더니 그의 입에서 돼지멱 따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행군하다가 강이 막아서면 다리를 놓고 구뎅이가 있으면 메우면서 길을 열고 전진함이 옳거늘 어찌 초목이 무성하다고 지체한다더냐! 빨리 길을 열고 전진하…》

말끝을 채 맺기도 전에 한방의 포소리 울리더니 사방에서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난데없이 군사들이 무섭게 공격해오는것이 아닌가. 우군장 서하수가 이끄는 발해군의 삼천군마였다.

전렬에 섰던 진성과 진보가 맞받아나갔으나 진보는 서하수의 창에 찔려 죽고 진성은 혼자 당해내지 못할줄 알고 달아나니 서하수가 그를 단념하고 진권을 향해 무섭게 질주해왔다. 진권이 전력을 다하여 그와 접전하였으나 능히 당할수 없었다. 진걸이 달려와 진권을 도와 서하수와 몇번 접전하는척 하다가 진권을 끼고 불속을 헤치고 달아났다. 서하수는 궁지에 빠진 진권과 진걸을 쫓지 않고 군마만 빼앗고 돌아가버렸다.

진걸의 도움으로 서하수한테서 겨우 몸을 뺀 진권이 죽을둥살둥 도망하다가 발해군이 추격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말을 세우고 돌아보니 한무리 패잔병이 뒤를 따르고있고 추격병은 보이지 않았다.

좌우를 둘러보며 또 물었다.

《예서 미주성이 얼마나 되느뇨?》

《륙십여리 잘되오이다. 헌데 사람과 말들이 지쳐서 더 갈수 없으니 잠간 쉬며 밥을 지어먹고 가는것이 좋을것 같소이다.》

한 부하장수가 나서며 하는 말에 진권이 얼굴을 찡그렸다.

《추격병이 따르면 어찌하느냐. 바삐 행군하라!》

군사를 재촉하여 미주성을 향해 십리가량 전진하였는데 멀리 촌부락에서 밥짓는 연기가 몰몰 타래쳐올랐다.

진권이 촌부락쪽을 응시하며 또 물었다.

《이곳 지명이 무엇이라 하느뇨?》

《협곡산이라 하오이다.》

그러자 뒤따르던 장수들이 일제히 한무릎을 꿇으며 간청한다.

《미주성이 여기서 오십리라 군사와 말이 피곤했으니 잠간 쉬였다가 행군하사이다.》

진권이 묻는듯한 눈길로 진걸을 돌아보니 진걸이 나섰다.

《부하장수들의 청을 들어줌이 좋을듯 하나이다.》

진권은 마지못해 부하들의 청을 들어 휴식령을 내렸다.

데쳐낸 시래기처럼 후줄근해있던 군사들이 언제 그랬던가싶이 와- 소래기를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저기에서 일변 밥을 짓고 일변 갑옷을 벗고 그자리에 털썩 누워있고 일변 군마에게 마초를 먹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홀연 어디선가 한방의 포소리가 울리였다.

말에서 내려 군사들의 하는 양을 노근해서 바라보고있던 진권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 사위를 둘러보니 좌우켠 산에서 화염이 하늘로 솟구치고 무수한 군사들이 창과 칼을 비껴들고 풍우처럼 달려나오고있었다. 맨앞에 선 대장은 발해군 좌군장 우시춘이라 장창을 높이 추켜들어 진권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웨쳤다.

《역적 진권은 그만 달아나고 목을 바치라!》

맹호와 같이 달려드는 그 기세는 사정없이 쏟아지는 산사태를 방불케 하였다.

창황중에 불의의 변을 당한 진권의 군사들이 미처 갑옷을 입지 못하고 말을 타지 못한채 갈팡질팡하다가 그대로 칼을 받으니 장졸의 머리 추풍락엽신세를 면할수 없었다.

진걸과 진성이 다급히 말에 올라 앞을 막아나섰다.

우시춘이 고리눈을 부릅뜨며 장창을 들어 허공에서 번뜩거리니 진성의 머리가 말아래에 나딩굴었다. 진걸이 크게 놀라며 진권을 호위하며 달아나려는데 우시춘이 어느새 뒤쫓아와 우뢰소리 한마디 지르며 장창으로 진권을 찔렀다. 진권이 얼결에 몸을 피하니 그 창에 진권의 말이 맞아 거꾸러지고 진권은 땅바닥에 돌멩이처럼 뿌려져 뒹굴었다.

우시춘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창을 들어 진권의 머리를 내리치는데 진걸이 황급히 우시춘의 창을 칼로 비껴치고 땅에서 뒹구는 진권을 옆구리에 끼고 달아났다. 우시춘이 그 뒤를 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진성의 머리를 창에 꿰들고 돌아갔다.

진걸의 도움으로 다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진권은 이번에는 아예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자개바람이 일도록 내처 말을 몰아 미주성에 가닿았다. 어찌나 말을 혹사시켜 몰아댔는지 미주성에 당도하자마자 진권이 탔던 밤색말이 입에 거품을 몰고 자빠지더니 한동안 두눈을 떼룩거리며 발버둥질치다가 죽고말았다.

죽어 뒈진 말을 굽어보는 진권의 눈에 비통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하늘소귀가 후두둑 떨렸다. 미주성에 들어온 군사를 점고하니 수십만군사중에 겨우 만수십명만 남았다.

진권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였다.

《아-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구나!》

진걸이 죽은 말곁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꺼이꺼이 통곡하는 진권을 부축여 일쿼세웠다.

《대왕은 너무 상심마소서. 하늘이 대왕을 저버리지 않았소이다.

이제 군사를 다시 초모하고 또 격서를 달주의 진형에게 보내여 원병을 청하면 대사는 땅짚고 헤염치기입니다.》

넉두리하며 통곡하던 진권이 눈을 희번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 벼룩이 씹듯 독기서린 악청이 튀여나왔다.

《그래, 아직은 하늘이 우릴 배반하지 않았지. 내 기어이 설연과 황운이 그놈들을 칼탕치고 천하를 차지하리라.》

진권은 진걸에게 명령하여 원병을 청하는 사자를 달주로 급파하였다. 진권의 서신을 받아쥔 사자일행이 달주로 질주하였다.

회주성을 함락한 도원수 설연은 방을 내붙여 백성들을 안정시킨 다음 즉시 승전소식을 알리는 첩서를 조정에 올리였다. 이어 설연은 선무관 류도에게 군사 오천을 떼주어 회주성을 지키라는 임무를 주고 자기는 황운과 함께 대군을 인솔하고 진권이 틀어박힌 미주성으로 진격하였다.

미주성의 오리밖에 진을 친 도원수 설연은 장수들을 내보내여 우정 싸움을 걸어 진권의 싸움의기를 떠보았으나 군세가 쇠진할대로 쇠진해진 진권은 떡 버티고 일체 응하지 않고 다만 진형의 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질질 끌뿐이였다.

우시춘과 장수들이 가슴을 두드리며 도원수에게 청하였다.

《진권이 지금 세력이 진하여 궁지에 빠졌으니 이때를 타서 진권을 사로잡도록 해주소서.

도원수는 빨리 결심을 내리시오이다.》

설연이 머리를 흔들었다.

《천험지세에 틀고앉은 미주성을 깨뜨리기는 쉽지 않노라. 허나 미주성은 고립무원한 상태에 놓여있기에 우리가 성을 포위만 해도 승패는 불보듯 뻔하도다.

미주성에 적을 몰아넣음은 성을 포위해서 적을 제풀에 기진맥진시키자는것이 첫째 목적이요, 분명 진권이 달주의 진형에게 원병을 청할것이니 이 기회에 진형의 군사를 고립무원한 미주성에 끌어들여 몽땅 쳐없애자는것이 둘째 목적이요, 그 기간에 싸움에서 지친 아군의 군사들을 쉬우면서 힘을 축적하자함이 셋째 목적이라 장수들은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

도원수 설연이 부원수 황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 눈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황운은 온몸으로 직감하고있었다. 얼핏 들어보면 우시춘과 장수들의 말대로 일격에 성을 들이치는 편이 옳은 방책인듯싶다. 허나 황운은 도원수 설연의 계책이 멀리 앞을 내다본 적절하고 현명한 방책임을 순간에 알아챘다. 더구나 달주의 진형까지 미주성에 끌어들여 일망타진하자는 의도는 실로 기막힌 묘책이였다. 과시 도원수 설연은 용병술이 뛰여난 장군임이 틀림없었다. 전번에 있었던 일로 하여 될수록이면 도원수와의 마찰을 피하기로 내심 작정하고있던 황운은 자기를 바라보는 도원수 설연의 눈빛에서 그가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잘 알고있었다.

부원수 황운은 윽윽거리는 우시춘을 비롯한 장수들을 엄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장수들의 그 심정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도원수의 계책대로 해야 역적무리들을 송두리채 멸할수 있도다. 그러니 도원수의 분부대로 각 장수들은 돌아가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차후 명령을 기다림이 옳도다!》

부원수 황운의 어조에서 풍기는 위세와 론조앞에 장수들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다른 의견을 더 내지 않고 묵묵히 물러났다. 도원수 설연은 자기 결심을 지지해주는 부원수 황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고마움의 뜻으로 눈을 슴벅였다.

이때 진권의 둘째인 진형은 달주에 있으면서 군사를 조련시키고있었는데 미주에서 진권의 서신을 가지고 사자가 왔다고 하는것이였다.

《어서 들여보내라.》

땀으로 미역을 감은듯 온몸이 땀투성이인 사자가 황황히 들어와 설연과 황운과의 싸움전말을 두서없이 전하며 서신을 내보였다.

진형이 뜯어보니 쓰기를 《…설연, 황운의 형세가 강하여 회주성을 잃었고 지금은 미주가 위급하니 빨리 원병을 보내여 구원하라.》고 하였다.

《설연과 황운이란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대왕이 그리도 쩔쩔 맨단 말이냐?》

밤중에 길가다 범을 만난 할미마냥 펄쩍 놀라며 진형이 그 즉시 대오를 집합시키라는 령을 내렸다. 군사들을 징집하는데 하루새에 정병이 이십만이고 장수는 이백이나 되였다.

군사를 징집한 진형은 진권의 격서를 놓고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다가 흉악한 꾀를 생각해냈다.

(발해군의 용장이라는 설연과 황운이 전장에 나갔다면 황성엔 장수가 없을것이 아닌가.

병법에 이르기를 적의 빈 곳을 치라고 하였거늘 미주로 군사를 내몰것이 아니라 차라리 텅 빈 황성을 들이치는것이 옳지 않을가.

황성을 점령하고 임금만 잡는다면 발해국은 무너질것이고 이 세상천하는 진씨세상이 될것이니라. 그렇게 되면 발해국이 다 망한 판이라 설연과 황운은 올데갈데없는 신세에 놓일것이니 그때 가서 그들을 없애치우면 꿩먹고 알먹기가 아닌가.)

자기가 제갈량의 지모와 관우의 용맹을 겸비했다고 자처하는 진형의 입가에 삵의 웃음이 어렸다.

진형은 원병대신 황성을 기습하겠다는 밀서를 진권에게 보내고 달주의 이십만대군을 이끌고 황성으로 진군하였다. 달주에서 황성으로 가려면 철리부와 막힐부의 남쪽고을들을 거쳐야만 하였다.

달주를 떠나 철리부와 막힐부의 고을들을 들이치고 곧바로 황성을 향해 풍우같이 돌진하는 진형의 대군을 철리부와 막힐부의 크고작은 주와 현들이 맞서보지도 못하고 손을 들었다.

며칠만에 이렇다할 저항을 받지 않고 황성이 바라보이는 십리밖에 당도한 진형은 대오를 멈춰세우고 간자들을 성안에 들여보내여 형세를 탐지하게 하였다. 성안에 들여보냈던 간자들이 돌아와 하는 말이 황성안에는 수비군사들만 남아있다는것이였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진형은 대군을 휘몰아 순식간에 북문을 깨뜨리고 성으로 쳐들어갔다.

수문장들과 수비군사들이 저항해나섰으나 종이장으로 화살막기였다. 황성을 지키던 수비군사를 손쉽게 제거한 진형은 정예군사를 이끌고 직방 대궐로 쳐들어갔다.

당시 대궐에는 임금과 황후 그리고 임금의 동생인 계루왕부부가 있었다.

황궁의 호위도감과 호위군사들이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으나 그들도 모두 반란적들에게 란도질을 당하고말았다. 마른 하늘에 생벼락맞듯 불의의 변고를 당한 임금은 황후와 계루왕부부를 데리고 황황히 남문을 벗어났다. 어가를 바래는 성안의 백성들이 터뜨리는 구슬픈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진형이 대궐로 쳐들어갔을 때는 임금의 일행이 이미 남문을 벗어난 뒤였다.

노발대발한 진형이 부장 진봉더러 당장 발해의 임금과 그 일행을 뒤따르라고 호령하였다. 진봉이 군사 오백을 이끌고 남문으로 달려갔다.

반란적의 예봉을 피해 남문을 벗어난 임금일행이 오십여리쯤 왔을 때 꼬리에 진봉의 추격군사가 바싹 붙었다. 계루왕이 호위군사들을 둘러보며 임금을 모시고 피신하라 하고는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맞받아나갔다. 수십명의 호위군사들이 목숨을 내대고 계루왕과 함께 적들과 맞서싸웠으나 워낙 수적으로 중과부적이라 군사들은 모두 쓰러지고 계루왕은 사로잡히고말았다. 그사이에 임금은 간신히 추격에서 벗어나 현주로 피신할수 있었다. 계루왕을 사로잡은 진봉은 더 뒤를 쫓지 않고 황성으로 돌아가버렸다.

황성을 타고앉은 진형은 반란군사들에게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죽이고 빼앗으라는 령을 내렸다. 백여년의 사직과 문물을 자랑하는 발해였다. 그 발해국의 무명유명의 재사들과 백성들의 피와 넋이 깃든 귀중한 국보들이 반란적들에게 도륙당하고 숱한 진귀한 서적들이 불에 타버렸으며 무고한 백성들이 피흘리며 쓰러지고 꽃같은 녀인들이 눈도 감지 못한채 갈기갈기 찢겨졌다.

애닲도다, 무고한 인명이 어육이 되고 곳곳에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니 그 정상 차마 눈뜨고 볼수 없구나!

반란군이 진형의 령에 따라 종묘에 불을 지르니 홀연 청청 하늘에서 우뢰가 울고 번개가 치더니 비가 억수로 쏟아져 불을 꺼버리는것이였다. 진형이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이후론 감히 불을 놓을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이튿날 진형은 진봉더러 황성을 지키고 부장 엄한더러 삼천군사를 끌고 동각에 매복하여 설연에게 소식이 새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주었다. 동각은 황성으로 통하는 길목이자 북쪽관문으로서 동각을 통해야만 북으로 오갈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직접 오천명의 정예군사를 데리고 임금을 쫓아 현덕부의 현주로 향하였다.

현주는 임금의 동생 전왕의 봉읍지인 현덕부의 도성이였다.

임금이 창황중에 미처 기별하지 못하고 곧바로 현주로 들어서니 전왕이 대성통곡하며 맞아들였다. 서로 붙들고 통곡하고있는데 이때 수문장이 황황히 달려와 보고하였다.

《진형이 대군을 몰아 성아래에 진을 쳤소이다. 헌데 진형이 계루왕전하를 결박하여 진앞에 꿇어앉혀놓고 갖은 모욕을 다 주고있소이다.》

전왕이 분기를 누르지 못하여 칼을 빼들고 당장 나가려 하자 임금이 만류하였다.

《진형은 사납고 횡포하기 그지없는 장수이니 싸우면 무익하거늘 다만 성문을 굳게 닫고 도원수 설연에게 조서를 내여 구원병을 청함이 방책이로다.》

그자리에서 조서를 내여 설연에게 사자를 띄워보내였다. 허나 현주성을 벗어난 그 사자가 동각에 이르러 엄한에게 붙잡히고말았다. 사자의 몸에서 설연에게 보내는 원병요청조서가 나왔다. 엄한이 코웃음치며 그 조서를 불태우고 사자의 목을 쳤다. 이리하여 원병을 청하는 조서는 중도에서 없어졌고 결국 도원수 설연은 황성에서 어떤 재난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리 없었다. 일이 이렇게 글러졌지만 임금은 사자에게 기대를 걸고 설연의 원병이 오늘 올가 래일 올가 학수고대하고있었다.

별의별 오그랑수를 다 쓰며 싸움을 돋구어도 성문을 굳게 닫고 전혀 응하지 않자 악에 받친 진형은 현주성아래에 계루왕을 결박하여 앉혀놓고 또 성안에 있는 임금을 모욕하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만일 항복치 않으면 성문을 깨고 들어가 성안의 백성들을 사정 두지 않고 도륙하리라.

만백성을 돌본다는 주상이 그래가지구도 맘 편하느냐. 우매하기 짝이 없는 군주로다!》

전왕이 그만에야 더 참지 못하고 갑옷을 떨쳐입고 말에 올랐다.

그뒤로 현주군사 륙만이 따라섰다. 성문을 열고 와- 함성을 지르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진형이 랭소하며 팔십근장창을 들고 전왕을 맞받아달려나왔다. 수합만에 진형이 전왕을 땅에 떨구어 사로잡았다. 한겻동안 현주군사들이 필사의 각오로 적들과 싸웠으나 진형의 대군에게 무참히 희생되고말았다.

범잡은 포수마냥 득의양양한 진형이 사로잡은 전왕을 진앞에 꿇리운 계루왕의 옆에 앉혀놓고 군사들을 시켜 욕을 보이니 그 광경을 내려다본 임금이 너무도 절통하여 앙천통곡하였다.

해가 구름장에 가리웠는지 온 누리가 삽시에 어둑컴컴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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