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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회


전 편
집없는 나그네


제 2 장


6


마지막졸업시험을 치르고난 학생들은 《와-》하고 환성을 지르며 교실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밀려나갔다. 모자를 벗어서 하늘공중에 내던지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어깨우에 뛰여올라 만세를 부를듯이 두팔을 추켜올리다가 허우적거리며 땅에 떨어져 뒹구는 학생도 있었다.

이제는 더는 가슴조이며 시험장문밖에서 서성거리는 일도 없어지고 두눈에 성냥가치를 버티며 시험문제를 따로외우느라고 밤을 패울 일도 더는 없으리란 말인가. 어깨와 어깨를 겨루고 활개치고 웃고 떠들며 교문으로 밀려나가는 패거리도 있었다.

저들은 중학을 마치는것으로 일생의 학업이 끝났다고 생각하는것이나 아닌가, 허나 이 시각만은 그런 생각을 말자, 저마다 마음들이 둥둥 떠서 돌아간다고 탓하지 말자, 학업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힘겨운 고역일진대 이들은 바야흐로 그 고역의 짐수레를 무겁게 끌고 한 목적지에 당도한것이 아닌가, 그러니 굴레를 벗어놓고 잠시 들뛰며 유쾌한 순간을 보낸들 어떠랴.

응상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감한 눈매로 학우들을 둘러보았다. 이때 그의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응상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리덕구선생이였다.

《가세!》 나직하면서도 은근한 목소리였다. 늘씬한 키에 재색봄가을외투를 입고 등산모를 쓴 리덕구는 앞장서서 걸었다. 옆구리에는 불룩한 가죽가방을 들었다. 영문을 몰랐지만 응상은 스승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들고 부지런히 뒤따랐다.

그들은 번화한 수창동대도로를 피하여 조용한 뒤길로 잡아들었다. 좁은 골목길에서는 조무래기들이 딱총놓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리고 이따금씩 엿장사가 절칵절칵 가위를 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옆구리에 칼찬 왜순사가 뚜벅뚜벅 군화소리를 내며 둘레둘레 행인들을 살핀다.

《응상군, 금년나이가 21살이지?》

리덕구의 물음이였다.

《예, 어느새 벌써 그렇게 되였습니다.》

《자네나이에 발명왕 에디슨은 첫 발명품 〈투표기록기〉를 만들었네. 그런데 우리는 그 나이에 중학을 나오거던. 이런 엄청난 차이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거라고 생각하나?》

리덕구는 언제나 자기가 즐기는 심각한 론제를 꺼냈다. 그에게는 학문연구 이외에 날카로운 롱담을 즐기는것밖에는 다른 흥미가 없었다. 모름지기 이야기의 흥을 돋구는것도 일종의 향락인듯싶었다. 이런 면에서는 응상도 리덕구와 류사한 성미를 지니고있다고 할수 있었다. 그 역시 학문연구를 최상의것이면서도 유일한 흥미로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대신 이런 론쟁에서조차 한마디를 해도 남달리 깊이 생각하고 대답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번에도 응상은 스승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얼마후 그는 턱을 쓸어만지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게 바로 조상들이 우리한테 넘겨준 빚이 아닐가요.》

《영원히 청산하기 어려운 묵은 장부일는지 모르지.》

리덕구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내 더는 이따위 약자의 넉두리는 입밖에 내지 않으려구 했네만 도저히 가만 보구만 있을수가 없네그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일은 무슨 일. 늘 보는 그런 일이지. 며칠전에 어머니 삼년상 치르러 고향에 내려갔다가 철봉산절간엘 들리지 않았겠나. 대웅전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비질을 하던 머리 빡빡 깎은 한 젊은이가 로송밑에 앉아 책을 보길래 슬며시 넘겨다보니 글쎄 수학공식을 중얼중얼 외우고있었네. 어떻게 된 영문인가고 말을 붙여보았더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데 있겠나. 이태전에 철봉산아래마을에서 우리 학교에 올라와 입학시험을 친 젊은이가 있었는데 단연 상등의 성적으로 합격했었지.

방도 내다붙이고 입학통지서도 띄웠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학생은 종시 나타나지 않았네. 한데 그 머리깎은 젊은이가 그때 특출한 성적으로 입학했던 당자였네. 그는 내가 오성중학에서 왔다는걸 알자 두손 부여잡고 눈물을 머금으며 사정얘기를 하는것이였네.

살림살이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이붓어미 괄세가 심해서 집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한다는건 꿈도 꿀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배움을 단념할수가 없어 절간에 들어와 시주미로 지어주는 밥을 얻어먹으며 독학을 하고있다는걸세. 귀한 인재가 이렇게 썩고있으니 우리가 언제 번한 앞날을 내다볼수 있겠나.》

끓어오르는 의분을 터놓던 리덕구는 입가에 쓰디쓴 미소를 짓고있었다. 응상은 가슴이 답답해났다. 세상일을 개탄하는 스승의 목소리에서 헤여날수 없는 비애감을 느끼게 되기때문이였다.

사람이 결심하고 나서면 산도 머리를 숙이고 강도 길을 열어주고야말리란 기백을 지녀도 모르겠는데 그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조차 저런 참담한 기색을 지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선생님!》

응상은 걸음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리덕구를 쳐다보았다. 하숙집앞에 다달은것이다. 루추하고 초라한 하숙방으로 들어가자고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수도 없었던것이다.

이런 기미를 눈치챈 리덕구는 《응상군의 하숙이요? 들어가봅시다.》라고 하며 한걸음 앞선다.

《저-》 응상은 얼어붙은듯 그 자리에 서서 애원하듯이 말했다.

《저 방엔 선생님이 올라가보실데가 못됩니다.》

《상관없네. 아무러면 응상군한테 찾아올 때야 나를 고대광실루 안내하길 바라겠나.》

《알겠습니다.》

응상은 면구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뒤뜰로 들어가 일각문을 열었다. 장작을 가지러 집모서리를 돌아오던 오녀는 응상이 중산모쓰고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의 신사를 뒤에 달고 일각문으로 들어서자 숨박곡질하는 소녀처럼 창황망조하여 집모퉁이로 돌아가 얼굴을 빠금히 내밀고 이쪽을 내다보았다.

《조심하십시오.》

응상은 가파로운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가며 뒤따르는 리덕구에게 말했다. 체구가 큰 리덕구는 다락방문으로 겨우 몸을 비집고 들어섰다. 뙤창으로 기운해의 볕발을 정면으로 받은 양옥집 흰 벽이 해뜻하게 내다뵈였다. 그것은 종일 그늘이 깃든 이 처마밑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흠, 기맥힌 곳이군.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고 그렇지만 조용하기로는 으뜸이겠소.》

리덕구는 천정이 낮아 등을 구붓하고 뙤창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방안을 휘둘러보며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그는 방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남비를 열어 밑굽에 붙은 강조밥누룽지를 띄여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라디움을 발견한 마리 큐리가 빠리에서 세내고 들었던 11층 다락방도 이렇지는 않았을거요. 그 역시 자기의 조국이 다른 나라에 예속되여있은탓으로 집없는 나그네신세였소. 그러나 이렇듯 가혹한 빈궁이 그를 괴롭히지는 않았단 말이요. 아시아의 비극이지.…》

리덕구는 가죽가방을 열고 그안에서 소고기 둬근과 소주 한병을 내놓았다.

《변변치 못한것이지만 함께 나누며 이야기나 나누자구.》

응상이 서울 올라온 후 단 한번도 맛보지 못한 희귀한 음식이였다. 고학생의 생활에서는 너무나도 호사스런 음식이였지만 리덕구는 어줍은 미소를 지었다.

《벌써부터 한번 찾아와본다는게 성의가 없다보니 이렇게 되였네.》

《모처럼 찾아오신 선생님께 대접은 고사하고 이거 안됐습니다.》

응상은 눈언저리가 벌개졌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아무러면 내가 계군한테 대접받으러 온줄 아나.》

리덕구는 양복저고리를 되는대로 말코지에 걸어놓으며 희떱게 말했다.

스승과 제자는 숯불에 익힌 소고기볶음 한가지를 놓고 마주앉았다. 리덕구는 고기 한점을 맛보고 눈을 찡긋하며 활기있게 말했다.

《에키, 이제야 이 소고기료리의 진미를 알겠구만. 자, 어서 드세.》

응상은 어떤 자리에서도 술을 한잔이상 마시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날은 스승이 부어주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쭉쭉 들이키였다. 이야기하기를 즐기는 리덕구도 제자가 부어주는 술을 말없이 들이키며 턱을 들고 천정을 쳐다보는것이였다.

《그동안 전도문제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았나?》 졸업후 갈 곳을 묻는것이였다.

《예,》

《어데루?》

《어쨌든 생물유전학을 연구하는 사업에 일생을 바쳐보겠습니다.》

《어떻게?》

《뾰족한 수가 있는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금 유일하게 희망을 거는건 공부할수 있는 돈을 좀 채용하자는겁니다. 저의 고향마을에서 백여리쯤 떨어진 구성마을에 저의 집과 같은 성씨를 가진 돈많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분한테 찾아가 통사정을 해볼가 합니다.》

《흠-》

리덕구는 신음하듯 중얼거리였다.

《옛책에 나오는 허생이모양으로 이름난 갑부를 찾아가 돈 만냥만 10년기한으로 꾸어주시오 한단 말이지. 허지만 그런 일은 전책에서나 볼수 있는 희귀한 이야기이지 생활에선 타산없이 선심을 쓰는 부자가 단 한명두 없다네.》

《그럴가요.》

《그럴가요가 무언가. 장담하네만 인생에선 그런 우연한 횡재란 절대로 없다네. 그래서 나두 그동안 계군의 장래를 두고 내딴의 생각을 해보았네. 마침 돈냥이나 있는 옛친구 하나가 누에종란업을 차려놓으면서 기술자 한사람을 모색하는중일세. 그 사람하구 손을 맞잡구 돈벌이를 해가지고 다시 공부하러 떠나는게 어떨가? 에디슨도 과학연구를 위해 자작 신문을 만들어 팔지 않았나. 곧바른 길이 막혔을 땐 에돌아갈줄도 알아야 한다고 보네.》

응상은 숙였던 머리를 들고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거치른 하늘아래 그 누가 제자를 위해 품놓고 다니며 이런 뜨거운 선의를 베풀어주랴. 하나 너무도 때늦게 길을 떠난 그에게 또다시 먼길을 에돌아가라고 하는 그 말만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아직 그가 세상을 모르는탓으로 리상에만 매혹되여 실무적타산을 무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촉해서 가야 할 길을 눈앞에 두고 또다시 헛걸음을 걷고싶지는 않았다. 한몸이 찢기여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결심한 그 길에 무작정 뛰여들고만싶었다.

계응상은 생각했다. 내가 남들처럼 틀을 제대로 차리고 조건이 다 갖추어진 다음에 길을 떠나자면 영원히 앉은방아를 찧다말것이 아닌가. 아니다. 각자가 제힘으로 한나무씩이라도 붙잡고 높이 올라가야 한다. 물은 우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것밖에 모르지만 힘을 한곬으로 모으면 분수와 같이 하늘높이 솟구치는 기적을 나타내기도 하지 않는가.

응상은 자기의 머리속에서 번거롭게 배회하는 이런 생각을 스승앞에 숨김없이 터놓는다는것은 너무도 외람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장 그의 뜻을 어기고싶지는 않았다. 하여 그가 고개를 숙이고 기여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은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였다.

《그럴터이지.》 리덕구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였다.

《나도 자네한테 내 뜻을 강요하지 않겠네. 군도 결심을 서두르지 말게. 그리구 스승의 말이라구 어렵게 여기며 마음에 없는 일을 하겠다구 나설 필요두 없네. 군은 시간과 정력을 함부로 랑비할 권리가 자기한테 없다는것을 명심해야겠네.》

덕구는 제자의 장래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큰 기대를 가졌다. 그런것만큼 응상을 서푼짜리 교원들보다도 몇배나 더 존중하고 귀히 여겼던것이다.

《알겠습니다.》 응상은 고개를 수그리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덕구는 해가 어설핏해서야 하숙을 나섰다. 휘적휘적 골목길 저쪽으로 사라지는 스승의 뒤모습을 점도록 바라보는 응상의 두눈에 가늠할길 없는 고뇌의 빛이 얼른거리였다.

소리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온 오녀는 두눈이 둥싯하여 응상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불행한 일이 생겼나요?》

응상은 고개를 돌려 어린애처럼 천진하고 순박한 빛이 샘물처럼 고인듯싶은 오녀의 정찬 눈동자를 이윽토록 내려다보며 허구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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