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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전 편
집없는 나그네


제 2 장


1


응상이 석산리 맏누이네 집에 나들이간다고 집을 나간지 열흘이 지났으나 그는 돌아올념을 하지 않았다.

《웬일이냐?》

계시경은 초조하고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맏아들에게 물었다.

《제 누이네 집에 매부만 있으면 몰라두 늙은 사둔내외까지 모시고있는데 펑덩하니 열흘씩이나 주저앉아있으면 어쩔셈이냐?》

응관은 고개를 수굿한채 새끼를 꼴뿐 아무 응대도 하지 않았다.

《여보! 당신 래일은 딸네 집에 좀 댕겨오구려. 혹시 사둔네 집에 앓아누워있는게 아니요?》

시경은 안해에게 짜증을 부렸다. 시름에 잠겨 버선을 깁던 윤씨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두 응상인 제 누이집으루 간것 같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요?》

붕어칼로 삼아놓은 짚신의 거스러미를 다듬던 계시경은 두눈을 흡떴다.

《아버님!》

응관이 침묵을 깨뜨렸다.

《응상인 공부하러 서울루 간것 같애요.》

《뭐라구?》

시경의 손에서 붕어칼이 툴렁 삿자리에 떨어졌다.

《넌 그걸 알구있으면서두 여직껏 가만있었단 말이냐?》

《…》

《말해보아라. 도대체 어떻게 된 감투끈이냐?》

시경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며늘애야, 너는 알고있었겠지?》

응상의 안해는 숙인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며 《흑.》하고 흐느껴울었다. 쪽진 실한 머리밑에서 동실한 어깨가 바르르 떨리였다.

《새애기두 감감 몰랐다우.》

윤씨가 며느리를 두둔하여 나직이 말하자 계시경의 얼굴은 더욱 험악하게 이그러졌다. 그는 음성을 높였다.

《이녀석아, 왜 그렇다는걸 내한테는 한마디 귀띔도 하지 않았느냐? 서울 간 웃마을 경훈이꼴이 되는걸 보구싶어서 그러느냐. 어이구, 이를 어쩌면 좋으냐?》

응관의 얼굴에서 피기가 싹 가시였다. 그는 해쓱해진 얼굴을 들며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긴 하나 침착하게 말했다.

《아버진 응상일 어느때까지나 집에 붙들어둘수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사람에겐 다 제 갈길이 따로 있는것 같애요. 응상인 제가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고야마는 성미가 아니나요.

전 응상이 집을 뛰쳐나가려고 한다는걸 오래전에 알았지만 도저히 그걸 막아낼수 없다는걸 알자 단념했어요.》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제 애비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탈가하는 부랑망측한 행동이 어데 있단 말이냐. 그 앨 기특히 여겨 서당훈장으로까지 천거해준 동리어른들보구는 무엇이라고 발명해야 좋단 말이냐.》

응관은 방구석만 내려다보았다. 시경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참, 별녀석 다 보겠군.)

이웃들은 응상의 성미가 신통히도 애비를 닮았다고 말하기가 일쑤였다. 무슨 일이든지 마음내킨 일은 끝을 보고야마는 그의 검질긴 성미때문인듯 하였다. 한데 그 직성이 애비의 손탁에서 놀 때는 별일이 없었으나 일단 그의 손에서 벗어날 때에는 가늠할수 없는 지경으로 내달아가는것이였다. 확실히 둘째는 애비가 걷는 길을 고스란히 따르는 그런 자식이 아니였다.

몇해전 초여름 어느날이였다. 시경은 서켠집에서 삯김을 매주고 날이 어두워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안뜨락에 들어서자마자 습관적으로 외양간을 들여다보니 송아지가 보이지 않았다. 한데 응상은 건너방에서 책을 읽고있었다. 시경은 방문을 펄쩍 열어제끼며 소리쳤다.

《이녀석아, 금방 비가 쏟아지겠는데 소를 한지에 매놓구 글자가 눈에 들어오느냐?》

《그만 깜박 잊었어요.》

《잊어? 그래두 네 끼니는 건느지 않았겠지. 응, 너두 농사군의 자식이냐.》

계시경은 결김에 응상의 귀쌈을 쳤다. 응상은 원망에 차서 부친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야 이녀석아, 아버지 더 성나시기 전에 냉큼 나가서 소를 들여오려무나.》

윤씨가 안타깝게 곁들었지만 응상은 아버지의 매질에 항거라도 하듯 까딱하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안절부절하지 못하던 윤씨는 시경에게 간청하듯이 말했다.

《여보, 저 애두 방금 들어왔어요. 재너머 최판서네 집에서 찾아와 비문을 써달라구 해서요. 그런데 사정두 알아보지 않구 애닥달부터 하자구드니 어디 됐어요?》

그러나 분기가 치받친 시경은 애비한테 맞서는 둘째를 제때에 눌러놓지 않으면 버릇을 궂힌다고 여기고 아들을 사정없이 족치면서 잘못했다는 말을 받아내자고 했다. 그러나 응상은 원망에 차서 부친을 올려다볼뿐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녀석아, 아버지를 쳐다보면 어쩔테냐, 응? 이 애비 말을 듣지 않으려거던 당장 나가라!》 격하여 리성을 잃은 시경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한데 뜻밖에 응상은 《좋아요, 나가겠어요.》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런 발칙한 놈 봤나.》

시경이 다쫓아갔지만 응상은 새처럼 밖으로 날아나고말았다.

응상은 자정이 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윤씨는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놔두오. 그깟놈 애비말도 안 듣는 후레자식같은거, 필요없소.》

시경은 고함을 질렀다. 윤씨는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고말았다. 첫닭이 울고 새벽의 랭기가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시경도 은근히 걱정되였다. 철없는것이 독한 마음을 먹고 물에라도 빠지면 어쩌나 하는 위구심이 들어 안절부절하지를 못했다. 이렇게 마음의 고통을 당하느니 아들을 찾으러 집을 나서는것이 나을것 같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아들을 찾기 시작했다. 응상은 내가의 버드나무밑에 새우처럼 꼬부리고 누워 쌔근쌔근 자고있었다.

《이녀석아.》

시경은 열적은 기색으로 아들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그는 끝내 아들한테 지고만것이다. 꺾이면 꺾였지 결코 굽어들지 않는게 둘째의 직성이였다. 그러니 그가 맏아들보고 둘째가 집을 나가리란걸 알면서도 애비한테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고 나무라지만 과연 죽지가 돋히여 제 갈곳으로 날아가는 그 애를 막을수 있었겠는가. 계시경은 가슴이 알알해왔다. 제 자식 하나 제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무력감을 느끼자 괴로운 심정을 누를길이 없었다. 사람에게는 다 제갈길이 있는것 같다고 제법 애비를 가르치려드는듯 한 맏아들의 대꾸질도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았다.

계응상이 집을 나간 후 그의 집에는 외견상 이전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는 조촐한 생활이 흘러가고있는듯 하였다. 그러나 이때를 시작으로 하여 그의 집에는 햇낟알나기 전에 식량이 떨어졌다든가, 4~5월 된가물에 화중밭이 새빨갛게 탔다든가, 손주애가 홍역을 앓았다든가 하는 근심걱정들이 크나큰 불행, 생사를 알지 못하는 둘째에 대한 가실길 없는 깊은 수심속에 묻혀버리고마는것이였다.

그해 봄에는 여느때없이 춘궁이 일찌기 찾아왔다. 아무리 굶는다고 우는소리를 할 때에도 쌀겨를 빚어본적이 없었으나 이봄에는 호박죽에 모래알같이 깔깔한 겨떡으로 끼니를 잇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도 객지에 나가 고생하는 둘째에 비하면 자기들은 제집에서 된장국에 푸성귀라도 푸짐히 두고 부글부글 끓여먹으니 호사를 한다고 생각했다.

응상의 탈가는 누구보다도 그의 안해에게 뼈저린 아픔을 주었다. 어쩌면 제 피줄을 이은 오누이를 낳아기르는 안해에게조차 집을 나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길을 떠난단 말인가. 제 하고저 하는 일을 안해가 리해하지 못한다고 해서였을가, 아니면 부부간의 정이 떨어져서일가. 아무리 골똘히 생각을 해봐도 안해를 안해로조차 여기지 않았다는 무서운 사실을 부인할수 없었던것이다.

초조하게 이제나저제나하고 안타깝게 기다리던 외로운 나날도 지나가버리고 속절없이 해가 바뀌였다. 옹근 한해가 지나갔건만 응상은 한번 날아가면 돌아올줄 모르는 화살과 같이 감감무소식이였다.

이제는 동네사람들이 동켠집사람들을 만나도 응상이 소식을 더는 묻지 않았다. 차라리 묻지 않는것이 서로 마음 편하리라 여긴듯싶기도 했지만 거듭되는 실망으로 희소식을 단념해버린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식구들은 어느 하루도 집떠난 둘째를 잊을수가 없었다.

《여보, 이러구있으면 어떻게 하우. 고을에 나가 서울 나드는 사람 연줄을 찾아서라두 좀 부탁해봐야 할게 아니유.》

윤씨는 아들며느리들 있는데서는 궁상을 떠는것 같아 입을 봉하고있다가도 남편과 단둘이 마주앉게 되면 울상을 하고 성화를 먹였다.

《흥, 철없는 소리. 서울이 뭐 물곬같은덴줄 아우? 20만총중에 응상이 어디에 배긴줄 알구 찾는단 말이요?》

계시경은 돌아앉아 장죽에 쟁인 부용을 화로불에 대고 뻐금뻐금 빨며 툭하게 내쏘았다. 그러나 그는 혹시 응상의 행처를 알아볼가 하여 전번 장날에도 싸리비를 한짐 해지고 정주고을에 나가 자식들을 서울에 공부시키러 보낸 집들을 찾아다니며 물어보기도 했었다.

대처에 아들딸들을 공부시키러 보낸 집들은 신통히도 네거리에 사는 우편국장네 아니면 장거리 양주장집, 99간짜리 기와집을 쓰고있는 김부자네같은 집들이였다. 자기네 집처럼 째지게 가난한 숯쟁이네가 신의주나 안주고을도 아니고 서울공부시키러 보냈다는 집은 단 한집도 없었다.

《허허, 집에 아들이 서울공부하러 간다구 집을 나갔다구요?》

계시경의 초라한 형색을 무례하게 뜯어본 점포주인은 허무맹랑한 말을 다 듣는다는듯이 머리를 저었다.

《그래두 거 고학이라는걸 하면서 공부하는 젊은이들도 있지 않습네까?》

시경은 용기를 내여 항변조로 말을 붙여보았다. 점포주인은 재치있게 튕기던 주산알을 털며 코웃음을 쳤다.

《령감, 꿈에 맛본 떡 배부릅데까? 어림두 없는 소리외다. 서울이라는데가 어드런덴지 알기나 하슈? 물 한사발 얻어먹재두 돈을 내야 하는데라우. 그러니 공짜루 재워주구 먹여주고 공부시켜주는데가 어데 있겠소. 전책에 나오는 률도국에나 찾아가면 그런게 있겠는지 원.》

시경은 이런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더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알아볼 용기도 내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부질없는 요행수를 바라고있다는것을 알았다. 실심한 그의 입에서는 전에 볼수 없던 긴 한숨소리가 새여나왔다.

(세상이란 원래 그런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헤매이는고. 멀쩡한 정신을 가지구 숙맥노릇을 하다니. 왜 좀더 일찌기 알아차리고 범의 굴로 찾아들어가는 자식을 붙들어놓지 못했던고.)

그러나 둘째며느리가 있는데서는 이런 내색을 싹수조차 드러내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새 며느리는 혹시나 랑군의 소식을 알아오지 않을가 하여 시부모의 얼굴만 쳐다보고있었다. 게다가 식솔들이 오골오골하는 시켠에서 진아이를 둘씩이나 키우며 농사일을 하자니 오죽이나 속이 탈가. 가긍한 생각을 금치 못한 시경은 둘째며느리에게 넌지시 비쳤다.

《요새 네 신색이 좋지 않구나. 한동안 본가집에라도 가서 몸조리를 하고 돌아오지 않겠느냐?》

《괜찮아요. 밭에 씨앗묻을 땐데 한사람이라도 집을 떠나있으면 어쩌겠나요.》

둘째며느리는 오히려 남편이 없다고 딴마음 먹는다는 말을 들을가봐 흔연히 응대하는것이였다.

《그래두 혼자 고생하는 너를 보기가 딱해서 그런다. 어려워말구 남편이 올 때까지 본가에 가있겠거던 있으려무나. 그런다고 조금도 탓하지 않겠다.》

윤씨도 정색하고 곁들었다.

《시부모께서 저를 생각해주시는건 고맙지만 남편대신 집안일을 한껏 돕겠어요. 남자가 큰일을 하자면 집안에서 고생해야 될건 당연하지요.》

새 며느리는 버선코를 손으로 매만지며 말공대를 바치는것이였다.

《네 생각이 그렇게 지극하니 마음을 놓겠다.》

시경내외는 대견한 눈길로 둘째며느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때로부터 또다시 반년이 지났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탈가한 응상이한테서는 여전히 편지 한장 없었다.

《불효자식같으니라구. 일가족이 일일삼추로 제 소식을 기다린다는걸 생각해서라두 편지 한장 띄울게지. 이렇게두 애간장을 태우는 법이 어데 있담.》

《소문두 없이 객사한게지. 그렇지 않다면야 어째서 오백마흔날이 넘두룩 편지 한장 없겠수.》

《방정떨지 마우. 독심한 애니까 어디든 꾹 배겨서 제 할 일을 할지 어떻게 아우.》

실망은 원망으로, 원망은 다시 절망으로 변했다. 그러나 인간만사란 언제나 사람의 생각대로 움직여주는것이 아니였다.

칠월에도 백중이 지나자 밤만 들면 바람결에 선들선들하는 맛이 났다. 골안 십리아근에 뙈기뙈기 널린 밭들에서 조, 수수, 고구마들을 거두어들이느라고 동켠집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사람들의 사고가 한가지에만 머무른다면 한번 당한 슬픔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미쳐버리고야말것이다. 다행히도 인간의 사고에는 망각이라는것이 있어서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한 사람들도 세월이 흐르면 웃고떠들며 새로운 생활에 몸을 잠그는것이다.

동켠집에서도 이제는 응상을 기다리기에 지치기도 했거니와 아무리 고대해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것을 알고는 애타게 기다리기를 그만두었다. 집안식구들은 누구도 둘째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럴 즈음 뜻밖에도 우체부가 불쑥 동켠집에 찾아왔다. 대문은 닫겨있고 집안식구들은 모두 재너머 고구마밭에 나가있어 집에는 귀가 절벽인 시경의 부친이 웃방에 홀로 누워있었다.

우체부는 주인을 찾다못해 편지를 대문밑에 떨구어놓고 휭하니 달아나버렸다. 윤씨가 상처입은 고구마로 곁두리를 때우려고 가마를 가지러 내려왔다가 대문문턱밑에 떨어져있는 편지를 띠여보았다.

얼핏 그것을 집어든 윤씨는 가슴이 후두두 뛰였다. 그는 옹배기에 담가놓은 풋김치를 가마안에 넣어 이고가겠다던 생각조차 까맣게 잊고 솥 한개만을 뎅겅하니 이고 황황히 메골고구마밭으로 달음쳐올라갔다.

《여보, 편지가 왔수다레. 글쎄 대문을 열구 들어가는데 편지가 발에 밟히지 않겠수. 목빠지게 기다릴 땐 오지 않구 모두들 생각지두 않구 주인두 없을 때 이렇게 날아옵니다레.》

윤씨는 마음이 동떠서 여느때없이 수다스러워졌다.

《어디 봅쉐다.》

흙묻은 손을 바지에 문대고 편지를 받아쥔 계시경은 고랑을 타고 나가며 고구마를 캐는 응관을 불렀다.

《얼핏 와서 좀 들여다보렴. 글씨를 보니 응상이 보낸게 분명하구나. 둘째가 죽지 않구 살아있나부다.》

계시경은 희색이 만면해졌다. 말없는 기대속에 재가 앉았던 그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이 피여났다. 등을 구붓하고 성큼성큼 다가온 응관은 피봉에 침을 묻혀 편지를 정성스레 뜯었다. 얄팍한 편지지를 뽑아든 그는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오매불망 잊지 못할 조부님, 부모님, 형님, 그간 불효막심한 이녁때문에 얼마나 맘고생들이 많으셨습니까. 저는 서울에 올라와 하숙을 정하고 무고한 몸으로 고학생활을 하고있습니다. 그리 아시고 소식이 없어도 걱정하시지 않으면 저를 극진히 위해주시는것으로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온집안식솔들에게 저의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할 말은 태산같지만 오늘은 이만 상서합니다.

계응상 올림.

서기 1914년 10월 12일 새벽 1시.》

응관이 편지를 다 읽었으나 집안식구들은 서로 의문에 찬 눈길을 주고받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해포동안이나 종무소식이던 사람한테서 온 편지이니 그간에 있은 사연들을 만지장서할줄 알았는데 수수께끼같은 간명한 글 몇줄을 써보내고만것이 아닌가.

《그게 다냐?》

윤씨는 너무도 서운하고 못미더운지 이렇게 물었다. 응관은 편지를 뒤집어보고 봉투속을 들여다보고는 그렇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는 어디라구 밝혔느냐?》

아버지의 묻는 말을 듣고 응관은 편지봉투를 다시 들여다보고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보내는 주소두 없군요.》

《원, 그럴수가 있느냐.》

들여다보아야 알수도 없었지만 시경은 맏아들이 쥐고있는 편지를 잡아당겨 두손에 들고 애달픈 눈초리로 어루더듬어보았다.

《찾으러 올가봐 우정 주소두 밝히지 않구 편지를 한것 같군요.》

응관이 침울하게 중얼거리였다.

《헛참.》

계시경은 기가 막힌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윤씨는 소리내여 한숨을 내쉬고 응상의 처는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려 소리없이 흐느껴울었다.

제 처자의 안부를 물은 구절이 단 한줄만이라도 있었으면 이다지 섧지는 않을것이다. 그런데 해포만에 보내는 편지에 어쩌면 그런 말한마디 비치지 않을수가 있단 말인가.

응상이 보내는 편지에는 형수며 조카애들에게도 일일이 안부를 물은것이 단 한마디도 없었다. 하길래 제 처자에게 따로 인사말을 쓰지 않은것도 이상할것이 없었다.

그러나 응상의 처는 이런 일을 그렇게 허술히 넘겨버릴수가 없었다. 그가 그리도 가슴아파하는것은 그의 존재가 남편의 안중에 전혀 없다고 생각된 그것이였다. 그는 남편한테서 버림을 받기라도 한듯이 가슴이 쓰리고 아팠던것이다.

응상이한테서 한점의 소식이라도 없을 때에는 생사여부라도 알았으면 더는 바랄것이 없으리라 여겼던 가족들이였으나 그가 건재해있다는 소식을 듣고보니 자상한 내막까지 알고싶은 마음들이 불같이 일었고 단가마에 부은 한고뿌의 물처럼 더욱 궁금증이 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한편 계시경은 생각이 번거로왔다. 남들은 도회지에 나가 공부를 하게 되면 한주일이 멀다하게 집에 편지질을 하며 돈을 송금해달라, 어째라 한다는데 응상이는 혹시나 가족들중에서 누군가가 찾아올가봐 주소조차 밝히지 않고 편지질을 하는것이 아닌가. 실은 찾아가볼래야 시원히 가볼수 있는 로자도 변통할 형편이 못되였다. 저도 이런 사정을 아는만큼 집에서는 나를 셈에 두지 말라, 나 또한 집의 덕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심산인듯싶었다.

《헛참, 기맥힌 일이로군.》

시경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였다.

둘째의 소행에 남다른데가 있어 남다른 행동을 할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해도 응상의 처사는 리해할수 없었다.

옛법에도 이르기를 자식은 부모를 공양할줄 알고 처자를 금옥과 같이 위할줄 알아야 한다고 했거늘 돌틈에서 나온 인간도 아니건만 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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