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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회


전 편
집없는 나그네


제 1 장


4


저녁해가 어설핏해지더니 물곬에 땅거미가 기여들었다. 계시경과 응관은 산에서 내려오며 삭정귀를 한지게씩 해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응상은 집뒤로 돌아가며 호박구뎅이를 팠다.

허청간에 지게를 들여세우고 밖으로 나온 응관은 스적스적 응상이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뒤도랑에 깔린 푸근푸근한 두엄을 삽으로 긁어 응상이 파놓은 구뎅이에 펴넣으며 넌지시 말을 건네였다.

《기어이 떠나야겠니?》

《예?!》

《나한테까지 숨길건 없다. 네가 허청간 뒤웅박에다 보짐을 건사했더구나. 아버지가 호박씨를 찾으면서 뒤웅박소릴 하길래 내가 그걸 재우리귀제비에 감추구 북데길 덮어놓았다.》

응상은 조마조마하여 잔주름이 얽힌 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번 장날 정주고을에 나간 응상은 우연히 풋낯이나 아는 네거리음식점주인네 아들이 며칠후 서울공부하러 떠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무작정 그 청년을 찾아가 함께 길을 떠나자고 말을 붙여보았다. 마침 저쪽에서도 길동무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이때부터 응상은 남몰래 길떠날 차비를 해놓고있었던것이다. …

《좀 앉아라.》

응관은 삽자루를 뉘여놓고 한쪽모서리에 앉았다. 응상은 조심스레 그 옆에 앉았다.

《너 경훈이가 잘못됐다는 말을 들었니?》

《들었수.》

응상은 경훈이한테서 편지를 보내온 전말에 대하여 숨김없이 터놓았다. 근심이 실린 무거운 기색으로 동생을 건너다보던 응관은 저으기 엄한 어조로 말했다.

《암만해두 네가 분별없이 덤비는것 같구나.》

응상은 삼태기에 소똥을 긁어담아가지고 올라오는 아버지가 형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나 하여 그쪽을 미타하게 바라보며 대꾸했다.

《형님, 이젠 나두 더는 자기를 걷잡지 못하겠어요. 벼랑에서 굴러떨어지는 돌망구는 붙잡지 못해요.》

《그럼 넌 네 처자까지 나한테 얹어놓구 맘내키는대루 떠돌셈이냐?》

응관은 갈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버리였다. 응상은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형이 사라진 집모퉁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응관은 저녁상을 물리고 나앉아 한타래의 새끼를 꼬아 사리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응상은 홀연히 석산리로 시집간 맏누이네 집에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서는 그는 단벌나들이옷인 무명바지저고리에 검정물을 들인 무명조끼를 걸치고 손에는 자그마한 보퉁이를 들었다.

남들은 무명천일망정 장에 나가 색갈곱게 드는 회색물감을 사다가 옷을 해입지만 응상의 바지저고리는 먹물을 들인것이여서 얼숭덜숭한것이 중의 장삼같이 망측했다.

계시경은 둘째가 마음을 돌려먹을 여유도 가질겸 바람을 쐬고오는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듯 방안에 앉아 자새질을 하며 《잘 갔다 오너라.》라고 했다. 응상의 안해는 설겆이를 하느라고 부엌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그는 안해에게조차 자기가 공부하러 떠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인자하고 다심한 어머니에게도 그런 티를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았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후날 모질고 매정하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큰일을 위해서는 달리 할수 없다고 여겼다.

만약 그가 마음을 무르게 먹고 어머니와 안해에게 미리 말을 했더라면 필경 떠나기 전에 그의 집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을것이다. 아무리 속이 깊은 녀자라도 그렇게 큰 감정을 숨기고있을수는 없는것이다.

응상은 은근히 형의 기색을 엿보았다. 집안에서 그의 나들이가 범상치 않은 길이라는것을 알고있는 유일한 사람인 그는 뜻밖에도 입을 굳게 다물고있었다.

그는 한어깨에 바지게를 거느적이 메고 푸새라도 하러 가는것처럼 묵묵히 응상을 따라서는것이였다. 저마끔 생각에 잠겨 어툴더툴한 달구지길을 따라 한참동안 걷던 형제는 걸음을 멈추었다.

《응상아.》

손에 보퉁이를 거머쥔 윤씨가 엎어질듯 허우적거리며 달려오고있었던것이다.

《아이구, 미처 생각지 못했구나. 옛다, 누이한테 가져다주어라.》

윤씨가 내미는 해진 보퉁이사이로는 노란 바가지 두쪽이 비죽이 들여다보였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든 응상은 목이 꺽 메이고 눈굽이 화끈 달아올랐다.

《둘째야-》

가늘게 쪼프린 윤씨의 두눈이 바르르 떨리였다.

《네 정말 인차 댕겨오지?》

응상은 자기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는 어머니의 애절한 눈빛을 마주볼수가 없었다. 예리한 그 무엇에 깊이 찔리운듯 전신을 떨었다.

(어머니, 불효막심한 이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나서 이때까지 거짓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야속하게도 어머니마저 속이고 언제 돌아올지 모를 기약없는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저는 꼭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여 돌아오겠습니다. 그날을 믿기에 저는 눈물을 씹어삼키며 길을 떠납니다.)

응상은 어머니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가득히 고여오르는 진정을 숨김없이 터놓고싶은 생각을 가까스로 누르고 《다녀오겠어요.》라고 분명치 않게 중얼거리였다.

그는 눈물을 보일가봐 저어하여 제대로 몸을 돌리지도 않고 깊숙이 절을 하고는 황황히 돌아서서 길을 재촉했다. 길섶에는 햇풀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고있었다. 언제한번 유심히 본적 없는 냉이며 길짱구조차 정깊이 내려다보게 되였다.

이른냉이를 먹으면 눈 밝아진다면서 얼음이 녹기도 전에 냉이며 달래를 캐다가 된장국을 끓여주던 어머니의 살틀한 정이 새삼스레 쿡 가슴에 마쳐왔다. 이제는 그 누가 소르쟁이토장국일망정 구수하게 끓여주고 입맛나라고 향긋한 홑잎나물을 무쳐주랴.

응상은 찔레덤불이며 국수나무가 뒤엉킨 산굽이에 우뚝 멈춰서서 썩바위앞에 서있는 흰옷입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멀찍이 바라보이는 집앞에는 흰 저고리에 깜장치마를 입은 안해가 애기를 업고 한손에는 아들애의 손목을 잡고 그린듯이 서있었다. 그는 차마 못할짓을 저지른것만 같은 무거운 생각에 잠겼다.

《응상아.》

말없이 산모퉁이까지 따라서던 형의 부름에 응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응관은 심각한 기색을 짓고 물었다.

《누이집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니?》

응상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만 하다. 일단 나선 길이니 후회가 없도록 꿋꿋이 걸어가다우.》

응관은 동생을 와락 그러안았다. 응상은 꽛꽛한 형의 어깨를 그러안으며 《부탁해요.》 목메여 한마디를 중얼거리였다. 뜨거운것이 목구멍을 꽉 메우고 두눈에 눈물이 언듯 비껴흘렀으나 그는 강잉히 머리를 흔들었다.

《뒤일은 념려말아. 그리구 네 속옷갈피에 넣어둔게 있으니 목적지에 가닿거던 꺼내써라.》

응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홱 돌아서서 바지게를 지고 더벅더벅 오던 길로 걸어갔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추 묵밭이 널린 산비탈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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