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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황부에 큰불이 홀연히 일어나고

설씨의 절개는 변심이 없도다


동산에 올라 자기 집이 불타고 무수한 비복들이 처참하게 타죽는것을 본 황운의 눈에 홰불이 황황 일었다. 자기가 혼자라는것을 잊고 황운은 장검을 빼들고 쏜살같이 집으로 내달았다.

앞에 얼른거리는 도당들을 닥치는대로 베고 찔렀다. 몇몇이 황운의 앞을 막아나섰으나 우리에서 뛰쳐나온 성난 갈범마냥 눈에 불을 켜고 장검을 휘두르는 그 위세앞에 공포에 질리고 기가 죽어 흡사 수수대로 칼을 막기였다. 순식간에 도당들의 주검이 마당에 어지럽게 널려졌다.

눈이 빼대대하고 꺽두룩한 놈이 어둠을 타서 뺑소니를 치는것이 황운의 눈에 걸려들었다. 황운이 그놈의 뒤를 막 쫓아가려는데 문득 뒤에서 무슨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란리속에서 용케 살아남은 비복 서넛이 시꺼먼 숯검댕이가 잔뜩 게발린 얼굴로 자기에게로 다가오고있었다. 황운은 그제야 검을 내리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칼에 맞아 너부러진 도당들의 주검이 한벌 쭉 깔려있고 집은 서까래 하나 남지 않고 재가 되여버렸다.

너무도 억이 막혀 황운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무슨 재변인고? 량친까지 없는 내가 집마저 불타버렸으니 장차 어찌할고?》

가슴치며 통곡하는 그의 앞에 비복들이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

《우리와 무슨 원쑤를 졌다고 누가 이다지 모질게 구오이까?!》

그 말에 황운은 벌떡 일어섰다. 칼에 맞아 너부러진자들속에서 아직 숨이 붙어 꼼지락거리는자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켜세웠다.

《네놈들은 대체 웬 놈들이냐? 어째서 우리 집에 불을 놓고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느냐?》

장검에 가슴을 엇베인 텁석부리사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진좌상이 황공자를 없애고 그 집을 불태우라고 하기에…》

《뭣이, 진좌상이?! 그가 왜 그런다더냐?》

《그건 우린 모르오. 그저 황사정은 역적이고 그 집안은 역적집안이라 하면서 좌상이 공자를 죽이라고 했다고 하기에…》

《좌상이 직접 그런 임무를 주었느냐?》

《아니요. 대중정의 부하인 조가가 좌상의 지시라고 했소.》

《조가라니? 키가 꺽두룩한 놈말이냐?》

《대중정의 손발노릇을 하는 조침이란 사내요. 그 조가가 우리에게 은전을 주…면…서…》

기운이 다 진했는지 텁석부리의 눈시울이 눈동자를 가리웠다. 황운은 그자의 목덜미를 세괃게 흔들며 다시금 소리쳐 물었다.

《대중정이 이 일에 왜 그리 극성이냐?》

《대중정이 설시중의 집안과… 혼례를 성사시키려다가… 뜻대로 안되니… 그로 해서 설시중을 귀양보내놓고… 황공자와 설랑자와의 관계를 알고는 애당초 죽여없애야 혼사를 성사시킬수 있다면서 그런 계책을 꾸민것 같소.… 공자, 우린 아무도 몰랐소. 우린… 그저 시키는대로만… 했을뿐이요. …》

그 말을 남기고 텁석부리는 머리를 떨구었다.

안개속에 묻히워 실체를 분간할수 없었던 흉계의 내막이 어렴풋이 안겨왔다.

(그러니 설대인이 정배간것도, 우리 집을 불태운것도 필경 설소저와의 혼사와 련관되여있었구나. 그렇다면 한시라도 꾸물거릴새가 없다. 조침이란 놈이 도망쳤으니 이제 날이 밝으면 무슨 험창한 일이 또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

진권과 양철이 자기와 설시중집안을 멸살시키려고 흉계를 꾸몄다는것을 깨닫는 순간 황운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면서 세찬 분노로 하여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였다.

잠시후 마음을 가라앉힌 황운은 우선 비복들을 시켜 주검들을 묻어주게 하고 재무지속을 뒤져 금고를 찾아 그속에서 얼마간은 몸에 지니고 나머지는 그들에게 나누어주면서 가고싶은데로 가라고 하였다.

비복들이 눈물을 뿌리면서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황운이 애써 설복하니 그들은 허리굽혀 인사를 하고는 떠나갔다.

달빛아래 연신 허리를 굽히고 멀리 사라져가는 그들을 바라보는 황운의 가슴속에는 다시금 격노의 불길이 용암마냥 세차게 끓어번지기 시작하였다.

(진권이 이놈! 내 기어이 네놈을 복수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원한을, 설소저 부모들의 한을 풀고야말테다!)

황운은 이밤중으로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떠나기에 앞서 황운은 설소저를 만나 떠난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말을 타고 빨리 가면 호주에 삼경이나 사경쯤이면 당도할수 있었다. 다행히도 마구간은 불에 타지 않아 황운이 애용하던 가라말은 살아있었다.

마구간으로 발길을 옮기던 황운은 주춤거렸다.

(가만, 내 말을 타고 호주에 당도한다쳐도 남 다 자는 깊은 밤인데 야밤삼경에 설소저의 집대문을 두드린다는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처사가 아닌가.)

그렇다고 그냥 떠나가자니 랑자의 몸으로 홀로 있을 설소저의 신상이 가슴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이제 자기가 없어진것을 알면 양철이 홀몸으로 있는 설소저에게 어떤 못된짓을 할지 가늠할수 없었다.

더구나 애오라지 자기만을 믿고있을 설소저가 자기의 행처를 몰라 속을 태울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만일 우리 집이 불타고 비복들이 다 죽은줄 알면 설소저는 틀림없이 몸을 보존치 않을수 있다. 그러니 그에게 내 종적을 알리고 태명산으로 떠나리라.)

지필을 꺼내든 황운은 설소저에게 보낼 글을 써나갔다.

이윽고 행장을 차리고 가라말에 오른 황운은 재더미만 날리는 집주변을 한바퀴, 두바퀴 돌아보고는 단호하게 호주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황운이 호주에 당도한것은 삼라만상이 기우는 삼경때였다. 설씨댁 주위는 쥐죽은듯 조용하였다. 담장에 이른 황운은 주먹만 한 돌을 밀봉서로 싸서 후원담장안에 던졌다.

(설소저, 부디 날 기다려주오. 홀로 있는 그대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이몸을 그대는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오. 내 천하무적의 학문과 재주를 배워 간신소인배들을 소탕하고 피맺힌 원한을 갚고 나라를 구원하고저 이 길을 떠나오.

내 뜻을 이루고 찾아올 때까지 소중한 그대가 부디 몸성하기를 이 황운이 빌고 빌면서 떠나오.)

어느새 황운의 부리부리한 두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두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황운은 형언할길 없는 아픔과 서운함, 부글부글 끓고있는 연연한 정을 한가득 담아 설소저가 잠들고있을 안방을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날이 밝으면 담장안에 던진 서신을 받아들고 눈물 흘릴 설소저를 생각하느라니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았다. 꽉 깨문 입술에서 선지피가 슴새나오고있었다.

이윽고 몸을 돌려 말을 향해 발걸음을 떼려던 황운은 다시 뚝 멈춰섰다.

북해로 정배가면서 남긴 설대인의 말과 운명직전에 자기의 손을 꼭 잡고 당부하던 조부인의 음성이 귀전에 생생하여 차마 걸음을 뗄수 없었다. 풍파사나운 험악한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유일하게 남은 사람은 설소저 한사람뿐이며 또 설소저가 유일하게 의탁하고있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다름아닌 황운, 자기라는것을 이 시각 새삼스레 느꼈던것이다.

(설소저, 가슴속에 오직 그대만 간직하고 무정한 황운이 길을 떠나오.)

황운은 설소저가 꿈결에서도 심중의 이 목소리를 들으리라 믿으면서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태명산으로 힘있게 말을 몰아갔다. 어디선가 부지런한 새벽닭이 홰치는 소리가 간간이 울려오기 시작하였다. 미구에 새날이 밝아올참이였다.…

태명산을 향해 떠난 황운은 며칠만에 하늘을 가리우고 버티고 서있는 커다란 산과 마주쳤다. 말을 몰아 쳐다보기에도 아아히 높은 산으로 천천히 들어가니 얼마나 수림이 울창한지 키돋움하며 소소리높이 자란 나무들의 잎새사이로 하늘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였다.

골짜기를 따라 말을 몰아가는 그의 눈앞에 난데없이 사슴 한마리가 뛰여들었다. 온몸에 흰점이 다문다문 박힌 애기사슴이 순박한 두눈을 껌벅거리며 한적한 심산속에 웬 불청객이 뛰여들었나 하는 시틋한 눈길로 황운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껑충껑충 뛰여올라갔다.

(고놈이 나와 한번 내기할 심산인가?)

말에서 훌쩍 뛰여내린 황운이 몸을 솟구쳐 사슴을 따라 기슭에 붙으려 했으나 얼마나 가파로운지 도저히 오를수 없었다. 다행히도 칡넝쿨이 손에 잡히여 그걸 잡고 안깐힘을 쓰며 언덕에 올랐다. 가까스로 언덕에 오르니 애기사슴은 그새 어데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는 땀을 씻으며 황운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야!》

감탄의 목소리가 저도모르게 튀여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경치는 그야말로 절승이였다.

백화가 만발하고 좌우엔 집채같은 비석들이 웅장히 서있고 푸른 소나무와 싱싱한 참대가 울울창창한데 그우로 노고지리며 꾀꼬리, 백학이며 황학이 쌍쌍이 날아예고 어디선가 구슬이 굴러가는듯 맑은 시내물소리가 들려오고 이상야릇한 짙은 향기가 은은히 풍겨왔다. 인간세상을 떠난 신선의 고장에 들어선듯 한 느낌이였다.

황운은 절승경개에 취하여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그 사이로 뻗은 오솔길을 따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짚었다. 한참동안 새끼줄을 늘여놓은듯 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문득 그의 귀전에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옥퉁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소리나는 곳으로 한걸음두걸음 발을 옮겼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그의 앞에 계단을 쌓아놓은듯 한 층층절벽이 가로막아섰다.

황운이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보니 발밑으로는 돌돌 옥계수가 절벽을 감돌아흐르고 층층절벽우에는 웬 백발로인이 앉아있었다. 그 로인의 옆에는 청의동자가 옥퉁소를 불고있고 옥퉁소소리에 맞추어 머리우에선 황학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있었다.

이 분명 신선이로다 하고 생각한 황운이 로인을 향해 두세번 절을 하고 바위아래에 우두커니 섰건만 로인은 그를 본체도 하지 않고 옥퉁소를 부는 동자에게 뭐이라고 이르는것이였다.

동자가 일어나 두손을 마주잡고 로인앞에 섰다. 로인의 말이 끝나자 동자가 머리를 조아리고 돌아서더니 바람을 향해 주문을 외우는지 입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곧 산꼭대기로부터 중황소만한 큰 범이 내려와 로인앞에 머리를 수그렸다.

로인이 그 범을 향해 꾸짖는 소리가 황운의 귀전에 들려왔다.

《네 산신령이 되여 산의 동구를 지키면서 속객이 임의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자기 소임을 잊었느뇨?

봐라, 네가 온종일 싸다니다나니 이렇게 속객이 방자하게 선경을 침범하지 않았느뇨?

어서 바삐 저 속객을 쫓아내거라!》

로인의 꾸지람을 들은 큰 범이 뒤걸음치며 물러서더니 어슬렁어슬렁 절벽우로 다가섰다. 큰 범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뿜어져나왔다.

따웅-

노기등등한 큰 범이 황금같은 두눈을 부릅뜨고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며 벼랑에서 휙 날아내리더니 황운에게로 슬금슬금 다가들었다. 황운의 손에 고삐를 잡힌 가라말이 질겁해서 호응- 하며 뒤걸음쳤다.

황운은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앞으로 다가드는 큰 범을 향해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입에서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말소리가 울려나왔다.

《무릇 사람은 말과 행동이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면 비록 만가지 맥이 뻗어가는 곳이라 해도 능히 다닐수 있다고 하였다.

이곳이 설사 명산선경이라 해도 인간세상 사람이 오지 못할바는 아니거늘 네 아무리 짐승이라 해도 사람의 선함과 악함을 가려보지 못하고 감히 나를 해하려고 하는가.

산중의 왕이라는 네가 비록 악행을 저지르려 하지만 난 애당초 널 알기를 못된 버러지로만 보노라.

자, 어데 한번 덤벼들어봐라!》

두손으로 틀어잡은 장검을 눈앞으로 쑥 내밀며 황운은 틈을 주지 않으면서 큰 범을 쏘아보았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방금전까지도 황운을 한입에 물어메칠듯 다가들던 큰 범이 갑자기 온순해졌는지 두눈을 껌벅거리며 머리를 조아리는것이 아닌가. 잠시후 긴 휘파람소리가 나더니 큰 범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황운은 (이 분명 도사의 술법이로다.) 하고 생각하며 장검을 거두고 다시 절벽우의 로인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소생은 소요스러운 인간세상에서 살다가 가슴속에 깊고깊은 원한이 있사와 명산도인을 찾아가는 길이온데 그만 길을 잘못 들어 선경을 침범했으니 넓은 아량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인덕을 베풀어 인생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나이다.》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황운에게로 향하였다.

《네 무슨 원한이 있느뇨? 사람이 무릇 원한이 있으면 마땅히 노력하여 소원을 풀고 출세하여 이름을 날려 일을 성사함이 옳거늘 어찌 깊은 산중에 의탁하여 원한을 풀려 하느뇨?

그러니 마땅히 다시 내려가 원쑤갚기를 생각하고 부질없이 산중에 의탁하지 말지어다.》

황운이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소생의 뜻은 그렇게 록록한것이 아니오이다. 원쑤를 갚고 나라를 구원하며 가문을 빛내임이 소생의 소원이오나 힘이 약하고 지혜가 없사와 능히 실행치 못하고있나이다. 그래서 신선의 도술을 배워 천하리치를 도통한 후에 세상에 나서려고 태명산을 찾아가는 길이옵니다.》

로인이 엄엄한 어조로 되물었다.

《네 도술을 배우려 한다는데 그건 장차 구름 타고 명산을 찾으며 아침엔 동해에서 놀고 저녁이면 무산에 돌아와 락을 누리겠단 소리련다?》

황운은 어깨를 쭉 펴며 씩씩하게 대답하였다.

《그건 소자의 소원이 아니오이다. 소자는 오직 천하의 지모와 재주를 배우고 천문지리에 능통하기 바라나이다. 하여 그 재주가 이 세상에 더는 맞설 대적이 없고 그 용병술이 천하에 뛰여나기를 원할뿐이옵니다.》

로인의 얼굴에서 엄엄한 기색이 사라지고 느슨한 웃음이 어렸다.

《지금 성상이 어진 덕을 시행하여 현인군자를 등용하고있기에 천하가 태평한데 검술과 병법은 배워 무엇하리오?》

황운의 어조는 자못 절절하였다.

《옛 성인들은 〈천하가 태평함을 믿지 말라〉 고 하였고 나라의 정사를 어지럽히며 임금을 해치고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란신적자들은 자고로 있었거늘 태평성대를 어찌 장구히 믿을수 있겠나이까.

또 소생은 한낱 글줄이나 파고드는 평범한 인생으로 살다가 초목같이 스러지고싶지 않소이다.》

가슴에까지 드리운 로인의 백발이 미풍에 가볍게 흐느적거렸다.

《그 말이 족히 영웅에 비할지라 신선의 도술을 배우겠거든 날 따라오라.》

로인이 표연히 일어서며 하는 말이였다.

황운은 그제야 그가 태명산 도사인줄 알고 그의 뒤를 쫓아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따라 한참동안 내려가니 여러칸의 초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지붕우에 흰 구름이 항시적으로 떠돌고있는 자그마하면서도 정갈하기 이를데 없는 초가집이였다.

이날부터 황운은 도사에게서 법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고금동서의 국가의 흥망성쇠와 영웅들의 공적이며 여러가지 병서들과 18반무예 그리고 우로는 천문날씨와 아래로는 산천지리에 이르기까지 황운은 하나하나 온 정력을 기울여 배워나갔다. 천성적으로 남달리 총명하고 담찬 황운인지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고 열을 가르치면 백, 천을 헤아리니 그를 배워주는 도사도 그의 재능과 완강한 기질에 혀를 차군 하였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뀌는 세월속에 황운의 재능은 점차 천하에 대적할자가 없을 신비한 경지에 이르게 되였다. 하루를 십년맞잡이로 온 심혈을 기울이며 재주를 익히는 속에서도 황운의 가슴 한구석에는 홀로 있는 설소저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응어리되여 늘 걸려있었다.…

졸지에 홀몸이 된 설소저는 정배살이를 하고있는 아버지의 소식은 전혀 알길 없고 또 일생을 언약한 황공자까지 떠나가니 낮이나 밤이나 탄식하고있던중에 뜻밖에 룡주의 황씨집이 불에 타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어머니마저 잃은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삶의 지탱점은 장래를 약속한 황공자뿐인데 화는 쌍으로 온다고 황씨의 집이 불에 타버렸다니 망망대해에 홀로 뿌려진듯 눈앞이 캄캄하고 앞길이 막막하였다.

급히 하인 하나를 불러 황공자소식을 탐문해오라고 시켰더니 그하인이 돌아와 하는 말이 《아닌밤중에 불이 일어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타죽고 집은 재만 남았다고 하나이다.》하는것이였다.

《아니, 그정녕 사실이냐?!》

설소저는 온몸의 힘이 싹 빠지며 나른하여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소저의 낯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하였다.

(이젠 누굴 믿고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접한 소저가 망연자실하여 눈물로 옷깃을 적시고있는데 문득 운랑이 들어와 소저의 기색을 살피며 조용히 말을 붙였다.

《아씨, 후원에서 이 밀봉서를 주었나이다.》

실성한 사람처럼 앉아있던 설소저가 처음엔 무슨 말인가 해서 운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씨, 혹시 이 밀봉서가 황공자가 보낸것이…》

운랑이 뒤말을 채 끝맺지 못하는데 설소저가 눈을 크게 뜨며 와락 밀봉서를 나꾸어챘다.

《뭐라구? 어디 좀 보자.》

헤덤비며 밑봉서를 뜯는 설소저를 운랑이 긴장해서 바라보았다.

과연 황운의 서신이였다.

《설소저에게 드리나이다.

불운아 황운이 운명도 기구하여 네살적에 아버지와 리별하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다나니 친부모의 정을 잃었나이다. 천행으로 대인과 대부인의 관후한 덕을 입어 십년동안 배우며 성장하게 되였나이다. 생각해보면 대인과 대부인의 그 은혜는 산같아 이 황운은 어른으로 성장하면 효도를 다하여 평생 모시기를 바랐나이다.

허나 액운은 지꿎게 따라다녀 대인께서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멀리 귀양가고 대부인은 비명에 세상을 뜨셨나이다. 그런데 또 오늘은 이 황운의 집이 불에 타고 재가루만 남았소이다.

하늘이 도와 목숨을 부지한 혈혈단신 이 황운은 장차 부모와 나라의 원쑤를 갚고저 기약할수 없는 길로 떠나려 결심하였으나 륙례를 치르지 못한 소저가 눈에 밟혀 쉬이 발걸음을 뗄수 없나이다. 떠나간다는 인사도 못하고 먼길을 떠나가는 이 황운의 심정 무엇이라 표현하리까.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하늘이 점지한 연분이라 후일에 꼭 만날 날이 있으리라 믿소이다.…

지금 간신배들이 소저를 노리고있나이다. 위급함이 눈앞에 박두했으니 하루바삐 집을 벗어나 소중한 옥체를 보존하소서.

후일을 기약하며 무정한 사내 황운 삼가 쓰나이다.》

황공자가 살아있음을 알게 된 설소저의 고운 눈에 찰랑찰랑 눈물이 고이더니 뺨을 타고 굴러내렸다. 두손을 가슴에 모아쥐고 소저를 바라보는 운랑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올랐다.

그러니 황공자는 살아있다. 허나 그 거처는 알길 없었다.

(어데로 갔을가?)

기쁨은 한순간이고 뒤이어 소저의 가슴속에 황공자에 대한 짜릿한 련정이 들물마냥 한가득 밀려들었다. 예리한 칼로 살점을 저미는듯 한 아픔이 심장을 콕콕 찔렀다. 네살적에 어머니를 잃은 황공자였다. 자기는 그래도 이 나이때까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너무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사랑을 잃은 황공자였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여려지고 한달음에 달려가 살뜰한 정을 모르고 살아온 그에게 비단결마냥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안아 정을 부어주고싶었다. 허나 그가 지금 어데로 갔는지도 모르고있는 자기였다.

설소저는 품속에 간수하고있는 백옥잠과 금팔찌를 꺼내들고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림종을 앞두고 어머니가 《백옥잠은 황씨가문의 가보인데 황사정어른이 준것이고 금팔찌는 황공자와의 신표라며 아버지가 남긴것이니라.》 하면서 자기 손에 꼭 쥐여준것이였다.

문득 편지의 마지막구절이 눈에 밟혀왔다.

《간신배들이 소저를 노리고있으니… 하루바삐 집을 벗어나 소중한 옥체를 보존하소서.》

그렇다면 누가 우리 집을 또 노리고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게 누구일가? 왜 그럴가?

불현듯 대중정벼슬에 있다는 양철이 매파를 보내왔던 일이 생각키웠다. 아버지가 두말안팎에 그 매파를 쫓아보냈다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안있어 부친은 의부경이라는 벼슬에 임명되였으나 거절하였고 그로 하여 어명에 불복한 죄로 귀양을 갔다.

그렇다면 이 모든것이 과연 우연이겠는가? 황공자는 분명 내막을 알고있는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의 집이 불탄것이 아닐가.

설소저는 미구에 자기에게도 그 어떤 변고가 닥쳐올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황공자가 날더러 이 집에서 한시바삐 피하라고 하지 않았을가. 헌데 녀자의 몸으로 당장 어데로 피한단 말인가. 툭 삐여져나올만 한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앞일이 묘연하였다. 이럴 때면 자기가 녀자가 아니라 차라리 사내로 태여났으면 하는 생각이 부지중 갈마들었다.…

부하들을 시켜 황씨의 집을 불태우라고 지시를 준 양철은 그 집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에 처넣어 죽였다고 보고하는 조침의 말에 혼빠진 놈처럼 요란스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그러니 황현의 애새끼도 뒈졌단 소리가 아닌가. 정말 잘됐어!

황운이 죽었으니 사리를 들어가며 설씨에게 권하면 우리 아들의 혼례를 치를수 있겠구나!》

정신나간 놈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양철은 좋아라 웃어대고있지만 그앞에 봉산수수대처럼 꺽두룩한 키를 반나마 웅크리고 서있는 조침은 어서 이 자리를 피했으면 하는 생각만 하고있었다.

생각할수록 등골이 서늘하고 머리칼이 주삣해졌다. 간밤에 간신히 황운의 검날을 피해 목을 건사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자기의 뒤를 쫓아오는것만 같아 조침은 저도모르게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황운을 죽이지 못했다고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양철이 단박에 자기의 목을 베라든가 형장을 안기라고 불호령을 내릴것 같아 그 집안사람들은 다 불에 타죽었으며 비밀이 새나갈가봐 자기의 패당들도 다 죽여버렸다고 능갈치게 상전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은 조침이였다. 그런 조침이여서 자기의 거짓말이 들짱날가봐 마음이 오밀조밀해서 양철의 동정만 힐끔힐끔 살폈지만 다행히도 눈앞의 리득이라면 제 녀편네도 팔아버릴 양철인지라 조침의 기분같은것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여기며 그저 황현의 집이 불타고 그 집안사람들을 다 불에 처넣었다는 소식에 기분이 붕- 떠있었다. 도리여 매사에 일처리가 적실하다고 한바탕 조침을 추어주고 개한테 먹이주듯 금전을 던져주더니 정신나간듯이 저렇게 좋아한다.

며칠후 양철은 조침을 다시 불러 이리이리 하라고 지시를 주었다.

동지섣달에 언땅을 파라고 하는것처럼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감이였으나 조침은 이번에도 두말없이 설씨집으로 향하였다. 한번 잘못 택한 인생을 다시 돌려세운다는것은 참으로 힘에 부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설씨집에 당도하여 소저 만나기를 청한 조침은 잠시후에 중당에서 주렴을 사이에 두고 소저와 마주앉았다. 주렴발너머 앉아있는 소저의 기분상태를 가늠해보며 양씨댁에서 혼인맺기를 청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소저가 단박에 거절하였다.

《소녀의 나이 어언 이팔이 되였으니 아녀자의 례의범절을 삼가 지켜야 하는줄 어른도 모르지 않는다고 보옵니다. 이미 부모님들이 혼사를 정해준 소녀더러 딴 사내를 보라 함은 인륜에 어긋나지 않소이까. 더구나 부친도 안계시는데 어찌 이런 중대사를 자의로 결정하라 하시나이까.

소녀는 결단코 실행할수 없나이다.》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조침이 허거프게 웃어댔다.

《그 말은 하나는 알지만 그이상은 모르고 하는 말이여서 참말로 가소롭소이다.

이전에 한 랑자는 종일토록 문지방을 넘는 사내가 없어 독수공방 하다가 일생을 헛되이 보냈다고 하는데 어이하여 랑자는 외고집을 부리나이까. 그리고 모친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또 부친은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수 없는데 그러면 랑자의 일생이 가련하지 않소이까. 그래서 대중정어른이 랑자를 불쌍히 여겨 모처럼 혼사를 권고하는게 아니오이까.》

소저가 쌀쌀하게 비양조로 대척하였다.

《까마귀 열두번 울어도 까욱소리뿐이라더니 나리가 아무리 달콤한 말을 이것저것 다 끌어다 붙여도 그 입에서 바른소리가 나올리 있겠나이까. 그 말재간에 참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니 이젠 그만 말재간을 부리고 나리같은 사람을 보낸 양어른에게 가서 소녀가 감사해하더라구 인사나 전해주사이다.》

조침의 주먹만한 얼굴이 달아오른 화로처럼 시뻘개졌다. 바늘 찔러도 피가 안나온다더니 설소저의 마음이 너무도 오돌차고 그 말이 너무도 가시가 돋혀 자칫하면 일이 글러질수 있다는 위구감이 뇌리를 쳤다.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지만 조침은 능글거리며 그냥 찰거마리마냥 달라붙었다.

《지금 랑자는 친동기가 하나도 없고 또 혈혈단신으로 의탁할 곳이 없는 난처한 처지인데 어찌 후일을 생각치 않나이까.

랑자가 혼사를 맺았다고 방금 말한 그 황운은 참화를 입어 집이 불에 타버렸고 그 생사도 알수 없는데 무슨 미련이 있어 그러나이까. 그건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파는 어리석기 그지없는짓이오이다.

옛날에 한 재상의 부인은 세번씩이나 재가하였으나 후세에 자그마한 루명도 듣지 않았고 또 어느 한 임금은 남편잃은 누이를 권하여 재가하게 하였은즉 이로 미루어봐도 랑자의 말은 심히 가소롭소이다.

비록 황가와 언약을 했다쳐도 륙례를 갖추지 않았는데 어이하여 부질없이 홍안청춘을 썩이리까.

그러니 랑자는 양씨문중의 옥같은 랑군을 취하여 백년가약을 맺으소서. 그런 후에 또 조정에 원정하여 북해에 계시는 부친을 고향에 돌아오게 한 다음 부귀영화를 누리고 효도를 다함이 오죽 옳은 처사이겠나이까.

부디 세번, 네번 곱씹어 생각하고 일생을 망치지 말기 바라나이다.》

소저가 낯색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앉은자리에서 콩튀듯 발딱 일어섰다. 소저의 입에서 마디마디 그루를 박으며 내쏘는 되알진 목소리가 튀여나왔다. 분노와 수치감으로 소저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 말은 군자의 론조가 아니라 소인배의 말장난에 불과하도다!

당신은 그래도 소녀와 달리 사내로 태여났은즉 성현의 글을 읽고 고금의 례법을 모르지 않겠는데 어이하여 소녀를 옳은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음탕한 곳으로 끌고가려 하는가!

내 비록 아녀자의 몸이나 당신같은 불의로운 간신, 소인배는 아직 보지 못하였도다!

당신이 아무리 세상에 뛰여난 언변과 혀를 가졌다 해도 내앞에서는 발뺌하지 못하리니 부질없이 혀바닥을 놀리지 말고 어서 빨리 내눈앞에서 사라지라!》

말을 마친 소저는 찬 바람을 일쿠며 내당으로 들어가버렸다.

닭쫓던 개 울담 쳐다보듯 소저의 뒤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조침의 낯색이 시꺼멓게 죽었다. 후줄근해서 돌아와 양철에게 그대로 전할수밖에 없었다.

《설씨의 결심이 너무도 철석같아 성사하지 못했나이다. 소인으로서는 옥같이 맑고 얼음같이 랭랭한 그 마음을 돌려세울 길이 바이 없었소이다.》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양철의 넙적한 얼굴에 시꺼먼 구름장이 한벌 뒤덮였다.

《어찌하면 설씨의 마음을 돌려세울고?》

침울해있던 조침의 메밀눈이 한참후에 반짝거렸다.

《소인이 계책 하나를 생각했으니 좀 들어보사이다.》

넙적한 양철의 얼굴에서 구름장 한켠이 들리운다.

《그게 뭔데?》

《한가위날이 이제 멀지 않았소이다. 이날이면 설씨가 분명히 모친의 묘에 제사하고 돌아올것인즉 이때 소인이 건장한 노복 몇을 데리고 매복했다가 돌아갈 때에 겁칙하여 집으로 끌고와 혼례를 치르면 제 비록 금옥절개가 반석같아도 감히 어쩌는 수가 있겠나이까.》

양철의 넙적한 얼굴에서 구름장이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이자 보니 임잔 을두지 못지 않아. 그 계교가 참으로 신통해!》

양철이 꺽두룩한 키를 반나마 수그리고있는 조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니 조침이 두손을 앞에 모은채 헤식은 웃음을 지었다.

《그게 참말이오이까.》

《응, 그래, 그래!》

그로부터 엿새후 한가위날 설소저는 제물을 갖추고 어머니의 묘소를 찾았다.

분묘앞에 다소곳이 꿇어앉아 향불을 피우고 절을 하며 소저는 제를 지냈다. 슬피 울며 제를 지내고난 소저는 부지중에 천리멀리 북해에서 정배살이를 하고있을 아버지생각이 갈마들어 북녘하늘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때마침 끼루룩, 끼루룩 기러기떼가 북쪽으로 날아간다.

(저 기러기처럼 날개라도 있으면 아버님이 계시는 북해에 얼른 잠간 가련만…)

느닷없이 또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슬픔에 잠겨있는 소저의 곁으로 운랑이 조용히 다가섰다. 인기척에 자기를 수습한 소저가 허공에서 눈길을 떨구는데 문득 저멀리 산자락의 길가에 사람들이 어스벙거리는것이 눈에 띄였다.

《운랑아, 저기 저 사람들은 웬 사람들일가?》

운랑이 소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열댓명의 사나이들이 혹 앉아있고 혹 우뚝 서서 분묘를 바라보고있었다. 헌데 그들의 거동이 어쩐지 수상하고 부자연스럽다.

《아씨, 저 사람들의 거동이 이상하지 않소이까?》

그 순간 설소저는 황공자의 편지구절이 눈에 떠올랐다.

가만, 저들이 나를 노리고있는것이 아닐가?

정신을 집중하여 산아래쪽을 다시 유심히 살펴보는 소저의 눈에 며칠전 양씨댁에서 왔다던 줄당콩대처럼 볼품없이 꺽두룩한 사내의 모습이 유표하게 안겨들었다. 짜릿한 공포심과 불안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소저가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어느새 운랑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의논을 벌렸다.

《지금 저 산아래 길가에 정체모를 사내들이 우리 아씨를 핍박하려고 모여있는게 분명한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우린 목숨을 걸고라도 아씨가 안전하게 빠져나가도록 해야 한다!》

하녀들이 저저마다 죽기를 각오하고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소저의 가슴이 뭉클해지고 무섬증이 슬그머니 가셔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하녀들을 만류하며 유모 계섬이 소저앞에 나섰다.

《쇤네의 나이 예순이 지나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원컨대 아씨를 위해 한번 나서겠나이다. 그러니 젊은것들은 그만두게 하소서. 쇤네가 이날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한것은 나리와 마님의 덕이오니 아씨는 제발 이 늙은것을 말리지 마소서.》

소저가 눈물을 뿌리며 유모의 손을 잡아 일으켜세웠다.

《어멈이 날 위해 죽기를 불사하니 그 지극한 정을 내 어이 갚으리오. 혹 살아날수만 있다면 후에라도 어멈을 만나 내 그 은혜를 갚으리다.》

《그런 말씀 마소서. 아씨는 내 딸과 같은 사람인데 딸을 살릴수만 있다면 이 늙은 목숨이 무슨 대수겠나이까.》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니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시비가 없었다.

이윽고 유모 계섬이 교자에 오르고 하인들이 교자를 메고 길을 떠나는데 소저는 하녀들속에 섞여 그뒤를 따라섰다.

일행이 산을 내리는데 산아래길섶에 몰켜 수작질하던 사내들이 맞받아올라왔다.

산자락밑의 길로는 이따금 행인들이 지나지만 선산으로 뻗은 오솔길쪽은 비교적 한적하였다. 소저일행이 산길을 한창 내려가는데 아니나다를가 마주 올라오던 십여명의 패당들이 다짜고짜로 왁- 하고 덮쳐들었다. 하인 서넛이 저항하다가 무지한 왈패들의 주먹질, 발길질에 얼굴이 터지고 팔다리가 부러졌다.

하녀들이 깁찢는 비명소리를 지르며 소리쳤다.

《아씨를 모시고 분묘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사부댁교자를 백주에 탈취하느냐! 그래 너희들은 나라법이 무섭지 않아 침범하느뇨!》

교자를 빼앗고 무리들을 몰아가던 조침이 돌아서더니 의기양양해서 너스레를 떨었다.

《너희들은 념려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며칠후면 자연히 너희들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으리라.》

얼마나 빨리 달아나는지 순식간에 일행이 눈앞에서 멀어져갔다.

소저일행은 하인들을 부축하며 교자를 따르는척 하다가 무뢰배들의 꼬리가 보이지 않자 곧 집으로 돌아오고말았다.

이 시각 양철은 큰 잔치상을 차리고 숱한 손님들을 청하였다. 이제 설소저를 앗아오면 그자리에서 혼례식을 할 잡도리여서 미리전부터 사람들을 청해놓고 잔치술을 대접하는 중이였다. 량반자들의 옆에는 일등가는 미인 스무나문명이 련이어 술을 치고있고 광대와 기생 수십명이 쾡창거리며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며 돌아가고있었다.

양철과 신랑차림을 한 그의 아들 양달이 목을 빼들고 따오기 샘구멍 들여다보듯 대문쪽을 바라보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도차지가 달려와 설소저를 태운 교자가 당도했다고 기별하였다. 양철부자가 덩지 큰 몸을 들썩거리며 교자를 사당앞으로 인도하고 하녀더러 신부를 모셔내오라고 하였다. 잔치손님들이 교자에서 내리는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어떤이는 엉거주춤하며 일어서고 어떤이는 키돋움하고 바라보았다. 사람사태로 성벽을 쌓은 어른들 다리짬으로 코흘리개 애녀석들이 새앙쥐 멍석구멍 들여다보듯 눈알을 굴렸다.

교자앞에 다가가 문을 열던 하녀가 《으악-》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문을 쾅 닫으며 그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그쪽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웬일인가 해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양철이 빨리 신부를 모셔내오라고 소리쳤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던 하녀가 헤덤비며 일어나 양철에게 황황히 뛰여왔다.

《저- 신부가 죽었, 그게 아니라 교자엔 신부가 아니라 목을 매고 죽은 로파가 있소이다!》

《뭐, 뭐라구?!》

양철이 펄쩍 놀라 교자로 다가가 문을 나꾸어채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교자안에는 깁으로 목을 매고 축 늘어진 백발로파가 앉아있었다. 순식간에 눈알이 뒤집혀진 양철이 숨없이 앉아있는 로파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 와락 끌어내렸다.

《악!-》

사람들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듯이 동시에 비명소리 울려나왔다.

이어 사태를 짐작한 사람들이 끌끌 혀차는 소리, 흥흥거리는 비웃음소리가 그뒤를 따랐다. 잔치에 왔던 손님들이 엉치를 툭툭 털며 하나, 둘 일어서더니 대문밖을 나섰다.

잠간새에 혼례식장은 휑해지기 시작하였다.

개구리처럼 불거져나온 퉁방울눈을 데룩거리며 사라지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양달이 씩씩거리며 벼락같이 달려왔다. 사방을 둘러보던 양달이 마당 한구석에 세워놓은 떡치는 메를 발견하고 뛰여가 두손에 쳐들었다. 사람들이 왜 그러나 하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불에 덴 숫소처럼 헤덤비며 돌아선 양달의 퉁방울눈에 살기가 펀뜩거렸다. 두말없이 양달은 그 떡메로 이미 숨이 끊어진 로파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로파의 온몸이 박살나고 온 마당에 검붉은 피가 랑자히 흘렀다.

《으악!》

기절초풍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또다시 터져나왔다. 삽시에 혼례장은 상가집으로 바뀌였다.

유모 계섬으로 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집으로 돌아온 설소저는 그를 생각하며 목놓아 울었다.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어올랐으나 소저는 그냥 울음을 그칠줄 몰랐다.

그곁으로 다가온 운랑이 가만히 소저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아씨, 계속 이러고만 있겠나이까?》

온통 눈물투성이인 얼굴을 들어 소저가 운랑을 바라보았다.

《나때문에 어멈이 죽었구나. 어릴 때부터 날 돌봐주던 어멈이 말이야!》

혼빠진 사람마냥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소저의 팔을 흔들며 운랑이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아씨대신 유모인줄 알면 양씨댁에서 가만있자 하지 않겠는데 이렇게 앉아 울고만 있을수 없지 않소이까. 황공자의 말대로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남이 옳을가 하오이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듯 설소저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잠시 무슨 생각에 골똘하던 소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양철이 간사하고 악독한 흉계로 나를 핍박하더니 결국은 무고한 어멈이 내대신 죽었어, 나때문에 어멈이 죽었단 말이야!

미구에 그 재앙이 나에게도 미치려니 차라리 북해로 가서 아버님을 뵙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것 같구나.》

《그럼 북해로 떠나려 하오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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