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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황공자는 삼수의 풍랑을 만나고

설소저는 북해의 구름을 한탄하다



발해국의 상경룡천부 룡주에는 황현이라는 명재상이 있었다.

재주와 덕이 출중하고 충성과 효성을 겸전한 그의 둘도 없는 벗은 한동리에 사는 설영이였다. 일찌기 두 사람은 청룡산 도사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고 동시에 급제하여 황현은 좌사정으로, 설영은 시중의 벼슬에 이르렀다.

조정의 6부를 장악통제하는 정당성의 버금자리인 사정벼슬에 오른 황현과 임금의 명령과 지시를 전달하고 바른 의견을 제기하는 선조성의 시중벼슬에 오른 설영이 직분을 지켜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백성들에게 어진 정사를 펴니 천하는 태평스럽고 나라안에는 도적이 없었으며 물산 또한 풍요해져 백성들은 현인이 내렸다고 입을 모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허나 이런 두 사람에게도 터놓고 말 못할 근심거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무슨 마귀할미가 심술을 부리는지 나이 마흔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는것이였다. 나라안을 다 뒤져도 찾아보기 힘든 경국지색의 녀인들과 원앙부부를 이루었건만 일점혈육이 없으니 아릿다운 부인들의 얼굴엔 언제 봐야 수심이 가셔질줄 몰랐다.

때는 온갖 꽃이 만발한 춘삼월 어느날 밤이다.

황사정의 부인 양씨와 설시중의 부인 조씨는 망월루에 올랐다.

만첩으로 피여난 꽃들에서 풍기는 향긋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훈훈한 봄바람에 실려오고 구름 한점 없는 하늘중천에선 놋대야같은 둥근달이 시름없이 흘러가며 교교한 빛을 뿌리고있다. 나이 마흔이 되였으나 아직도 처녀시절의 황홀한 자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두 부인의 뛰여난 미모에 꽃들도 보름달도 무색해지는 고요한 밤이였다.

망월루에 올라 둥근 달을 바라보던 양부인의 입에서 홀연히 탄식소리가 새나왔다.

《내 나이 벌써 마흔이 되였으나 팔자가 기박하여 여지껏 자녀를 두지 못하였으니 후일에 지하에 간들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뵙는단 말인가.》

혼자소리로 뇌인 말이였건만 조부인이 가려들었는지 조용히 뒤말을 달았다. 그의 목소리도 슬픔에 젖어있는듯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의 생에 후대 없음이 가장 큰 죄악이라고 했는데 자식 하나도 낳지 못한 우리 신세는 참말로 애석하고 가련하기 그지없군요.》

조부인이 양부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샘같은 맑은것이 번뜩거린다.

《이전에 누군가가 북두칠성에 기도하여 아이를 낳았다던데 우리도 한번 기도함이 어때요? 혹 천행중 다행으로 효험이 있으면 얼마나 희한하겠나요.》

양부인의 그늘진 낯색이 밝아진다.

《나도 매양 그럴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오늘 부인의 말을 듣고보니 한시바삐 실행하고싶군요.》

《그럼 우리 래일 청룡산으로 함께 감이 어때요?》

이튿날 새벽 일찌감치 두 부인은 목욕재계하고 칭룡산으로 향하였다.

청룡산은 룡주에서 서남쪽으로 백여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있는 웅장하기 이를데 없는 산이다. 가지가지 신비한 전설들이 깃들어있는 청룡산에는 사시장철 푸르른 숲이 울울창창하고 온갖 꽃이 지지 않고 계속 피여있어 사람들은 령험이 깃든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일렀다. 산세가 험준하기 이를데 없고 골짜기들이 끝간데 없이 깊어 아직까지도 그 산을 다 돌아보았다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산입구에서 얼마 떨어진 펑퍼짐한 곳에는 단군천제시절에 세웠다는 커다란 선돌이 절벽마냥 박혀있었는데 명절이 오면 각처에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찾아와 그 선돌앞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군 하였다.

청룡산에 이르러 선돌앞에 제물을 차려놓고 마주선 두 부인은 천지신명과 황천후토와 일월성신(하늘과 땅, 해와 별, 달의 신)에게 지성으로 빌고 또 빌었다.

청룡산에서 집으로 돌아온 그날밤 양부인은 온몸이 노근하여 잠자리에 들었으나 도무지 잠을 이를수 없어 방문을 열고 퇴마루로 나왔다. 황사정은 조정일을 보느라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부인의 눈길이 자연히 밤하늘에로 향했다. 무수한 별들이 서로 내기나 하듯이 반짝거리고있다.

(하나, 둘, 셋… 서른하나, 서른둘…)

퇴마루에 앉아 하늘에서 깜박거리는 별들을 입속으로 세여보던 부인은 지친듯 단념하고 눈길을 떨구었다. 또글또글한 크고 작은 별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얼마나 밝은 빛을 뿌리며 깜박이는지 눈이 부시고 아물아물하여 더 셀수가 없었다.

(저 하늘의 별들에도 엄마별과 아기별이 있다지, 그렇다면 나의 아기별은 과연 어느 별일가?

남들은 아이낳이를 무우뽑듯이 수월하게 한다는데 무슨 팔자가 들어 나한테 자식이 태우지 않을가. 청룡산에 들어가 빌었다고 여직 없던 자식이 나한테도 생길가?)

양부인의 눈가엔 저도모르게 눈물이 핑 고여오르기 시작하였다.

비록 자식이 없으나 자기를 대하는 남편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티끌만한 변심이 없이 한본새로 애틋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솟구쳤던것이다.

날씨는 여전히 화창하고 봄바람은 의연히 산들산들 불고있다.

시름에 겨워 퇴마루기둥에 앉아있는 부인의 눈앞에 기연가미연가 불쑥 웬 백발로인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내려왔나, 땅에서 솟았나?

부인은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그의 앞에 얼굴은 아이같이 말쑥하고 머리는 흰눈같이 새하얀 암만 봐도 인간세상의 범속한 사람같지 않은 백발로인이 엄정하게 서있었다. 부인은 창황중에 허리를 굽혔다.

백발로인의 입에서 석쉼한 목소리가 드렁드렁 울려나왔다.

《아릿다운 부인이 젊은 한창시절을 다 지나보내고도 아직 무자식이라 이를 가상히 여긴 옥황상제께서 부인의 정성에 감동하셔 이 늙은이를 보내여 귀동자를 주셨도다. 그러니 부인은 부디 그 애를 귀히 길러 나라의 동량지재가 되게 하라.》

말을 끝낸 로인은 황의동자를 부인앞으로 내밀었다.

부인은 반색하며 두손을 내밀어 아기를 받아안았다.

《아!》

부인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부인은 정신없이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우뚝 솟은 코며 훤칠하게 넓은 이마, 새별처럼 초롱초롱한 두눈은 자기가 그리도 애타게 꿈꾸고 바라던 옥동자였다. 부인은 온 얼굴에 함박꽃같은 웃음을 담뿍 띠우고 얼굴을 쳐들었다.

헌데 흰 실안개가 눈앞에 새뽀얗게 서렸다가 인차 걷히우더니 그 백발로인은 온데간데 없었다. 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품에 안은 아기를 다시 살펴보려 하는데 이번에는 그 황의동자가 불쑥 황룡으로 변하여 달아난다.

《아니, 내 아기가 어데로 달아날가?! 》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부인은 두손을 쑥 내밀며 몸을 일으켰다. 그 서슬에 양부인은 놀라서 깨여났다. 깨여나보니 일장춘몽이 아닌가. 괴이하고 놀라우면서도 아쉽기 그지없었다. 가슴은 널뛰듯 활랑거리고 손에 다 잡았던 파랑새를 놓친듯 알찌근하여 양부인은 온밤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양부인은 조부인을 청하였다. 양부인이 헤덤비며 꿈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조부인의 눈이 화등잔마냥 커지는것이였다.

《어쩌면 그리도 신통할가요?

나도 어제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 백발로인이 청룡산에서 왔노라고 하면서 계수나무꽃 한송이를 주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꽃은 봉래산 계수나무꽃이니 강가에 씻으면 새 잎이 돋아나 번성하리라〉 하고 말하지 않겠나요.

깨여나보니 생시같이 여겨지는지라 하도 이상하여 부인과 의론하자고 막 오려던 참이였어요.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는 꿈이예요.

혹시 청룡산 신령이 우리 두 사람의 지성에 감동하셔 자식을 점지하는게 아닐가요?》

양부인이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나요. 본래 꿈이란 허망하기 그지없다는데…》

하늘도 무심치 않은가부다. 다름아닌 그달부터 두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으니 말이다.

열달후 한날한시에 두 부인은 자식을 낳았다. 양부인은 달같은 아들이요, 조부인은 꽃같은 딸이라 두 부인과 가장들인 황사정과 설시중의 기쁨 그 어디에 비길수 있으랴. 한나라의 재상이라는 엄정한 지체에 어울리지 않게 황사정과 설시중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우리 두 사람이 막역한 친구이고 두 부인이 친자매인양 자별한 정을 나누다가 함께 청룡산에 기도하여 한날한시에 약속이나 하듯 아들과 딸을 낳았으니 이는 분명 하늘이 정해준 연분이요, 또 꿈에 계수나무꽃을 강가에 씻으라고 하였다니 이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겠소. 》

황사정은 아들의 이름을 《운》이라 지었으며 설시중은 딸의 이름을 《봉선》이라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부인들과 의논하고 애들이 다 자라면 서로 짝을 무어주기로 약조하였다.

부모의 소원이 담긴 자장가소리 들으며 운이와 봉선이는 무럭무럭 잘도 자랐고 애들이 커감에 따라 두 집안엔 웃음소리, 노래소리가 떠날줄 몰랐다.

허나 슬프구나, 흥진비래는 예로부터 있었던가.

황공과 설공의 두 집안에 화기로운 웃음소리가 차넘치고 영특하고 귀여운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는데 청청하늘에 벼락이 친다고 하루아침에 된서리 내릴줄 그 누가 알았으랴.

이때 조정에서는 선조성의 좌상 진권이 손안에 실권을 흠뻑 틀어쥐고 나라일을 줌안의 공기돌 놀리듯이 제 마음대로 롱락하고있었다. 조정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일컫는 벼슬인 정당성의 대내상 대야수라는 로회한 대신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많은데다 계속 병으로 앓다나니 조정의 일을 돌볼 형편이 못되였다. 그러다나니 조정의 크고작은 모든 일들은 나라안에서 두번째 벼슬이라 칭하는 선조성의 좌상 진권이 주관하게 되였다.

대내상 대야수가 나라의 정사에 참례 못하는 기회를 타서 권력을 틀어잡은 진권은 간신소인배들을 끼고 충신들을 모해하였으며 금전으로 벼슬을 사고팔고하였다. 우로는 지엄한 임금이 있고 아래로는 숱한 신하들과 백성들이 있건만 조정에서는 소인배들이 오뉴월 풀메뚜기마냥 기세등등 날뛰며 충신재사들을 탄압하고 시골에서는 탐관오리들이 살판을 만났다고 각종 명목으로 걸터듬질을 밥먹듯 하니 임금은 명색뿐이고 량순한 백성들은 물란리에 집마저 잃은 고아신세와 다름없었다.

말타면 경마 잡히고싶다고 권력을 틀어쥔 진권은 점점 야심이 굴뚝처럼 솟구쳐 이제는 기름종지를 노리는 도적고양이마냥 언감생심 룡상까지 넘보았으나 대바르고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나 조정대신들의 존경을 받고있는 황현때문에 감히 어쩌지 못하고 기회만 노리고있었다.

그렇지만 진권은 자기의 패당들을 조정의 요직에 끌어들이고 양으로 음으로 황현을 비롯한 충신들의 수족을 은근히 얽어매고있었다.

진권의 이러한 전횡으로 바른 말이 탑상으로 들어오던 길이 막혀버리고 길가에는 고향을 버리고 살길찾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죽은 시체가 발에 걸채일 정도로 차고넘쳤다.

조정의 충신들이 들고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충의롭고 청렴강직한 정당성의 좌사정 황현이 제일 앞장에서 상주문을 올렸다. 황현이 비록 정당성의 두번째 벼슬인 사정이라지만 선조성의 꼭지인 좌상 진권과 품계가 엇비슷하였다.

《하늘이 있어 나라가 있고 임금이 있어 신하와 백성이 있으며 백성이 있어 나라가 굳건하거늘 지금의 조정은 성상이 있는 조정이 아니요, 지금의 천하는 성상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천하가 아니옵니다.

나라안의 땅들은 황페화되고 거리엔 사람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강들엔 물이 아니라 백성들의 피눈물이 흐르고있소이다.…

이는 조정에 들어앉은 소인배들과 사악한 무리들이 떼를 지어 권력에 아부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며 성상의 은총을 가리우고있기때문이옵니다. 성상께서 하루빨리 이 소인무리들과 사악한 탐관오리들을 료정내여 온 나라에 밝은 교화를 펴소이다.》

상주문이 임금의 탑전에 가닿기 바쁘게 황현이 상주문을 올려 조정의 소인배들을 탄핵했다는 소식이 하늘소귀같이 커다란 진권의 귀에 날아갔다. 임금의 주변에 자기 심복들을 박아넣은 진권이라 그의 심복들이 상전에게 잘 보일 기회를 놓칠가봐 제꺽 진권에게 고해바쳤던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진권의 벌쭉귀가 푸들거리기 시작하였다. 진권이 분노를 터뜨릴 때면 손바닥만 한 그의 귀가 앞뒤로 푸들푸들 요동친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심복부하들이 속이 한줌만 해서 옹송그리고 서있는데 진권이 앞에 놓인 서안(책상)을 탕- 치며 벌떡 일어섰다.

진권의 귀가 부채질하듯 세차게 떨었다.

《이놈의 황사정이 살기가 정 싫었구나! 네놈이 감히 나와 맞서보겠다구?!》

그러지 않아도 학식이 높고 대바르기로 소문난 황사정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어느때든지 제거하려고 골머리를 앓고있던 진권인지라 이번 기회에 황현을 매장해치울 흉심이 독구렝이마냥 심중에 꿈틀거렸다.

하늘소귀가 어서빨리 진정되기를 속으로 빌며 심복부하들이 진권의 행태를 주시하였다.

진권은 즉시 조정의 요직마다 구렝이마냥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는 자기의 패당들을 불러들였다. 진권에게 잘 보인 덕으로 닭알의 노란자위라고 할수 있는 조정의 알속있는 벼슬자리를 차지하고있던 그의 무리들이 범벅덩이에 쉬파리떼 모여들듯 욱 쓸어들었다. 그 무리들이란 하나같이 진권의 말이라면 엄동설한에 산에 가서 산딸기를 따오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고 팔뚝을 걷어올리고 나설 작자들이였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고 백설이 흩날리는 산중에 산딸기가 없는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진권은 그 무리들과 작당하여 황현을 모함할 흉계를 꾸미고 이튿날 조회때 섬돌에 머리를 찧으며 아뢰였다.

《미천한 이몸이 성상의 하해같은 은총을 입어 좌상직에 올라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밤잠도 잊고 뛰고있소이다. 헌데 아닌밤중에 홍두깨라고 정당성의 좌사정 황현이 조정에 소인배가 득실거린다고 참소하였나이다.

이는 평시에 신을 목에 걸린 가시처럼 미워하던 황현이 억하심정으로 신을 겨냥한 참소가 아니고 뭐라고 하겠소이까. 그런 참소를 당하고 신은 더이상 나라의 중임을 감당할수 없으며 또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을수 없나이다.

엎드려 빌건대 페하는 신의 목을 베이여 국권을 회복하옵소서.》 섬돌주변은 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로 랑자해졌건만 진권은 한본새로 그냥 머리를 쪼았다.

임금이 처참한 그 광경에 기겁하여 어안이 벙벙해서 어쩔줄을 몰라하는데 이때라고 생각한 그의 패당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좌상 진권은 국가의 중임을 몸에 지닌 대신이요, 사직을 떠받들고있는 공신이옵니다.

헌데 정당성의 좌사정 황현이 무엄하게도 중임을 맡은 대신을 헐뜯는 상주문을 올려 사직을 어지럽히고 조정을 소란케 하였은즉 이는 분명 자기를 내세우려는 불측한 마음으로 출발한것입니다.

조정의 제일가는 대신을 함부로 모함하고 중상한 황현의 그 죄는 천만번 죽어도 씻지 못할 대역부도죄인줄 아오니 부디 페하는 명철하게 살펴 조처하옵소서.》

이미전부터 진권의 손탁에서 놀아대는 조정이였다. 황사정의 상주문이 충의지심으로부터 출발한 바른소리임을 모르는바 아닌 임금이였지만 진권도당들의 손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된 처지라 별수없이 그 의견을 쫓아 황현을 삼수로 정배보내라는 조서를 내렸다. 상주문을 올린 후 이틀만에 벌어진 일이였다.

하늘처럼 믿고 애오라지 충정을 바쳐온 임금에게서 상상밖에도 정배살이라는 형벌을 받아안은 황사정은 눈앞에 무수한 별찌가 일고 정신이 아뜩해졌다. 밝은 해가 칠칠 검은 구름장속에 묻혀 빛을 잃었다는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니 성상마저도 이 신하를…

아, 발해국의 밝은 해가 먹장구름속에 가리워졌구나!》

집으로 향하는 황사정의 걸음발이 술에 취한듯 휘청거렸다. 그의 뒤로 금부도사와 라졸들이 다급히 쫓아오고있었다.

집에는 친구의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설시중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설시중의 옆에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고있는 양부인과 눈이 꿀종지만 한 네살난 아들 황운이 눈물이 글썽해서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붙들고 서있었다.

황사정은 눈굽이 축축해서 자기를 바라보는 설시중의 두손을 꽉 부둥켜잡았다.

《해를 가리운 어두운 구름장을 우리 힘으로야 어찌 헤쳐낼수 있겠소.

소제가 이제 삼수에 정배가면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기 힘든데 로형에게 부탁할게 있소.

내 부탁은 딴게 아니라 우리 운이를 그대가 맡아달라는것이요. 내 어린 아들 운이가 이 아비가 없으면 학문을 배울수 없는것이 마음에 걸리오. 그러니 로형은 후날을 생각해서 내 아들을 맡아 배워주소. 그러면 내 비록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여한이 없을것 같소.》

황사정은 품안에서 백옥잠 한개를 꺼내들었다.

《이는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며 전해오는 유물이니 이제 로형의 녀아가 크거들랑 소제와의 약속대로 우리 아들애와 성례를 치르어주오.》

영리별을 고하듯 처량하게 울리는 그 말에 설시중의 울대가 세차게 오르내렸다. 대답대신 설시중은 그저 머리만 끄덕거리며 백옥잠을 받아 간수하였다.

이윽고 황사정은 부리부리한 두눈을 들어 어린 아들을 바라보다가 무릎을 꿇고 허리에 찼던 옥장도를 끌러 아들애의 허리에 채워주었다. 황사정의 커다란 두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부디 죽지 말고 살아남으면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날 날이 있으려니 이로써 신표로 삼자꾸나.》

황사정은 애리애리한 아들의 얼굴을 자기의 구레나릇으로 비벼대다가 품에 와락 껴안았다.

《아버님은 우릴 두고 어데로 가시려 하나이까. 소자는 아버님과 헤여지고싶지 않소이다.》

네살짜리 운이가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며 서럽게 울기 시작하였다. 그 애처로운 모습이 둘러선 사람들의 가슴을 허비였다.

《이젠 그만하고 떠나가자. 해질녘까지 그냥 여기에 못박힐셈인가!》

진권의 패당인 금부도사가 도끼눈을 희뜩거리며 버럭 라졸들에게 호통쳤다. 사람들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금부도사의 불같은 독촉에 두억시니같은 라졸들이 우르르 황사정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두 공이 눈물속에 두손을 다시금 마주잡았다. 어린 운이는 고사리같은 손으로 아버지의 바지가랭이를 꼭 붙들고 놓을념을 안한다. 비칠거리는 양부인을 하녀가 옆에서 부축해주었다.

이리하여 결백하고 강직하기로 명성높은 황사정은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기약할 길 없는 류배지로 떠나게 되였다.…

황사정이 정배간 후 양부인은 밤낮으로 눈물속에 슬퍼하다가 그만 병석에 눕게 되였다.

집안의 하녀들과 설시중내외가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마음의 상처로 생긴 골병이라 백약이 무효였다. 양부인의 병은 더는 수습할수 없는 위급한 상태에 놓이게 되였다.

자기의 목숨이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져 몇날 넘기지 못함을 예감한 양부인은 어느날 조부인의 손을 꼭 잡고 뱉는듯이 띠염띠염 입을 열었다. 양부인의 얼굴은 백지장 한가지로 해쑥하고 조갈든 입술은 터실터실 갈라져있었다.

《내가 부인과 함께 청룡산에 기도하여 각각 아들과 딸을 낳고 슬하에서 옥이야 금이야 귀히 길러 후일에 락을 보자 했더니 천만뜻밖에도 가군이 멀리 류배가는 참변을 당했군요.

청천벽력같은 변고에 접해 지나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마음이 자연히 쓸쓸하더니 그만 불치의 병을 만나 이렇게 죽음의 그림자만을 쫓고있을뿐이예요.… 부인이 어진 마음으로 조금도 나를 간격두지 않고 친골육같이 사랑하니 난 그간 기쁨속에 살아왔지요. 헌데 지금은 가군이 기약할 길 없는 류배를 가고 또 나까지 몹쓸 병을 만났으니 저 어린 우리 아들애는 장차 어찌하겠어요. 막상 눈을 감자니 아들애의 정상이 가슴에 걸려 눈을 감을것 같지 못하군요.

지난날 나와의 정을 생각하여 부인이 우리 아이를 맡아서 거두어주세요. 그러면 황천에 가서도 내 그 은혜를 갚겠어요.》

양부인의 손을 잡은 조부인의 뺨으로 눈물이 샘솟듯 흘렀다.

《부인은 무슨 모진 마음을 먹고 그런 나약한 말을 하시나요? 어린 운이를 생각해서라도 하루빨리 몸을 회복해야지요.》

이후로 더 지성다해 병을 간호했건만 세월도 무심타, 양부인은 사흘후 끝내 북망산으로 가고말았다.

림종을 눈앞에 둔 양부인은 어린 운이를 침상으로 불렀다.

양부인의 눈가에 피보다 더 진한 새빨간 눈물이 한가득 고여있었다. 운이는 처음으로 피보다 더 빨간 눈물도 있다는것을 알았다. 힘겹게 말을 뱉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린 운이의 뇌리에 그대로 한자한자 쪼아박혔다.

《내 비록 저세상 사람이 된다만 너를 두었으니 황씨가문의 후사는 근심이 없고 지하에 묻힌들 조상들앞에 죄를 면했구나. 그러나 너의 아버지도 모르게 먼저 가게 되였으니 그게 한스럽구나.… 운이야! 이 엄마가 없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부디 네 몸을 보존하여 저 멀리 귀양간 아버지와 꼭 다시 만나 남부럽지 않게 살거라. 그리구… 네 비록 어린 나이에 고아나 다름없는 혈혈단신이지만 아무쪼록 황씨가문의 장손임을 명심하고 몸을 보존하여…》

뒤말을 채 잇지 못하고 운이의 손을 잡고있던 부인의 손이 맥없이 풀려졌다. 난파도 몰아치는 험악한 세상에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황천으로 떠나가는 어머니의 눈은 운이를 응시하고있었다. 네살난 아들애를 두고 차마 눈을 감을수 없는 양부인이였다.

《어머니, 죽지 마소이다! 그렇게 죽으면 아버지도 없이 난 어떻게 하나요? 어머니, 엄마야!》

숨이 꺼져가는 어머니를 애절하게 부르며 몸부림치던 운이는 양부인의 가슴우에 엎어져 기절하고말았다.

설시중이 실신한 운이를 부둥켜안아 자리에 눕혀놓았다. 한참후에 정신을 차린 운이가 또다시 어머니를 부르며 막무가내로 달려갔다. 그러는 운이를 설시중이 가까스로 막아서며 품에 꼭 껴안았다.

설시중은 동리사람들과 함께 양부인을 선산에 안장하였다.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상가를 치르는 운이의 례법의식은 어른들도 무색할 정도로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린 상제의 어른스러운 그 모습에 혀를 빼물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인 황사정이 억울하게 귀양간 후 세상만사가 귀찮아진 설시중은 벼슬살이 그자체가 신물이 났다. 가뜩이나 엉망진창이던 조정은 황사정마저 없으니 더욱 어지러워졌다. 진실과 허위가 혼탕되고 상과 벌이 뒤죽박죽되여 말그대로 란장판이 되여버렸으며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는 단 하루도 살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였다. 하여 설시중은 몸이 편치 않다는 구실을 대고 벼슬을 내놓는 사직상주문을 올리였다.

임금이 몹시 서운해하면서 금은페백을 수많이 하사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선산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의 고향은 원래 황성에서 남쪽으로 한 오십리가량 떨어진 호주인데 아버지대에 룡주로 옮겨와 살았던것이다.

고향에 내려온 설시중은 선산을 돌보고 농사와 독서, 산수구경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오직 친구의 아들인 황운과 자기 딸 봉선의 교육에만 온 심혈을 기울였다.

어느덧 꽃피고 잎지고 해뜨고 달지는 세월속에 십년세월이 흘렀다.

그간 황공자는 학문과 무예가 뛰여난 헌헌장부로 성장하였고 설소저는 자색과 재주를 겸비한 절세의 가인으로 피여나 온 호주고을에 두사람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되였다.

이무렵 설시중의 고향 호주에 조정에서 관리들의 치적을 조사하는 중정대의 장관인 대중정벼슬에 있는 양철이 무슨 시찰명색으로 내려왔는데 그로 말하면 진권의 도당으로서 권력에 아부하고 충신들을 모해하며 뢰물을 좋아하기로 소문짜한 소인배로서 설시중은 조정에서 있을 때부터 애당초 그와 상종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 양철에게 양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지만 양달은 제 아비를 찜쪄먹을 정도로 심술이 바르지 않고 포악하고 무지하기 그지없어 사람들은 그들부자를 가리켜 승냥이밑에서 빠져나온건 다 날고기를 먹는다는 말이 그른데가 하나도 없다고 쉬쉬거렸다.

호주로 내려온 양철은 설소저가 자색이 뛰여나고 재덕을 겸전했다는 소문을 듣고 매파를 보내여 혼인을 청하였다.

《두 집안의 귀한 자식들로 서로 길복스러운 인연을 맺음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나이까. 두세번 곱씹어 생각하여 대사를 결정함이 후날에도 좋을것이라고 대중정어른이 전하라 하였나이다.》

혼인을 청하는 매파의 말이였다. 일종의 위협조가 풍기는 매파의 그 말에 설공내외는 너무도 기가 막혀 한동안 아무말도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더구나 조정에서 벼슬을 할적부터 양철을 소인배로 치부하던 설공이 아니였던가.

설공은 울컥 치미는 노기를 터뜨리며 고함을 쳤다.

《내 비록 빈한하나 양가의 부귀는 부러워하지 않아! 인륜대사를 그렇게 위협한다구 내가 호락호락 정할줄 아느냐! 백로한테 까마귀가 어울릴수 있다더냐?

당장 돌아가서 그대로 이르거라! 우리 애는 이미 황사정의 자제와 정혼한 사이야!

그러니 두번다시 내 집에 얼씬거리지 말라!》

무줄해서 쫓겨온 매파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양철이 대노하여 불그락푸르락거렸다.

《뭐, 뭐라구?! 백로한테 까마귀가 어쨌다구? 설영이 그 량반이 날 업신여겨도 정도가 있지, 네놈이 얼마나 배심이 든든하나 어디 두고보자!》

그길로 황성의 진권을 찾아간 양철은 입에 거품을 물고 갖은 악담을 퍼부으며 설시중을 헐뜯었다.

《설영은 본래 황현과 한패당이라 황현이 정배간데 대해 원한을 품고 성상께 고하여 좌상을 해하려고 하나이다. 그런즉 좌상께서 빨리 손을 써서 설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앉은자리에서 무슨 날벼락을 맞을지 그 누가 알겠소이까.》

오래전부터 자기의 손과 발이 되여 송아지 보고 노루라 해도 두말없이 믿는 양철이 찾아와 하는 말을 듣는 진권의 하늘소귀가 푸들쩍거리고 상통이 이그러졌다. 황현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진권이였다.

《그놈이 황현의 패당이란 말이지?!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

《어르신께서 일부러 품계를 돋구어 그자를 조정으로 다시 부르면 될게 아니오이까.

황현이 류배간 뒤 조정일이 제 심지에 맞지 않아 벼슬을 놓고 락향한 놈이니 필경 불러도 응하지 않을것은 불보듯 뻔하지요. 그때 어명에 불복한 죄를 씌워 없애버리면 적실할줄 아오이다.》

진권은 그 말을 쫓아 설영을 의부경으로 임명하자는 상주문을 올리였다. 임금이 두말없이 응하였다.

명소패를 앞세운 선전관이 설영을 찾아와 조서를 전하니 설영은 뜻밖의 등용에 한동안 어리둥절해졌다. 둘도 없는 막역친구인 황사정이 억울한 루명을 쓰고 류배간 뒤 언제 모함당할지 알수 없고 또 조정일이 되여가는 꼴이 진저리나서 병핑게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온 설시중이였다. 헌데 진권이 자기를 의부의 경으로 천거하여 조서가 내렸으니 이야말로 고양이 쥐생각이 아닌가.

(진권이가 날 의부의 경으로 천거하다니 거참, 소가 웃다 꾸레미터질 노릇이군. 세상에 수닭이 알을 낳았다고 한들 이보다 더 희한한 일이 또 있으랴. 여기엔 필경 그 무슨 음모가 있는게 분명하다!)

하여 설시중은 벼슬길에 나설 의향이 없음을 장황히 설명하는 상주문을 임금에게 올렸다. 설시중이 그렇게 나오리라 믿고있던 진권은 이때라고 생각하고 그를 참소하는 상소문을 재차 올렸다.

《설영이 벼슬을 사양함은 다 리유가 있소이다.

설영은 본래 황현의 심복이라 현이 귀양간데 대해 불평불만을 부리면서 성상을 원망하며 요설을 퍼뜨린다고 하옵니다. 그가 이번에 벼슬을 받지 않고 불러도 응하지 않는것은 결국은 성상을 원망하고 또 조정을 우습게 보기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중벌을 주어 다시는 설영과 같은 불충불효가 나타나지 않게 하기를 바라오이다.》

설영을 의부의 경으로 임명하는 조서를 내리면서 그가 다시 조정에 들어오는것을 진정으로 기뻐하던 임금이였다. 그러나 벼슬을 사양하는 설영의 상주문을 받아보고는 은연중에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괘씸하게 여기던 임금에게 있어서 진권의 상소문은 붙는 불에 기름을 치는 격이 되고말았다.

진권의 상소문을 읽어본 임금은 언짢은 생각이 분노로 번져져 사연을 더 알아보지도 않고 진권의 건의대로 설영을 북해로 귀양보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하루사이에 설씨집안은 따스한 봄날 때아니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살풍경으로 화하고말았다.

귀양지로 떠나는 날 설시중은 황운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하였다.

《너의 부친은 무고하게 저 멀리 류배지에 가고 너의 모친은 원한을 품은채 비명에 돌아갔지.… 내 친구의 의리를 지켜 너를 양육하여 우리 봉선이와 혼례를 치르자 했건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정배를 가게 되누나.

살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금에 와서 내 무슨 말을 더 하랴만 너의 재주가 비상하여 장차 다른 사람의 아래에는 있을것 같지 않으니 부디 나의 뜻을 잊지 말고 학업에 힘쓰며 우리 녀아를 버리지 말지로다.

기다리면 때는 올것이니 장차 네가 삼수에 류배간 부친을 찾아가 위로하고 또 북해에 귀양간 고독한 나를 찾아준다면 내 비록 죽어도 한이 없을것 같구나.》

부모없는 자기를 친자식보다 더 따뜻한 사랑과 정을 부어주던 설시중은 황운에게 있어서 마음의 기둥이였고 운명의 지탱점이였다.

황운은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소자의 운수 기구하고 팔자 사나와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리별하고 또 어머니를 잃었소이다. 그런 혈혈단신 소자에게 있어서 의탁할 곳은 오직 대인밖에 없었소이다.

소자가 대인의 슬하에서 그늘 한점 없이 오늘까지 성장한 그 은혜를 어찌 높은 산에 비기며 깊은 바다에 비기겠소이까. 소자가 어른으로 자라면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갚으려 했건만 천운이 불행하여 대인마저 이렇게 또 정배가는 신세에 처했으니 이는 다 소자의 정성이 모자랐기때문이옵니다.

허나 소자는 대인의 간곡한 당부를 골수에 명심하겠나이다.

하늘과 땅도 변하여 사계절이 있고 산천도 그 모습을 바뀌는 때가 있거늘 대인은 부디 귀한 몸을 돌보시여 후일을 기약하소서.

소자는 목숨이 붙어있는 한 대인의 말씀을 꼭 실행하겠소이다.》

황운의 대답에 설공은 눈굽이 뜨거워났다. 너무도 기특하고 대견하여 한동안 황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품안에서 금팔찌 하나를 꺼내들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봉선에게 있으니 후일에 너희들은 이로써 서로의 신표로 삼도록 해라.》

북해의 정배지로 떠나가는 설시중을 바라보는 황운의 눈가에 이름할길 없는 비애와 고뇌가 어렸다. 십년전에 아버지가 저 멀리 삼수로 정배가더니 어인 연고로 오늘은 설대인이 천리밖 북해로 류배가는지 황운으로서는 풀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설시중이 귀양간 후 조부인은 식음을 페하더니 얼마 안있어 심화병으로 앓아눕게 되였다. 황운과 봉선이 엇바꾸어 병자의 곁을 잠시도 뜨지 않고 성의껏 간호했으나 병세를 역전시킬수 없었다.

운명직전에 조부인은 손을 내밀어 황운의 손을 꼭 잡고 혼신의 힘을 모아 입을 열었다.

《내… 임자만을… 믿네. 우리 봉선이를…》

황운이 나가자 설소저가 어머니앞으로 다가갔다. 딸을 바라보던 조부인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머니!》

소저가 조부인의 품에 어푸러지며 곡성을 터뜨렸다. 그러던 설소저는 정신을 잃었다.

조부인의 침상에서 울려나오는 설소저의 곡성을 들은 황운이 부리나케 달려들어와 하녀들을 시켜 소저를 방안에 눕히고 잠시도 곁을 뜨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장례를 치르고 선산에 조부인을 정히 안치한 그날밤 황운은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급작스레 닥쳐온 설씨가문의 불행이 아무리 생각해봐야 가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되여 불의에 설대인이 정배살이를 가게 되였을가? 조부인의 비명횡사는 설대인의 정배와 잇닿아있었다. 설시중내외가 양철이 매파를 보낸 소식을 황운에게 내색하지 않은 까닭에 그는 전혀 내막을 모르고있었다.

뒤척거리며 잠못들던 황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라지창을 열었다.

키높이 자란 우중충한 나무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쪼각달이 애처롭게 떨고있었다. 장차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것인가? 그리고 설소저는? 생각할수록 앞일이 끝을 대중할수 없는 미궁처럼 묘연하기 그지없었다. 자기는 남자이니 그럭저럭 무슨 변이 생겨도 헤쳐나갈수 있겠지만 랑자인 설소저의 일은 마음이 놓이지 않고 왼심을 쓰게 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집채같은 바위에 짓눌린듯 가슴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정혼한 사이라지만 혼례를 치르지 못한 처지에 한집에서 산다는것이 거북스러운 노릇이였고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였다.

(내 비록 소저와 언약했다지만 성례를 치르지 못했으니 어찌 한집에 있으랴. 그러니 룡주의 우리 옛집으로 돌아가 선산을 지킴이 마땅하도다.)

이튿날 황운은 설공댁의 비복들을 모두 마당에 모이게 하고 그앞에 나섰다.

《내 일찌기 천고에 드문 슬픔을 당하고 대인의 넓은 도량과 보살핌으로 잔명을 보존하고 오늘까지 성장하였다. 헌데 지금은 대인이 멀리 정배살이를 가고 부인은 슬픔으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 어찌 원통하지 않으랴.

소저의 처지도 나와 같거늘 그렇다고 내 어찌 혼례를 치르지 않고 한집에 있을손가. 그래서 난 이 시각부터 본래 살던 룡주로 돌아가 살겠으니 너희들은 소저를 성심으로 돌보라!》

비복들이 허리를 굽히며 황운의 말을 따르겠노라고 다짐하였다.

아버지를 북해로 귀양보내고 어머니마저 잃은 설소저는 너무도 슬프고 비통한 나머지 음식을 전혀 들지 못하고있었다. 하녀 운랑이 잠시도 그 곁을 뜨지 않고 만단으로 위로하였지만 상태가 좀처럼 호전되지 못하다나니 장례식에도 변변히 참례하지 못한 소저였다. 결국 어머니의 장례는 황공자가 주관하게 되였다. 장례를 치르는 마당에서도 설소저는 하늘을 우러러 어머니를 부르다가는 기절하고 정신을 차리면 또 어머니를 부르며 기절하기를 몇번인지 몰랐다.

장례가 끝난 이튿날 아침이였다. 밤새 혼수상태에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설소저에게 운랑이 애기숟가락으로 미음을 떠먹이고있는데 나어린 하녀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운랑이 그 하녀에게 눈을 흘겼다.

《무슨 일이냐? 아씨가 몸이 편치 않아 웬간하면 들어오지 말라구 하지 않았니?》

하녀가 미안스러운 낯색을 지으며 어줍게 대답하였다.

《도련님이 자기의 옛집이 있는 룡주로 돌아가겠다면서 아씨에게 문안인사를 하러 왔기에…》

어린 하녀가 다가와 운랑의 귀에 대고 뭐이라고 속삭였다. 운랑의 눈이 둥그래지며 저도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뭐라구, 그게 사실이냐?》

누워있던 설소저가 그 어조에서 무슨 낌새를 맡았는지 안깐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운랑이 그 모양을 띄여보고 얼른 미음종지를 놓고 부축하였다.

《그래, 황공자가 왜 갑작스레 룡주로 돌아가겠다는거냐?》

소저의 물음에 나어린 하녀가 머밋거렸다. 운랑이 소저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리유를 설명하자 소저의 낯색이 발그스레해지더니 인츰 엷은 그늘이 졌다.

《운랑아, 내대신 네가 좀 나가보렴. 부디 몸을 보존해서 후날에…》

뒤말을 더 잇지 못하고 소저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공자마저 떠나가면 난 어찌해야 하는가?)

소저의 해쑥한 뺨으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슬픔에 잠겨있는 소저를 다시 자리에 눕혀놓은 운랑이 눈굽을 훔치며 문을 나섰다.

운랑에게서 설소저의 정상과 당부의 말을 전해들은 황운의 가슴은 미여지는것 같았다.

《아씨를 부탁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기별해다오.》

황운은 소저가 있는 방을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대문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황운은 아버지가 정배살이를 하고있는 삼수로 찾아갈 생각을 해보았다.

처마밑에서 지지배배하는 제비의 울음소리도, 끼룩끼룩 북으로 줄지어나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도 오늘따라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를 뵙고싶은 생각이 가슴속에 끓었으나 아직은 너무도 자기의 힘이 약함을 통절히 한탄하며 황운은 땅이 꺼질듯 한숨을 내쉬였다.

그렇다! 아직은 자기가 너무 어렸다. 나이도 어리고 학문도 어리고 지혜도 어렸다. 하루빨리 학문을 닦아 과거에 응시하고 금의환향할 때 아버지를 찾아가리라!

후일을 기약하며 황운은 주야로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집에 돌아온지 달포가 지난 어느날 창밖에서는 보슬비가 내리고있었다.

창밖으로 소리없이 내리는 보슬비를 바라보느라니 삼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고있을 아버지생각이 더욱 가슴에 미쳐와 황운은 도무지 글줄이 들어오지 않았다. 황운은 책을 덮고 문을 나섰다.

문앞에 우두커니 서서 길가로 오가는 행인들을 멀거니 바라보고있는데 서쪽으로 뻗은 길켠이 갑작스레 소란해졌다.

황운이 소리나는 길쪽을 향해 언듯 눈길을 돌리니 초라한 행장들과는 달리 선명한 의복과 화려한 의관을 차린 한무리 사람들이 왁작거리며 길을 오고있는것이였다. 보슬비가 내리는데도 우장을 높이 쳐들고 히히닥닥거리며 다가오는데 행인들이 다니는 길을 잔뜩 메우고있어 오가던 사람들이 모두 한켠으로 엉거주춤 밀려났다. 딴 사람들을 발치에 두고 저밖에 없는듯이 놀아대는 그 무례함에 황운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슨 사람들일가? 거동과 옷차림을 봐서는 량반행렬은 아닌듯싶었다.

하도 이상하여 행렬이 자기 앞을 지날 때 맨 옆에서 가는 한 사람을 불러세워 물어보았다.

《그대들은 어디로 가는 길손들이요?》

목이 앙바틈하고 살집이 투실투실한 사내가 보기 흉한 거적눈을 흘기며 황운을 치떠보았다. 상대가 량반신분의 도령임을 알아보았는지 대답은 퍽 곰상스럽다.

《우린 진좌상어르신의 사람들인데 막힐부의 고주땅에 갔다가 황성으로 돌아가는중이요.》

《?!》

황운은 흠칫 놀라며 거적눈을 쏘아보았다. 섬광이 번뜩이는 황운의 눈총앞에 거적눈이 낯색이 질려 살맞은 쥐마냥 제꺽 꼬리를 사렸다. 통분함을 금할수 없었다.

(진권같은 간특한 인물이 오래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더니 이제는 노복들까지 그걸 등대고 이렇듯 오만방자하니 정말 거꾸로 된 세상이구나.

내 언제면 진권을 징벌하여 삼수의 참담한 해와 북해의 창망한 구름을 위로하랴.)

그날 밤이였다.

늦게까지 책을 읽던 황운이 곤해서 서안에 의지해 잠간 조는데 비몽사몽간에 백발의 로인이 그앞에 다가와 우뚝 서는것이였다.

《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어찌 깊은 잠에 드느냐?

태명산 로인이 그대와 더불어 전생의 연분이 깊은데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니 바삐 태명산으로 가라. 후일에 몸이 영달하거든 나를 생각하여 청룡산으로 찾아오라!》

말을 마치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황운이 놀라서 깨여나보니 한가닥 꿈이다.

(방금 꿈속에서 왔다간 이는 청룡산 도사인가?)

심중에 괴이한 생각이 일었으나 그것도 순간이였다. 황운은 벽에 걸어놓은 장검을 비껴들고 다급히 후원으로 나가 동정을 살펴보았다.

헌데 이 무슨 일인가. 홀연 화광이 대문으로 비쳐들어오고 지척에서 투닥투닥 숱한 사람들이 성급하게 뛰여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아차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꿈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눈앞에 닥쳐왔던것이다. 언제 집사람들을 깨울새가 없었다. 황운은 다급히 담장을 넘어 동산으로 올랐다.

동산에 올라 자기 집을 굽어보던 황운은 너무도 억이 막혀 눈을 부릅뜨고 입을 항 벌렸다.

정체를 알수 없는 무수한 도당들이 사면으로 자기 집을 둘러싸고 불을 지르는 모습이 환히 보였던것이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중구난방으로 고아대는 거센 목청이 타래치는 불길속에서 울려나왔다. 잠에 곯아떨어졌던 비복들이 놀라서 방문을 열고 불길속을 헤쳐나오다가 그 무뢰한들에게 걸려들어 생죽음을 당하는 모습이 빤히 내려다보였다. 도당들이 옷도 걸치지 못하고 맨발로 뛰쳐나오는 그들을 보이는 족족 잡아 불속에 처넣으니 대다수가 불길속에서 아우성을 치며 타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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