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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 회


제 4 장


전류는 흐른다


3


리성복의 방을 나온 지용수는 용접봉심선절단기를 제작하고있는 련희를 만나러 자력갱생직장으로 찾아갔다.

딸을 찾아가는 그의 마음은 그닥 즐겁지 못했다. 그는 련희를 영천화력발전소에 현실체험을 떠나보낸것이 자기가 범한 실책중에 가장 큰 실책이라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고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련희는 얼마든지 좋은 직업을 택했을수 있었으나 지용수는 딸의 장래발전을 위해 여기 영천화력발전소를 큰집처럼 푹 믿고 내려보냈던것이다. 그가 그렇게 기대했던 큰집이 길가의 주막집보다 못했을줄이야.… 지용수는 더이상 여기에 딸을 맡기고싶은 생각이 꼬물만큼도 없었다. 딸을 하루가 새롭게 평양으로 데려가는것이 상책일뿐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련희도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지는 않을것이다. 그도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가 얼마나 큰가를 너무도 잘 알고있지 않는가. 지용수는 딸을 굳게 믿었다. 믿을뿐더러 자식이라면 응당 부모의 요구를 따르는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가 자력갱생직장 작업장에 들어서니 로동자들에게 둘러싸인 련희가 작업장한가운데 도면을 펼쳐놓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있었다. 지용수는 소리없이 다가가 생기에 넘쳐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딸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작업복을 입은 체통 큰 남자들 몇이 련희를 호위하듯 빙 둘러싸고 그의 말을 긍정하며 연신 머리를 끄덕이였다. 볼수록 흐뭇하고 감개무량한 딸의 모습이다.

지용수는 이제 1년후면 년로보장수속을 할셈이다. 그다음엔 련희에게 의탁하여 남은 여생을 보내면 된다. 그러자면 딸의 직업을 잘 잡아주어야 할것이고 사위감도 가는 채로 추고 또 추어 그야말로 보석을 골라내듯 골라야 할것이다. 딸이 가정을 이루고 손자까지 낳아주면 아장아장 손자의 손잡고 낚시질도 나가고 일요일이면 가족과 함께 극장에도 가고 대성산에도 가게 될것이니 이 얼마나 흐뭇하고 화락한 여생이랴.

지용수는 선자리에서 머지않아 누려보게 될 달콤한 생활의 단즙을 들이키며 련희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련희는 펴놓았던 도면을 말았고 모여섰던 사람들도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담은채 작업장으로 흩어져갔다.

지용수는 정찬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련희야!》

어디론가 급히 달음쳐가려던 련희는 귀익은 아버지의 부름에 얼굴을 돌렸다.

《아버지!》

련희는 반가와서 콩콩 달려왔다.

《언제 오셨어요?》

《북창에 일보러 갔다가 널 만나자고 들렸다.》

련희는 온몸이 기쁨덩어리가 되여 아버지를 대했다. 그는 지금껏 아버지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2차기술협의회때에는 아버지가 내려오지 않은데 대해 큰아버지도 몹시 서운해했다. 1차기술협의회때 서재필아바이의 일로 고까와진 아버지가 다시는 이곳에 발길하지 않으시려나 하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걱정해온 련희였다. 그런데 불쑥 나타났으니 그 고마움이 온몸을 화락하니 적셔주고있었다.

《아버진 퍽 축가셨어요. 얼굴색도 좋지 않고.》

련희는 아버지의 얼굴표정을 바라보며 저으기 근심스럽게 말했다.

《축가긴, 두루두루 일에 몰려 그러겠지. 그래 넌 객지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냐?》

《아버지두 참, 안할 걱정을 하시네. 큰아버지랑 큰어머니랑 얼마나 다심한지 몰라요. 여기야 제집과 꼭 같은걸요.》

지용수는 련희의 꾸밈없는 이야기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어디 조용한 곳에서 딸애와 이야기를 나누고싶었다.

《련희야, 조용한 곳이 없니? 너와 심중히 할 얘기가 있다.》

그들은 자력갱생직장앞으로 나진 소로길로 해서 공장구내공원으로 갔다. 그리고 수삼나무아래 세멘트로 만들어놓은 의자에 앉았다. 지용수의 표정도 자못 심각해졌고 련희의 얼굴도 아버지를 만날 때처럼 밝지 못했다.

지용수는 말없이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의 심중은 무거웠다. 이제 딸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다음행동방향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방도가 전혀 묘연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딸이 아버지의 의사를 따라줄것을 바라고 또 바랐다. 그 기대가 무너지고나면 그로 인하여 오는 정신적허탈감에 몸까지도 지탱할것 같지 못했다.

그는 마음을 크게 먹고 이야기의 화제를 꺼냈다.

《련희야, 아버지는 널 평양으로 아주 데려가자고 왔다.》

《?…》

련희는 깜짝 놀랐다. 그는 휘둥그래진 눈을 아버지의 얼굴에서 떼지 못했다. 천만뜻밖이라는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가. 그의 머리속에는 여느때없이 수심에 싸인 아버지의 얼굴에 내비쳐진 마음속 고충이 무엇일가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생각해봐라. 이 아버지에게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뿐이다. 이젠 나도 나이가 들었다. 그래서 동년배들이 손자손녀들의 손을 잡고 거니는걸 보면 마음이 자꾸 허전해지는것을 어쩔수 없구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처량하게 들려왔다. 련희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늙으신 아버지의 모습이 가슴을 쿡 찔러 절로 눈물이 났다. 안타까운것은 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그런 쓸쓸한 말을 하는지 아직은 전혀 가늠할수 없는 일이였다. 아버지가 뭔가 묵직한것을 안고 모대기는것만은 틀림없었다.

《뭐 에돌지 말고 이야기하자. 난 며칠전에 한 청년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청년은 부모들의 의사에는 관계없이 기어이 너를 사랑하겠다는거다. 련희야, 사랑이란건 순수 감정만 가지고 하는게 아니지 않니. 난 그 사람이 마음에 없다. 솔직한 심정에서 너를 그 집에 주고싶지 않다. 너야 집도 평양이고 아버지도 중앙기관의 국장인데 부디 그런 사람과 언약을 맺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거다. 련희야, 이 아버진 너하나만을 바라보고 산다. 그러니 이 아버지의 마음을 더 괴롭히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와 함께 평양으로 올라가자, 응?》

아버지는 련희에게 거의 사정하다싶이 요구하고있다. 요구가 하도 절절하게 울리니 그 요구를 담아들여야 할 딸이라는 그릇의 진동도 커지고있었다. 련희는 얼굴이 화독처럼 달아올랐다. 가슴을 조이며 근심하던 일이 끝내 터지고말았던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서봉철은 얼마전에 아버지의 일로 근심하는 련희에게 우리의 사랑은 두 아버지의 일로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을것이라고, 2호발전기용접을 끝내고는 련희의 손을 잡고 꼭 아버지를 찾아갈것이라고 했던것이다.

련희는 서봉철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 사실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그는 자기와 의논도 없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 봉철동무가 미워났다. 하지만 그 생각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짐작해온 련희였던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이렇듯 빨리 닥쳐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음속이 안타까움으로 바질바질 타드는것 같았다.

그는 용접소리가 울려나오는 공무직장쪽을 바라보았다. 문뜩 서봉철의 우선우선한 모습이 안겨왔다. 그는 마음속으로 서봉철에게 호소하였다.

(봉철동지, 난 어쩌면 좋아요? 아버지가 날 데리러 왔어요.)

련희는 애타는 눈길로 자기를 지켜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차마 마주볼수가 없었다.

《련희야, 어서 결심해라. 다 너의 행복을 위해서다!》

아버지의 지꿎은 물음에 련희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아 아버지, 무엇을 결심하라는거예요? 나의 동심이 깃든 이 땅, 나에게 온갖 사랑과 정을 아낌없이 기울인 고마운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 땅에 난 정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들과 헤여진단 말이예요. 난 여기와서 할일도 다 못한 형편이 아닌가요? 예, 아버지?)

련희는 아버지의 옷자락에 매달려 이렇게 애원하고싶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두 길이 놓여있었다. 한길에는 피를 준 아버지가 행복의 보금자리를 마련해놓고 두팔벌려 서있고 다른 한길에는 눈에 흙이 들어간대도 잊을수 없는 고마운 사람들, 큰아버지, 큰어머니, 서재필아바이와 봉철동무, 리동혁 등이 자기를 지켜보며 서있다. 아, 어느 길도 버리지 않고 다 갈수만 있다면!…

그의 귀전에는 우리 함께 평양의 밝은 불빛을 지켜가는 전력생산자로 영원히 살자고 뜨겁게 이야기하던 서봉철의 목소리가 금시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이젠 자기도 전기를 떠나선 한시도 살수 없는 사람들속의 한성원이 되였음을 느꼈고 그것으로 하여 얼마나 행복에 싸여있었던가. 그 행복감과 긍지감을 어째서 아버지는 뺏으려 할가. 그는 가슴속 사연을 어디다 터칠지 몰라 허둥거렸다. 이런 때 큰아버지라도 곁에 있었으면 좋으련만… 불쑥 용접작업장에서 땀을 동이채 흘리며 전투를 벌리고있을 서재필과 봉철의 근엄한 모습이 떠올랐다. 련희는 흠칫 몸을 떨며 자신을 다잡았다.

(그래, 난 정녕 떠날수 없어. 지금 이 시각도 서재필아바이와 봉철동진 견디기 어려운 고열속에서 자기의 량심을 용접섬광으로 불태워가고있는데 그들이 이렇게 방황하는 내 모습을 본다면?!…)

련희는 고개를 들었다. 그다음 처음으로 아버지의 간절한 요구를 거절한다는 아픔에 목이 꽉 메여 울먹울먹 부르짖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이 딸을… 부디 용서해주세요. 전 정말… 애국의 땀을 흘리는 여기 사람들과 헤여져 훌 떠날수 없어요!》

련희는 수삼나무에 왈칵 얼굴을 묻었다.

지용수는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옹골차다고 여겨온 자기 마음이 순간에 구새먹은 나무통처럼 텅텅 비여버리는듯 한 허무감을 느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여 입에 물었다. 몇번이고 라이타를 켜보았으나 끝내 불을 붙이지 못했다.

지용수는 이 순간 딸이 피를 준 친아버지보다 키워준 큰아버지를 더 소중히 여기고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리성복에게 졌다는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시간전에 리성복은 련희를 데려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버지로서 요구는 할수 있어도 결론하고 강박할수는 없다고 말했었다. 그는 이미 일이 이렇게 번져지리라 예견한듯싶었다.

지용수는 이제는 딸에게 그 어떤 설복도 필요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담배대를 부스러뜨리며 흐느끼고있는 련희에게로 다가갔다.

《련희야, 그쳐라. 이 아버진 더는 너를 괴롭히지 않겠다. 그러고보면 이 아버지의 한생도 행복한축은 못되는가보다. 젊어서는 너의 어머니를 먼저 보냈지. 그 일로 사랑하는 딸도 욕심껏 안아도 못보았으니…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아버지를 멀리하는구나. 됐다. 어서 눈물을 거두어라. 아버진 가겠다.》

《아버지!》

련희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됐다. 너도 살아보느라면 언젠가는 이 아버지의 마음을 리해할 때가 있을게다.》

지용수는 딸애를 슬며시 뿌리치며 승용차가 서있는 곳으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그는 자기의 뒤모습을 아픈 눈길로 바라보며 섧게 울고있을 딸의 모습을 똑똑히 의식했다. 단 한번만이라도 돌아보고싶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약해질가봐 결연히 승용차에 올랐다.

련희는 멀어져가는 승용차를 바라보며 한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아버지, 부디 이 딸을 용서해주세요!)

그 순간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와 련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리성복이였다. 련희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큰아버지!》

리성복은 련희의 등을 가볍게 어루쓸며 말했다.

《련희야, 아버지도 너를 리해할 때가 있을게다.》

《아니예요. 아버진 다시는 여기로 오지 않을거예요!》

《아니다. 너의 아버진 널 버리지 못한다. 자식둔 부모들의 심정은 같다.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서 아픈 매도 들고 때로는 눈먼 사랑도 기울이는거지. 련희야, 넌 옳은 길을 택했다. 네가 선택한 그 길로 꿋꿋이 가느라면 아버지도 반드시 널 찾아올게다.》

《그럴가요?… 그럴가요?》

리성복은 련희를 믿음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련희에 대한 믿음이 커갈수록 딸 영희가 걱정되였다. 그는 지용수가 안해에게 영희의 졸업배치지가 평양으로 되였다는것을 알려주라고 할 때 얼굴이 뜨거워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지용수가 자기를 얼마나 비웃었을것인가. 제 처신도 못하면서 남을 걱정한다고 말이다. 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련희와 영희인데 선택한 길은 얼마나 차이나는가. 련희는 발전소사람들과 뜻을 같이하려 평양을 떠나 여기 화력발전소로 달려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전기와 떨어져 못사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살자고 평범한 용접공청년과 한생까지 같이할 결심을 품지 않았던가. 그런데 영희는… 그럴수록 안해에 대한 고까운 감정이 굴러가는 눈덩이마냥 자꾸만 커졌다.

아니, 안해만 탓할것도 못된다. 우선 자식들 교양문제에 관심을 적게 둔 자신부터 질책해야 했다. 그는 간부들의 가정혁명화에서 특히 자녀들의 교양사업을 잘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것을 깊이 인식하면서도 그 일을 등한시해왔던것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막내딸 영희의 졸업배치문제였다.

영희는 속도전청년돌격대에서 복무하던중 조직의 추천으로 금성정치대학에 입학하였다. 영희가 평양에 배치받을 리유란 하등 없다. 원칙대로 되려면 자기가 복무하던 돌격대에 내려가 대학에서 배운대로 자기의 정치리론수준과 기술실무수준을 더 높여야 할것이다. 그것이 리성복이 바란 뜻이였다. 했건만 영희는 그 어떤 힘을 빌어 조건과 환경이 탄탄대로같은 좋은 직업에 분수없이 얼굴을 들이밀었던것이다.

리성복은 즉시에 이 문제를 바로잡아야겠다는 결심을 가졌다. 영희가 졸업배치를 받고 집으로 오면 단단히 신칙하여 스스로 자기 갈길을 택하게 해야 할것이다.

리성복은 너무도 대조적인 련희와 영희의 일을 두고 끝없는 생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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