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43 회


제 5 장. 천리마휘장


5


서늘한 초가을의 밤은 소리없이 깊어간다.

호기심에 겨워 눈을 쪼프린듯 한 쪼각달이 초고전력전기로의 위용에 반한듯 건물의 창문으로 기웃이 들여다본다. 천정에 공중 매달린 촉수높은 전등이 환하게 비친다. 현장에는 고요한 정적이 깃들어있다. 래일을 위해 교대근무성원들만 남기고 모두 집에 들여보냈다.

김성남은 박상근과 함께 현장을 돌아보고있다.

그들은 생각에 잠겨 말이 없다. 하긴 무슨 말을 더 할수 있으랴.

옛 장수의 투구처럼 멋지게 생긴 초고전력전기로가 은백색동체를 번쩍거리며 거연히 틀지게 앉아있는데야!…

그 모습은 바라볼수록 장쾌하면서도 회오가 깊어지게 한다.

제강소를 현대화해보겠다고 몇해동안 얼마나 뛰여다녔던가.…

이제 래일이면 부하시운전을 하게 된다. 시운전이자 조업과 같다. 부분별 시운전은 다 해보았으나 그래도 마음을 놓을수 없다.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것은 래일이 결정한다, 래일이… 래일은 운명적인 날이다.

사람의 심리란 참…

얼마나 고대하던 그날이였던가!… 그런데 막상 그날이 바로 래일이라고 생각하니 긴장되고 두려운 생각까지 든다. 그 시각이 너무도 빨리 다가오는것 같다. 좀더 길었으면 싶다.…

같은 생각을 하였던지 그들은 은연중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도 김성남은 불현듯 어머니생각이 나서 눈굽이 뜨거워났다.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온 어머님이였던가.…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는지 묵묵히 걷기만 하던 박상근이 공사시작이후 자기를 찾아왔던 어머니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어머니가 이처럼 완공된 초고전력전기로를 보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나!…》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저으기 갈려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저도 모르게 눈굽이 젖어드는 김성남이다. 만나자 세상을 떠난 어머니여서 더욱 그러하다. 의식을 잃은 마지막순간까지 언제면 쇠물을 뽑는가고 물으셨다니 이 불효자식과의 상봉을 얼마나 고대했으면, 아버지가 못다한 일을 아들이 꿋꿋이 하기를, 그날이 얼마나 기다려졌으면 그랬으랴.…

《기술과제제안서가 부결되였을 때에도 어머님은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참, 설계실에서도 자주 만났고 건설장에서도 보군 하였는데 제가 왜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였던지… 이상한 예감이 들면서도… 전기로현대화를 하면서 저자신이 또 하나의 대학을 나온것 같습니다. 난 확실히 불효자식이였습니다.》

《…》

박상근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성남동무, 언젠가 내가 성남동무에게 의리가 없다고 말하던것이 생각나겠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야말로 의리가 없는 놈이였소. 자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말이요.》

《!…》

《유진섭에게서 아버지의 글과 수표가 적힌 책을 보았다고 했을 때 난 속으로 놀랐댔네. 이제 와서 뭘 숨기겠나. 나도 그런 책을 자네 아버지에게서 받았었지.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난 그 책이 낡은것이라고 생각하고 관심도 두지 않았지. 결국 잃어버리고말았네. 그와 함께 의리도 천리마의 넋도 말이요.… 그러니 외국의 설비에만 빠져있을수밖에…》

그들은 지나간 나날에 대한 회오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서로 주고받으며 전기로앞에 새로 건설한 종합지령실로 들어갔다.

크고 넓은 방의 정면에는 전기로와 련관부문의 작업행정을 감시할수 있는 여러면의 액정현시판이 벽에 걸려있다. 현시판밑의 길다란 책상우에는 콤퓨터와 전화기들이 질서있게 배렬되여있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여있는 왼쪽 옆면구석에 《성원외 출입금지!》라고 쓴 패쪽이 걸려있는 문이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역시 두 면이 유리창으로 되여있어 전기로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방이 있는데 이것이 조작공실이다.

노란 비닐안전모를 쓴 강선희가 밤근무를 서고있다. 조작공들은 열흘전부터 돌격대에서 철수하여 교대근무를 서며 새로운 계기들을 료해하고 조작방법을 숙련하고있다. 각종 계기들과 조종단추들이 가득 배렬된 조종탁을 정성들여 닦고 문대던 선희가 조작실로 들어서는 두사람에게 깍듯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선희를 만날 때마다 병원에서 느꼈던 감동이 되살아나 가슴이 후더워지는 박상근이다.

《선희, 조작실이 마음에 드냐?》

《예, 정말 꿈같습니다, 모든것이 자동화되여서.…》

《그러니 이젠 전극 부러뜨릴 걱정이 없겠구나. 허허…》

그 웃음이 어찌나 만족스러운것이였던지 성남이도 선희도 따라웃었다. 옆방의 당직성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머리를 기웃거리며 들여다보다가 얼른 사라진다. 뜻깊은 밤이다.

《부상동지, 밤도 깊었는데 이젠 들어가 쉬십시오!》

《자네도 눈을 붙여야지.》

《저야 뭐, 아직 젊지 않습니까?》

《그럼, 난 늙었단 말인가? 하긴 늙기야 늙었지. 이젠 마음뿐이야.》

김성남이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건 아닙니다.…》

《허, 내 해보는 소리요. 래일 신문기자들이랑 오라고 성에 조직사업을 해놓았는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아야 하겠소. 그럼 난 사무실에 가있겠네.》

박상근이 나간지 얼마 안되여 밖에서 벅적 다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인가 하여 김성남이 지령실로 해서 나가보니 키가 꺽두룩한 리규택이 나들문에 서있다.

《아니, 오늘 밤엔 푹 쉬라고 했는데 왜 나왔습니까?》

《자리에 누웠어도 어디 잠이 와야 말이지.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와버리고말았지요. 그런데 저 동무들이 공연히…》

리규택은 자기를 몰라주는것이 섭섭하다는듯이 못마땅한 눈길로 근무성원들을 쳐다본다.

김성남은 그의 마음이 리해되였다. 원래 나이를 먹으면 잠이 없다고 하지만 더우기 오늘 밤 같은 때야.…

래일 시운전을 앞두고 모든것이 안전해야겠기에 근무성원외에는 그 누구도 현장에 들여놓지 말라고 근무성원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었다.

그러나 김성남은 어찌할수가 없었다.

리규택이 이젠 됐다고 초고전력전기로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것을 지켜보고있는데 새로 설치한 커다란 나들문쪽에서 또 다투는 소리가 들려온다.

《?!…》

그곳으로 가보니 유진섭이와 공정실장이 방조를 청하듯 지배인을 바라본다.

그들도 역시 같은 심정일것이다.

두사람을 통과시키고 돌아서려는데 뒤이어 기술공정실은 말할것도 없고 박영재며 설계원들, 병원에서 퇴원한 리제일이도 나왔다. 그들이라고 안 들여놓을수가 없다.

현장에 나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맡은 부분을 다시한번 재확인해보고는 (그것은 물론 구실이다. 이미 확인할대로 다 확인해본 상태였던것이다.) 모두 널직한 종합지령실 쏘파에 앉아 이야기장단을 펴놓았다.

밤을 새울 잡도리이다.

김성남이 아무리 눈을 좀 붙이라고, 그래야 래일 시운전을 보장할게 아닌가고 얼려보아도 막무가내이다.

고집불통들이다. 하긴 김성남이 자신도 밤이 깊어가면 갈수록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데야 어쩌겠는가. 결국 자기도 아바이들의 이야기판에 끼여들고말았다.

손풍금건반을 누르듯 손가락을 구부렁구부렁 우습강스레 놀려보던 리규택이 한숨을 내쉬였다.

《아무리 손가락을 놀려봐도 아직 꿋꿋해.… 콤퓨터건반을 누르는것이 게발놀리듯 한단 말이야.》

유진섭이 조용히 핀잔을 주었다.

《첫술에 배부르겠나? 그 나이에 콤퓨터를 다루게 된것만 해도 큰것이지. 다 영재동무가 수고한 덕이야.》

영재가 뒤덜미를 긁적거린다.

《저야 뭘, 아바이들이 열성껏 노력한 결과이지요!》

리규택이 밉지 않은 눈길로 그를 흘겨보았다.

《어허, 칭찬해주면 가만있으라구. 지나친 겸손성은 거만의 표현이란 말도 있지 않나. 자랑할건 자랑해야 해. 어쨌든 이번 초고전력전기로는 우리 로병들이 주동이 되여 한것만은 사실이지. 안 그래, 영재!》

영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리규택을 바라본다.

《아바이말씀이 옳습니다.》

리규택이 한쪽구석에 앉아있는 젊은 축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다음번 2호초고전력전기로의 쇠물노을은 자네들이 피워올려야 하네. 어때, 자신들 있나?》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박영재가 일어서며 힘있게 말하였다.

《2호초고전력전기로건설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좋아, 사내라면 그렇게 배짱이 있어야 해. 뭐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뒤짐이나 지고 앉아있을것 같은가. 콤퓨터를 배워준 값은 할테네! 허허…》

옆에 앉아있던 로기술자들이 옳다는듯 머리를 끄덕이며 즐겁게 웃는다.

김성남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로기술자들이 은근히 빛을 뿌리는 저녁노을이라면 젊은 기술자들은 열정으로 불타는 아침노을이 아니겠는가.… 저녁노을은 언제나 아침노을이 더 열정적으로 타오르게 하기 위해 자기의 마지막빛을 아끼지 않는것이리라.…

바로 저들의 인생이 꺼질줄 모르는 강선의 노을처럼 빛나게 해주어야 한다.

김성남은 책임일군으로서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짐을 의식하였다.

형광등빛이 환한 지령실에서는 이야기가 그칠새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초고전력전기로 부하시운전과 관련한 말은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생활적이며 우스운 롱말들만 입에 올렸다.

저저마다 의젓해지려고, 대범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이따금 흘끔흘끔 로조작공실을 쳐다보고있는 박영재를 보자 리규택이 놀려댔다.

《왜, 선희가 보구싶어서? 그럼 들어갈것이지.》

영재는 얼굴이 벌개졌다.

《아, 그런게 아닙니다.》

《솔직하지 못하다, 사내라는게… 어서 들어가라구.》

《조작실엔 외인이…》

리규택은 《성원외 출입금지!》라고 쓴 표쪽을 흘끔 쳐다보고나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어째서 외인이란 말인가. 영재동문 들어갈 자격이 당당히 있어. 암, 있구말구. 안 그렇소?》

그의 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허허 웃는것으로 긍정했다.

들어가지 않겠다고 뻗치는 박영재의 등을 떠밀어 조작공실에 들여보내고난 리규택이 벙글거렸다.

《허허, 그래두 첫날색시 신방에 들어가는것보다야 더하겠나? 지배인동무, 저들의 결혼식을 언제 하겠습니까? 요즘 목이 컬컬한데…》

김성남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조업식을 끝내고 아바이들이 날자를 정하십시오.》

《거참, 좋구만!》

가벼운 웃음소리가 흐른다.

잠들수 없는 밤이다.

이밤 잠들지 못하는것은 이들뿐이 아니였다.

수많은 건설자들과 지원자들, 그들의 흥분된 마음인양 아빠트창문들에도 단층집창문들에도 불빛이 꺼질줄 몰랐다.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데 그 누구인가 창밖을 내다보며 환희에 넘쳐 소리쳤다.

《어, 벌써 날이 밝아오는구만!》

사람들은 일제히 창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침노을이 붉게 타오르고있었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