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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 회


제 3 장


마음속의 빛은 밝다


9


서재필은 출근길에서 앞서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제 저녁 기사장방에서 2호발전기회전자축의 용접을 위한 용접공선출문제가 토론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중 한사람은 5월17일보수지휘부성원인 박기사였다.

서재필은 호기심이 부쩍 동해 바투 따라서며 귀를 강구었다. 박기사는 그런것도 모르고 열이 올라 어제 저녁에 있은 일을 이야기했다.

《나도 서재필아바이가 선출될줄 알았는데 일두 참…》

《아니, 화력발전소적으로 용접기술에서야 서아바이를 당할 사람이 얼마나 되나?》

《그러게 말이네. 기사장동지가 딱 자르니…》

《거 모를 일이군.》

박기사보다 곁에서 말을 받아주는 사람이 더 등이 달아 말했다.

《이보게 박동무, 서재필아바이를 반대하는 리유가 뭔가 말이야?》

《글쎄… 말로는 나이가 많고 눈병까지 앓는다고 하지만 그런것 같지도 않네. 여러가지 원인도 있겠지만 내 보기에는 기사장이나 일부 간부들의 눈밖에 난것 같네. 어제 기사장동진 말로는 서재필아바이가 나이도 많고 또 용접을 손에서 놓은지 오래되기때문에 그런다고 했는데 그 아바이 용접재간이야 올데갈데 없겠는데… 하여튼 서아바이일이 참 안됐어.》

박기사가 자기 일처럼 걱정하며 하는 말이다.

《그럼 당비서동지도 같은 의견인가?》

《쉿, 저기 기사장동지가 오누만.》

두사람은 저쯤에서 틀지게 걸어오는 기사장을 띄여보고 부리나케 가던 길을 재촉했다.

서재필은 한자리에 우뚝 멎어서버렸다. 심장이 졸아드는것만 같았다. 차라리 듣지 않은것만 못했다. 누군가가 몸을 스치고 지나가서야 자기가 지금 출근길 한복판에 우뚝 서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공장구내길로는 수백명이나 되는 종업원들이 제나름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출근길을 재촉하고있었다. 그들모두가 이야기화제를 서재필이 용접공추천에서 락선된것을 가지고 떠드는것처럼 느껴졌다.

방금전에 한 박기사의 이야기가 고막을 아프게 자극했다. 그는 종업원들이 허탈상태에 빠진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는것만 같아 애써 마음을 다잡고 용접작업반 휴계실을 향해 황황히 걸어갔다. 걸으면서도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혹시 잘못 듣고 그러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휴계실에 들어서니 작업반원들은 여느날과 같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누구도 아직은 이 사실을 모르고있었다. 아들도 모르는것 같았다.

조회가 시작될무렵 생산과에서 온 전화를 작업반장이 받았다. 서재필은 한껏 긴장되여있었다.

전화를 받고난 반장은 웬일인지 서둘러 조회를 끝냈다. 그는 서봉철에게 자기와 함께 생산과에 올라가자고 말했다. 이것도 서재필에게는 의문스러운 일이였다.

(생산과에서 아들을 부를 일이란 없겠는데… 혹시 용접봉심선절단기문제로 그러지 않을가? 그런데 반장과 함께 간다는것은 또 뭔가?)

서재필은 그럴바에는 5월17일보수지휘부에 직접 찾아가 속시원히 물어보는게 나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회가 끝나기 바쁘게 5월17일보수지휘부를 찾아갔다.

그제서야 그는 자기는 제외되고 그대신 아들이 보조용접공으로 선출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서재필은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 한 감을 느꼈다. 그는 2차기술협의회때 지용수국장앞에서 2호발전기회전자축용접을 자기가 맡아하겠다고 당당히 제기했었다. 그때 지용수국장은 그 일은 두고볼 일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었다. 그러니 떡 줄 놈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 된셈이다.

서재필은 발이 닿는대로 터벅터벅 걸었다. 그는 2호발전기회전자축의 용접을 위해 남모르게 많은 노력을 쌓았던것이다. 밤이면 아들, 로친 잠든새 마당에 나와 맞춤한 나무를 놓고 용접모의훈련을 했고 퇴근시간이면 2호발전기회전자축이 있는 공무직장에 찾아가 저녁늦도록 덩지큰 회전자축을 어루쓸며 합리적인 용접안을 찾느라 고심했다.

그 과정에 두사람이 동시에 량쪽에서 용접하면 시간을 단축하고 축의 변형도 막을수 있다는 매우 기발하고 합리적인 안도 찾아냈었다. 그때 너무 기뻐 손으로 회전자축을 어루쓸며 《어디 한번 겨루어보자. 이 서재필이 록록한줄 알았어.》하고 호기있게 장담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게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서재필은 남들이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찾아가 연거퍼 줄담배를 태웠다. 꾸역꾸역 타래치는 담배연기와 어울려 문뜩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어릴 때처럼 《재필아, 어디 아프니? 얼굴색이 말이 아니구나. 속상하면 이 어미에게 터놓으렴. 이 어미가 널 도와줄지 알겠니?》하고 다정히 위로해주는것만 같았다. 번개처럼 스치는 환영이였지만 수십년이 흐른 오늘 불쑥 귀익은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보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람이란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당하고나면 머리가 싯허예가지고도 자기를 낳아주고 젖먹여 키워준 어머니의 모습을 찾는것 같다. 아마 어머니만큼 자식들을 위해 궂은일, 마른일 다 달게 여기는 사람은 없기때문일것이다. 그래서 서재필이 자기곁을 떠난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 못 잊게 어머니를 그려보는것이다.

서재필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마음속으로 어머니에게 아뢰였다.

《어머니! 저의 마음속 고충은 어머니의 조언으로도 풀지 못할 일이예요. 어머니, 난 일생을 용접공으로 일해왔어요. 수십년간 련마해온 기술이여서인지 발전소적으로도 손꼽히는 용접공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헌데… 발전기의 생명이라고 할수 있는 회전자축용접에 빠졌습니다. 정말이지 제가 한생 련마해온 용접기술을 최대한 발휘하여 손색없이 용접하려 했는데… 어머니, 정말이지 내가 그 책임적이고도 영예로운 일을 해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까? 어머니,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흑흑…》

서재필은 저도 모르게 흐느꼈다. 어머니가 림종의 시각 하나밖에 없는 자식의 손을 꼭 잡고 하시던 당부가 그를 울렸던것이다. 한동안 제 설음에 싸여 눈물이라도 속시원히 흘리고나니 마음이 한결 후련해났다. 그리고는 손수건으로 주름진 얼굴에 찍혀진 눈물자욱을 꼼꼼히 지웠다. 한켠으로 생각하니 나이 예순이 넘어 주책없이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자기대신 아들이라도 그 용접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다는 위안으로 마음이 개운해져왔다.

(그래. 내겐 어디에 내놓아도 떳떳하게 자랑할수 있는 끌날같은 아들이 있지 않는가? 비록 내 손으로 용접을 하지 못해도 아들을 힘껏 돕자. 아들과 함께 땀을 흘리는 심정에서 말이다.)

서재필은 저녁퇴근길에 공무직장작업장에 들리였다. 저녁 이맘때면 흥분된 마음을 안고 찾아오던 곳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마지막으로 회전자축과 작별하자고 쓸쓸한 걸음을 한것이였다. 이제 용접이 시작되면 여기에 찾아올 일이 없을것이다.

공무직장작업장은 늦은 퇴근시간이여서 조용했다. 이따금 어느 구석에선가 텅텅 쇠붙이 때리는 망치질소리가 간간이 들려올뿐이다. 밖은 벌써 어두웠는지 작업장천정에 매달린 전등에서 뿌옇게 불빛이 비쳤다.

서재필은 회전자축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물었다. 쇠붙이의 싸늘한 감각이 엉치로부터 온몸으로, 심장속으로 아프고 차겁게 마쳐왔다. 눈이 흐려졌다. 마음속에 반짝 켜졌던 재생의 환희가 졸지에 꺼져서인지도 모른다.

그가 담배를 석대째 태우고났을 때 누군가가 다가오면서 물었다.

《거 서동무 아니요?》

서재필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예.》

《여기에 있었구만요.》

반기며 다가오는 사람은 리성복초급당비서였다. 그를 대하는 순간 서재필은 못할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눈을 허둥거렸다.

《서동무가 여기 있는줄 모르고 온델 찾아다녔습니다.》

《?…》

서재필은 미심쩍게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긴요한 일인지는 알수 없으나 자기를 찾아 여기까지 온것으로 미루어 누군가에게서 아들이 퇴근하는것은 보았으나 그의 아버지는 못 보았다는 보고라도 들은것 같았다. 그래서 공장구내를 샅샅이 훑었을것이다.

《서동무, 퇴근이 늦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한대 태우면서 이야기나 나눕시다.》

《예.》

리성복이 그에게 담배를 권했다. 서재필은 황송하게 담배를 받았다. 그의 마음은 불안감과 초조감으로 널뛰듯 했다. 당비서가 품들여 자기를 찾은데는 필시 용접공선출에서 밀려난 일때문일것이라는 예감이 뇌리를 때린것이였다.

(아마 위안해주자는거겠지. 제 손으로 나를 다시 발전소에 데려왔는데 오죽이나 딱하랴. 그렇다고 난 비서동지를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아. 그게 무슨 큰일이라구 속에 꽁지고있담.)

서재필은 허리를 쭉 펴며 큰 용기를 안고 당비서의 말을 기다렸다.

《서동무, 지용수국장동무와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입니까?》

서재필은 좀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자기의 예측과는 전혀 다른 뜻밖의 질문이여서였다. 어쨌든 지용수라는 이름은 아들과 지련희의 상서롭지 못한 관계를 상기시켜 그의 가슴을 아프게 건드렸다. 그는 마지못해 뜨직이 대답했다.

《예, 화력발전소건설때부터 잘 아는 사이입니다.》

《…》

리성복은 잠자코 담배를 빨며 한참 동안을 두었다가 다시 물었다.

《내 보기엔 두사람 관계가 좋지 못한것 같은데 서동무의 이야기를 듣고싶습니다.》

서재필은 곰곰히 생각을 굴려보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리성복과 지용수는 서로 막역한 사이라고 한다. 얼마전에 알았지만 엄마의 얼굴도 못 본 국장의 딸을 당비서의 안해가 맡아키워주었다는것이였다. 그러니 두집 사이가 여간 가깝지 않으리라는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이 얼마나 딱한 질문인가.

바재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그의 심정을 꿰뚫어본듯 리성복이 다시 말했다.

《서동무, 난 동무의 진심의 목소리를 듣고싶어 그럽니다.》

《…》

한동안 망설이던 서재필은 드디여 입을 열었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려면 먼저 우리 가정이야기부터 해야 할가봅니다.》

서재필은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벌써 여러대째 피운 담배생각이 다시 난것이였다. 담배의 도움이 없으면 자기가 말할 용기도 낼것 같지 않았다. 처음 마음속에 넣었던 그릇이 점점 작아지고있었던것이다.

《자, 태우십시오.》

그 눈치를 알아챘는지 리성복이 또 담배를 권하며 불을 켜들었다. 서재필은 몇번이고 깊숙이 담배를 들이빨았다 내뱉았다.

《비서동지, 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사람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였는가는 어머니가 림종의 시각에 들려준 이야기뿐입니다.》

…서재필의 아버지 서병구는 황해도태생으로서 몰락한 봉건가문의 마지막후손이였다. 서병구의 아버지는 흥현이라는 곳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가난한 백성들의 자녀들에게 우리 글을 가르쳤다.

완고한 민족주의자인 그는 일본놈들이 강요한 창씨개명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선친들이 지어준 이름 석자를 끝끝내 지켜냈다. 또 언제인가는 조선어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사립학교들에서 조선말 대신 일본어를 강의하라고 강요하는 일본시학의 귀뺨을 때려 경찰서에 붙들려가 고역까지 치르었다. 이 일로 사립학교는 페쇄되고 간신히 이어가던 밥탁도 끊어지게 되였다. 어쨌든 그 강직한 성품때문에 그는 흥현은 물론 군에까지 소문이 자자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것으로 하여 그 집에서 서재필의 어머니 고삼분에게 청혼장이 날아왔을 때 온 집안은 너무 황송하여 감지덕지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자기네는 부모들이 물려준 얼마 되지 않는 뙈기논에 다 팔아도 용돈도 나오지 않는 과일나무 몇그루를 가지고 자기 근력을 팔아 밥술이나 먹으며 근근히 살아가는 산골농부의 가정인때문이였다. 그래서 고삼분도 부모들을 따라 해뜨면 밭으로 나가고 해떨어지면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서 바느질을 배운게 고작인 별로 식자도 없는 어진 촌처녀였다. 다만 주근깨가 코언저리에 다문다문한 그의 용모가 좀 이쁜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일뿐이였다.

고삼분은 그날 과수원에 올라가 혼자 실컷 울었다. 하늘이 내려준 천분이라는 생각에 감사했고 자기를 잊지 않고 색시로 맞을 결심을 한 서병구가 고마와서였다. 사실 고개 하나를 사이두고 살아오는 고씨네와 서씨네는 친형제같이 가깝게 지내다나니 고삼분도 자연 어릴 때부터 서병구를 오빠처럼 따랐었다. 서병구가 서울로 신식공부 떠날 때 고삼분이 부모님들 몰래 꼬깃꼬깃 모아두었던 지전 몇장에 조찰떡을 찧어가지고 30리길이나 따라나온것도 그때문이였다. 바로 그 정을 잊지못해 서병구가 청혼해온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고마와요, 고마와요. 서울공부한 의젓한 병구오빠를 받들어 이제부턴 더 부지런히 일하겠어요.)

그런데 고삼분의 심장속에 깊이 자리잡고 달빛 휘영청한 밤마다 그리움의 눈물로 베개잇을 적시군 하던 옛적의 병구오빠는 이미 딴사람이 되여왔었다. 그것을 고삼분은 결혼식 며칠후부터 느끼기 시작했다. 가세가 몰락한 집을 떠나 가시집살이를 시작한 서병구는 일은 하지 않고 종일 과수원그늘속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책을 벌컥거리거나 읍거리에 나가 술추렴을 하다가 고주망태가 되여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는 오직 한가지뿐이였다.

《돈을 벌어야 해, 돈을! 서울에선 부자들이 어떻게 떵떵거리며 사는지 알아? 봄이면 창경원의 벗꽃구경, 여름이면 한강에서의 꽃배놀이, 가을이면 유람렬차에 몸을 싣고 금강산구경… 헌데 여긴 뭐야. 소똥내나는 두엄무지와 철떡거리는 진창길밖에 더 있어? 아, 아버지가 강요하지만 않았어도 이 촌구석엔 처박히지 않는건데!》

공부깨나 했다고 우러러보았던 남편의 그 이지러진 탄식은 처음 고삼분을 놀래웠고 다음은 슬프게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억울함으로 몸부림치게 했다. 그가 자기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돈만을 사랑하고 승상한다는것이 명백했기때문이였다.

(내가 신세를 망쳤구나!)

불쌍한것은 고삼분뿐이였다. 차라리 남편에게 자유를 주어 멀리 서울로 되돌려보내고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기의 몸에 태기가 생겼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 애기에게 아버지가 없어서는 안되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한창 농번기여서 고양이손이라도 빌릴만큼 드바쁘던 5월 초닷새날 서병구는 밭두덩에서 풀을 뜯고있던 고씨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황소를 몰래 풀어가지고 어디론가 도망쳤던것이다. 소잃은 농군의 한스럼이야 어떻게 말로야 다 표현할수 있으랴. 고삼분의 아버지는 곰방대로 노전바닥을 내리쳤고 어머니는 애고데고 망할놈의 사위녀석 제명에 못 죽는다고 곡을 해댔다. 그러다가는 제 서방 하나 치마폭에 비끄러매놓지 못했다고 딸에게 역증을 냈다. 억울한건 고삼분뿐이였다. 부모들이 맺어준 혼사인데 그런 장돌뱅이같은 사람을 낸들 어찌란 말인가, 콱 죽기라도 했으면 이 역증 듣지도 않을게 아닌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눈에서 불똥이 일도록 성이 났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깟놈 나가길 잘했다고, 소는 아수하지만 그 꼴 보지 않으니 앓는 이 뽑힌것 같다고 고삼분을 위로했다. 어머니는 그길로 채뚝이란 채뚝은 샅샅이 뒤져 노란꽃이 닥지닥지 핀 풀뿌리를 캐가지고왔다. 그리고는 이름 모를 몇가지 풀을 섞어 약절구에 넣고 찧었다. 고삼분은 어머니가 무슨 바람에 저러는가 영문 모르고 지켜보았다. 밤새 꼬박 새우며 약을 달인 어머니는 날이 펀듯 밝자 부엌으로 딸을 불러내갔다. 그제서야 고삼분은 어머니가 내미는 쌉싸래한 냄새가 풍기는 한약 달인 물이 몸안에서 요동치는 태기를 떨구는 무서운 약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아 어머니, 이러지 말아요. 배속에 태기가 무슨 잘못이라고, 이러단 나까지 벌을 받아요. 난 마시지 못하겠어요.》

고삼분은 약사발을 부엌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이구 이 망할것아, 그 종자는 받아 뭘 하겠다고 야단질이냐. 네년이 환장을 해도 단단히 했구나. 아이구, 서씨집안덕에 고씨집안이 망하누나.》

어머니의 탄식과 함께 배속의 태기는 어느덧 자라 막달이 되였다.

고삼분은 집기둥을 뿌리채 뽑아낼듯 무섭게 번개가 치고 우뢰가 울던 칠월 장마달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서재필이였다. 서재필이 태여난지 한해가 지나 조국이 해방되였다.

그때부터 고삼분은 아들 하나를 믿고 한생을 살아왔다. 해방된 이듬해 서재필을 업고 나라에서 분여해주는 땅을 받았고 아장아장 채뚝길을 걷고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농사를 지어 나라에 애국미를 바쳤다.

고삼분은 아들을 기둥처럼 믿고 억척같이 일어나 전쟁도 이겨냈다. 전후 어렵던 시기 서재필은 아버지있는 아이들과 꼭같이 책보를 둘러메고 학교에 다녔다. 철들어 가끔 가다 아버지는 어디 갔는가고 묻는 아들애앞에 고삼분은 한숨을 내그으며 도리머리를 젓군 했다.

언제인가 이웃집녀인이 자기 아이와 싸웠다고 서재필을 보고 아버지없는 후레자식이라고 욕한적이 있었다. 평소에 사슴처럼 어진 두눈을 늘 죄송스레 내리뜨고 다니던 고삼분은 그 두눈에 불똥을 켜달고 그집 녀인과 대들이판 싸웠다. 서재필은 처음으로 어머니의 무서운 얼굴을 보았다.

그날 고삼분은 이불깃속에 얼굴을 묻고 밤새 흐느꼈다. 그는 철없는 아들에게 입에조차 올리기 싫은 아버지의 과거사를 이야기해줄수가 없었다.

서재필이 고중에 입학할 때 그의 집에는 경사가 생겼다. 새로 조직된 리당위원회에서는 전사자가족인 영수네와 꼭같이 어버이수령님의 존귀하신 초상화를 집 정면벽에 정중히 모셔주었던것이다. 전쟁시기 원쑤놈들과 싸우다 한쪽다리에 부상을 입은 리당위원장은 서글서글한게 사람이 참 좋았다. 그는 고삼분의 손을 잡고 《장군님만 믿고살면 우린 잘살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삼분은 서재필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어놓고 어버이수령님의 초상화를 우러르며 눈굽을 적시였다. 늘 아버지없는 아들로 하여 가슴속에 꽉 찼던 서러움의 눈물이 온통 밖으로 쏟아져나가는 순간이였다.

그날 저녁 고삼분은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과 함께 새옷을 갈아입고 어버이수령님의 초상화앞에 정중히 섰다. 그들은 깊이 머리숙여 인사를 올렸다. 고삼분은 그날 아들애의 작은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인생의 철리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찾아 떼질하던 아들애의 작은 가슴에 아버지없는 설음대신 기쁨과 환희를 안겨주었다.

《재필아, 잘 봐라. 이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기쁠 때나 외로울 때나 마음속에 장군님만 계시면 너는 행복해질게다.》

고삼분은 아버지없이 자란 아들과 더불어 우리 운명의 친근한 어버이를 모시게 된 기쁨으로 하여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서재필이 고중을 졸업하고 북창화력발전소건설장에 로동의 첫발을 내디딜 때 고삼분은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는 아들의 두손을 꼭잡고 지금껏 묻어두고있었던 안해와 자식에게 남긴것이란 짚검불도 없는 아버지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해주었다.

《재필아, 이 에미가 네곁에 없다고 외로와하지 말고 우리 운명을 지켜주시는 어버이수령님께 이 에미의 몫까지 합쳐 충정을 다하거라!》

고삼분은 이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마지막유언은 아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서재필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비서동지, 내 이제는 나이 륙십을 넘겼소만 지나온 생활을 돌이켜보면 누구에게라없이 떳떳하게 자랑할만 한 일을 한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추석날이면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가군 하는데 갈적마다 생각되는게 많습니다. 그게 뭔고 하니 사람이 한생을 후회없이 산다는게 조련치 않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한해, 두해 나이는 먹어가니 육체도 딸리지, 그저 욕망뿐이니… 젊었을적엔 뭘하고 이제 와서 후회만 하니 참.… 젊은 시절엔 기술이 있다고 으쓱해 그 대우를 안해준다고 잔뜩 볼이 부어가지고 다녔고… 돌이켜보면 얼굴이 뜨겁습니다.

말이 난김에 이야기하오만 우리 봉철이가 중학교 1학년때라고 기억됩니다.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녀석이 볼이 잔뜩 부어가지고 나에게 묻질 않겠습니까.

〈아버지, 우리 집에서는 왜 기념사진을 모시지 못했나요. 씨, 난 뭘가지고 아버지자랑을 해야 하나요?〉

난 아들의 절절한 물음에 선뜻 대답을 줄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아들이 자기 동무네 집에 갔다가 그 집 벽에 모셔진 발전소조업식장에 나오시여 건설자들과 함께 찍으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어린 기념사진을 보고 온 모양입니다. 녀석도 제 아버지가 발전소건설초기부터 용접공으로 일했다는것을 알고 묻는 말이였습니다.

웬일로인지 그 물음에 밸이 울컥 치밀어오르더군요. 그래 결김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녀석아, 그래도 아버진 화력발전소적으로 1등가는 특수용접공이다. 이 아버지의 손끝으로 때붙인 저 수만메터의 증기관으로 증기가 흐르고 그 증기로 전기가 생산되여나온단 말이다. 그래 아버지자랑할게 어디 그뿐인줄 아니? 이 아버지가 지금껏 녹여낸 용접봉을 모으면 집채만큼은 될게다. 그래도 아버지자랑할게 없어? 이 망할 자식!〉

그리고는 화풀이로 아들녀석을 쥐여박았수다. 아마 아팠을거우다. 엉엉 소리내여 우는 아들을 보니 속이 내려가지 않더군요. 글쎄 철없는 자식의 순진한 물음에 화풀이를 했으니… 난 그날 밤새 울었수다.

비서동지, 솔직한 심정이지만 발전소조업식에 참가하지 못한 일이 서분해 울었고 또 아들애앞에 아버지구실을 못한 자책감때문에 울었구요.

그날에 흘린 이 아버지의 눈물의 무게를 아들이 가늠했는가봅니다. 아들은 부대에 찾아오신 경애하는 장군님께 자기들의 훈련모습을 보여드렸고 또 그이를 모시고 기념사진까지 찍는 영광을 지녔던것입니다. 난 내가 이루지 못한 소원을 아들이 이루었다는 마음속 위안을 가지고 년로보장을 받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실 손에 낚시대가 드리워졌지만 마음은 늘 화력발전소에 가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비서동지의 뜨거운 동지적사랑과 인정에 이끌려 다시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게 되였으니… 고맙습니다, 비서동지, 이거 주책없이 쓸소리, 못 쓸소리 막해 미안합니다.》

서재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는 마음속에 꽁꽁 묻어두었던 하많은 사연을 죄다 털어놓아 마음이 개운해졌는지 얼굴색도 한결 밝아졌다. 서재필은 이제는 더 무엇을 알고싶은가 묻는듯 한 눈길로 리성복을 바라보았다.

리성복도 생각깊은 눈길로 서재필을 마주보았다. 그는 서재필이 진정으로 고마왔다. 서재필은 마음속에 이끼가 덮이고 또 뽀얗게 곰팡이가 끼도록 그 누구에게도 터놓지 않은 사실을 당비서인 자기에게만은 속속들이 다 터놓은것이였다. 감동이 컸다. 다만 서재필의 그 마음속 소원을 풀어주지 못하는것이 안타까왔다.

화력발전소건설 당시부터 일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기 집에 조업식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찍은 기념사진을 가보처럼 모시고있다. 허나 유독 서재필의 집에만은 그 기념사진이 없다.

리성복은 처음 서재필의 집을 찾아갔을 때에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아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려 했었다. 그러다 좋은 일도 아닌 질문으로 누구보다 노여움을 잘 타는 서재필에게서 감정을 살것만 같아 그만 두고말았다.

(어째서 서재필이 그 영광의 자리에 자신을 세울수 없었을가? 그가 한생을 이 순간을 바라고 살았대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소원이 클진대…)

이제는 그것을 알아볼 때도 되였다고 생각한 리성복은 조심스레 물었다.

《서동무는 이 발전소건설에 처음부터 참가한 사람인데 조업식에 왜 참가 못했습니까?》

《비서동지, 그 일이 이제는 먼 옛날 일이 되였습니다. 이제 더 입에 올려 뭘하겠습니까.》

서재필은 쉬이 당비서의 의문을 풀어줄 잡도리가 아니였다.

《뭘 주저합니까?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리성복은 거의 간청하다싶이 재촉했다. 바로 거기에 서재필에게 한생 얹혀있던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줄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기때문이였다. 그래 주저없이 육박해들어갔던것이다.

서재필의 얼굴에 동요하는 빛이 비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울대뼈를 몇번 꿈틀거리더니 승수관의 증기와 같은 단김을 헉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좋수다. 기왕 터진김에 말합시다. 실은 이렇게 된겁니다. 발전소조업식을 앞둔 어느날 대안중기계공장에 가서 변압기를 해체해올 과업을 받고 나와 몇몇 기능공들이 이동작업을 나갔었습니다. 책임은 금방 기술발전과장으로 임명된 지용수가 졌지요. 일이 거지반 끝나갈무렵 기술과장은 나에게 혼자 떨어져 미진된 용접작업을 마저 할데 대한 과업을 주고 전원 다 데리고 공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수걱수걱 용접을 했습니다.

그들이 떠나간지 3일만에 난 방송으로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우리 발전소조업식장에 나오시여 발전소건설자들과 함께 사랑의 기념사진까지 찍어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습니다. 그때 저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저 발전소쪽을 향해 울면서 정신없이 막 달려가던 기억만 납니다.》

서재필은 목이 꺽 막혀오는지 아니면 눈안에서 서물서물 눈물이 고여났는지 중도에서 말을 끊었다. 그날 돌부리에 채우면서 실성한 사람마냥 달리던 일이 삼삼히 떠올라서인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리성복도 서재필의 심정을 충분히 꿰뚫어서인지 얼어붙은듯 한자리에 못박혀있었다.

잠시 격동된 가슴을 진정시키고난 서재필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일로 지용수국장과는 서로 량립될수 없는 그런 관계로 되여버렸지요. 다 제 속이 옹졸한때문이겠지요. 흔히 사람들은 일이 잘되면 제탓이고 안되면 조상을 탓하지 않습니까. 나야 아버지복이 없는 사람인데…》

리성복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격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럼 지용수는 동무를 떨구어두고 철수할 때 조업식행사가 진행된다는것을 알았겠습니다?》

《예, 알았는가 봅디다. 아마 그 사람생각엔 이 서재필이 그런 영광의 자리에는 설수 없는 놈으로 보였던게지요. 휴-》

서재필은 꺼질듯 한숨을 내그었다. 이 순간 그보다 더 가슴아프고 분격한것은 리성복이였다.

(지용수! 네가 그런 인간이였단 말인가? 넌 한 인간의 가슴에 칼을 박았다. 그러고도 뭐가 어쨌다구?)

리성복은 그의 인간됨이 이렇게 용렬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용수에 대한 배신감과 험오감이 커갈수록 서재필의 인간상은 더 아득히 높아보였다. 그는 오래동안 화력발전소에서 당비서로 사업하면서 한 평범한 로동자의 마음속에 이런 가슴아픈 사연이 있는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자신이 뼈를 부시고싶도록 미워났다. 리성복은 서재필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서동무, 이젠 알겠습니다. 지용수가 내 친구라고 말하기 힘들어했었지요? 그 친구를 대신하여 사죄합니다.》

서재필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이젠 지나간 일인데… 좋은 일도 기억하기 힘든데 그런 일이야 잊는게 상책이지요. 저도 잊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

서재필은 대답이 궁한지 침묵을 지켰다. 필시 지용수의 친구인 당비서를 위하느라 속에 없는 빈말을 한것이 무안했던 모양이였다. 그가 어떻게 한생의 소원이 묵살된 그 일을 잊을수 있으랴. 자다가도 그 일만 생각키우면 벌떡 일어나 식은땀을 흘릴지 모른다.

아닌게아니라 서재필은 마침내 견디기 힘들었는지 솔직히 고백했다.

《제가 그걸 잊기야 어떻게 잊었겠습니까. 그저 지나간 일이구 내 개인의 한이니 속에 묻어두는게 상책이라고 여겼을뿐이지요.》

그 모진 결심을 하고도 얼마나 괴로왔으랴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으나 리성복은 그의 가식없는 순수한 마음을 긍정해주고싶어 위로하듯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걸 잊는가 못 잊는가 하는것은 서동무의 결심에 달린거지요. 내 어느 책에선가 보니 사람은 뒤를 돌아보며 울기보다는 앞을 내다보며 웃으라는 말이 있더군요. 서동무, 우리 좋은 일만 생각합시다.》

《뒤를 돌아보며 울기보다는 앞을 내다보며 웃으라. 참 일리가 있는 뜻이 깊은 말이라고봅니다.》

서재필은 당비서의 말을 가슴속에 깊이 새기려는듯 뜨겁게 되뇌이였다. 수십년세월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해묵은 감정을 여느 사람도 아닌 당비서에게 죄다 털어놓으니 사포솔을 마셨을 때처럼 가슴이 시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속에 괴로움이 있으면 당일군을 찾아 가는것이라고 서재필은 생각하였다.

《오, 그렇지. 내 서동무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낮에 열린 초급당위원회에서는 서동무를 2호발전기복구를 위한 책임용접공으로 선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서재필은 숙였던 얼굴을 펀뜩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재삼 확인하는듯 한 거의 애원에 가까운 눈빛이였다. 리성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도 됩니다!》

명인국과 론의가 있은 후 리성복은 즉시 초급당위원회를 열고 서재필을 책임용접공으로, 서봉철을 보조용접공으로 추천하자는 제의를 내놓아 회의참가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찬동을 받았던것이다.

서재필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갑자기 헉 느끼며 리성복의 손을 부둥켜잡고 목메여 부르짖었다.

《고맙습니다. 비서동지, 내 이 한몸이 용접물이 되여서라도 회전자축을 꼭 살려내겠습니다!》

《서동무!》

두사람은 뜨겁게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그 손길을 타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열렬하고 가장 헌신적인 사랑과 믿음의 감정이 혈맥처럼 찌르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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