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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8 회


제4장. 믿음


9


2008년 7월 X일

오늘 아침 지배인오빠에게서 영재동무가 마지막붕대를 풀어버리고 드디여 앞을 보게 되였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나 고대하던 소식이였던가!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린다.

나는 외진 곳에 가앉아 몰래 소리없이 울었다. 마음같아선 한달음에 달려가고싶다. 나를 알아보고 기쁨에 겨워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싶다.

그의 티없이 맑은 눈을 오래오래 들여다보고싶다. 영재동무에게 각막이식수술을 해준 고마운 의사선생들과 간호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싶다.…

그러나 지금은 안된다.

영재동무의 몫까지 합쳐 뛰여야 할 나다. 어쨌든 떳떳이 만날 그날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땀을 흘리자!

오늘은 앞으로 내가 일할 전기로조종실축조작업을 하였다.

모든 동무들이 등에 소형블로크를 량껏 지고 운반했다. 걷는것이 성차지 않아 막 뛰여다닌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려 눈이 알알해도 씻을새 없이 일했다. 자리가 푹푹 났다. 벽체가 쑥쑥 올라갔다.

짧은 휴식시간에도 어떤 동무들은 간식을 먹으면서 끄덕끄덕 졸았다.

그중에는 해군제대군인인 리철호동무도 있다. 그는 미배치기간이기에 전기로건설을 도우러 나왔다고 했다. 그는 딴 동무들보다 블로크를 두장씩 더 지고다닌다. 다른 때 같으면 졸고있는 그를 보고 술먹은 닭같다고 놀려주었으련만 오늘은 가슴이 뭉클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래도 일어서기만 하면 언제 졸았던가싶게 펄펄 뛰여다닌다.

다른쪽에서는 우리가 이미 쳐놓은 기초우에 전기로동체의 조립이 끝나가고있다. 든든한 기초우에 덩실하게 올라앉은 새 전기로를 보느라니 문득 자기를 해체하는 사람들에게 내게 무슨 잘못이 있어 그러느냐 하듯 말썽을 부리던 옛 전기로가 떠오른다.

멀끔한 멋쟁이처럼 의젓하게 앉아있는 새 전기로가 나를 보고 《안녕하오, 처녀동무!》하고 반갑게 웃는것 같았다.

《초고전력전기로야! 난 조작공 강선희야. 이렇게 새로 만나게 되니 반가워!》

나의 말에 전기로는 《내가 정말 멋쟁이지요?》라고 하며 자기를 뽐내는듯 하였다.

《그전 전기로는 전극때문에 나를 무던히도 울렸단다. 너는 그러지 않겠지?…》

《난 겉만 아니라 속도 멋쟁이라오. 이제 일해보면 알게 될게요. 언제면 우리와 함께 강철을 녹이게 되오?》

《이제 멀지 않았어, 9. 9절에!》

나는 즐거운 환상에서 깨여났다. 하루라도 그날을 앞당기고싶어 남먼저 일어나 블로크를 날랐다.


2008년 7월 X일

아침에 까치가 깍깍 울더니 영재동무한테서 회답이 왔다. 붕대를 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차 편지를 보냈는데…

설겆이를 하던 어머니가 미소를 띄우며 《영재의 편지냐?》하고 물었다. 이미전부터 우리 일에 대해 깊이 마음써오시던 어머니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였다.

우편통신원아주머니도 기쁜지 나를 보며 웃는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초고전력전기로건설은 온 강선사람들 아니, 전국의 관심사로 되여있는 일이고 영재동무의 장거는 그들의 화제거리로 되고있는데야…

나는 차마 편지를 뜯을수 없었다. 행복스러운 순간을 오래오래 간직하고싶었다. 어머니도 리해하시는것 같았다. 나는 작업복안주머니에 편지를 정히 넣고 출근했다. 우리는 요즘 교대작업을 한다. 영재동무와 함께 작업장에 나가는 심정이여서인지 발걸음도 가벼웠다.

여전히 축조작업이다. 하루종일 블로크, 세멘트를 나르고 모래도 날랐다.

나는 영재동무의 몫까지 하려고 노력했다. 힘든줄 몰랐다. 노상 웃으며 사기가 나서 일했더니 동무들도 이상한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바라본다.

련심이가 옆에 딱 붙어다니며 놀려주었다.

《영재동지한테서 소식이 온 모양이지요?》

나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따금 개봉하고싶은 생각이 불쑥 나 꺼내보려 했지만 참았다. 저녁에 집에 가서 마음껏 대화를 나누리라! 나는 이렇게 영재동무와 함께 일했고 저녁에 함께 퇴근했다.

나는 지금 영재동무의 편지를 읽고 또 읽는다. 한글자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고싶다.…

영재동무는 나에게 사랑이 넘치는 편지를 보내여왔다. 아니, 편지가 아니였다. 활활 불타는 심장을 봉투속에 넣어보냈다. 봉투를 태우지 못한 그 불길은 그속에서 튀여나와 나의 온몸을 태웠다. 뜨겁게 뜨겁게…

나는 헤여져있는 짧은 기간이지만 쇠물노을처럼 멀리서 타오르는 그 불길을 이미 느끼고있었다. 그의 곁에서 뜨거운 사랑의 불길에 지치고 얼어붙었던 마음을 말끔히 녹이고싶다.

수술후과는 좋고 얼굴에 난 화상자리만 나으면 퇴원한다고 했다. 영재동무가 강선으로 오게 되는 날은 언제일가?

과연 우리의 상봉은 어떻게 이루어질가?…

그와 만나는 순간을 아무리 상상해보려고 애써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2008년 8월 X일

밤새껏 조종실층막타입작업을 하고 아침에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마당에 있는 참살구가 다 익은것 같은데 따야겠다고 말씀하신다. 아침밥을 먹고 마당에 나가보니 정말 금빛나는 살구알들이 푸른 잎사이로 주렁주렁 내려다보고있다. 그전같으면 영재동무가 와서 따주었겠는데…

나는 살구나무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한알두알 살구를 땄다. 떨어진 살구는 철이가 주어서 모은다. 입에도 넣고 주머니에도 넣으며 좋아한다.

내 마음도 즐거웠다.

봄내, 여름내 물을 주고 거름을 묻어주며 정성껏 가꾼 보람이 느껴진다.

전기로건설에서 우리가 흘린 땀방울들이 이 살구처럼 훌륭한 결실로 맺어지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따고따고 또 따서 작은 비닐구럭지에 담았다. 구럭지에 다 차면 어머니에게 내려보내주었다. 이렇게 몇번 하고나니 열키로가 남는것 같다.

노랗고 발깃한 참살구는 보기만 해도 입에서 신물이 돌았다. 철이는 너무 좋아 깡충깡충 뛴다. 호주머니에서 살구가 튕겨나오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고는 또 먹는다. 너무 많이 먹으면 체기받는다고 할머니가 말하자 이번에는 돌을 찾아들고 씨를 까먹기 시작한다. 아마도 씨를 먹으면 아무 탈 없다는 말을 어디서 들어 아는 모양이다. 나는 너무 우스워 철이가 하는양을 한참 바라보다가 맛있게 생긴 살구 몇알을 골라 어머니에게 드렸다.

나도 먹으려고 손에 골라쥐였다. 그러나 먹을수가 없었다.

살구를 보면 아이들처럼 좋아하던 영재동무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쑥 며칠전에 받은 편지구절들이 생각나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가 몹시 그리워진다. 이제 남은 살구가 다 익을 때엔 영재동무가 오겠는지, 어머니도 나의 마음을 읽으신듯 몇알 안 들고 손을 놓는다.

살구를 몹시 좋아하시는데…

저녁에 밤일을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낮에 딴 살구를 모두 큰 비닐구럭에 담아내놓는다.

《얼마 안되지만 첫물살구인데 돌격대원들에게 먼저 맛보여라!》

기뻤다.

《우리 어머니가 제일이야!》

나는 웃으며 다가가 어머니의 주름있는 볼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내가 묵직한 살구구럭을 들고 나가려는데 웃방에서 놀고있던 철이가 매달리며 칭얼거린다.

《살구 다 가져가지 말라. 힝, 나 살구.》

내가 갈라주려고 하자 어머니가 소리쳤다.

《그냥 가져가거라, 얼마 안되는데. 얘 철이야, 저 살구는 전기로건설하는 돌격대아저씨들에게 가져가는거란다!》

그러자 철이는 잡았던 구럭을 놓고 슬며시 물러선다.

《그럼 난 안 먹을래.》

어머니가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철이가 용타, 이제 익으면 또 따서 철이에게 많이 주마.》 철이가 도리머리질을 한다.

《싫어- 싫어- 돌격대아저씨들한테 다 주라요!》

그러는 철이를 보느라니 가슴이 다 뭉클했다. 살구를 중대동무들에게 내놓으니 모두가 어찌도 좋아하던지… 특히 처녀들이 더 좋아했다.

누구인가 롱담을 했다.

《처녀들이 살구를 좋아하는걸 보니 이상하다.》

《왜요?》

《시큼한 살구는 애기 가진 녀자들이…》

《아유!-》

처녀들이 달려들어 종주먹으로 그의 실팍한 어깨를 때려주었다. 와- 웃음판이 터졌다. 우리 중대는 오늘 조종실층막타입을 다른 중대보다 먼저 끝내고 2층 축조에 들어갔다.


2008년 8월 X일

오늘 아침 나는 출근길에 영재동무가 눈을 뜬 소식을 알려주려고 설계실에 제일동무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리규택아바이에게 물어보니 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한다. 전극자동승강장치설계를 기어이 완성해놓고 끝내 쓰러졌다는것이다.

영재동무한테 면회가던 날 설계걱정은 하지 말고 치료를 잘하라고 하던 그의 병색짙은 모습이 떠올라 눈굽이 젖어들었다.

리규택아바이는 영재동무의 병세가 어떤가고 물었다. 붕대를 풀고 눈을 보게 되였다는 말을 듣자 몹시 기뻐했다. 그러면서 제일동무도 이제 치료를 잘 받으면 인차 회복될것이라고 확신에 겨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런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병마를 이기고 다시 일어서 대지를 활보할것이라고…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몫은 하나 더 늘어났다. 제일동무의 몫까지…

현장에 도착하니 또 놀라운 일이 나를 기다렸다. 제대군인이라고 했던 리철호동무가 해군복에 검은 댕기를 날리며 나타난것이다. 휴가온 병사라면 받아줄것 같지 않아 그랬다며 오늘은 부대로 떠난다는것이다.

열흘남짓한 짧은 기간이지만 보람찬 로동속에서 정이 든 그와 헤여진다니 서운하기 그지없다. 나를 누이라고 따르던 그가 휴가군인이였단 말인가!

《누이, 그럼 조업하는 그날까지 건강하여 일을 잘해주십시오. 신문지상에서 누이의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렇게 떠나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구만요!》

나는 눈굽이 뜨거워졌다.

《걱정말아요. 철호동무의 몫까지 다하겠으니…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하였는데 우린 동무에게 아무것도 줄것이 없군요.》

다른 동무들의 생각도 나와 같았으리라 믿는다.

《별말을 다. 제가 누님에게서 아니, 돌격대원들에게서 진정으로 바라고싶은 가장 큰것이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초고전력전기로에서 첫 쇠물을 뽑고 우리의 최고사령관 김정일장군님께 기쁨의 보고를 드렸다는 그 소식입니다!》

《!…》

우리들은 열렬한 박수로 대답하였다.

이렇게 철호동무는 떠나갔다. 귀중한 부탁을 우리에게 남겨두고…

우리는 그 부탁을 꼭 실행할것이다.

그날 중대는 2일동안 계획했던 변압기실기초타입을 밤늦게까지 해제끼고야 손을 뗐다.


2008년 8월 X일

오늘은 조종실안팎을 미장했다. 앞으로 내가 일할 조종실이여서 그런지 별로 관심이 가고 더 잘했으면 하는 심정이다. 그래서 미장칼을 직접 쥔 조인철동무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했다. 그는 오늘따라 웬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웃었다. 만년대계창조물인데 정보산업시대의 요구에 맞게 미끈하게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했다.

그러자 조인철동무는 빙긋 웃으며 《선희동무가 발전했는데…》라고 하였다.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나는 초고전력전기로를 건설하는 길지 않은 나날에 몸도 마음도 퍼그나 자란것 같다. 평범한 나날에는 체험해보지 못했을 고난과 의지, 참된 동지적우정과 사랑, 창조자의 희열을 체험해보았다.

나는 어쩐지 자신이 나이보다 퍽 숙성한 처녀처럼 느껴진다.

한참 몰탈을 이기고 떠주며 미장조력을 하고있는데 누구인가 나를 찬찬히 바라보는듯 한 촉감이 들었다. 왜서인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피끗 머리를 돌리던 나는 깜짝 놀라 쥐고있던 삽을 떨구었다.

박영재동무가 조종실나들문에 서있는것이 아닌가! 나는 환각이 아닌가 해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분명하였다.

그는 나를 보며 빙긋이 웃는다. 분명 나를 알아보고있었다. 얼마나 그립고 보고싶던 그였던가. 이제 만나기만 하면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리라 생각해온 나였다.

나는 그가 나에게로 오다가 넘어지기라도 할것 같은 착각이 들어 급히 마주가려고 했다. 그 순간 조인철동무가 벼락같이 먼저 달려가 그를 번쩍 끌어안고 빙빙 돌아갔다. 그들의 상봉은 열렬했다.

한동안 두서없이 말을 나누던 인철동무가 얼핏 나를 쳐다보았다.

《선희동무, 용서하오. 내가 먼저 독차지해서. 자, 이젠 통채로 맡기겠으니 마음대로 처리하오, 하하.》

영재동무는 상처자리가 불깃한 채 아물지 않은 얼굴이지만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서인지 눈물이 왈칵 나서 나는 얼른 돌아서고말았다.

인철동무랑 중대동무들이 내 잔등을 떠밀어서야 나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조용한 구내도서실마당의 나무그늘밑으로 갔다.

이제 만나는 날, 그동안 하지 못한 말을 하고 또 하리라 벼르고 별러왔지만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정겹게 마주보기만 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불타는듯 했다. 그 불타는 눈동자에서 힘찬 사랑의 목소리가 울려나오며 내 마음의 예민한 금선을 은근히 울려주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간직된, 아직 그 누구도 울려보지 못한 사랑의 선률이였다. 조용히 울리기 시작한 사랑의 노래는 점점 공명되면서 나의 심장을 걷잡을수 없게 뒤흔들어놓았다.

우리는 마주보는 눈빛에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선희, 못 견디게 보고싶었소!)

(나도 그리웠어요!)

(그동안 큰일을 많이도 했구만!)

(거기엔 영재동무의 희생적인 공로도 스며있어요.)

(그게 무슨 공로겠소. 이제부터라도 힘껏 일해보겠소!)

우리의 말없는 대화는 끝이 없을것 같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먼저 입을 뗐다.

《얼굴의 상처랑, 눈이 아프지 않아요?》

애써 진정하느라 했지만 나의 목소리는 왜서인지 떨리였다.

《이젠 많이 나아졌소. 그런데 내 얼굴에 난 허물이 보기 싫지 않소?》

영재동무는 그것을 몹시 생각하고있은 모양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웃으며 말했다.

《눈을 감으세요.》

그는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주변을 얼핏 살피고나서 발뒤축을 쳐들었다. 그리고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그의 얼굴에, 아직 채 아물지 않은 그 상처자리에 재빨리 볼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도망쳤다. 저녁에 다시 만나자는 그의 정겨운 목소리를 뒤에 남겨놓고…

비록 얼굴에는 화상의 허물이 남아있지만 나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라고 생각한다, 나같은건 그의 발치에도 못 가는.

나는 그와 함께라면 그가 위구하는 그 싫증을 느끼지 않을것이다.

가슴속에 맥박치는 심장의 고동에 싫증이 나지 않는것처럼…

내가 그리도 그려보며 상상하던 우리의 상봉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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