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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회


제 3 장


마음속의 빛은 밝다


7


성에서 조직한 기술협의회에 다시 참가하여 자기의 이름석자를 어마어마한 수표란에 적어넣은 다음부터 서재필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감에 잠을 이를수 없었다. 사실 그는 기술협의회장에 엉치를 눌러붙이고 앉아있었을뿐이지 용접안의 과학적담보를 위한 토의에서는 한마디 발언도 못했다. 기술발전부기사장이나 연구소 박사선생들이 열기띠게 토론하는 과학적술어라든지 또 콤퓨터화면에 펼쳐지는 각이한 수값들과 각종 형태의 모형들을 보고 리해할수가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용접기능공이였다. 사실 이번 협의회는 참가하지 않으려 했었다. 첫번째 협의회때는 용접의 방안을 내놓은 당사자로 공장에 입직하지 않은 상태에서 당비서가 보내준 차를 타고 어쩔수 없이 참가했던것이다. 두번째로 참가해서도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있으려고 했던것이 지용수국장의 노는 꼴이 눈에 거슬려 맞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속은 후련했으나 한켠으로는 후회도 없지 않았다. 지용수는 성의 국장이고 자기는 년로보장자에 불과하다. 그 격차로 말한다면 하늘과 땅차이다. 협의회에 숱한 간부들이 참가했었는데 그 사람들이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어도 뒤에 가서는 우아래턱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을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옹송그려지기까지 했다.

서재필은 이번 협의회에 참가해서는 어떤 경우라도 죽었소 하고 입을 다물자고 결심했는데 다행히도 지용수국장은 내려오지 않았다.

협의회가 끝나갈 무렵 용접안의 과학적담보를 위한 문건에 수표들을 진행했다. 마지막차례로 부국장이 서재필을 불렀다.

《서재필아바이도 나와 수표하십시오.》

서재필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망두석처럼 떡 굳어져 움직일줄 몰랐다. 그는 난생처음 문건에 수표를 해본다. 그것도 화력발전소적으로 세사람밖에 하지 못하는 수표를 한갖 용접공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속이 떨려났다.

그때 기술발전부기사장이 서재필에게 힘을 주었다.

《아바이, 너무 심각해하지 마십시오. 용접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지 않았습니까. 어서 수표하십시오.》

서재필은 어떻게 앞으로 나갔는지 그리고 부국장이 쥐여준 펜을 어떻게 받았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한자두자 정으로 쪼아박듯 수표란에 이름석자를 적어넣었다는 기억뿐이였다.

협의회가 끝난 후 그는 맨 마지막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3시간이 넘도록 오금을 꺾고 앉아있어서인지 무릎이 아파났다. 한뉘 로동을 한 그가 오래동안 걸상에 앉아있자니 엉친들 오죽했으랴. 하지만 자기가 국가적의의를 가지는 문건에 수표했다는 흥분은 그를 구름우에 붕 띄워놓는 한편 이제는 발전소의 운명이 자기 손에 달려있다는 두렵고도 아름찬 자각과 책임감으로 심장을 무섭게 고동치게 만들었다.

기사장방을 나서는 그에게 부국장은 국장이 보낸다는 한통의 편지를 넘겨주었다. 그의 마음은 조급함과 긴장감으로 높뛰였다. 편지에 대한 의문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국장이 무슨 연고로 편지를 써보냈을가? 그때 협의회에서 당한 모욕에 대한 분풀이일가? 아니, 그 일로 편지까지 써보낼 용렬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내용일가?)

꼭 주머니속에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탄을 넣어둔 심정이였다. 그는 몇번이나 편지를 뜯어보려고 했다가는 다시 주머니속에 넣었다. 장소가 적합치 않았다. 두루두루 생각던 끝에 공장후문쪽에 있는 소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는 점심시간이여서 소공원은 인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서재필은 버드나무앞에 이르러 황황히 편지를 뜯었다. 대뜸 고르지 못한 필체가 눈을 찌르듯이 안겨들었다.

《…서동무, 난 협의회때의 불쾌했던 감정을 잊은지 오래오. 그러니 그 감정으로 편지를 쓴다고는 생각지 마오. 난 더이상 영천화력발전소 일에 감놔라, 배놔라 할 생각은 없소. 그러니 안심해도 되겠소.

내 말하자는 내용은 이제부터요. 서동무도 알고있겠지만 그 집 아들과 내 딸이 그 무슨 기계제작인가 함께 하면서 서로 좋아한다는 말이 나던데… 들려오는 말은 동무의 생일날 집에 데려가기까지 했다더군. 그건 좋고. 하지만 난 두 집이 자식들때문에 얼굴을 붉히지 말기를 바라오.

우리 딸은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으니 동무 아들은 동무가 책임져야겠소. 만약 그 집 아들이 우리 딸을 그 어떤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면 오산이요. 장차 두 집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서로가 잘 조처하기를 바라오.

안됐소. 나도 딸문제가 아니면 동무한테 구태여 이런 편지놀음을 할 생각이 없었소. 그럼 이만 쓰겠소. 지용수.》

서재필은 구멍뚫을듯 편지에 눈을 박고있었다. 머리가 휘 도는것 같았다. 지용수는 편지의 글줄마다에 묘하게 도금칠한 표현들로 서재필과 자기와의 하늘땅같은 차이를 암시하고 경거망동하지 말것을 강박했다. 그런것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지용수의 딸과 자기 아들이 사랑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그러니 우리 봉철이가 생일날 데려왔던 그 처녀가 지용수의 딸이였단 말인가?)

그는 지용수보다도 아들녀석이 더 미워났다.

《시러베같은 자식!》

저도 모르게 튀여나온 이 말은 그의 속을 더 불끈해나게 만들었다. 서재필에게는 로친 못지 않게 아들 잘 둔 긍지감이 하늘처럼 높았다. 그런 훌륭한 아들이 생각지도 않은 처녀때문에 험담투성이가 된다고 생각하니 분기가 치밀어 견딜수가 없었다.

편지를 와락와락 찢어버리려던 서재필은 아들녀석을 홍달구려면 물적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여 그 역스러운 편지를 주머니에 도로 구겨넣었다. 꼭 깨끗한 구럭에 오물을 집어넣는 심정이였다. 서재필은 저녁에 아들이 들어오면 단단히 신칙하리라 마음먹었다.


동암산마루에 저녁노을이 곱게 물들무렵이였다. 서봉철과 지련희는 함께 영천기계공장정문을 나섰다. 용접봉심선절단기설계는 이미 완성되여 자력갱생직장에 넘어갔다. 했지만 그들은 절단기의 칼날각도가 아무래도 미타했다. 그전 설계에 비해 완성되였다고 할 정도로 훌륭했지만 그래도 리상적이라고 할수는 없었다.

봉철과 련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영천기계공장에 찾아가 두시간이나 용접봉심선절단기의 작업모습을 지켜보며 끝내는 리상적인 칼날각도를 찾아냈다. 그들은 서로의 지혜를 합쳐 용접봉심선절단기의 칼날각도를 3도 22분으로 락착지었다. 그렇게 되면 용접봉심선의 변형을 최대한 줄일수 있고 본래의 전동기보다 키로수가 낮은 전동기를 쓸수 있어 경제적효과성도 컸다.

용접봉심선절단기제작은 시간문제였다. 두사람의 노력으로 기계제작에 필요한 자재도 충분히 마련되였다. 이제 용접봉심선절단기가 완성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두 청춘남녀의 넋이 슴배고 사랑이 깃든 열정의 산물일것이였다.

그들은 영천시내를 나란히 걸었다. 봉철은 자전거를 끌었고 련희는 그옆에 바투 붙어 보폭을 맞추었다. 그러느라니 련희와 처음 만나던 때 일이 즐겁게 련상되였다. 서로가 생면부지였지만 연분이런듯 얼마나 자연스럽게 어울렸던가. 그것도 진정 빛이 그리워 숨막힐듯 환희에 넘쳐 고향으로 찾아오는 처녀의 짐을 자전거에 싣고 함께 걸어왔다면 오늘은 마음속에 하고싶은 말 가득 채워놓고 그 처녀와 다정히 걷고있다. 련희도 고개를 살풋이 숙인채 볼수록 믿음이 가는 열정에 충만된 청년과 호흡도 보폭도 맞추며 걷고있다.

《련희, 무슨 생각을 하오?》

련희의 침묵이 이상스러웠던지 봉철이 친근하게 물었다. 련희는 고개를 들며 애써 자연스럽게 말했다.

《아니예요, 아무 생각도 안했어요.》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생각도 이만저만한 생각이 아니였다. 지금 련희의 마음속엔 남몰래 묻어둔 고민덩어리가 꿈틀꿈틀 요동치고있었다. 그 고민덩어리는 봉철의 일로 빚어진것이였다.

발전소로 기술협의회에 참가하러 내려왔던 아버지는 평양으로 올라가면서 련희에게 심중해서 물었었다.

《련희야, 너와 함께 용접봉심선절단기를 제작하는 그 청년 말이다. 이름이 뭐랬더라?…》

련희 보건대 아버지는 자기들의 관계를 이미 누구에게선가 들은것 같았다. 필경 이름도 알고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이야기화제를 자연스럽게 끌어갈 목적에서 짐짓 묻는것이 틀림없었다.

《서봉철동무라고 특수용접작업반에서 일해요.》

《음, 사람이 어떠냐?》

말은 심상하게 하는것 같았지만 련희는 아버지의 시선이 긴장하게 자기 입을 주시한다는것을 똑똑히 의식했다. 틀림이 없었다. 아버지는 서봉철과의 관계를 손금보듯 꿰뚫고 물어보는것이였다. 심장이 불안스레 들뛰였다. 아버지가 큰아버지의 집에서 서재필을 두고 몹시 불쾌하게 말하던 기억이 가시처럼 심장을 침질했다.

련희는 한동안 바재이다가 큰마음먹고 대답했다.

《전… 그 동무를 참 훌륭한 동무라고 봐요, 탐구심도 강하고 열정도 있고…》

《훌륭하다?!… 련희야, 생활속으로 들어가면 훌륭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훌륭한것도 어떤 눈으로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다르지. 아버지의 말뜻을 리해하리라고 본다. 무릇 처녀들의 눈에 비낀 총각의 모습은 뭐나 다 쉽게 훌륭해보이기마련이다.

련희야, 넌 이제 현실체험이 끝나면 평양으로 올라갈 몸이라는것을 명심해라. 내 좀 알아보니 여론들이 있더구나. 그러나 너희들 문제가 사업상관계외 더 다른 문제까지 번져지지 않기를 바란다.

난 더구나 그의 아버지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명심해라. 처녀시절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사진기렌즈에 찍혀진 필림같아서 한번 찍혀지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걸 말이다.》

처음엔 좀 사근사근하던 아버지의 말이 마감에 이르러서는 위엄있고 날카로운 어조로 련희의 여린 마음을 위압했다. 그는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앞에서 자기 감정을 숨기려고 애썼지만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까지 가빠났다.

아버지는 딸의 애달픈 심정을 들여다본듯 덤덤히 담배만 태웠다. 그가 딸의 입에서 그런 념려를 말아달라는 그 한마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린다는것은 뻔했다. 하지만 련희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서봉철을 멀리한다는것이고 사랑을 스스로 매장한다는것을 의미했다. 아, 이 정든 발전소를, 전기처럼 신비한 빛을 창조하는 매력을 모두 체현하고있는듯 한 그를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매정한줄 알면서도 련희는 침묵으로 아버지를 바래웠다. 아버지가 탄 승용차가 점점 멀어지더니 시야에서 아주 사라지고말았다.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 못박힌채 움직일수 없었다.

아버지는 딸의 일이라면 정말 극성이였다. 딸이 앓으면 열밤이라도 곁에서 지새울 아버지였다. 엄마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딸이여서 그 모성의 공간을 부녀의 애틋한 사랑으로 메꾸려고 다른 집 아버지들보다 더 사랑을 기울이고 정을 쏟아부었다.

련희도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다. 존경은 하면서도 다른 집 애들처럼 아버지의 목을 그러안으며 재롱은 부리지 못했었다. 부녀간에 넘을수 없는 한계선이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가로막혀있었다. 련희는 큰아버지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다. 그는 지금도 큰아버지앞에서는 허물없이 마음속 심정을 모두 아뢰였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련희는 울고싶었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은 하늘같은데 그 딸은 아버지에게 마음속 문을 꼭 닫고 열어주지 않았던것이다. 분명 자기에게 피를 준 아버지인데 무슨 일로 하여 이 서름한 간격이 생겼는가?

(아 아버지, 불효한 이 딸을 용서해주세요.)

련희는 마음속으로 떠나간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만큼 서봉철을 진정으로 사랑했던것이다.

언제부터였던가. 련희가 영천화력발전소로 현실체험을 왔을 때 서봉철은 낯모를 그와 함께 걸어왔었다. 련희는 첫대면에 그가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체격이며 얼굴생김이 미끈한게 대뜸 호남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련희의 마음을 살수 없었다.

그는 공장예술공연무대에서 시 《나는 로동자의 아들이다》를 소리높이 웨쳤다. 화술도 좋았고 형상도 훌륭했다. 련희는 흥분하여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뭇처녀들이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서봉철, 그때 벌써 련희는 자기도 그 처녀들속에 나란히 있음을 알게 되였다. 그의 눈에 서봉철은 멋있는 사람으로 안겨들었다.

그런 서봉철이 또다시 용맹스러운 사나이로 안겨들게 된 날은 그로부터 얼마후 장성강반에서의 해상작전때였다. 그들이 자칭 《경비함》이라고 부르는 고무배에 올랐을 때 련희는 무서웠다. 그 무서움은 얼마 못 가서 대담성으로 뒤바뀌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련희도 용감한 사나이들과 함께 해상작전에 참가한 전투원이였기때문이다. 련희는 용접봉심선절단기자재인 형강소재를 얻기 위해 수십번이나 물속으로 들어가는 봉철의 모습에서 체질화된 혁명적군인정신을 보았다.

해상전투임무를 성과적으로 마치고 기지로 돌아온 그들은 버드나무밑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노래를 불렀다. 아, 그날에 울리던 풀피리반주가 오늘도 귀쟁쟁히 들려왔다. 그들은 승자의 기쁨으로 밤이 지새도록 고마운 조국을 노래했다.

련희는 그날 밤 마음속으로 봉철을 오빠라고 조용히 불러보았다.

(봉철오빠, 내 마음속에 억센 기둥이 되여주세요!)

련희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기둥을 한삽두삽 푸근한 흙으로 억년드놀지 않게 덮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뿌리를 마구 흔들어놓았으니…

련희는 지금도 아버지가 남기고간 마지막말이 가슴속에 옹이처럼 박혀있었다. 아버지는 봉철동무의 아버지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이런 일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주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떠나갔다. 련희는 아버지가 무슨 연고로 봉철동무의 아버지를 쓴외보듯 하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자기 보기에는 봉철동무의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처럼 더없이 훌륭해보였다. 이번에 용접안을 내놓아 발전소사람들의 존경속에 얼마나 떠받들리우고있는가. 헌데 아버지는 그 용접안까지도 반대하니…

이 일이 있은 후 련희는 봉철을 만날 때마다 마음속 괴로움이 요동쳐 견딜수가 없었다. 그 괴로움도 두사람이 나누면 가벼워진다건만…

련희는 그처럼 열정적이고 순박한 봉철의 얼굴에 그늘을 지어주고싶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봉철은 련희의 심정을 물으려고도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편이 더 나았다.

오늘도 련희는 용접봉심선절단기의 리상적인 칼날각도를 찾아낸 기쁨보다도 미구에 닥쳐올 먹장구름같은 장막을 예감하며 울적한 기분에 싸여 걸었다.

불쑥 봉철의 시랑송이 듣고싶어졌다. 봉철은 가끔 조용한 시간이면 련희의 요청에 의해 시 《나는 로동자의 아들이다》를 즐겨 읊어주었다. 그 시를 감상하고나면 어쩐지 가슴은 숭엄해지고 로동자인 아버지를 긍지높이 자랑하는 시인의 정서적인 감정이 그대로 봉철의 감정처럼 느껴져 마음의 안정을 느끼군 했다.

두사람은 영천갑문을 벗어나 장성강동뚝길을 걸었다. 타는듯 한 저녁노을이 장성강물결을 불바다마냥 용해시켰다.

《봉철동지, 시를 읊어주세요!》

마침내 련희가 속삭이듯 청했다. 어째서인지 봉철은 련희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마치 느닷없이 시를 듣고싶은 생각을 해낸 처녀의 마음속을 갈피갈피 헤쳐보려고 하는것 같았다.

그 레이자빛같은 눈길을 피하며 련희는 놀람과 의혹이 뒤섞인 어조로 말했다.

《아이, 왜 그래요?》

봉철은 껄껄 웃었다.

《노을의 조화가 아주 기막혀 그러오.》

《?!…》

《동무가 지금 대단히 아름다와졌다 그 말이요.》

그리고는 련희에게 자전거손잡이를 맡기며 시원한 장성강바람에 호흡을 맞추듯 시를 읊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도록 서글펐다

동네아이들의 아버지자랑에 쫓기워

해질녘까지 강가에 홀로 서있었고

학급동무들의 아버지자랑에 눌리워

때없이 머리숙이던 나여서


부드럽고 격조높은 시어들이 그의 입에서 금구슬, 은구슬이 되여 좔좔 쏟아졌다. 련희는 붉게 타는 노을에 얼굴을 더 진하게 물들이며 시세계에 깊숙이 이끌려들어갔다.


로동자의 이름은

수령님 계시여 빛나는 내 조국의 자랑

로동자의 삶은

수령님과 떨어져선 순간도 못사는 운명이여서


봉철은 잠시 시랑송을 멈추고 련희에게 눈길을 주었다. 펑끗 타는듯 한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뜨거운 빛을 발산했다. 봉철의 손이 어느 사이 련희의 손을 더듬어잡았다. 련희는 어째서인지 숨이 막혔다. 이것은 서봉철을 단념하라고 강박하던 아버지의 의사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자기를 통채로 맡기고 한생 의지하고싶은 사람을 어떻게 뿌리친단 말인가. 아버지와 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더더욱 가까이 하고싶은 이 심장의 갈망과 호소를 어떻게 묵살해버린단 말인가.

련희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열정적으로 속삭였다.

《봉철동지, 저도 함께 시를 읊겠어요!》

《좋아!》

두사람은 여전히 손을 꼭 잡고 장성강을 향해 동뚝우에 섰다.


하늘에서 땅에서 바다에서

박사가 되고

영웅이 되고

인민배우가 되는

그런 인간존엄의 높은 연단에서 나는 자랑했어라

나는 로동자의 아들이라고


시랑송은 끝났다. 그러나 가슴속의 불덩이같은 격정을 뿜어올린 그 부르짖음은 장성강물결우에 실려 여전히 강렬한 메아리를 일으키고있었다. 련희는 심장이 터질듯 했다. 그는 봉철의 타는듯 한 눈길을 온몸으로 느꼈다.

《련희, 시가 좋지?》

봉철이 나직이 물었다. 련희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 시를 읊으면 꼭 영웅이 된 동무의 모습을 보는것만 같아요.》

《정말?》

《정말이예요!》

《련희, 우리 영원히 함께 평양의 밝은 불빛을 지켜가는 전력생산자로 살자구. 그래주겠어?》

《예, 봉철동지가 빛이 되면 난 그 빛이 일으키는 열이 되겠어요.》

《빛과 열! 좋구만, 련희!》

동암산마루를 태우던 귤빛노을도 행복의 무아경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살짝 암전의 막을 내려주었다.…

련희와 헤여진 봉철은 집으로 돌아왔다. 한껏 달았던 가슴이 채 식지 않아서인지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물었다.

《어디서 한고뿌 한 모양이구나.》

봉철은 두손으로 얼굴을 썩 비볐다.

(참, 어머닌 눈치도 빠르시네.)

그는 방금전에 사랑의 단시루속에 빠져있었던 일을 즐겁게 련상하며 어머니에게 되물었다.

《아버진 들어오셨어요?》

《들어오셨다. 봉철아, 작업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버지가 뿔나셨다.》

오금녀는 두손으로 황소처럼 뿔난 시늉을 해보였다. 순간 아래방에서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들어오너라!》

봉철은 긴장해져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령감두, 곰잡겠수다. 무슨 심사가 뒤틀렸는지 콱 말이라두 하시우.》

뒤따라들어온 오금녀가 창문을 활 열어제끼며 령감에게 역증을 냈다.

《봉철아, 웃방으로 들어가자.》

서재필은 오금녀를 흘겨보며 아들을 이끌고 웃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틈새없이 미닫이문을 닫았다.

(허, 저 령감 본심이 살아나누나. 하긴 그 버릇 개줄가? 저렇게 속통머리가 작다구야. 나하구는 마주설게 못된다는게지! 어디 그래봐라!)

오금녀는 령감이 미워났으나 아들을 보고 참았다. 그리고는 귀를 바싹 강구었다. 웃방미닫이사이로 부자간에 주고받는 이야기가 웅얼웅얼 들려왔다.

《봉철아, 내 생일날 데려왔던 처녀가 지용수국장의 딸이 옳으냐?》

《예.》

《사실대로 말해라. 너희들 관계가 어느 정도 깊어졌느냐?》

《…》

(저 령감 별걸 다 묻는다. 그저 친하는 사이겠지.)

《우린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더 깊어지기 전에 끊어라!》

《아버지, 그건 무슨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전 그 처녀를 사랑하면 안됩니까?》

《안될 일이 있다. 예로부터 까치는 까치끼리 살라구 했다. 그 처녀의 집은 평양이고 아버지는 국장이다. 그래 분수에 맞는 일이냐?》

《뭐, 국장?!》

오금녀가 한길이나 뛰면서 놀랐다. 이 집안에서 그 처녀가 국장의 딸이라는 사실을 오늘 처음으로 안것은 오금녀뿐이였다.

《그것만도 아니지만 이러구나 저러구나간에 될일이 아니다.》

《아버지, 저도 모르는바가 아닙니다. 련희동문 저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그 동문 우리 집이 로동자집안이라고 탓할 그런 처녀가 아닙니다.》

(거 괜찮은 처녀다. 그렇다면야 얼싸 받아들여야지.)

오금녀는 아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처녀를 당장이라도 며느리로 받아들이고싶었다.

《하지만 그건 열뜬 소리다. 어쨌든 안된다!》

(저 령감 제가 뭐라구. 평양처녀들의 코는 하늘에 가붙은줄 아는게지?)

오금녀는 참지 못하고 웃방미닫이문을 와락 열었다.

《령감! 난 아들을 믿수다. 젊은이들의 일에 너무 삐침질 마소!》

이쯤되자 서재필은 눈을 부라리며 남정들 일에 코코이 얼굴을 들이미는 로친에게 역증을 냈다.

《로친은 모르면 가만있소! 약국의 감초처럼 웬 참견이야?》

그런다고 목을 움츠릴 오금녀가 아니였다.

《약국의 감초 아니면 그 약 써서 먹겠수?》

《감초라구 다 단법은 아니야. 어서 나가지 못할가.》

서재필은 벌컥 역증을 내며 문턱에 있는 로친을 밀어버리고 웃방미닫이문을 쾅 닫아버렸다.

《며느리한테 고운 밥 먹기는 코집이 글렀수다!》

오금녀는 웃방에다 대고 눈먼 주먹질을 해대며 옹알거렸다.

령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봉철아, 그래 이 아버지의 심정을 그렇게도 모르겠느냐?》

《전 모르겠습니다. 그 동무의 아버지가 국장이면 어떻고 로동자이면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사랑은 그 어떤 리기적인 목적에서 출발한게 아닙니다.》

(그렇지. 요즘이 때가 어느때라구 문벌을 따질가?)

오금녀는 이제는 아들의 편에 서서 령감을 공격할 자세였다. 령감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네 생각이지 어디 그 집 생각이 그렇다더냐? 자, 봐라. 그 집 아버지가 써보낸 편지다.》

한동안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오금녀는 궁금증에 불이 달렸다.

(무슨 편지게 그리도 오래 보노?)

얼마간 기다려서야 령감이 이야기했다.

《그래 이젠 알겠지? 아버진 그런 집하고 사돈을 맺을 생각이 없다.》

웃방문이 열렸다. 서재필은 문앞에 딱 버티고 서있는 로친을 밀어버리며 밖으로 나갔다. 이젠 마음놓고 참견하라는 뜻이다.

오금녀는 기다린듯 웃방문턱을 넘어섰다.

《그래 무슨 편지길래 그리 심각해하느냐?》

《어머니, 안심하십시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봉철은 손에 들려있던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면서 빙긋 웃어보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잘되지 않는지 오히려 얼굴이 괴롭게 찌프러졌다. 오금녀는 생각같아서는 그 편지를 뺏어라도 보고싶었으나 어째서인지 속이 떨렸다.

《말 좀 하려무나, 응?》

《어머니, 아버지와 성과학기술국장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느닷없이 아들이 되물었다. 마음속에 큰 근심덩어리를 안은듯 어조가 무거웠다. 오금녀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내 알겠니? 거 국장이라는 사람이 여기 발전소에서 기술과장인가 했다더라. 그것밖엔 더 모른다. 어디 령감이 속을 줘야 알지. 네 아버지속엔 귀신이나 들어가야 알겠는지 이 에민 한생 속을 썩이며 살아왔다, 휴-》

오금녀는 한숨을 길게 내그었다. 봉철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위로했다.

《어머니, 이젠 아버지도 많이 달라졌어요. 아버지를 그전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이제 아버진 큰일을 하실겁니다.》

《에그, 모르겠다. 그 속통머리에 무슨 큰일을 치겠니. 그래 봉철아, 그 처녀 아버지가 무슨 글을 써보냈니?》

오금녀는 아들을 침울하게 만들어버린 그 편지내용에 등이 달아 또다시 채근했다.

《별게 아니예요. 그저 딸을 아끼는 아버지의 심정을 적었습니다. 어머니, 난 그 동무를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

봉철은 애써 밝은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어머니가 아들을 믿는것처럼 아들도 어머니에게는 숨기는것이 없다. 오금녀는 그렇게 믿었다.

마음이 어느 정도 가벼워졌다.

《그래라, 내 보기에도 그 처녀는 마음씨도 곱고 경우도 바른 훌륭한 처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네 마음에 들면 꼭 우리 집사람으로 만들거라. 바늘따라 실간다고 녀자는 남자에게 끌려오는 법이란다. 》

봉철은 그러는 어머니가 눈물이 나오도록 고마왔다. 방금전에 편지를 읽을 때는 속이 끓어올라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려 했었다. 그러다가 불시에 련희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을 다잡았다. 련희가 그러는 자기를 본다면 얼마나 가슴아파할것인가. 봉철은 지금에야 련희의 눈길에 실려있던 수심의 무게를 가늠할수 있었다. 필시 그의 아버지는 딸에게도 단단히 침을 박았을것이다. 그러니 련희는 지금껏 내색없이 그 마음속 고충을 혼자서 묵새겼던것이다.

봉철은 련희가 갑절 돋보이고 훌륭해보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련희에게 부르짖었다.

(련희! 난 동무를 진심으로 사랑하오. 동무의 아버지가 편지에 쓴것처럼 내 티끌만큼이라도 사심이 있었다면 나약해지고말았을것이요. 련희, 난 우리들의 사랑의 앞길에 험준한 가시덤불이 덧쌓여도 꿋꿋이 헤쳐나갈 결심이요. 믿어주오. 서로의 심장이 하나로 고동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함께 있을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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